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정리 (1)
요정 사회에는 스물세 곳의 귀족 가문이 있다. 그들은 한때 바단과 나우파나의 지도층이었으나 섬기던 신을 잃고 동족의 도시로 도망 오게 되었다.
야스와다를 세운 아홉 가문이, 즉 명문가가 그들의 위에 군림한다. 명문가의 일원은 야스와다 학파의 마법사이자 이시 타브의 신관으로서 가장 많은 것을 취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선택받은 자들의 의회>의 옥좌는 여섯뿐이다. 진정한 권력을 거머쥐기 위해, 혹은 자신의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아홉 명문가는 치열한 암투를 거듭한다.
* * *
나트람에게, 지난 다섯 달은 악몽 이상이었다. 테네브로즈를 치우려던 시도는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고 말았던 것이다.
놈은 스스로 배반자를 자처하면서 감옥으로 향했고, 사형일 전날에 사라졌다. 3교구에 있던 신관들을 모두 죽여 놓은 채. 영혼조차 남기지 않고. 그제야 요정들은 그가 자백한 혐의가 진실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와그다스 학자들을 풀어준 것은 테네브로즈였다. 오래전부터 그 도망자들과 내통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자 자연스레, 나트람에게로 의심의 눈길이 모였다. 어쨌거나 테네브로즈는 몇십 년간, 충성스레 그의 곁을 지켜 왔던 것이다.
<선택받은 자들의 의회>에 소속되어 있다고 해서 혐의를 덮을 수는 없었다. 오히려 의회에서 제명되고 재판을 받을 판이었다… 그러나 나트람은 다른 의원들 앞에서 결백을 증명했고, 다시 저택으로 돌아왔다.
"신임을 잃지 않았다니 다행입니다. 그렇지요, 아버님?"
"너는 아무것도 모른다!"
나트람은 노기 서린 목소리로 외쳤다. 말을 걸어온 여자는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그녀의 이름은 사이라크였고, 나트람의 맏딸이었다. 테네브로즈에게 보내진 자객 중 하나이기도 했다.
"너와 동생 둘을 보냈다. 셋을 보냈어.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셋이 하나를 처리하지 못했단 말이냐?"
"하지만 그건 저희 잘못이 아니었습니다. 마법으로 목을 으스러뜨리고 심장에 칼을 찔러 넣었는데도 죽지 않았단 말입니다! 그러고는 사라졌습니다!"
"환각에 당했겠지!"
"아닙니다!"
그렇게 소리친 사이라크는 폐부를 찌르는 격통에 허리를 수그렸다. 명문가에서는 아랫사람들을 벌하기 위해 매를 꺼내 드는 대신 약한 주문을 쓰곤 했다. 나트람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바닥에 주저앉은 딸을 내려다보았다.
"정신의 감옥에 들어가서 심문을 받았다. 내가 그놈의 배반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걸 보이려면 그럴 수밖에 없었지. 내가, 별불꽃의 가주가 평민 취급을 당했단 말이다! 너희가 일을 그르친 탓에!"
중대한 상황이 아니라면, 귀족이나 명문가에게 정신의 감옥을 시전하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그 주문은 단순한 살인보다도 훨씬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얻어낸 의원 자리인지 네가 아느냐?"
그것은 나트람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했다.
그가 막 가주 자리에 올랐을 때, 별불꽃은 아홉 명문가 중에서 가장 마지막이었다. 여섯 번째 가문을 밀어내고 의회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노력과 영민한 계획이, 그리고 천운이 동시에 필요했다.
첫째 가문과 둘째 가문은 각각 은빛매와 어둠달이었다. 둘의 세력은 거의 비등했다. 은빛매는 경쟁자를 견제하기 위해 의회의 구도를 조정할 필요성을 느꼈고, 나트람에게 기회를 주었다.
의회의 옥좌를 차지하기까지, 나트람은 모든 과업을 성공적으로 해냈다. 지금의 그는 단순한 장기말 이상의 존재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입지가 확실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놈은 어둠달의 핏줄입니다! 가문 전체가 연루된 일인지도 몰라요! 배신자 한 명이 저지를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고통으로부터 빠져나온 사이라크는 창백한 얼굴로 외쳤다.
나트람은 그 항변을 완전히 무시했다. 어둠달과 놈 사이의 관계는 그가 더욱 잘 알고 있었다. 만약 어둠달을 의심할 여지가 있었더라면 정신의 감옥에 들어가는 것은 나트람이 아닌 어둠달의 아자라스가 되었을 터였다.
당시의 3교구에서는 소생 의식이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었다. 영혼을 끝없이 바치면서, 이시 타브의 영토로 이어지는 차원 균열을 억지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막대한 힘이 흘렀다. 한 명의 잘못된 마음이 끔찍한 결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
따라서 의회는 그게 와그다스 학자들과 놈의 합작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각인만 미리 새겨져 있다면 어디에든지 나타날 수 있는 족속이니까. 3교구는 특성상 야스와다 외곽에 위치해 있으니만큼 은폐 역시 쉬웠을 터.
