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Once my sister, now my thesis (2)
볼로디아는 몰려드는 적을 찢고 갈랐다. 쓰러진 것들이 흘린 피가 스며들어 늑대의 일부가 되었다. 전투를 모두 끝마쳤을 때, 그녀는 요새를 뒤덮을 만큼 커져 있었다.
꿈의 마지막 장면은 새끼 늑대를 조심스레 내려놓고 요새를 집어삼키는 자신. 열기 서린 암흑. 그리고 배웅에 나서는 스카르파의 환영. 그것이 동생의 혼인지 소망이 만들어낸 환상인지는 묻지 않았다.
‘너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언제든 이곳에 올 수 있어. 언제든 돌아갈 수 있지.’
‘백 년이 지나고 천 년이 지났을 때, 너를 계속 기억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은 믿는 만큼 진실이야.’
현실을 다루기 위해서는 현상과 소망을 구분해야 한다는 것. 하지만 마음속에서만큼은 무엇이든 믿을 수 있다는 것.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에 도움이 된다면, 그게 자신을 속이는 일인지 진심인지는 구분하지 않아도 좋다는 것.
그리고, 옳은 방향을 알아내려면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것.
볼로디아는 긴 꿈을 통과해 나왔다. 일어나자 별채의 침소였다. 엷고 환한 빛이 창문을 거치며 만화경처럼 갈라지고 있었다. 볼로디아는 윗몸을 일으켜 앉았고, 창밖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나뭇가지마다 두터운 눈이 얹혀 있었다. 아기를 감싼 강보처럼 보였다.
"폐하, 대장군에게 소식을 전하고 치유사를 부르겠습니다."
시야 저편 보이지 않는 곳에서 군부 대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볼로디아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대꾸했다.
"치유사는 부르지 않아도 괜찮다. 대신 스카르파의 딸에게로 안내해 다오."
"이틀째 깨어나지 않고 계십니다."
"지금쯤이면 눈을 떴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볼로디아는 준비된 군부 제복으로 갈아입은 후 대원과 함께 침소를 나섰다. 복도로 나와 스무 걸음 걸은 뒤 모서리에서 오른쪽으로. 그리고 문을 연다.
막 깨어난 아이가 눈가를 부비고 있었다. 볼로디아는 그곳에 있던 하인을 내보낸 뒤 작은 볼로디아의 앞에 앉았다. 충성을 맹세하는 장병처럼, 한쪽 무릎을 꿇고. 시선이 같은 높이에서 마주치자 아이의 눈동자가 놀란 듯 반짝였다.
둘은 한동안 서로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윽고 작은 볼로디아는 침대 가장자리로 옮겨와 상체를 쭉 뻗었다. 작고 여린 손가락이 큰 볼로디아의 목덜미 뒤에서 맞닿으며 고리를 만들었다. 그러는 동안 누구도 말하지 않았다.
포옹하는 작은 팔 속에서, 그녀는 덥고 축축한 기운이 뺨으로 퍼지는 것을 느꼈다. 이제는 마지막으로 흐느낀 것이 언제였는지 궁금해할 필요가 없었다.
* * *
내 이름은 볼로디아. 말루카의 왕녀고 다섯 살입니다.
그런데 나는 이 도시라는 게 도통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왕궁이고 길거리고 죄 어둡고 칙칙한데다가 사람들은 내가 말을 걸려 치면 겁에 질려서 벌벌 떱니다. 아니면 대원들이 와서 이야기를 방해합니다.
대원들은 내 부하인데 내 말을 도통 듣지 않습니다. 쥐를 잡으러 다니면 체통이 없다 하고 소극장에 연극을 보러 가자고 하면 왕녀가 그런 곳에 가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그뿐인가요, 어머니랑 있을 때에는 중간에 끼어들어서 훼방을 놓기까지 합니다.
우리 어머니는 군부 대원들이랑은 아주 다른 분입니다. 붉은 머리카락은 구불구불해서 흘러가는 저녁노을을 뚝 떼어서 붙여놓은 것 같아요. 왕궁에서 어머니보다 색깔이 많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도 참 불쌍하지요, 넋이 나갔으니까요.
어머니는 온종일 창밖만 바라보고 계십니다. 나는 어머니 무릎에 올라 보기도 하고 뒤에서 안아 보기도 하지만 미동이 없는 겁니다. 그러다가도 가끔 어머니는 정신이 돌아온 것처럼 나를 안아서, 무어라 속삭여 주기도 합니다.
대원들은 어머니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 말해주지 않지만 나는 이유를 압니다. 북부 기지에 갔을 때 들었거든요.
