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정리 (2)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려오자마자 헤이딘은 테네브로즈에게 질문을 던졌다.
<자기 전에 하나만 묻고 싶은데, 아직 깨어 있느냐?>
"능묘의 각인 때문에 그러십니까?"
헤이딘은 세계를 구한다는 과업보다는 각인 도면에 관심이 더 많은 상태였다. 그래서 일을 마친 후 능묘 조사를 도와주겠다고 약속을 해 두었다. 약속을 하긴 했는데,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군부 조사관들이 득시글거릴 겁니다. 옮겨 적고 싶으시다면 내일쯤 해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저도 졸려 죽을 지경이란 말입니다……."
<아니, 그게 아니다. 밤새 생각을 따로 해 보았는데, 신의 피를 제물로 썼지 않으냐. 3교구에서는 거기에 있던 요정들을 모두 네가 제물로 바쳤다 했고.>
"그렇지요, 그래서요? 죽은 이들의 목록이라도 알고 싶으십니까? 모두 기억하고 있습니다. 얼마든지 읊을 수 있습니다만, 일단은 좀 더 자야 할 것 같은데요."
<졸린 것치고는 말이 많구나.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가 궁금할 뿐이다.>
야스와다 학파의 주문은 격이 높은 제물을 많이 바칠수록 효과가 증폭되었지만 다다익선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감당할 수 없는 제물을 썼다가는 시전자도 무사하지 못했던 것이다.
언제나 세 가지를 명심해야 했다.
첫째, 필멸자의 몸은 영혼을 담는 그릇이다.
둘째, 너무 많은 영혼을 담았다가는 그릇이 깨진다.
셋째, 제물로 바쳐진 영혼은 마법사의 몸을 통로로 삼아 이시 타브에게로 간다.
분수에 맞지 않는 힘을 넘봤을 때, 그 결말은 죽음뿐이었다. 요정 하나가 동시에 감당할 수 있는 영혼의 수는 요정 둘. 마법진을 그려 제의를 갖추더라도, 넷. 그 이상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서는 여러 마법사가 힘을 합쳐야만 했다.
<신의 피는 한 명이 다룰 수 있는 제물이 아니다. 통로가 무너지지 않은 게 이상한 일이지.>
"제가 안 죽어서 불만이십니까?"
<그 이유가 궁금하단 말이다.>
"전 유능하고 마법을 잘 쓰는 사람이니까요."
테네브로즈는 그렇게만 답한 뒤 헤이딘이 말을 걸어올 수 없도록 반지를 뺐다.
비결을 설명하려면 저승 이야기를 꺼내야 했다. 현명한 일은 아니었다. 숙소에 돌아와 누운 직후, 솔로틀에게서 경고가 들어왔던 것이다. 쓸데없는 말이 너무 많다고. 울쿠스뿐만 아니라 란드와르에게도.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솔로틀은 분명히, 란드와르를 충성으로 섬기라 명령했기 때문이다. 그 안에 들어 있는 게 무엇이건 간에, 자신과 동격의 존재로 여기라고.
그래서 테네브로즈는 란드와르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비밀을 지켜야 했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 동시에 진실을 숨겨야 하는 것이다.
그 점에 있어서도 최선을 다했다. 최선을 다했지만 누구도 만족시키지 못한 듯했다. 란드와르는 화를 냈고 솔로틀도 그를 꾸짖었다.
물론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욕을 먹는 건 익숙한 일이었고 별 감흥도 없었기 때문이다. 편리한 마음은 실로 좋은 것이다. 슬픔도 속상함도 먼 세상의 일일 뿐이니까.
하지만 슬픔과는 별개로, 그는 여전히 필멸자의 몸을 썼고 졸음 또한 느꼈다.
새벽 내내, 솔로틀의 속삭임에 시달리다가 겨우 풀려난 참이었다. 잠이 들려는 순간 란드와르가 그를 깨웠다. 깨워서 이상한 질문을 거듭하다가 밖으로 나갔다. 곧이어 헤이딘이 귀찮게 굴기 시작했다.
실로 가혹한 업무환경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제는 정말로 잘 시간이었다. 눈을 감는 순간 솔로틀과 나눴던 대화 한 조각이 뇌리를 스쳤다.
― 네 마음을… 잘못 고쳤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내가 실수를 했어.
― 저는 지금이 좋은데요. 그 말씀을 천 번은 넘게 하셨습니다.
