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한 번 포기했다면 두 번도 포기할 수 있다 (2)
상위 우주의 공허는 복잡한 규칙에 따라 하위 우주를 생성한다. 각각의 크기와 형태는 서로 다르다. 인격신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가 있고, 거대한 거북의 등 위에 만들어진 세계가 있는가 하면, 중심 두뇌가 모든 지성체를 하나로 묶는 세계가 있다.
물론 외견이 같다고 해서 그 작동 원리마저 동일한 것은 아니다. 거북이 대륙을 받치고 있을지라도, 어떤 거북은 숫자와 물리 법칙의 지배를 받고 어떤 거북은 마법적 힘으로 이루어져 있으니까.
이러한 하위 우주들은 대개 독립적이지만 서로 연결되기도 한다. 따라서 세계의 종말에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 내재적인 법칙에 의해 스스로 사라지거나, 혹은 다른 세계의 침략을 받고 망가지거나.
후자의 경우에, 망가진 세계의 초월적 존재들은 상위 우주의 공허를 헤매게 된다. 새로 만들어지는 하위 우주를 엿보면서, 끼어들 자리를 노리는 것이다.
이러한 낙오자 무리는 차원 생쥐라 불리며, 각 세계의 지성 있는 초월자들에게는 경멸의 대상이 된다.
* * *
"부름이 느껴지자마자 곧바로 갔지. 차원 생쥐들이 먼저 초대를 받는 일은 거의 없거든. 그때 우리한테는 남은 게 거의 없었어… 사실은 지금도 비슷해. 우리가 정말로 좌우할 수 있는 곳은 여기뿐이야! 이 사무실 하나뿐이라고!"
설명이 끝자락에 이르자 파울리스의 목소리가 갑자기 높아졌다. 소년은 그렇게 외치고서는 경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자조처럼 느껴지는 태도였다.
강현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옆으로 시선을 던졌다. 은은한 빛의 구체가 탁자를 감싸고 있었지만 그 바깥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어두웠다. 사무실은, 계약서를 쓸 때 보았던 장소를 말하는 걸까? 아니면 여기까지도?
"여기도 사무실에 포함됩니까?"
"그래. 방해되지 않도록 공간을 조금 조정했을 뿐이야."
그러고서는 불편한 침묵이 있었다. 강현은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은 채 서른네 살의 불가지론자에게는 너무 낯선 이야기들을 정리해 나갔다.
일단 파울리스를 비롯한 이스트리아의 여덟 신은 다른 하위 우주에서 왔다. 정확히는, 주어진 세계를 말아먹고, 상위 우주의 난수들 사이를 떠돌다가, 아즈리온의 부름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아즈리온은 맛이 갔고 이스트리아의 작동 원리는 이 생쥐들에게는 낯선 것이었다. C++으로만 코드를 짜던 사람이 Prolog로 쓰인 프로그램을 이해할 수 없듯이.
규칙을 해독하려는 시도는 꾸준히 하고 있었지만 쉬운 일이 아니라고 했다. 계약서의 항목들은 해석된 작동 원리를 자기네 방식으로 바꾼 것뿐이라고도.
무슨 종류의 애도를 표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가족을 잃거나 애완동물이 죽은 경우에는 관용어구가 있지만 세계를 잃은 신들에게는 적당한 인사말이 없었다.
뭉근한 안타까움과 답답함이, 그리고 무력감이 서로 달라붙더니 짜증으로 변했다.
씨발, 이걸 왜 나한테 설명하고 있어. 난 그냥 인간인데. 돈 벌어서 빚 갚으려고 온 건데. 그쪽 분들이 세계를 잃은 건 안타까운 일이지만, 내 인생도 나한테는 모든 세계란 말입니다…….
이 생각 역시 전해지고 있으리라는 자각은 잠깐 했는데 멈출 노력은 하지 않았다. 의지대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어차피 파울리스도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작고 아늑한 세상이었어. 십만 명, 그래, 언제나 십만 명의 사람이 있었고 복잡한 일들은 생각하지 않아도 좋았어. 모든 게 평화로웠으니까. 죽지 않고, 현명하고, 싸우지 않는 사람들이었어. 장벽이 무너지기 전까지는 그랬지……."
