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85화 (86/258)

85화 종막

밤하늘은 이면 세계의 요동을 반영하지만 모든 것을 들여다보지는 못한다. 약한 마력 갈래들은 쉽게 무시되기 때문이다. 밤하늘을 통해 읽을 수 있는 것은 세상의 거대한 일들뿐이다.

대신 한 사람의 앞날을 점치는 데에는 명반이라는 도구가 쓰인다. 금속판에 주문을 각인해서, 별의 흐름을 모사한 것이다. 여기에서 사용되는 것은 밤하늘의 실성(實星)과 유사한 허성(虛星)이다.

허성계는 한 사람만을 위한 하늘이다.

영혼은 저마다, 마력에 반응하는 방식이 다르다. 혈마력은 능히 다루지만 금색 마력과는 전혀 연이 없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이러한 감응력의 차이가 허성계의 흐름을 만들어낸다.

따라서 타인에게 마력 적성을 밝히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일이다. 적대 가문에서 별점술을 통해 행적을 파악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요정들은 자신의 적성을 최대한 숨기며, 오로지 가주에게만 가문 성원의 세부를 알 권한이 있다.

*  *  *

가주가 직접 명반을 다루는 일은 흔치 않다. 대개는 적성만을 읊은 후 별점술사를 불러와 나타난 형상의 해석을 맡길 뿐이다. 그러나 딤 나겔은 언제나, 스스로 그 일을 했다.

차가운 금속판에 손을 얹자 새파란 마력이 각인의 홈을 따라 스며들었다. 그는 천천히 주문을 외워 울쿠스의 적성을 명반에 알려주었다. 그러자 빛이 점과 선으로 변하며 허공으로 치솟았다.

"경진이 천이궁이 되어 녹존은 홍란과 천희를 비추고……."

분명한 파멸 앞에서 눈을 돌릴 사람은 많지 않다. 그 끝에 있는 게 무엇인지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계속 운명의 흐름을 좇는 것이다.

딤 나겔은 한동안, 명반 앞에 멈춰 있었다. 갖가지 질문이 심장 둘레를 휘돌았다. 그때 울쿠스를 보내지 않았더라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허튼 소리라 꾸짖고 중재자로서의 일을 계속 가르쳤다면…….

그러나 울쿠스가 엮인 것은 사람의 일이 아니었다. 시간을 되돌린다고 해서 다른 결과가 나왔으리라고 장담하기는 어려웠다. 신들이 어떤 뜻을 품고 젊은 요정을 둘러싸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생각에 잠겨 있던 딤 나겔은 종이 울리는 것을 듣고는 흠칫 놀랐다. 손님의 방문을 알리는 소리였다. 1층의 응접실로 내려가자 명문가의 일원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허리까지 닿는 은발은 하나로 땋았고, 검은 드레스에는 광택이 없었다.

"어둠달의 엘드리그가 피송곳니의 가주께 예를 취합니다."

엘드리그는 테네브로즈의 큰누님이었지만 대외적인 활동에 나서지는 않았다. 자신이 죽었다는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 때때로 가문의 연회에 모습을 내밀 뿐이었다. 마주 인사한 딤 나겔은 그런 이가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가늠해 보았다.

"본가 바깥으로는 거의 나서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네만, 가문 내에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군."

"어둠달의 일은 아닙니다. 제가 모시는 분께서 당신을 뵙고 싶어할 뿐이지요."

그녀가 다른 가문의 명령을 받아 움직이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었다. 귀족들은 대개 가문에 충성을 바쳤지만 가끔은 사사로운 이유로 배신을 택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달갑지 못했다.

"나에게는 중립을 지킬 의무가 있어. 자네가 어떤 가문의 이름을 받들든, 모두의 앞에서 할 수 없는 말이라면 내 앞에서도 하지 않는 게 좋을 걸세."

