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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90화 (91/258)

90화 Once my sister, now my thesis (1)

작은 볼로디아의 상태를 살핀 뒤 란드와르 일행은 큰 볼로디아를 보러 갔다. 눈을 감고, 침상에 곧게 누워 있었다. 그 자세에는 순교하기 위해 스스로 제물대에 올라간 성자를 연상시키는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순교라 부르기에, 볼로디아에게 남은 시간은 많다. 영원일지도 모른다.

차원 생쥐들이 계약서를 쓰게 시키려는 건 일단 막았다. 그러니까, 그들이 언젠가, 무슨 이유로인가 이스트리아를 떠나 다른 하위 우주에 도달하더라도 볼로디아는 계속 여기에 머무를 터였다.

그 아득한 세월 동안 원래의 모습을 잃어갈 염려는 잠시 내려놓기로 하자. 아직까지는 누구도 장담하지 못할 일이니까. 그게 현실이 되었을 때 지금의 걱정을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괜찮겠습니까? 만약 말씀하신 대로, 전대의 악의가 이 몸을 차지한다면……."

펜닐이 조심스레 물었다.

"잘 되길 빌어야지요. 다른 누군가가 간섭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란드와르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스스로 굴러가는 공으로 당구를 치는 것과 똑같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마쎄이를 잘 넣어서 방향을 돌려놓을 수도 있겠지만 결국엔 모든 것이 공 자신에게 달려 있다. 순순히 구멍에 들어가는 것도, 역으로 당구채를 들이박는 것도, 혹은 제동을 걸고 완전히 멈추는 것도… 공의 소관인 것이다.

그는 당구채를 내려놓았으며 공은 어딘가를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그 종착지가 옳은 구멍일지, 테이블 바깥일지는 하루가 더 지나야 알 수 있을 터였다. 지금으로서는 믿고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볼로디아를 믿었다.

*  *  *

스카르파는 명징한 정신 속에서 뼈 장식을 한 여자를 마주 보았다. 항상 말을 걸어오던 목소리의 정체가 이것이었음을 곧바로 알 수 있었다.

마음은 이상하게도 고요했다. 슬픔과 기쁨이 함께 달아난 것처럼. 지난 일곱 해 동안, 수없는 악몽을 거치며 격한 감정은 모두 닳아 없어지고 말았는지도 모른다. 뚜렷한 것은 오로지 며칠간의 기억뿐이었다.

볼로디아는 그녀에게 사과했고 울쿠스는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그 둘에게 스카르파는 중요한 사람이었다. 스카르파는 자신의 생에 더는 이룰 것이 없음을 알았다.

그녀는 여자와 시선을 맞추고 낭랑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나머지 심장까지 먹었구나, 그렇지?"

"그래."

여자는 싸늘한 어조로 내뱉었다.

"하지만 나한테는 소원이 없어. 이룰 것도 없지. 심장은 이제 필요하지 않아."

"내겐 필요하니, 내가 너를 삼키면 되겠구나!"

날카로운 목소리와 함께 여자의 몸이 크기를 키웠다. 그것은 거대한 핏빛 뱀으로 변해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스카르파는 물러서지 않고 그늘의 복판에 가만히 있었다. 뱀이 비웃듯 외쳤다.

"발악해 보아라. 도망쳐 봐. 사냥감을 쫓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거든……."

"네가 나를 원한다면, 나를 먹어. 나는 원하는 게 없으니까."

밝게 웃은 스카르파는 포옹하듯 팔을 벌리고 말했다. 뱀은 그녀를 의심스럽다는 듯 내려다보다가, 마음을 정한 듯 덥석 집어삼켰다. 이윽고 스카르파의 정신이 스며들면서 뱀의 일부가 되었다.

그녀는 하인을 불러내 말했다. 뱀의 하체를 지닌 인간이 바닥에서 치솟았다.

"볼로디아가 여기에 왔구나. 이것보다는 어려운 싸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쉬운 일이지요. 최선을 다하겠……."

그 지점에서 말이 멎더니 하인이 허물어지듯 사라졌다. 뱀은 무언가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지금껏 그녀를 지탱해 왔던 갈망과 탐욕이, 집착이 서서히 표백되고 있었다. 이제 그런 것쯤은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것처럼.

*  *  *

암흑이 있었다.

