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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92화 (93/258)

92화 그리고 (1)

<다 옮겨 적었지? 저쪽 회로에 마력을 좀 넣어 보아라. 저 위에 있는 것 말이다. 어디가 반응하는지를 똑같이 써.>

"둥둥 떠서 명령만 내리면 되니 참 편하시겠습니다."

<약속은 지켜야 할 게 아니냐. 거의 끝났다.>

테네브로즈는 투덜거리며 헤이딘이 가리킨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능묘에 들어온 지도 반나절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그동안 그는 미친 유령의 지시에 따라 각인의 외부 형태를 옮겨 적었고, 회로를 부분적으로 가동시킨 다음, 작용점들을 확인했다.

그는 헤이딘이 시킨 일을 하다가 툭 질문을 던졌다.

"그나저나 부적 제작은 어떻게 되어 갑니까?"

<틈틈이 들러서 보고 있다. 반지 내부는 세카두 저택과 연결되어 있으니까. 그것도 거의 끝났어.>

"잘 됐군요. 앞으로는 바깥을 나도셔야 할 테니 말입니다."

<뭐?>

"부적이 완성되면 어르신께서도 용사 노릇에 매진하셔야 한다는 이야기지요. 우리 나으리께서 와그다스 마법을 마음에 들어 하시더군요."

<이번 한 번이 아니었어?>

"그럴 리가요, 나으리 성격을 생각해 보십시오. 노는 사람을 가만히 둘 분인가."

꼼짝없이 끌려다닐 운명이었다. 헤이딘은 좋은 생각을 하려 애썼다. 이 얄미운 놈 대신 제자와 함께 다닐 수 있으리라는 점. 화신과 동행하면서, 용 비늘 부적만 만들고 입을 닦는 게 가능할 리가 없다는 점. 능묘의 각인을 보게 된 건 소득이 크다는 점…….

<됐다, 어쩔 수 없지. 다니는 동안 옛 각인들이나 많이 구경할 수 있으면 좋겠구나.>

"참, 궁금한 게 있습니다만. 기억의 궁전에 잊힌 도면이 산더미로 쌓여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눈만 감으면 거기에 발을 들일 수 있다고요."

<그렇지.>

"슈문에게 직접 도면을 찾아달라고 하는 건 안 됩니까?"

<예전에는 그게 가능했다더구나. 나도 궁전에서 만난 요정에게 얼핏 들은 것이라 잘 모르겠지만…….>

헤이딘은 통상적인 절차를 거쳐 슈문의 신도가 된 것이 아니었다. 버려진 지성소를 발견하고 그곳의 기록물에 마음을 빼앗겼을 뿐이고, 슈문에게 인정을 받은 것은 별채에 갇히고서도 시간이 조금 흐른 뒤였다.

그러나 궁전에 들어갈 권한을 얻게 된 다음에도 그곳의 요정들과 이야기를 나누기는 쉽지 않았다. 황무지의, 도망자 요정들과 야스와다의 명문가는 행색부터가 달랐기 때문이다. 비록 그들이 거니는 곳이 정신공간일지라도.

도망자들은 헤이딘을 의심하거나 피해 다녔다. 애당초 궁전은 까마득하게 넓었으므로 만날 기회도 얼마 없었다. 얼굴이라도 본 요정은 열 명 남짓. 그중에서 직접 대화를 나눈 상대는 한 명뿐.

― 당신이군요! 야스와다 사람이 이 근처를 돌아다닌다는 말을 들었어요. 무슨 속셈이죠? 우군인 척 접근한 다음 학자들을 데려가서 제물로 바칠 건가요, 아니면 우리 주인님을 찾아내 죽일 작정인가요?

헤이딘은 그 하루를 이상한 날로 기억했다. 낯선 요정이 갑작스레 다가오더니 수다를 떨어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는 곧바로 답하는 대신 상대를 빤히 보았다. 안경을 쓴, 젊은 여자. 앞머리는 뒤로 쓸어넘겼고 하나로 땋은 긴 뒷머리가 숄처럼 목덜미를 감싸고 있다.

그러나 헤이딘은 겉모습만으로는 나이를 짐작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역시 소년 형상을 취한 채 돌아다니고 있었으니까.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솔직히 말했다.

― 둘 다 안 해요. 여기에 영혼 관련 분류가 붙어 있길래 찾는 중입니다.

― 그 분류표는 대전쟁 때 모두 망가졌어요. 제대로 된 게 없죠. 뭐가 필요해요? 영혼으로 불장난을 하는 데에 싫증이 나서, 세계의 진정한 비밀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나요?

― 나는 명문가의 사람이에요. 별불꽃의 부가주죠. 세계의 진정한 비밀에 관심을 가졌다가 마력 구속구를 낀 채 별채에 갇혀 있고요. 야스와다에서 도망칠 방법이 필요합니다.