자신이 한때는 이러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어 떠올랐다. 솔로틀의 의견에 동의하진 않았지만, 복잡한 마음을 빼앗길 때 무언가가 함께 사라진 것이 틀림없었다. 그게 도대체 뭐였을까?
그 질문은 잔잔한 울림을 일으키더니 곧바로 사라졌다. 호수에 던져진 돌멩이가 떠오르지조차 않고 바닥을 향해 가라앉는 것처럼. 이윽고 평온하고 무감각한 암흑이 그를 감쌌다.
* * *
숙소로 돌아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군부 대원이 조식이 담긴 쟁반과 함께 일간 소식지를 가져왔다. 군부에서 매일 편집해 말루카 전역에 뿌리는 물건이었다.
란드와르는 빵을 우물거리며 소식지를 살펴보았다. 1면의 헤드라인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당혹스러울 정도로 직설적인 문장이 찍혀 있었다. 아니, 이걸 직설적이라고 말해야 하나?
― 볼로디아 폐하, 어젯밤 환궁.
미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유배당한 나폴레옹이 엘바 섬을 벗어나 파리로 진격할 때, 신문의 논조는 12일 만에 극적으로 변했다고들 한다. 3월 9일, 식인귀 엘바 섬 탈출… 3월 21일, 황제 나폴레옹께서 퐁텐블로궁에 도착하시다.
어디에서나,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비슷한 일이 일어나는 모양이다. 이 헤드라인을 적어낸 이가 중부 대장군이라는 사실이 곧이어 떠올랐다. 극장에서는 앞장서 배신자 취급을 해 놓고 이런 문장을 써낼 수 있다니 정치인의 귀감이었다.
란드와르는 그 지점에서 사소한 원한을 기억해냈다. 스카르파가 볼로디아를 불러냈을 때, 펜닐과 중부 대장군은 그녀를 앞에 앉혀 두고는 불청객 취급을 했던 것이다. 어젯밤에야 일이 하도 급박하게 돌아가서 잊고 있었을 뿐이지, 모든 게 정리된 다음에는 꽤나 껄끄러울 게 분명했다.
파리로 돌아왔을 때, 나폴레옹은 그런 상대를 어떻게 취급했던가?
여기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말루카의 정치 구도에 대해서는 더더욱 몰랐다. 볼로디아가, 건방지다는 이유만으로 멀쩡히 일 잘 하던 사람들을 숙청하진 않으리라는 믿음만이 있을 뿐이었다. 물론 마음 같아서야 내쫓고 싶지만, 공과 사는 구분해야 하는 법이고…….
피웅덩이 문제는 끝났을지라도 역사서에 쓰일 내용은 아직 길었다. 세상의 대부분은 한순간의 혈전보다도 그 이후의 수습으로 이루어져 있으니까. 어쨌거나 둘 다, 어느 정도는 란드와르의 몫이었다.
그는 역사의 한 페이지를, 혹은 한 챕터를 차지하는 게 어떤 기분인지 느끼려 애썼다. 여전히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신앙심을 꽤나 수급했으리라는 기대가 있을 뿐이었다.
화신이라는 걸 밝히지 않을지라도, 교단의 이름으로 행동해서 영향력을 발휘하면 그에 상응하는 신앙심을 얻을 수 있었다. 상대가 이교도라 쳐도 예외는 아니다.
<예, 능묘에서 쓰신 양과 상계하면… 상계하더라도 확연한 증가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성공적이군요.>
말루카 시나리오를 초반에 처리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수정 요새>나 <황무지의 학자들>, 그리고 <불멸의 제국> 같은 핵심 시나리오는 인간 도시 바깥에서 진행됐던 것이다. 얼마나 영웅적인 업적을 세우든 간에, 그게 알려지지 않는다면 신앙심도 얻을 수 없다.
반면 <말루카의 피 웅덩이>는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상태에서도 상당량의 신앙심을 얻는 게 가능했다. 교단 사제의 도움을 받아 아즈리온의 예언이 실현된 셈이니까. 뿐만 아니라 말루카에서 나오는 신앙심은 단발성이 아니었다. 이후로도 계속 부스트가 되어줄 터였다.
대신 남은 시나리오는 말루카에 비하면 훨씬 어렵다. 전투시간 내내 신앙심을 불태워 가면서 몸을 회복하고 전투력을 강화해야 할 만큼. 그나마 시기를 잘 맞추면 난도가 대폭 낮아지는 게 <수정 요새>.