늑대는 어둠에 자리를 깔고 짧은 잠에 들었다. 꿈에서 늑대의 눈은 별이 되었고 두 개의 심장은 해와 달로 변했다. 요정들은 몰래 그 꿈을 들여다보았고, 빛이 있는 세계에 마음을 빼앗겼다.

늑대가 깨어나자 요정들 중 용감한 이 넷이 나아가 말했다.

"드높으신 분께 간청합니다. 저희에게 빛나는 세계를 다시 보여 주십시오. 저희가 그 세계를 다스릴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늑대는 그 부탁을 들어 넷이 자신의 눈을 하나씩 택하도록 했다.

가장 먼저 나선 것은 윰 시밀이었다. 그에게는 지휘관의 자질이 있었으나 탐욕스러웠다. 그는 녹황색의 눈을 골랐고, 썩어 문드러진 심장을 가지게 되었다. 게걸스러운 역병이 윰 시밀을 따랐다.

그 다음으로 이시 첼이 나섰다. 그녀는 두려움이 없었지만 잔혹했다. 그녀는 암적색의 눈을 골랐고, 피투성이 심장을 가지게 되었다. 괴수와 그 생명력이 이시 첼의 발밑에 있었다.

세 번째로 나선 자는 아 드지즈였다. 그는 강했지만 우둔했다. 그는 투명하게 빛나는 눈을 골랐고, 수정 심장을 가지게 되었다. 원초적인 힘이, 색깔 없는 마력이 모두 아 드지즈의 몫이었다.

그러나 이시 타브는 어떤 별이 가장 좋을지 고민하느라 마지막까지 기다렸다. 그녀는 현명한 만큼 교활했다. 그녀는 밝은 보라색 눈을 골랐고, 유령 심장을 가지게 되었다. 영혼을 망가뜨리고 부수는 것이 이시 타브가 얻은 재주였다.

늑대는 이시 타브에게 쌍둥이 동생이 있음을 알았다. 그의 이름은 슈문이었다. 마지막으로 슈문을 불러내자 그는 늑대의 앞에 나아가 고했다.

"감히 말씀드리건대, 저는 별을 원치 않습니다. 이곳을 떠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 이것이 당신의 뜻이라면, 가장 하찮은 것을 골라 제게 주십시오."

늑대는 슈문을 위해 직접 황금색의 눈을 골라 주었고, 그는 바스락거리는 종이 심장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자 잊힌 비밀과 세계의 모든 지식이 그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늑대는 다섯 신과 그 백성을 위해 긴 잠에 들었다.

*  *  *

볼로디아는 살덩이 속으로 끝없이 추락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어느 순간 그녀는 마요르가에게 칼을 겨누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지금은 7년 전. 스카르파의 혼례가 결정되었을 때.

주저하지 않고 목을 쳤다. 핏방울이 허공에 튀더니 머리가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탁자가, 책장이, 기물들이 꿈틀거리더니 형상을 바꿨다. 때는 일전보다도 한 달이 이른 시점. 타라곤은 검술 사사를 부탁한다.

"돌아가게. 돌아가서 스카르파의 말대로 해."

다시 사방이 흔들렸다. 북부 기지로 옮겨가기 전에, 그녀는 중부의 장교로서 요정과 손잡은 저항군을 소탕하는 일을 맡았다. 지도자는 취조실에서 죽었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지나, 그 지도자의 딸이 볼로디아에게 덤벼들었다.

너무 가혹하게 말할 필요는 없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음을 알려 주자…….

그녀는 자신이 기억하는 모든 시간과 모든 장소에 존재했다. 이제는 돌이키지 못할 일들을 바로잡으면서. 그러나 스카르파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볼로디아는 생각했다. 동생을 만나야 해.

그녀는 다시 현재를 바꾸었고, 능묘의 지하층에 도착했다. 스카르파는 뜻 모를 미소와 함께 구조물의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있었다. 볼로디아는 검을 쥔 손에서 힘을 뺐다.

"미안하다, 스카르파. 너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항상 도망치고만 있었던 거야. 다른 이들에게는 행복을 안겨줄 수 있겠지만 네게 그럴 기회는 이제 영영 없어졌구나."