십만 명. <이스트리아 퀘스트>의 플레이어가 그 세상에 살던 모든 사람보다도 많겠다 싶더니 종로구의 인구가 십오만 명 남짓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이 신들이란 사실 구청장쯤이 되는 셈이다. 지방으로 가면 시장까지도 될 수 있겠지.
강현은 전직 구청장이 떠드는 이야기를 가만히 귀에 담았다. 목소리는 여전히 쾌활했지만 어딘가 공허한 구석이 있었다.
"차원 사이의 장벽이 무너지고 뭔가가 쏟아졌어. 그걸 뭐라고 불러야 할까? 외계인? 악마? 뭐든 간에. 어차피 그것들도 다른 하위 우주의 거주민일 테니까."
"그래서, 졌습니까?"
"도망쳤어."
딱 잘라 말한 파울리스는 고개를 숙이고는 떨듯이 웃었다.
"우리는 그게 뭔지 몰랐어.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도, 섬 하나와 십만 명의 착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세계는 아주 작고 연약한 축에 속한다는 것도 몰랐지.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랐어. 전쟁이라는 걸 겪어 본 적이 없었으니까. 겁에 질려서 도망쳤어. 도망쳤다고……."
계약서를 썼을 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누구도 전쟁을 원치 않는다고 했다. 그건 모든 대안이 실패했을 때 만나는 종착점일 뿐이라고. 쉽고 어렵고를 따질 문제가 아니라, 최대한 피해야 하는 결말이라고.
당시에는 수긍하면서도 어딘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대전쟁도 한 차례 치른 데다가 지금도 괴수가 준동하는 세계에서 나올 발언은 아니었으니까. 도리어 자신이 할 법한 말을 판타지풍의 인격신들이 늘어놓고 있었으니까.
여전히, 무슨 심정일지는 짐작이 가질 않았지만 내막은 이해가 됐다. 강현은 지구를, 태양계를, 그 너머로 뻗은 광막한 우주를 상상했다. 그걸 누가 다스리는지는 논외로 치고. 고작 10만 명과 함께하던 꼬마들과 아득한 공간을 발밑에 둔 존재는 결코 같지 않을 터였다.
"어디든지 갔어. 지구에도 오래 있었지. 그만큼 큰 곳은 흔치 않거든. 차원 생쥐들은 보통 둘 중 하나야. 충분히 넓은 세계에 몸을 감추거나, 아니면 다른 하위 우주로 향하거나."
"이스트리아 말고 다른 곳도 가 봤습니까?"
"물론. 우리를 처음으로 부른 남자는 악마를 소환했다는 죄로 화형당했지… 거기에서 차원 생쥐라는 말을 처음 배웠어. 성당에 갇혀 있다가 다시 상위 우주로 쫓겨났거든. 그 후로도 온갖 세상을 떠돌면서 정말로, 정말로 많은 걸 봤어. 우리가 아주 작은 온실 안에 있었다는 걸 뼈저리게 깨달았지."
거기까지 말한 파울리스는 발작적인 홍소를 터뜨렸다. 거친 울림 사이사이에 절규를 닮은 문장이 섞여 나왔다.
"아즈리온이 우리를 불렀어! 생쥐들에게 신 역할을 맡겼다고! 이런 기회는 다시는 안 올 거야… 네가 의심하는 것도 이해하지만, 우리는 최선을 다하고 있어… 정말로, 최선을 다하고 있단 말이야……."
* * *
마력은 단순한 힘이 아니었다. 그것은 현계를 구성하는 질료였으며 과거와 미래의 일부였다. 마력 타래를 잘 짚어간다면 앞날도, 옛 일도 얼마든지 볼 수 있다는 뜻이었다. 운명신, 지즈벨라의 업무가 바로 그것이었다.
