93화 그리고 (2)
볼로디아가 연설을 마친 직후, 란드와르는 극단 건물에 들러 익숙한 얼굴들에게 작별 인사를 남겼다. 가짜 신분으로, 고작 두세 달 어울렸을 뿐이지만 휙 떠나는 건 예의가 아니니까.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 두었는데도 사무실에는 사람이 꽤 많았다. 란드와르는 문 너머에서 목소리를 가만히 들어 보았다. 모두들 걱정과 흥분이, 그리고 당황이 조금씩 섞인 태도로 떠들고 있었다.
란드와르가 성흔까지 받은 고위 사제라니 놀랍다는 점. 그 무뚝뚝한 형님이 볼로디아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단 점. 그래도 왕녀님이 누명을 벗고 피웅덩이까지 해결해서 정말 잘 되었다는 점. 하지만 타라곤이 요정이었다는 사실은 여전히 믿기 어렵다는 점.
"정말 착하고 마음 약한 친구였는데… 사실 성격으로만 따지면 원래 도련님보다 더 순했지……."
"목소리가 너무 커. 군부에서 경고를 받았잖아, 요정은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이라 치고 잊으라고. 몇 년만 참으라던데."
세탁기를 돌려주겠다고 약속하긴 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사람이 같은 시간 안에 처리할 수 있는 정보의 양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니까. 스카르파와 볼로디아의 이야기만으로도 머리가 복잡할 판에 울쿠스의 치정극까지 섞이면 혼란이 심할 터였다.
따라서 타라곤에 얽힌 사실은 당분간 비밀에 부치기로 합의가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두세 해쯤은. 역사를 윤색하는 일은 볼로디아가 완전히 말루카로 돌아온 뒤에 시작해도 괜찮으리라는 게 모두의 판단이었다.
"그래, 어디 가서 이런 소리를 할 수는 없겠지만… 어차피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 알잖아? 그러면 좀 떠들 수도 있는 거 아니겠어?"
스카르파나 타라곤이나 울쿠스나 불쌍하기는 마찬가지라는 쪽으로 합의가 모인 듯했다. 란드와르도 거기에 동의했다. 문을 열고 사무실에 발을 들이자 시선이 대번에 한 점으로 모였다.
늑대인간들은 말을 멈추고 란드와르를 빤히 바라보았다.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투였다. 이윽고 작업반 반장이 혼란에서 빠져나와 익숙한 호칭을 외쳤다.
"사제 청년!"
그제야 사무실에 소리가 되돌아왔다.
"처음엔 다 망한 줄 알았는데, 볼로디아 님이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마음 놓았어. 그래도 이런 일이 있으면 귀띔이라도 해 주지! 같이 술 마신 날이 며칠인데 섭섭해서 원……."
"이런 거 함부로 이야기하면 천벌 받습니다. 신들이 듣고 계시는데요."
란드와르는 검지로 하늘을 가리키고는 너스레를 떨었다.
"이왕 왔으니 여기 있는 사람들한테 한마디씩 해 줘. 사장님은 별 탈 없으신 거 맞지? 말만 저래 놓고 취조실에 끌려간 게 아니냐, 왕녀께서, 아니, 폐하께서 직접 한 말인데 안 지키겠냐로 싸우고 있었거든……."
"잘 지내십니다. 며칠 뒤에는 사무실로 돌아오실 테고요. 아즈리온의 명예가 걸린 일인데, 설마 그렇게 처리하겠습니까."
극단원들을 안심시키고 사건을 자세히 설명하는 데에는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여섯 해 동안, 미친 반신을 돌봐 온 게 바로 녀석이었다는 부분까지 설명하자 감동의 물결이 일었다.
"이런 말을 하면 안 되겠지만, 군부 순혈들보다 요정 하나가 낫구만!"
"이미 말해놓고 뭐래요. 하기야 우리 도련님이… 도련님이 아니지, 참, 아무튼 그 요정이 착하긴 했죠. 요정답지 않게요. 사실 시체만 안 봤으면 못 믿었을 텐데……."