무기를 바닥에 내려놓고 동생을 감싸 안자 스카르파의 얼굴에 화사한 웃음이 인다. 잠깐만, 능묘에서의 마지막이 이랬던가? 의문이 길어지기도 전에 격통이 배를 찌른다. 볼로디아는 어디에선가 날아든 핏빛 투창이 자신을 꿰뚫고 지나가는 것을 본다.

거기에서 흐른 피가 거미줄처럼, 방사형으로 뻗더니 벽면을 기어올라 철제 우리의 형상이 되었다. 그 우리가 볼로디아에게로 쏟아졌다. 의식이 다시 살덩이 속으로, 암흑을 향해 추락했다. 그녀는 지금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

이곳은 심장의 안쪽. 현계도, 이면 세계도 아닌 어딘가. 모든 것은 믿는 만큼 진실이며 모든 것이 가능하다. 볼로디아는 자신이 죽은 것을 믿었다. 저승으로. 저승으로 가자. 모든 늑대인간이 만들어진 그곳으로. 무감각한 어둠 속에서 스카르파의 환영이 걸어 나왔다.

‘내가 언니에게 중요한 사람이라 기뻐.’

‘너는 내 꿈일까, 아니면 진실일까? 네가 이렇게 말하는 건? 여기에는 아무도 없고, 그저 내가 그 대답을 듣고 싶어 하는 것뿐일지도 몰라.’

‘그걸 분간할 필요는 없어.’

‘분간해야만 해.’

‘항상 속죄하지 않아도 괜찮아. 이게 내 대답이라고 믿으면 돼. 나, 타라곤, 어머니, 그 아이, 그리고 수많은 것들. 죄책감은 돌이킬 수 없는 순간을 끝없이 후회하는 것과는 달라.’

‘그 순간들을 잊고 싶지 않아. 내 실수를 남겨두고 싶어.’

‘왜?’

‘나는 말루카의 왕이고 늑대 신이야. 네가 말했던 것처럼, 도시를 무너뜨릴 힘이 있지. 어머니보다도 더 큰 힘이. 거기에 휘둘리고 싶지 않아. 어머니 같은 사람은 되고 싶지 않아.’

‘잊지 않으면서도, 반성하면서도 후회하지 않을 수 있어.’

‘정말로?’

‘정말로.’

환영은 거듭해서 모습을 바꾸었다. 첫 번째 왕이 크게 꾸짖었다.

‘이 짧은 순간도 견디지 못할 만큼 나약한 아이였느냐?’

왕들의 목소리가 움직이는 장벽처럼 볼로디아를 에워쌌다.

‘능묘에서의 다짐을 잊진 않았겠지!’

‘네가 바란 평화가 정녕 너 하나의 평화였느냐?’

‘왕이 짊어질 목숨은 아득히 많다. 모든 죽음에 괴로워할 수는 없어!’

‘살아 숨쉬는 이들을, 아직 태어나지 않은 목숨을 저버리겠다는 말이냐? 오로지 한 명의 망자를 위해서?’

마지막으로, 마요르가가 노호했다.

‘너는 내게 세 번 도전했고 두 번을 죽였지만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 깨어나라! 깨어나서 네가 옳았음을 증명해라!’

볼로디아는 눈을 떴고, 품에 안겨 새근거리는 새끼 늑대를 발견했다. 그녀는 그것이 스카르파의 딸임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동시에 진정한 악몽이 치솟았다. 살덩어리와 뼈로 이루어진, 거대한 요새였다.

볼로디아는 생각했다.

‘짓지 않은 죄를 속죄할 수는 없어. 일어나지 않을 사건을 두려워해서도 안 되지. 나는 지금까지의 왕들과는 달라. 앞으로도 그럴 거야. 그건 내 믿음에 달린 일이야.’

그녀는 계속 생각했다.

‘여기는 내가 다스릴 영토야. 모든 것이 내 뜻 아래 있어. 저 요새도, 피조물 군대도, 뱀도. 그리고 나는 이 아이를 지켜야 해.’

견고한 의지 속에서, 볼로디아의 뼈와 살이 뒤틀리며 더욱 강인한 형상을 갖췄다. 검고 거대한 늑대였다. 새끼 늑대를 입에 문 그녀는 앞발로 피조물 군사들을 짓이기며 요새를 향해 돌진했다. 땅이 그녀를 위해 길을 터 주었고 피의 홍수가 패잔병들을 쓸어 없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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