덕분에 지즈벨라와 휘하의 천사들은 항상 바빴다. 시뮬레이터 설계부터가 그녀의 몫이었다. 마력 갈래에서 보이는 가능성들을 그대로 프로그램에 옮기는 것이다.
그런 만큼 실수도 많았다. 관측할 수 있는 미래는 모두 가능성의 범주로만 남아 있었고 과거를 파헤치기는 어려웠다. 어째서 일이 이렇게 흘러가는지 전혀 파악하지 못한 채, 어떻게든 어설픈 미래 덩어리에 게임 라벨을 붙여 시장에 내던졌다.
다행히 지금까지, 시뮬레이터의 오작동은 오차 범위 내였다. 하지만 그러고서도 일은 끝나지 않았다. 타라곤의 뒤를 캤고, 울쿠스를 감시했고, 이제는 테네브로즈의 과거를 다시 살피는 중이었다.
요정 신의 영향력이 커지는 곳에서는, 지금 당장 일어나는 일조차 추적하기 어려웠다. 교단 신도가 해당 장소에 있는 게 아니라면 아무것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수십 년 전의 야스와다를 들여다보는 게 쉬울 리가 없었다.
"앞으로 돌려 보자. 아니… 안 되겠다."
"아예 시료를 바꿔 볼까요?"
부관은 그렇게 물으며 결과가 떠오른 화면과 분석기를 번갈아 보았다. 짧은 신음을 흘린 지즈벨라는 새하얗게 마른 손가락을 검은 머리칼 사이로 찔러넣었다. 홀쭉한 얼굴 위로 고통스러운 짜증이 일었다.
"이건 잠깐 멈추고, 직전 상황으로 시점 옮겨 봐. 능묘 끄트머리로."
"전환했습니다."
곧바로 화면이 두 개로 분할되었다. 오른편은 란드와르와 볼로디아를 비췄고 다른 하나는 테네브로즈를 담고 있었다. 서로, 각자의 방식으로 죽음을 애도하는 중이었다.
지즈벨라는 테네브로즈가 울쿠스의 가슴팍에 손을 얹는 모습을 지켜보며 입술을 잘근거렸다. 마력 감지가 영혼까지는 짚어낼 수 없는 게 아쉬웠다.
영혼은 현계가 아니라 저승의 소관이었고, 교단 신도가 아니라면 명세를 들여다보는 게 불가능했다. 울쿠스의 영혼이 어떻게 되어가는지는 알 수 없다는 뜻이었다.
만약 그걸 볼 수 있었더라면 진작에 증거를 잡았으리라. 놈이 저승의 일원이라는 증거를. 심증은 차고 넘쳤다. 물증이 필요할 뿐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소득이 없었다. 지즈벨라는 부관들을 쉬게 한 후 복도로 나섰다. 이스트리아의 정경과는 완전히 다른, 삭막한 회색조 벽재가 그녀를 맞았다.
조금 더 세련되거나 고풍스러운 모습으로 꾸밀 수도 있었다. 하지만 사무실은 이전 세계의 마지막 흔적이기도 했다. 모두가 추억을 붙잡아두길 원했다. 그게 뼈저린 고통으로 다가올지라도…….
그녀는 한숨을 삼키며 휴게실로 향했다. 파울리스가 안락의자에 몸을 파묻고 있었다. 나른하면서도 어딘가 괴로워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지즈벨라의 그림자가 그 위로 드리웠다.
"그 요정 말이야, 아직 증거는 못 잡았어. 그래도 최대한 빨리 처분해야 돼. 저승에서 보낸 게 분명해. 아즈리온을 좀 설득해 봐. 저번처럼, 그냥 죽이라고 한마디 하고 돌아오는 게 아니라."
지즈벨라의 목소리에, 파울리스는 몇 차례 눈을 깜박였다. 대답이 들려온 건 조금의 시간이 더 흐른 후였다. 기묘하리만큼 차분한 어조였다. 평소의 태도를 생각한다면, 더더욱.