"인간들이랑 어울리고 싶어서 귀까지 잘랐다잖아. 애초에 그쪽 동네에 적응을 잘 했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테고. 요정들 중에도 별종은 있다는 거지."
진실은 언제나 승리한다지만 밝혀지지 않는 게 좋은 진실도 있기 마련이다. 지금이 바로 그랬다. 울쿠스는 애정결핍이 있었을 뿐이지 평범하게 미친 요정이었다고, 그래서 당신네들을 모두 죽이려 했다고 말해 봤자 득이 될 게 없었다.
란드와르는 혀가 제멋대로 움직이려는 걸 억누르면서 이야기를 끝마쳤다. 기나긴 질답까지 모두 처리하고 돌아가려는 순간, 경리가 생각났다는 듯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참, 그 요정… 이 편지를 하나 남기고 갔거든요. 보내야 한다고 말만 하다가 결국 그렇게 돼서. 보리 평야에 보낼 편지에요. 혹시 가시는 길에 전해 주실 수 있나요? 여기에서는 좀 멀지만… 사제님이라면 군부 차원문을 빌려 쓸 수 있을 테니까요."
머리가 잠시 띵하더니 펠로시가 편지를 한아름 싸 들고 오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늑대인간은 교단 사제와 우편배달부를 구분하지 못하는 게 종족 특성인가?
"우편 부치면 되잖습니까."
"모르겠어요, 직접 가서 줘야 한다는데요. 중요한 거라서 맡기면 안 된다고. 겉봉에 주소도 안 쓰여 있어요. 주소가, 보자… 메모가 여기 있을 텐데. 찾았다! 중부 외곽지네요. 보리 평야."
이윽고 란드와르는 편지의 정체를 깨달았다. 저항군 지도자에게 보내는 게 틀림없었다. 장소도 장소거니와 직접 가서 줘야 할 이유가 그것밖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잠깐 다녀올 시간은 있을 것 같군요. 내일 세카두로 갈 예정이거든요."
"거 봐, 사제 청년이 착하다니까. 기도문은 좀 못 외울지는 몰라도… 잠깐만. 성흔이라는 거, 교리는 잘 몰라도 받을 수 있는 건가?"
"그런가 봅니다. 제가 받은 걸 보면요."
그는 억지웃음을 입가에 그리며 자리를 떴다. 편지에 무슨 말이 쓰여 있을지 상상하자니 입맛이 썼다.
* * *
일단 볼로디아에게로 가서 의견을 구했다. 수신인이 저항군 지도자일지라도, 봉투를 뜯어 내용을 살피는 건 치졸한 일이라는 점에서는 둘의 뜻이 일치했다.
"뭐, 허튼소리를 쓰진 않았겠지요. 성격으로 봐서는 미안하다는 이야기나 잔뜩 적혀 있을 겁니다."
"나도 동의하오. 이건 캐러웨이 부인의 아들이 농부에게 보내는 편지인 거요. 그렇게 생각하는 게 모두에게 낫겠지."
란드와르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서는 주제를 옮겼다.
"저항군들은 어떻게 됩니까?"
"저번에 말했다시피 천 년간 있었던 일은 모두 불문에 부치기로 했소. 피웅덩이도 사라진 지금에서야… 가혹할 필요가 없는 문제니 말이오."
"하기야 그렇지요."
볼로디아는 모범적인 개혁 군주로 분류할 수 있는 사람이었고, 그만큼 명확한 청사진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껏 북부 대장군 자리에 안주한 게 의아할 정도로.
오히려, 그런 미래상을 그릴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왕 자리를 꺼렸는지도 모른다. 피웅덩이가 남은 상황에서 왕위에 올랐더라면 선조들의 전철을 밟아야 했을 테니까.
교육 제도를 정비하고, 흰둥이들의 처우를 개선하고, 인간 도시와의 교역로를 연다. 경제구조부터가 다르니만큼 전면적인 개방은 어렵겠지만 마력 결정을 이용한 거래는 가능할 것이다. 말루카의 철도 기술은 타일라프람에 비해서도 독보적인데다 고순도 마력 지맥 역시 여럿 보유하고 있으므로 마냥 불리하지도 않다.