"별점술사들은 스스로의 앞날을 볼 수 없다는 말이 있지요. 어르신께서는 손자의 일을 신경 쓰느라 자신의 운명은 묻지 않으신 모양이군요."

딤 나겔은 미간을 좁혔다. 지금까지 그와 어둠달 사이의 관계는 원만한 편이었다. 비록 테네브로즈가 나트람의 수하가 되긴 했지만 그는 가문에서 내쳐진 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엘드리그의 태도는 낯설고 당혹스러웠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인을 부를 때 쓰는 종은 벽난로 위에 얹혀 있었다.

"돌아가게나. 이 일은 나중에, 정식으로 가문을 통해 묻도록 하지."

"밖을 잠시 보시지요. 별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엘드리그의 눈은 기묘한 평온함 속에서 번뜩이고 있었다. 딤 나겔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창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울쿠스에 대한 생각을 떼어놓지 못한 탓이었다.

손자의 운명에 간섭하는 것은 신들의 의지였다. 젊은 요정 한 명의 개인사 때문에 그럴 리는 없다. 더 큰 뜻이, 세계를 뒤흔들 일이 있을 터였다. 그렇다면 언젠가는 그 결과가 나타나게 된다.

암막이 창을 가리고 있었다. 줄을 당기자 두터운 천이 말려 올라가며 그 너머의 유리창을 드러냈다. 밤하늘을 채운 것은 짙은 어둠. 그리고 낯설도록 크고 강렬한, 붉은 별이…….

<네 피붙이가 이룬 일이다. 자랑스러움을 느껴도 좋아.>

순간 낯선 생각이 뇌리를 파고들었다. 딤 나겔은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개의 해골을 머리로 삼은 남자가, 엘드리그의 뒤편에서 형체를 갖추고 있었다.

*  *  *

볼로디아한테 먼저 심장을 먹이고 밖으로 나왔다. 그걸 바깥에서 들고 다닐 수는 없으니까. 곧바로 혼수상태에 빠지지는 않았지만 휘청거리는 게 조만간 쓰러질 모양새였다. 결국 란드와르가 볼로디아를 부축하고 테네브로즈가 울쿠스의 주검을 업은 꼴이 됐다.

능묘 바깥으로 나서자마자 대장군들이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왔다. 그 옆에는 캐러웨이 부인과 극단 사람 몇이 조금 떨어져서 서 있었다. 다들 밤하늘을 놀란 듯 쳐다보는 중이었다.

시선이 모이는 곳에 위치한 것은 암적색의 빛 덩어리.

바단의 별이었다.

게임에서 모을 수 있는 정수는, 즉 심장은 총 세 개다. 이시 첼의 피투성이 심장. 아 드지즈의 수정 심장. 윰 시밀의 썩어 문드러진 심장. 각각의 심장이 새 주인을 맞을 때마다 거기에 대응되는 별은 크기를 키운다.

플레이어에게 도움이 되는 요소는 아니다. 별이 커지는 동안에는 마력의 흐름이 불안정해지니까. 괴수들은 날뛰고 몇몇 마법의 효과가 증폭된다. 게다가 요정들도 그걸 본다.

"2교구에 사람들이 모이겠는데요. 일이 귀찮아지겠습니다."

"아직 별 거 아니야."

인간측 신들이 운명의 흐름을 되짚고 신도들을 사찰하는 것처럼, 요정에게도 맵핵이 있다. 성능은 비교적 낮지만 무시할 수 없는 맵핵이다. 별점술을 통해 플레이어의 움직임을 추적하는 것이다.

게임에서, 정체가 들키기 이전부터 요정들이 플레이어를 뒤쫓는 것 또한 이 덕분이었다. 누가 아즈리온의 화신인지는 모를지라도 화신이 어디로 향하는지는 별을 보면 알 수 있으니까.

2교구 분석실이 활동을 시작하는 것은 첫 번째 별이 뜬 직후. 핵심 시나리오를 두세 개쯤 완료하자마자 화신의 강림을 공표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어차피 그쯤 되면 요정들도 모두 알고 있으니까, 당당히 밝히고 신앙심을 긁어모으는 게 이득이다.