어머니의 어머니가, 그러니까 나한테는 할머니 되시는 분이 우리 예쁜 어머니를 억지로 결혼을 시키셨답니다. 몸이 약해서 제복을 입고 괴수를 잡으러 다닐 수는 없으니 대라도 이으라는 거지요.
나는 그래서 어머니가 다른 대원들처럼 키도 크고 힘도 강했으면 어땠을까 궁금해하곤 합니다. 어머니가 충분히 강했더라면 할머니가 그러지도 않았겠지요. 모두가 어머니를 좋아했겠지요. 연병장에서 붉은 머리가 휘날린다면 그 누구보다도 돋보일 겁니다.
어머니는 참 불쌍합니다. 어머니의 언니는 참 강했다던데. 이모님은 혼자서 산맥의 괴수들을 죽이고 다녔다고 합니다. 대원 두셋이 함께 다니고서도 다쳐서 올 때가 있는 놈들인데도요. 내 이름도 그분을 따라 지은 겁니다.
참, 이건 어머니가 말씀해 주신 겁니다. 정신이 돌아올 때는 고운 목소리로 여러 이야기를 해 주시거든요. 그중에는 이모님에 대한 게 절반입니다. 어렸을 적에, 자기가 울 때 옆에서 걱정해주던 사람은 이모님밖에 없었다고요. 오두막에도 데려다 주고 꽃도 따다 주었다고요. 할머니가 화를 낼 때면 이모님이 옆에서 지켜 주었다고요.
참, 나머지 절반은 캐러웨이 극단 이야기였는데…….
캐러웨이 극단은 말루카에서 제일가는 곳입니다. 군부 축연은 항상 거기에서 맡지요. 그래서 이번 연극을 기대했는데 이상하게도 잠이 와서 보지는 못했습니다. 대신 꿈을 꾸었어요. 누군가의 뱃속을 걸어가는 것처럼 사방이 온통 꿈틀거리는 살덩어리였습니다.
그 살덩어리들이 뛰어오르면서 괴수로 변하지 뭐예요. 싸우고 싸우고 싸웠는데 끝이 나질 않았습니다. 처음에 나온 건 약한 놈이었는데, 그놈을 죽이니까 조금 더 강한 놈이 나오고, 그리고 훨씬 더 강한 놈이…….
결국엔 나동그라지고 말았습니다. 살덩어리도 모두 사라지고 어둠만 눈앞에 가득했지요. 그런데 어마어마하게 크고 검은 늑대가 저한테 오지 뭐예요. 나는 그게 이모님이라는 걸 바로 알았어요. 이모님이 나를 입에 물고 달려서 어둠을 벗어났습니다.
그렇게 일어났더니 공연이 이틀 전에 끝났다지 뭐예요. 이틀이나 자고 있었던 겁니다. 꿈을 생각하면서 가만히 앉아 있었어요. 그리고 이모님이 문을 열고 나타났습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알 수가 있었습니다. 키가 아주 크고, 검은 머리를 짧게 잘랐고, 얼굴 한쪽에는 흉터가 있어서 멋졌습니다.
이모님은 하인과 대원들을 물리고는 내 앞에 와서 눈높이를 맞추었습니다. 이모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나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구해 줘서 고맙다고 해야 할까요? 하지만 꿈이었는데요?
그래서 나는 말은 하지 않고 이모님을 꼭 안아주었습니다. 이모님이 어머니한테 해 주었다던 것처럼요. 이모님은 조용히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상한 일입니다. 어머니는 우는 건 항상 당신이었고 이모님은 달래는 쪽이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 * *
볼로디아는 태어났을 때부터 말루카를 다스렸던 것처럼 익숙한 태도로 대원들에게 지시를 내렸고 공식 연설을 준비했다. 바로 한 시간 뒤에 군부 중진과 장교들이 중앙청 연단 아래에 도열할 예정이었다.
7년간의 공백을 감안하면 놀라운 일이라고 생각했으나 잘 계산해본 결과 그럴 수도 있는 듯했다. 그 공백기는 사실상 기억에서도 날아가 있었으니까, 볼로디아에게는 북부 대장군이던 시절이 몇 달 전으로밖에는 느껴지지 않을 터였다.
대장군과 왕은 다르다지만 해온 가락이 있는 법이다. 따라서 왕위를 돌려주는 일에는 걱정이 없었다. 란드와르의 몫은 거의 끝났고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볼로디아가 그보다 뛰어났다. 염려는 다른 데에서 왔다.
"조카분에게는 스카르파 이야기를 하실 생각입니까?"