"어쨌건 네가 실패했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수습도 네 몫이지."
"수습이라뇨?"
"우리 가문은 이 사태에서 완전히 배제되어 있었다. 너 또한 소속 교구에서 근신 처분을 받고 있었지. 하지만 내가 결백을 입증했으니 우리에게도 놈을 처리할 권한이 있다. 그러니 네 동생들과 함께 가라. 그놈의 시체를 내 앞에 가져와!"
나트람은 구체적인 방법은 제시하지 않았다. 그건 딸과 두 아들이 생각할 문제였다. 사이라크를 쫓아 보낸 그는 탁자 위에 장식된 손 박제를 물끄러미 응시했고, 생각에 잠겼다.
사건이 터진 직후, 어둠달의 가주는 추적을 위해 테네브로즈의 마력 적성을 알려주었다. 그 즉시 2교구 분석실이 작업에 들어갔다. 별점술을 통해, 놈이 어디에 있을지를 점치는 것이다.
예상 경로가 나오는 시점은 보통 계산을 시작하고서 열흘 전후. 길어 보아야 수십 일을 넘지 않는다. 하지만 놈은 아직 행적이 잡히지 않았다. 다섯 달째였다. 필멸자라면 마력의 흐름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데도.
나트람은 정신의 감옥에 들어가기 직전, 어둠달의 가주가 자신을 미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순간을 떠올렸다. 심문이 끝난 뒤에는 뭐라고 했던가?
― 아무리 매력적인 물건이라도, 버려지는 데에는 이유가 있기 마련이라네. 망자의 소유물을 함부로 주웠다가는 액운을 입지.
그는 테네브로즈가 가문에서 쫓겨난 이유를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딤 나겔이 말해 주었던 것이다. 금지된 마법을 위해 누님 중 하나를 바쳤다고.
그러나 나트람은 그 이야기를 근거 없는 것으로 치부했다. 그중 첫째는 여전히, 가문의 연회에 모습을 내밀었으며 둘째는 병들어 죽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만약 그런 사건이 일어났다면 쫓겨나는 것만으로 일이 끝나진 않았을 터였다.
오판이었다. 놈은 금지된 마법과, 동족을 배반한 세 도시와 깊은 관련이 있었으며 그 사실을 지금껏 숨겼다. 그래서, 기회를 노리다가 소생 계획의 마지막 날에 모두를 죽인 뒤 달아났던 것이다.
"의회에서 소집령이 떨어졌습니다. 아주 급한 일입니다. 바로 출발하셔야 합니다."
…그를 상념으로부터 빼낸 것은 시종, 러스터의 목소리였다. 다른 감정보다도 당혹이 앞섰다. 이 한밤중에? 질문은 길지 않았다. 나트람의 시야에 붉은 빛이 들어왔던 것이다.
그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암적색의 별이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 *
눈을 뜨자 아침이었다.
란드와르는 꿈이 달아나기 전에 서둘러 종이를 찾았다. 마침 꾸러미 속에 연극 대본이 있었다. 여백이 많은 쪽을 펼친 뒤 파울리스에게서 들은 이야기들을 옮겨 적기 시작했다.
믿고 싶지는 않지만 믿을 수밖에 없는 내용이 줄줄이 이어졌다. 이런 거짓말을 꾸며내서 얻을 이득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정리를 마친 란드와르는 옆을 보았다. 테네브로즈가 옆의 침대에서 누워 자고 있었다. 흔들어 깨우자 녀석의 얼굴이 잔뜩 찌푸려졌다. 아랑곳하지 않고 질문을 던졌다.
"너 말이다, 사기를 당했으면 어떻게 할 거냐."
"전 사기를 당해본 적이 없는데요."
"아니, 만약 당하면."
"전 사기를 당하는 사람이 아닌데요."
란드와르는 현기증을 느꼈다. 차원 생쥐 이야기를, 그리고 자신의 상황을 털어놓는 건 아무한테도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걸 아는데도 입이 간지러웠다. 대나무 숲에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를 외치던 사람의 심정이 절실히 이해가 갔다.
"됐다, 관두자."
"그러면 더 자도 됩니까?"
"아침인데 일어나야지. 해 떴어."
"저는 나으리랑은 달라서 다치면 쉬어줘야 합니다. 나트람도 팔다리가 잘렸다가 붙은 사람한테 다음 날 아침이 되자마자 걸어 다니라고는 하지 않을 겁니다."
테네브로즈는 그렇게 웅얼거리고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렸다. 란드와르는 잠시 할 말을 잃어버렸다. 뭔가 변명 같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상식적으로 접근했을 때 미친 갑질을 하고 있는 쪽은 자신이었다.
"내가 미안해."
"아셔서 다행입니다."
이불 덩어리가 대답했다. 란드와르는 자문했다. 이거 내가 잘못한 게 맞나? 아니, 잘못한 건 맞는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좀 더 자고 싶어서 핑계를 대는 것 같았다. 그래, 지금까지 열심히 굴렀는데 늦잠쯤이야 잘 수도 있지.