― 여기까지 왔으면 영토를 나눠 받았다는 말이 아닌가요? 쉬워요. 현계의 두 곳에 영토를 연결하세요. 이쪽에서 저쪽으로, 순식간에 오갈 수 있죠. 세 곳은 안 돼요. 언제나, 입구 하나와 출구 하나니까요.

여자의 말에 헤이딘은 미간을 좁혔다.

― 내 말을 안 들었군. 각인을 새길 수도 마법을 쓸 수도 없어요. 별채를 벗어날 가능성은 더더욱 없죠. 손발이 잘렸고 눈까지 사라졌단 말입니다.

― 세상에, 엄청난 정성이군요. 사람을 그렇게 만들어 놓고 돌볼 바에는 그냥 죽이는 게 나았겠는데요.

― 내 형님만큼이나 가문 사람들을 아끼는 요정은 야스와다에서도 흔치 않을 겁니다. 어찌나 아끼시는지 죽는 것조차 허락해주질 않는군요.

― 잘됐네요. 그 경우라면, 도움이 될 도면이 하나 있어요. 쓸 사람이 없어서 골치가 아팠는데 애물단지를 하나 치우겠네요.

여자를 따라가면서 헤이딘은 도망자들의 상황을 조금 더 깊이 알게 되었다. 배신을 들키자마자 이시 타브의 종복이 영토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는 거였다. 슈문은 그걸 홀로 막아내느라 기억의 궁전을 전혀 관리하지 못하고 있다고.

― 여러분도 곁에서 도와야 하는 게 아닙니까?

― 글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런데 장본인의 뜻은 조금 다르셔서요. 우리가 궁전 서고에서 뭔가를 찾아야 한다는데요, 그 뭔가가 뭔지는 우리도 몰라요. 어둠 속에서, 새까만 칼린카를 잡으러 뛰어다니는 거죠. 방에 칼린카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데.

― 직접 물어보면 되지 않습니까.

― 응답이 없으니 문제지요. 결국엔 그 뭔가를 찾아야 하는데, 글쎄요, 천년간 찾질 못했으니 이천 년을 찾으면 될까요? 어떻게 생각해요? 야스와다에서는 그게 뭔지 아나요?

― 미안해요. 완전히 처음 들어 봅니다.

여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고, 궁전의 길을 한참이나 돌아 나가다가 산더미처럼 쌓인 책 앞에서 멈췄다. 그녀가 찾아 건넨 것은 무언가의 설계도였다.

― 예전에는 야스와다 마법을 쓸 줄 아는 학자들이 있었다더군요. 이제는 다 죽었어요. 그쪽이라면 두 학파의 주문을 모두 알 테니 이게 도움이 되겠죠. 미완성이니 제대로 쓰려면 개조가 필요할 거예요. 성공하면 직접 와서 알려줘요. 실물을 보려면 현계에서 만나야 할 테니까.

그 후로 여자를 다시 만날 일은 없었다. 도망자들은 여전히 헤이딘을 경계했고 헤이딘 역시 그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언젠가 다시 만날 기회가 있으리라 생각하면서, 도면 해석에 매진할 뿐이었다.

"그래서, 뭘 찾아야 하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뭔가를 찾고만 있다는 겁니까?"

<그런 셈이지.>

"별 미치광이들이 다 있군요. 하기야 어르신도 다를 바는 없습니다만."

테네브로즈는 괜스레 투덜댄 후 다시 각인의 명세를 옮겨 적기 시작했다. 헤이딘은 사각거리는 펜 소리를 들으며 주위를 훑어보았다. 이곳은 능묘의 지상층. 등잔대가 아주 작은 태양처럼 주위를 밝히고 불이 꺼진 각인을 따라 그림자가 흐른다.

여기에 종이더미를 마구 쌓아 놓으면 궁정의 일부처럼 보일 것이다. 그는 눈을 감은 채 기억을 더듬어 나갔다. 찾아야 하는 게 무엇이었던가? 도면도, 증명도 아니고… 이름? 무언가의 이름이라고 했다.

― 이름을 모르는 것의 이름을 어떻게 찾나요? 그건 뭐라고 해야 할까, 세계의 규칙과는 완전히 어긋나는 일이지요. 그쪽도 알겠지만, 이름은 존재론적 약속이에요. 대상에 접근하려면 이름이 필요하고, 이름이 없거나 잘못되었다면…….

여자의 푸념이 멀어진 기억 속에서 메아리쳤다. 헤이딘은 그들이 어떤 이유로 궁전을 헤매는지 여전히 알 수 없었다. 궁금함을 느끼지도 않았다. 그는 신의 안녕을 걱정하기에는 너무 소심하고 소박한 사람이었고, 관심사는 모두 현계에 대한 것뿐이었다.