"다섯 살은 이런 일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잖소. 언젠가는 기회가 있겠지."
"하지만 제 어머니가 보이지 않게 되었으니 눈치를 챌 텐데요. 오가는 이야기를 막기도 어렵고요. 게다가 당분간은 저와 함께 다니셔야 하지 않습니까."
볼로디아가 왕위를 되찾기야 했지만 말루카를 다스리는 것은 여전히 섭정일 예정이었다. 파티에는 방어 전담이 필요했으니까. 일단은 볼로디아가 한 달간 말루카에서 머무르면서 남은 일을 매듭짓고, 수정 요새에 진입할 즈음에 세카두에서 합류하기로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두 해, 늦어도 세 해 안에 결착이 나는 일이라고 했잖소. 여정에서 돌아온 뒤에도 내 조카는 여전히 아이일 거요. 그때부터는 옆에서 줄곧 지켜볼 수 있겠지."
"여덟 살이라."
란드와르는 막연하게 덧셈 결과를 중얼거렸다. 그게 반항기가 올 만큼 똑똑한 나이인지 어떤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늑대인간은 인간보다 성장이 조금 빠르다 쳐도, 열한 살쯤. 여전히 긴가민가했다. 어린아이였던 시절은 스무 해 전에 지났고 아이를 옆에 둘 기회는 지금껏 없었다.
볼로디아는 엷게 미소 지었다.
"나이가 들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되면 나를 원망할지도 모르오. 혹은 우울에 사로잡힐지도 모르지. 하지만 아직은 아니잖소. 조카의 감상도, 내가 할 일도, 그때가 되어야 알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오……."
하기야 그랬다. 잘 될 거라 믿은 다음 생각을 끝냈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로 떠들 때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연설이 코앞이었다.
* * *
볼로디아는 대광장의 연단에 서서 모여든 군부 중진과 장교들을 마주하고 있었다. 세 명의 대장군이 가장 앞에 섰고 그 휘하의 부관과 장교들이 뒤를 따랐다. 그녀는 도열한 군중을 한 차례 훑은 후 첫 마디를 열었다.
"제군들, 한때 나는 마요르가 왕의 딸이었으며, 북부의 대장군이었고, 도시의 배신자였다. 산맥의 미치광이였고 노예 검투사였으며 교단의 사제였다. 그리고 이제, 나는 심장을 취하고 그 증오를 물리친 자로서 여기에 서 있다!"
란드와르는 사제 정복을 갖춰 입고, 약간 뒤에 자리 잡은 채, 연설을 잠자코 따라갔다.
"천 년간, 우리는 불행의 운명을 거쳐 왔다. 산맥의 왼편에 고립되어 서로를 의심했다. 그러나 보아라, 그 운명은 이제 우리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늑대 신이, 이 볼로디아가 말루카의 땅과 백성을 평화로 인도할 것이며 산맥의 괴수들을 호위병으로 거느릴 것이다!"
군부 대원들은 벌써부터 압도당한 표정으로, 무언가에 홀린 듯 볼로디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관중들을 사로잡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웅변조의, 낮고 정확한 목소리에서? 늑대 신이자 말루카의 왕이라는 권위에서?
"피웅덩이는, 심장은, 이 땅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요정들의 교활한 술수는 이제 무용할 것이며 약함은 악덕이고 가혹함이 미덕이던 시대가 막을 내릴 것이다. 서로를 의심하고 날을 세우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평온 속에서 더 많은 것을 살필 시대가 올 것이다. 모두가 도시를 위해 부역하던 시대가 아니라 도시가 모두를 위해 부역하는 시대가 올 것이다."
혹은 그 내용으로부터? 어조에서 오는 진정성이?…모든 것이 조금씩은 이 분위기에 보탬이 되고 있을 터였다. 볼로디아는 군중의 총합보다 더한 정열로 계속 말했다.
"따라서 나 볼로디아는, 오늘 이 순간을 말루카의 새로운 첫 해로 선포한다. 지난 천 년의 압제는 힘을 잃을 것이며 그 법도 또한 그러하다. 모든 왕과 왕가의 먼 선조께서 나의 결정을 지지하신다!"
그 문장이 끝나는 동시에 란드와르는 성큼 앞으로 걸어 나갔다. 아즈리온의 화신이 아니라 교단의 공식 사절로서. 견습 천사, 미오리타가 그들 사이의 허공에 나타나며 엷고 신비로운 빛을 흩뿌렸다.
"―그리고 첫 번째 시행령으로, 캐러웨이 부인과 요정의 일을 불문에 부친다."
볼로디아의 음성이, 열광 어린 침묵을 뚫고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