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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86화 (87/258)

86화 한 번 포기했다면 두 번도 포기할 수 있다 (1)

긴 시간이 흘렀다. 강현은 별채에 마련된 숙소로 돌아가 욕조에 몸을 담갔다. 수증기와 열기로 뒤덮인 3평의 세계는 평안하게 멈춰 있었다. 오늘마저도 어제와 같은 하루라고 말하려는 것처럼. 그는 조금 더 생각을 뻗어나가다가 그만두었고, 침대에 몸을 밀어 넣었다.

*  *  *

눈을 뜨자 어둠의 복판이었다. 앞에 있는 것은 두 명이 마주 앉을 크기의 탁자. 그리고 파울리스. 지하 투기장에서, 허리에 칼을 맞고 쓰러졌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도 이렇게 독대를 했다는 사실까지도.

강현은 파울리스가 만들어 준 시가를 깊이 빨아들였다. 파묻혀 있던 기억이 한순간에 치솟았다.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 연기와 함께 퉁명스러운 질문이 튀어나왔다.

"설마 기억도 지우고 그래요? 아예 잊고 있었는데."

"그럴 리가. 꿈속의 일들은 원래 쉽게 사라지지. 일어나자마자 머릿속에 담으면 계속 남을 거야."

이 말을 믿어도 될지가 의심스러웠다. 경우는 다르지만, 싸울 때마다 아즈리온의 영향력이 강해지면 기억이 날아가지 않았던가. 물론 전투를 잊게 만들 까닭은 잘 모르겠지만…….

"그렇지, 구태여 그럴 이유는 없어. 화신을 빌려 쓰는 페널티치고는 도리어 약한 편이라고 생각하는데."

게슴츠레한 눈으로 쏘아보자 파울리스가 두 문장을 덧붙였다.

"기억을 지울 수 있었더라면 더 많은 걸 건드렸겠지. 잡담 따위나 잊게 만드는 게 아니라. 우리 방식 알잖아."

우리 방식, 이라. 강현은 그 범주 아래 묶이는 행위를 떠올려 보았다. 사찰과 도감청. 뒷조사. 하기야 생각까지 직접 편집할 수 있었더라면 진작 그랬을 것들이었다. 뻔뻔스러울 만큼 솔직해서인지 화도 나지 않았다.

"그건 그렇습니다만."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는 마. 이것도 다 인간들 좋자고 하는 일이니까."

파울리스는 그렇게 말하면서 손가락을 튕겼다. 곧바로 탁자 위에 술병과 잔이 나타났다. 강현은 내키지 않는 태도로 술병을 내려다보다가 한 모금을 따랐다.

바다 냄새와 스파이시한 향이 콧등에서 터지더니 바닐라와 토피넛의 향이 그 뒤를 이었다. 아일라 위스키였다. 여기에서는 다른 이름일지도 모르겠지만.

"정확히 알아맞히는군. 술을 그렇게 마시면서 원래 세계에서는 몸이 멀쩡했던 게 신기해."

"혼자 있을 때는 안 마셨습니다. 담배도 이렇게까지 자주 피우진 않았고요. 그냥 자극이 없으니까 물마시듯 마시는 거지……."

위스키를 맥주처럼 들이키는 건 이곳에 와서야 생긴 습관이었다. 술자리가 없으면 한 잔만 마시고 끝내곤 했다. 사장님 소리를 들을 때부터 그랬고 빌딩 관리인이 된 후에는 아예 술을 끊었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중독자가 될 게 뻔했기 때문이다.

대신 홍차 냉침을 자주 마셨던가. 1.5L짜리 콜라에 싸구려 얼그레이 티백 세 개를 넣고 레몬즙을 조금 더한다. 콜라는 제로콜라인 편이 좋다. 인공감미료 특유의 텅 빈 맛이 오히려 도움이 된다. 홍차 향이 들어갈 여백이 필요하니까.

"공산품에 꽤 정성을 들이는군."

"생각 읽는 건 아는데, 티는 내지 말라고 계속 얘기했지 않습니까."

"기능을 아예 꺼 줄까?"

마음 같아서는 그러고 싶었지만 효용을 생각하면 지금이 나았다. 전투 상황에서 일일이 소리로 뜻을 전달하는 건 낭비다. 탐탁잖긴 해도 덕분에 득을 본 일이 많다.

"그건 안 됩니다. 편하거든요."

"솔직히 말해도 돼. 다른 얘기도 괜찮고. 불만 사항 들으러 온 거거든."

"보수는 확실히 줘야 합니다. 그것만 확실하면 돼요."

"계약서에 쓰인 건 다 지키지. 따로 요구사항은 없어?"