"내버려 둬. 네가 계산한 가능성에는 배신하는 수가 없었잖아. 아즈리온도 그 녀석을 마음에 들어 해. 쓸모도 있지. 함께 다니라고 하면 되는 거야."
"정확한 출신을 몰랐으니까 그런 계산이 나온 거야. 저승 놈들은 아예 마력 흐름에서 벗어나 있다고. 우리 계산이 다 틀렸을 가능성이 커. 화신체도 계속 운명의 흐름에서 벗어나고 있고."
"화신체야 애당초 어떻게 되든 우리가 건드릴 수가 없고―저승 소속이라면 요정들 편은 확실히 아니야. 배신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대신 늑대를 돌려보내라고 하겠지!"
늑대는 저승의 주인이었지만 현계로 직접 올라가지는 못했다. 그러나 힘의 일부를 빌려주는 식으로 우회하는 것은 가능했다. 늑대의 꿈이 천사의 육신과 섞이자 아즈리온이 만들어졌다.
원래는 대전쟁이 끝나자마자, 인간이 요정의 압제에서 벗어나자마자 꿈을 되돌려주기로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그다음부터는 천천히, 규칙들을 해석하면서 적응해 나가면 될 테니까.
그러나 일이 틀어졌다.
"그 인간한테 우리 사정을 털어놓았어. 솔직히 말하지 않으면 다른 마음을 품을 것 같더라고. 의심이 너무 커진 상태였거든."
파울리스는 느닷없이 주제를 돌렸다. 지즈벨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모두 이야기한 건 아니야. 경계심을 풀 정도로만 알려줬지. 솔직할 수는 없으니까……."
아즈리온은 이시 타브를 죽여 놓는 대신 치명상을 가하는 데에서 멈췄고, 저승으로 돌아갈 뜻을 밝혔다. 어차피 요정들은 대륙의 끝까지 밀려났으니 인간들도 번영할 수 있으리라는 게 그의 입장이었다.
생쥐들의 의견은 달랐다. 그들은 아즈리온을 설득하려 노력하다가, 끝내는 누구도 원치 않았을 대안을 찾았다. 꿈 조각을 망가뜨린 것이다. 아즈리온은 천 년 동안, 만신전에 남아 있었다. 본래의 모습을 떠올리지 못하도록, 끝없이 기억이 지워지면서…….
"나는 이 짓이 지겨워. 관둘 때가 왔는지도 몰라."
"그만두면? 꿈 조각을 돌려준 다음에는 인간을 어떻게 지키지?"
"이 인간들은 우리 몫이 아니야. 처음부터 그랬고 지금도."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겠단 말이야?"
지즈벨라가 꾸짖듯 물었다.
결과로만 따진다면, 생쥐들이 옳았다. 요정들은 꾸준히 음모를 꾸몄고 화신을 내려보낼 일은 세 번이나 더 생겼다. 이제는 네 번째였다.
도중에, 아즈리온이 기억을 되찾는다면 그 결과는 끔찍할 터였다. 인간들을 위해서라면 아즈리온을 계속 붙잡아두어야 했다. 파울리스도 그 사실을 알았다. 십만 명을 버리고 도망쳤을 때처럼, 과오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차원 생쥐들이 새 기회를 얻는 일은 흔치 않았다. 애착을 가졌던 세계가 무너지는 모습을 다시 보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최선을 다했고, 위태로우면서도 평화로운 천 년을 지켜낼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들이 하는 일이, 침략자들의 행위와 얼마나 다르단 말인가? 진짜 주인을 몰아내고, 세계의 주인을 참칭하는 게?
심지어 이 상태가 계속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망각을 반복하는 동안 꿈의 힘과 통제력은 차츰 약해졌다. 화신을 제대로 운용할 수 없어서, 다른 세계의 정신을 빌려야 할 정도로. 이번에는 어떻게든 해결이 됐지만 다음에도 가능한 방법일 것 같지는 않았다.
"…한 번 포기했다면 두 번도 포기할 수 있어."
파울리스는 무감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