란드와르는 거기에서 생각을 멈추고 메모한 종이를 불태우기 위해 일어섰다. 이건 누구한테도 알려져서는 안 되는 내용이었다.
* * *
밖으로 나가서 으슥한 장소를 찾기 시작했다. 왕궁 한복판에서 뭔가를 태우는 건 현명한 일이 아니다. 방화범으로 몰릴 위험이 있으니까. 마공학 라이터로 극본의 한 페이지를 태우는 것뿐일지라도.
란드와르는 불꽃이 종이를 갉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그게 손가락에 닿기 전에 털어냈다. 얇은 재가 비늘조각처럼 무너지면서 묘한 단내를 풍겼다. 손이 온통 회색이었다. 그냥 욕실에서 태울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깨어난 지 얼마 안 된 탓에 판단력이 흐려졌던 모양이다.
손을 대충 털어낸 뒤 왔던 방향과는 반대로 별채 건물을 돌았다. 그러자 어제 만들었던 묘지가 보였다. 그 앞에 서 있는 사람 둘까지. 캐러웨이 부인과 군부 대원이었다. 경호를 받는지 감시를 받는지는 몰라도, 아무튼.
이러나저러나 부인에게는 미안한 일이긴 했지만 남의 일상에 날벼락을 쳐 놓고 넘어가기에는 마음이 편치 못했다. 위로라도 몇 마디 남기고 싶었다.
잠깐만, 이건 혹시 자기만족인가? 괜히 말을 얹었다가 남 기분만 망쳐 놓는 게 아닐까? 뭐든 간에. 강현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공감과 자기만족은 분간할 수 없다고 믿는 편이었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곁에 가서 섰고, 군부 대원에게 잠깐 멀리 가 있으라고 요구했다. 대원은 섭정의 명령에 따라 멀리 물러났다. 볼로디아가 깨어나기 전까지는 란드와르가 섭정을 맡기로 했던 것이다.
"일단, 지금까지 속인 점은 미안합니다. 원래는 체류 기간 때문에 온 건데 일이 공교롭게 돼서요. 많이 놀라셨을 테고, 앞으로도 귀찮은 일이 많으실 텐데… 거기에 대해서도 사과 말씀 드리겠습니다."
"모두를 속인 사람은 나예요. 사과할 사람도 나지요."
"부인한테 죄를 물을 사람은 없을 겁니다. 울쿠스가 부탁했거든요. 아즈리온의 명예가 걸린 일이니까, 예, 볼로디아도 약조를 했으니까… 지켜질 겁니다."
캐러웨이 부인은 란드와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살짝 미소 지었다. 서글퍼 보이는 웃음이었다.
"처음 만났던 날, 이 아이는 자기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말했답니다. 타라곤의 신분을 빌려 써서라도, 도시에 머물러야 한다고요. 두려웠어요. 내 삶에 왜 이런 일이 일어나나 싶었지요. 그래서 한동안 말없이 앉아 있었어요."
"예."
"정말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갑자기 울기 시작하더군요. 겁먹은 아이처럼요… 미워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혹은 내 마음을 속이고 그걸 진실로 만들어야만 했는지도 모르지요. 선택지가 없었으니까요."
부인은 침묵했고 란드와르도 말하지 않았다. 울쿠스가 부인을 어머니로 생각하는 것처럼, 부인에게도 그 요정은 아들이었던 모양이다. 타라곤의 대용품이다 치고 그럭저럭 참아줄 수준이 아니라, 그것보다 훨씬 의미 있는 존재 말이다.
심장이 수백 번도 더 뛴 다음에야 부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이런 거짓말이 언제까지 계속될 수 있을까 묻곤 했어요. 끝났군요."
"울쿠스의 삶은 명예롭게 막을 내렸습니다. 저승에서는 총애를 받을 겁니다."
"나는 그 아이에게 살아 달라고 부탁했어요."
이 말에는 대답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는 가만히 멈춰 선 채, 울쿠스에 대한 입장을 마지막으로 정리했다. 전사 란드와르의 태도가 아니라, 서른네 살 이강현의 태도를. 지금까지 울쿠스와 어울린 쪽은 대체로 이강현이었으니까.
자동차 둘이 부딪혀도 과실이 10:0인 경우는 흔치 않다. 그런데 추돌사고가 6중으로 났다면 어떨까. 바닥에는 블랙아이스까지 깔려 있었더라면. 그 상황에서 인과관계를 잡아내고 귀책을 따지는 건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일 터였다. 울쿠스가 순전한 악당인지, 신의 의지에 휘둘린 필멸자인지를 구분하려는 것 역시.
물론 강현은 여기에서 제일 억울할 사람은 볼로디아라고, 과실을 계산해야 한다면 도시 자체의 비극이 과반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 판단은 머릿속에만 남겨두기로 했다. 울쿠스가 착한 놈일 수는 없다는 것까지도. 볼로디아는 의견이 다른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모두에게는 각자의 결론이 있었다.
그것은 타인의 몫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