"해야 할 게 많소. 한 달로는 부족할 만큼. 아마 진짜로 일이 시작되는 건 두 해 뒤겠지.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에는 중부 대장군과 펜닐이 섭정을 맡기로 했소.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말이오."
"믿을 수 있겠습니까?"
란드와르는 놈들이 인간 사제들 앞에서 보인 태도를 떠올리며 물었다. 볼로디아의 얼굴에 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깨어난 이후로, 내가 무언가 다른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드오. 늑대인간들의 속마음이 얼핏 들리거든… 그 둘에게 말해 두었소. 서류나 증언은 꾸밀 수 있지만 마음은 그럴 수 없을 거라고."
심장의 힘을 완전히 제어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변화가 예상보다는 빨랐다. 혹은 마음을 읽는 건 권능 중에서도 기초적인 수준일지도 모르고.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알 수 있습니까?"
"당신은 물론이고, 요정의 속내도 읽을 수 없는 걸 보면 괴수의 영혼을 지닌 자들에게만 작용하는 것 같소. 혹은 누굴 섬기느냐의 문제일지도 모르지."
"후자겠군요. 스카르파는 울쿠스의 마음을 알지 않았습니까."
"둘 다일 가능성도 있지. 어쨌거나, 그 점에 대해서는 걱정하고 있지 않소. 지침을 만들고 있다오. 내가 없는 동안, 군부가 어떤 식으로 통치해야 할지에 대한 지침이지."
그 지점에서 볼로디아의 목소리가 갑자기 침울해졌다.
"물론 그것만으로 원혼을 달랠 수는 없을 거요. 우리는 언제나 죽이는 쪽이었고 흰둥이들은 죽어 나가는 쪽이었으니까. 그런 일에는 그게 최선이었다는 수식을 붙일 수가 없지……."
* * *
어쨌거나 시간이 촉박하진 않았으며 볼로디아도 허락했으므로 편지는 전해 주었다. 주소는 중부 외곽지 보리 평야 12―3. 군부 차원문을 써서 중부 외곽지까지 간 다음 다시 수레를 탔다. 길은 함께 따라온 군부 대원이 알아서 찾아 주었다.
"뭐야?"
초인종을 계속 누르자 부스스한 인상의 흰둥이 여자가 홱 고개를 내밀었다. 인간과 군부 대원이 함께 서 있는 걸 확인하자마자 여자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란드와르는 일이 커지기 전에 서둘러 편지를 꺼냈다.
"극단에서 보낸 편지입니다. 직접 전해 달래서 왔어요."
"캐러웨이 극단?"
여자는 의심스럽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고, 란드와르와 군부 대원을 번갈아 보았다. 이윽고 문틈으로 뻗어 나온 손이 편지봉투를 낚아채더니 쾅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란드와르는 곧바로 자리를 떴다. 지도자가 그걸 보고 어떻게 반응하든 간에 인간 사제가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그것도 군부 대원을 옆에 낀 상태라면. 빠르게 비켜 주는 게 상책이었다.
볼로디아가 저항군들을 면책했다지만 그것만으로 모든 게 해결될 리가 없다. 죽은 사람이 살아 나오지도, 고문실에서 병든 몸이 고쳐지지도 않는 것이다.
수레를 타고 돌아가는 동안 그는 지도자의 마음을 상상해 보았다. 얼마 안 있어서 타라곤과 이름 모를 조력자가 동일인이었음을 알게 될 터였다. 편지에는 더 심각한 이야기가 적혀 있을지도 모르지.
자신들을 돕던 이가 사실은 요정이었다는 것. 애초에 혈마법을 가르친 건 도움조차 아니었다는 것. 저항군들은 스카르파 한 명을 위한 인형극에 동원되었을 뿐이라는 것.