어쨌거나 그건 미래의 일이었다. 지금은 지금의 과제에 집중해야 했다.

"별채 창가에 묻어 달라고 했지?"

"예, 스카르파가 바라보던 창문 너머에요."

혼수상태에 들어간 볼로디아를 왕실로 옮기고, 대장군들에게 자세한 사정을 설명하고, 울쿠스의 무덤을 만들어 줘야 했다. 그밖에도 귀찮고 사소한 잡일들이 몇몇 있겠지.

벌써부터 침대가 그리웠다.

*  *  *

손과 얼굴을 대강 씻고, 볼로디아까지 별채로 옮긴 후, 대장군들과 함께 접견실에 앉았다. 란드와르는 마음 깊은 곳에서 치미는 귀찮음을 느꼈다. 능묘에서 머리도 깨지고 배까지 쑤셔진 판에 무슨 소리를 또 해야 한단 말인가?

결국 티아를 불러내 설명을 맡겼다. 볼로디아의 상태. 스카르파와 울쿠스. 그간 일어났던 일. 란드와르가 볼로디아를 발견해 데려온 경위. 기타 등등.

물론 란드와르가 화신이라는 사실은 밝히지 않았다. 지금으로서는 딱히 득이 없을 일이었다. 어차피 티아가 있으니만큼, 성흔이 찍힌 사제라는 것만으로도 신뢰를 얻기엔 충분했다.

그 다음에는 울쿠스의 무덤을 만들러 갔다. 군부 대원들과 극단 사람들이 별채 곁에 모여 있었다. 캐러웨이 부인에게 애도의 뜻을 전해야겠다는 생각은 들었는데 말을 꺼낼 분위기가 아니었다.

침묵 속에서 무덤을 파고, 관에 죽은 요정을 담은 뒤, 구덩이에 넣고, 흙을 다시 덮었다. 그게 다였다.

*  *  *

모두가 떠난 뒤, 강현은 테네브로즈와 함께 서서 무덤을 내려다보았다. 봉분을 올리는 대신 지면을 평탄하게 처리하고 그 위에 임시 묘비를 박은 형태였다. 잔디를 도려냈다가 다시 덮은 탓에 경계면이 구분되어 보였다.

울쿠스의 죽음이 현실로 성큼 다가왔다. 란드와르가 아닌 이강현에게는 보호장이 폭발하고 천장에서 혈기 구체가 떨어지는 장면보다도 그늘에 잠긴 무덤이 생의 끝에 더욱 가깝게 느껴졌다.

"죽었구나."

"죽었지요."

모두의 목숨은 똑같은 무게를 지닌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세계에 대한 이야기였다. 인간 한 명의 마음이란 줏대 없이 간사한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이번의 죽음은 일전에 겪은 것들보다도 더 선명하고 무거웠다. 삶 이후의 일을 생각해 볼 정도로.

강현은 많은 한국인이 그런 것처럼 약간은 불교도였고, 약간은 기독교인이었고, 약간은 불가지론자였다. 극락정토나 천국이 있을 가능성을 0으로 두진 않을지라도 눈앞에 나타나기 전까지는 영영 몰라도 될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 입장은 여전했다.

하지만 여기에서라면 신도 영혼도 두 눈으로 볼 수 있었다. 그는 흙바닥을 응시했고 그 밑의 요정을 떠올렸다. 녀석의 영혼이 이 순간을 느낄지가 의문이었다.

"얘랑 약속했던 거 있잖아. 부모 죽인 게 누구인지 말해주겠다는 거. 말해 줬냐."

"지킬 약속이 아니라면 하지도 않지요."

"그것만 알려주고 바로 끝냈어? 다른 이야기는 안 했고?"

"예."