<그나저나 옮겨 적는 걸 보니 구조를 이해하기 시작한 것 같은데, 와그다스 각인을 제대로 배워 보는 건 어떠냐? 어렵지 않아.>

*  *  *

테네브로즈는 새벽이 되어서야 너덜너덜해진 상태로 돌아왔다. 녀석은 반지와 종이더미를 탁자에 올려놓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는 무조건 꼬마가 끼고 다니라 그래요. 저는 못 하겠습니다."

"왜. 뭐가 문제야."

"저한테 각인에 소질이 있는 것 같으니 좀 배워 보라더군요. 그 흰둥이보다는 훨씬 더 잘 할 거라던데요. 관심이 없다고 해도 계속 떠들어대지 뭡니까."

이놈을 헤이딘과 붙여놓으면 누가 이길까 궁금했는데 헤이딘의 정신력이 더 강한 모양이었다. 단기전이라면 몰라도, 장기전에서는 확실히 그랬다. 오늘의 교훈. 맛이 간 사람은 맛이 간 사람으로 상대하는 게 답이다.

…미뤄두었던 질문이 의식의 수면으로 떠오른 건 녀석이 목욕까지 마치고 나온 후였다.

"야, 맞다. 그래서 작은 볼로디아가 누구 딸인지는 모른다는 거지? 영혼이 심장 안에 있으니까?"

"혼을 직접 보았더라도 몰랐을 겁니다. 심장을 온전히 취하면 그때부터는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거든요.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필멸자의 영혼으로 그 너른 곳을 다스릴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작은 볼로디아는 반신이라면서. 반신도 그래?"

"반신은 결국 신위에 종속된 존재입니다. 신위가 완전해지면 함께 그 격이 올라가지요."

란드와르는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무슨 시스템으로 돌아가는지 알 듯했다.

첫째. 심장이 뜯어져 있으면 효과가 제대로 안 나온다. 반드시 한 명이 온전한 하나를 가져야 한다. 둘째. 신위가 완전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반신들도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리고 셋째…….

"반신이 되면 정확히 뭐가 좋은 거냐."

"영혼이 심장에 붙박여 있으니만큼, 몸이 죽더라도 되살아날 수 있지요. 신의 영토를 오갈 수도 있고요."

요정 신의 영토는 두 종류였다. 심장부와 외곽지. 전자는 심장 내부의 정신 공간이고, 후자는 <이면 세계>라고도 불리는 마력 공간이었다. 외부인이 침입할 수 있는 곳은 외곽지가 끝인 셈이었다.

"반신들은 이면 세계의 마력을 제어하진 못합니다만, 얼마든지 되살아날 수 있습니다. 그러니 필멸자보다는 훨씬 강력한 존재가 되지요."

"그런데 나는 반신들 얘기는 거의 못 들은 것 같거든. 타마기스 황제 말고는 몰라. 그쯤 되면 역사에 따로 남은 애가 있어야 하는 게 아니냐."

"나으리, 제국의 수도가 어떻게 몰락했는지를 떠올려 보십시오."

테네브로즈의 말은 늪지대의 시체들을 상기시켰다. 대전쟁이 터지자마자 황제는 윰 시밀의 심장을 취했고, 타마기스는 불사의 저주에 휩쓸렸다. 황제는 천 년간, 옥좌에 멈춘 듯 앉아서…….

"하극상이 무서워서 안 만들었다는 소리구만."

"예, 반신들은 심장 속이 어떤 곳인지를 압니다. 의지가 얼마나 강력한 무기인지, 전대의 뜻을 어떤 식으로 제압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지요."

반신이 신위를 빼앗았다면, 선대와 똑같은 실수는 하지 않으려 할 터였다. 자식을 만들지 않는 게 당연했다. 잠재적인 찬탈자를 옆에 둬 봐야 명줄만 짧아질 뿐이다.

"볼로디아도 그렇게 되는 건 아니겠지."

란드와르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말해 놓고 보니 여기에 볼로디아가 없는 게 다행이었다. 나라가 망할 거라고 저주를 하는 것과 똑같은 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요정 놈이 억울한 투로 대꾸했다.

"나으리는 항상 저한테 욕을 하시면서 왜 자기 자신은 돌아보질 않으십니까?"

"내가 미안해."

대화를 마친 후로도 생각은 조금 더 멀리 나아갔다. 작은 볼로디아의 아버지가 펜닐인지 울쿠스인지 영영 모르게 된 것은 아쉬웠지만, 뭐, 이런 상황에서라면 열린 결말도 괜찮겠다 싶었다.

란드와르는 눈을 감았다. 꿈속의 세계는 낯설고 평화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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