지도자가 그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평생이 부정당하는 것만큼이나 끔찍한 일은 많지 않을 거라고, 동정인지 공감인지 모를 문장 하나만이 떠오를 뿐이었다.
란드와르는 마음 한구석이 갑작스레 불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소시민의 힘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였다. 소시민 개개인의 노력. 거대한 구조 앞에서는 한없이 무력하고, 그 구조를 바꿀 수조차 없는 노력.
울쿠스에게 선택지가 주어진 건, 볼로디아가 신위를 얻은 건 특별한 경우였다. 대부분의 사람이 거대한 세상에 맞설 방법은, 별들이 잘 움직이길 비는 것뿐이다. 이스트리아는 신들이 땅을 거니는 곳이니까.
하지만 노력은 그 자체로 착시를 일으킨다. 이만큼 열심히 했으니 무언가가 바뀌지 않겠느냐, 하는 착각이다. 늑대인간들의 명운을 뒤바꿀 수 있는 건 결국엔 신의 의지뿐인데도.
미묘한 무력감이 몰려왔다. 란드와르는, 이강현은, 한동안 형연할 수 없는 감상에 사로잡힌 채 굳어 있었다. 자신 또한 그 신들 중 하나인데, 아즈리온의 별은 천계의 본신보다도 화신의 행적을 뒤쫓고 있을 텐데 이런 감상을 느낀다는 게 우습기만 했다.
티아의 지적이 뇌리를 스쳤다.
― 너무 냉소적인 접근 같은데요
― 사회구조론적 접근이라는 겁니다.
― 결국엔 지구를 설명하는 이론일 뿐이죠.
그 말대로, 너무 냉소적인 태도인지도 몰랐다. 현대인이라도 이런 상황에서 이런 불평을 늘어놓는 사람은 흔치 않을 것이다. 강현은 그게 무엇 때문일지 짐작해 보았다.
사업이 망했을 때 머리에 충격을 입어서? 친구를 잘못 만난 탓에, 쓸데없는 이론이나 듣고 다녀서? 본성이 염세적이라서?
좋은 생각을 하려면 노력해야 했다. 이게 부정할 수 없는 해피엔딩이라는 사실을 되새기자. 각자의 마음이야 함부로 재단할 수 없겠지만, 객관적인 상황과 여건만을 따지면 분명히 그랬다…….
― 물론 그것만으로 원혼을 달랠 수는 없을 거요. 우리는 언제나 죽이는 쪽이었고 흰둥이들은 죽어 나가는 쪽이었으니까. 그런 일에는 그게 최선이었다는 수식을 붙일 수가 없지…….
그는 마지막으로 볼로디아의 말을 떠올렸다. 여러 사람의 최선과 각각의 삶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있다는 사실을 되새기면서.
요정이 숨어들 때마다 흰둥이 주거지를 가장 먼저 들쑤신 건, 흰둥이 남자들은 나가지조차 못하게 막아둔 건 군부에게는 최선이었을 터였다. 요정들이 위장할 수 있는 건 흰둥이 남자뿐이니까. 그게 가장 효율적이니까.
하지만 효율성과 합리성이라는 가치로 모든 과오를 덮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볼로디아가 왕위에 오르고 말루카의 천 년이 끝났을지라도. 그게 지켜온 삶만큼이나 고통 받은 삶도 있는 것이다. 둘을 덧셈과 뺄셈처럼 취급해 상계하는 건 인간을 다루는 태도가 아니었다. 어쩌면 그걸 해결하려는 시도부터가.
세상에는 영영 미결로 남을 문제들이 있다. 원인을 찾아내 제거한 다음 떠나보내는 게 아니라, 곁에 남긴 채 기억과 추도로만 대할 수 있는 사건이.
강현은 기도하듯 손을 모아 쥐었고, 이 순간을 머릿속에 박아 넣었다. 교단 기도문은 여전히 몰랐고 떠오르는 말도 많지 않았지만, 얄팍한 위로나 묵념은 기만일 뿐이라고 느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은 모두의 책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