"그쪽 분들한테 도움받을 기대는 반쯤 접었어요. 이대로만 하면 됩니다. 생각은 생각대로 읽으시고, 저는 생각 읽히면서 욕이나 실컷 할 테니까……."

강현은 고개를 숙이고는 짧은 헛웃음을 흘렸다. 이 상황 자체가 거대한 부조리극 같았다. 판교 스타트업만큼이나 삐걱거리는 천계에서부터, 계약서에 냉큼 도장을 찍은 자신까지.

후회하기에는 늦었다. 따지고 들 마음도 없었다. 바꿀 수 없는 문제를 두고 화를 내는 것만큼이나 소모적인 일은 없으니까. 하지만 의아한 점은 있었다.

"하필이면 저를 고른 이유나 알려주시죠. 예전부터 묻고 싶었습니다."

"네가 적임자였으니까. 잘 하고 있잖아?"

"적임자의 기준이 궁금하다는 겁니다."

강현은 굳이 따지면 하드코어 유저에 속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각을 나타내는 수준은 아니었다. 최대한 스스로 하되, 생각하기 귀찮은 지점에서는 공략 커뮤니티의 글들을 따라갔다.

<이스트리아 퀘스트>는 난해하고 복잡한 구성 때문에 욕을 먹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코어층이 탄탄한 게임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오픈월드 스타일의 싱글 RPG라면 수요는 보장된 것이다.

공략 커뮤니티 역시 충분히 활성화되어 있었다. 강현보다도 게임 세계에 익숙한 사람이 한참이나 많다는 뜻이었다.

"자, 우리는 네 결과가 마음에 들어. 그리고 너는 게임이랑은 다르게 행동하고 있잖아, 그렇지?"

"그건 사후적인 판단이죠. 결과가 좋았다 쳐도, 일단 투입시키기 전엔 장담할 수 없는 부분이 아닙니까. 게임에 대해서 좀 더 잘 아는 사람을 데려오는 게 합리적이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게임은 집단지성을 위한 거야. 우리도 모르는 가능성들의 축약본을 만든 다음 핵심적인 지침만을 던져 놓았지. 인간들이 머리를 맞대서 돌파구를 찾아내도록."

서로 다른 세계 사이의 시간 흐름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강현이 받아들이기에는 낯설고 어려운 이야기였다. 그는 이해를 포기하고 심드렁한 투로 촌평했다.

"외주를 줬군요. 플레이어는 본의 아니게 무급 노동을 했고요."

"재미있는 게임이었을 테니 인간들에게도 손해는 아니겠지… 아무튼, 그 일을 맡은 자가 꼭 게임 세계를 잘 알 필요는 없어. 이제 우리한테도 공략본이 있거든."

게임을 얼마나 잘 하든 간에 그 부문에서는 가산점이 없다는 소리였다. 공략은 천사가 직접 머리에 쏘아 주면 되니까.

하지만 그걸 그대로 따를 수 있느냐는 또 다른 문제다. 동물조차 죽여 보지 못한 사람을 데려다 놓고 망치를 쥐여 준 판이다. 따라서 관건은 행동력과 판단력이 된다. 현대인이 배양하지는 못했을 종류의 미덕이다.

"공략본으로, 스스로 해결할 생각은 안 해 보셨습니까? 애꿎은 현대인한테 화신 직함 달아주는 게 아니라요. 교단 사제들한테 그 몸을 줬어도 되는 일 아닙니까."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환경 속에서 만든다고들 해. 주어진,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직면하고 있는 환경에서……."

파울리스는 빙긋 웃더니 익숙한 문장을 인용했다. 강현은 그게 어디에서 나온 말인지 알고 있었다. 여기에서 그 인용구를 듣게 되다니 낯설었다.

"지구에도 관심이 많은가 봅니다."

"인간들이 상상하는 것만큼 위엄 넘치거나 도덕적이거나 전능하진 않아도, 우리는 어쨌든 초월자야. 세계들에 대해서라면 많은 걸 알지."

"그렇군요. 세계들이라고요… 계속 말씀하시죠."

"각각의 세계에는 각각의 대전제가 있어. 결코 변할 수 없는 사실에 대한 완고함이지. 하지만 너는 두 세계에 한 발씩을 걸치고 있고, 그래서 이곳의 규칙을 단순한 규칙으로만 받아들일 수 있어. 되도록 지키는 게 좋지만 필요하다면 침범하거나 의심할 수 있는 것으로."

파울리스가 말하는 것은 화신으로서의 능력만이 아니었다. 이스트리아는 강현이 속했던 환경이 아니었고, 그래서 당연한 것들에 대해 반기를 들거나 충분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은원과 편견에도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걸 제일 잘 해낼 수 있는 사람이 너였던 거지. 그럴 이유까지도 충분하고."

"선정 기준이 궁금한데요."