그 시점까지는 여유가 약간 있었다. 뒷수습을 끝마치고도 남는 시간이…….
란드와르는 섭정으로서의 일들을 떠올려 보다가 오전에는 쉬기로 결론 내렸다. 스카르파는 죽고 볼로디아가 혼수상태에 빠져 있다 쳐도, 모든 게 혼란스러울지라도 말루카는 적당히 굴러갈 터였다. 최소한 이틀쯤은.
그건 관료제의 미덕 중 하나였다.
* * *
오후가 되기도 전에 일거리가 생겼다. 작은 볼로디아가, 그러니까 스카르파의 딸이 도통 잠에서 깨어나질 않았던 것이다. 늑대인간들은 그것 역시 어젯밤에 있었던 일의 연장선이라 판단하고는 란드와르를 불렀다.
란드와르로서는 짚이는 구석이 없었다. 차원 생쥐 놈들도 마찬가지였다. 대신 이번에는 모른다는 말을 들어도 예전처럼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무능한 이유를 들었더니 기대가 없어졌고 화도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자 도움을 구할 곳이 테네브로즈밖에는 없었다.
"나으리께서는 정말 너무하십니다."
"내가 미안해. 이것만 하면 진짜 안 깨울게."
"졸린데 저녁에 하면 안 됩니까?"
"그런 이유로 미루는 게 될 일이냐. 어차피 여덟 시간쯤은 잤잖아."
놈은 말없이,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울쿠스한테 옮았나?
아이의 침실에는 중부 대장군과 펜닐이 와 있었다. 란드와르는 한 달 반쯤 묵은, 소소한 원한을 멀리 치워둔 다음 테네브로즈에게 영혼을 들여다보도록 시켰다. 둘에게는 놈의 정체를 밝혀둔 상태였다.
아이는 미간을 찌푸린 채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깊은 악몽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였다.
"…이 가능성을 잊고 있었다니 놀랍군요."
잠시 정신을 집중하던 테네브로즈는 잠이 깬 표정으로 눈을 깜박였다.
"인간은 인간을 낳고, 요정은 요정을 낳습니다. 그처럼 신의 자손도 그 핏줄을 잇지요."
테네브로즈의 말대로, 지금껏 그 가능성을 떠올리지 못한 게 스스로 느끼기에도 의아했다. 작은 볼로디아가 태어난 것은 스카르파가 심장을 먹고도 일 년쯤이 흐른 뒤의 일이었던 것이다.
반신격에 대한 내용은 게임에서는 깊이 다뤄지지 않았지만 대강은 알고 있었다. 애초에 타마기스의 황제부터가 윰 시밀의 아들이자 반신이었으니까.
"왕녀님이… 스카르파와 같은 존재가 된다는 말이오?"
"그건 아닙니다. 살아남느냐가 관건일 뿐이지요."
테네브로즈는 늑대인간들 앞에서 전직 부제사장으로서의 능력을 발휘했다. 심장과 신위에 대한 즉석 강의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필멸자의 영혼은 몸에 갇힌 반면, 요정 신의 혼은 심장 그 자체에 서려 있었다. 몸이 죽더라도 정신만큼은 그대로 남는 셈이었다.
아니, 오히려 정신이 핵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핏빛 뱀이 스카르파의 몸을 차지하고 덤벼 왔던 것처럼.
"요정 신들에게, 육신은 현계에 닿는 접점일 뿐입니다. 걸어다니는 차원 균열이라고 할 수 있지요. 반신도 그와 비슷합니다… 이들의 혼 역시 심장 속에 담겨 있으니까요. 이렇게 태어난 반신은, 신위가 나뉘어 신격을 온전히 물려받지 못한 경우와는 또 다릅니다."
"지금까지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는데……."
펜닐이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요?"
"제국의 긴 역사에도, 반신은 아주 적은 수만이 남아 있습니다. 확언할 수 있는 부분은 이분께서 지금, 이시 첼의 흔적을 마주하고 있으리라는 것뿐입니다."
중부 대장군은 잠시 생각하다가 불안한 듯 물음을 던졌다.
"심장에는 여전히, 요정 신의 악의가 도사려 있다고 했잖소. 볼로디아 폐하께서 거기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도……."
"그렇지요."
"왕녀님께서 위험하다는 말이 아니오?"
"그건 신들의 일입니다. 우리가 어찌 감히 간섭할 수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