"지금은 말 걸 수 있는 거냐. 묻은 지 얼마 안 지났으니까 영혼도 남아 있을 텐데."

테네브로즈는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제국의 신화에 따르면, 땅에 파묻힌 영혼은 저승으로 간다고 합니다. 대부분은 기억을 모두 잃은 채 다시 올라오지만, 가끔은 그곳의 주민으로 남기도 하지요… 저승의 청지기는 대업을 이룬 혼들을 아낍니다. 직접 마중을 나올 정도로요."

"그래서, 울쿠스도 그렇게 됐다는 소리냐."

이번의 대답 앞에는 짧은 침묵이 있었다.

"그런 것 같습니다. 혼이 남아 있지 않군요."

"저승은 여기랑은 뭐가 다르냐."

"그곳에는 슬픔과 미움이 없다고 합니다. 무언가를 두고 다툴 필요도, 먹고 입을 필요도, 원하는 것마저도 없으니까요. 그러니 기쁨과 행복도 없지요. 모든 것은 그저 당연한 일일 뿐입니다… 좋은 곳은 아닙니다."

불구덩이에서 고통을 받기보다는 나아 보였지만, 테네브로즈의 말대로 좋은 곳일 것 같지도 않았다. 감정이 풍부한 열여섯에게는 비슷한 지옥일지도 모른다. 강현은 잠시 생각하다가 한 문장을 던졌다.

"얘는 거기 가면 적응이 안 되겠는데."

"적응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된다고."

"마음이 절반쯤 사라지지요. 복잡하지 않은 마음까지도요."

강현은 저승에 있는 울쿠스를 불러내 이렇게 묻는 순간을 상상했다. 만족하냐, 고. 하지만 그때의 울쿠스는 2막이 끝난 직후의 울쿠스가 아닐 것이며 돌아오는 답 역시 그의 몫이 아닐 터였다.

결실조차 보지 못하고 흑암에 묻히는 것과 성취를 보면서도 아무런 감흥이 없는 것 사이에서, 무엇이 더 안타까운 일인지는 분간하기 어려웠다.

죽음을 앞둔 사람과 나누는 이야기는 얼마나 길든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처 꺼내지 못한 말들이 아쉬웠다. 지금의 결과가 결코 나쁘지 않다는 걸 아는데도, 악당에게는 과분한 처우임을 아는데도 그랬다.

란드와르는 묘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별채로 향했다. 볼로디아가 깨어날 때까지, 그곳의 방 중 하나를 임시 숙소로 삼기로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짐 역시 모두 옮겨진 상태였다.

테네브로즈는 숙소에 남겨두고서, 꾸러미에서 위스키를 찾아내 다시 밖으로 나왔다. 오는 도중에 군부 대원을 맞닥뜨렸지만 별일은 없었다. 무덤 곁에 앉아 병뚜껑을 비틀어 땄다. 사과와 배의 향기가 둔한 추위 사이에서 한 점으로 모였다.

늦은 새벽. 밤하늘에 붙박인 것은 암적색의 마력 덩어리.

<기나긴 이별>에서, 주인공인 필립 말로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죽은 줄 알았던 술친구와 재회한다. 시간은 금요일 오전 열 시. 김릿(*Gimlet, 진 베이스의 라임 주스 칵테일)을 마시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말은 여기에서 왔다.

그 말대로, 오전 열 시는 김릿에게는 이른 시간일지도 모른다. 새벽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위스키는 언제 마시더라도 늦거나 이르지 않다.

강현은 한 모금을 넘기고서는 묘지에도 조금 뿌렸다. 와인 세 잔에 취하는 녀석이니까 위스키는 한 잔으로도 충분할 텐데 들려오는 소리가 없었다. 술을 마시면 말이 그렇게나 많아졌는데도.

입 다문 땅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병을 수직으로 기울였다. 액체로 된 태양이 무덤에 닿더니 그 밑의 암흑과 섞여들었다. 병이 텅 비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러자 완벽한 침묵이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