"궁지에 몰린 사람들을 우선순위로 삼았지. 하지만 삶을 완전히 놓아버렸으면, 제외했어. 한 번 포기했다면 두 번도 포기할 수 있으니까. 정신력이 충분히 강하고 철두철미한 인재가 필요했지."

화두를 멍하니 곱씹다가 한 잔을 더 들이켰다. 삶을 손에 쥐고 있었던가? 1평 남짓한 경비실에서, 온종일 태블릿을 두드리며 게임에 매진하던 시절에? 지금은?

"너는 아직도 지구인이야. 란드와르와 이강현을 철저히 분리해서 생각하고 있잖아."

"서른네 해를 지구에서 살았습니다. 여기에서는 고작 다섯 달이 지났죠. 평생을 잊을 정도는 안 돼요."

"인생을 포기한 사람의 태도는 아니지."

"타성이죠. 물고기를 뭍에 던져 놓는다고 해서 곧바로 폐로 호흡할 수는 없으니까."

파울리스는 짧게 웃더니 넌지시 옛일을 꺼냈다.

"떠올려 봐, 사업에 실패했고 파산 절차를 밟았지. 그 직후에 교통사고가 났어."

강현은 잔을 탁자에 소리 내어 내려놓았다. 교통사고는 의도적으로 생각을 피하는 주제 중 하나였다. 그 시기를 떠올리기만 하면 머릿속이 암전된 것처럼 깜깜해졌다.

"됐습니다. 관두죠."

"실례했군."

강현은 술을 조금씩 흘려 넣으면서 생각을 가다듬었다. 옛이야기 속에서 허우적대기보다는 도움이 될 쪽으로 주제를 돌려야겠다는 계산이 섰다. 어차피 묻고 싶은 것도 많았다.

"다른 이야기나 해 봅시다."

"얼마든지."

"아즈리온에 대한 겁니다."

강현이 지금까지 파악한 사실은 대강 이랬다.

일단 아즈리온은 이스트리아 만신전의 핵심이지만 어딘가 망가져 있다. 천계가 무능한 것도, 갖가지 일에서 잡음이 터져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요정 신들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이방인의 존재까지도 인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아즈리온에게는 묘한 악감정마저 지닌 것처럼 보인다. 자신을 죽인 자가 아니라, 한때 알고 지냈던 자로서.

관련이 없어 보이는 사실 두 개를 끌어와 보자.

별점술에 사용되는 별은 18개다. 이 중에서 14개의 주성은 신의 의지를 상징하고 나머지 4개는 세계의 운명이라고들 한다. 요정의 신은 여섯. 인간의 신은 아홉. 14개의 별에 담기기에는 한 자리가 부족하다.

한편 요정 신들은 본상과 필멸자로서의 자아가 분리되어 있다. 이시 첼이 뼈 장신구를 갖춘 여자인 동시에 핏빛 뱀인 것처럼. 늑대인간의 전설대로, 아즈리온의 본상이 머리 아홉 개 달린 늑대라면, 비약에 가까운 추론을 던질 수 있다.

그는 요정 도시와 각각의 신 사이에 선을 그어 보았다. 야스와다의 이시 타브. 타마기스의 윰 시밀. 바단의 이시 첼. 와그다스의 슈문. 나우파나의 아 드지즈.

그리고 가디스의 신은…….

"대강 비슷해. 대전쟁을 일으키기 전에, 아즈리온이 우리를 불렀어. 인간들을 돌보아 달라더군. 그때 힘을 조금씩 나눠 받았지. 관리자 권한만 겨우 빌려 쓸 뿐이지 세계 자체를 뜯어고칠 능력은 없는 셈이야."

파울리스는 강현에게 대전쟁 시기의 신화를 상기시켰다: 요정이 제국을 이루던 시절에 인간은 노예에 불과했다. 그 인간들의 기도가 하늘에 닿아 아홉 신이 내려왔다. 대전쟁이 일어났고 제국은 무너졌다.

"마지막에 사고가 났어. 그 결과가 이거야. 최선을 다하고는 있지만 모든 게 삐걱거리지. 점점 더 나빠지고 있어……."

계약서나 신앙심 같은 시스템은 이곳의 방식이 아니라는 게 파울리스의 설명이었다. 이 세계의 작동 원리를 자신들이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고쳤을 뿐이라는 것이다. 덕분에 완벽하지도 못한데다가 삐걱거리는 곳이 많다고…….

강현은 지금 들은 이야기를 머릿속에서 정리해 보았다. 아즈리온에 대한 것은, 그리고 천계의 속사정까지는 어느 정도 해명이 됐지만 새로운 질문이 꼬리를 물었다.

"그러면, 그쪽 분들은, 원래는 어디에서 온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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