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선조의 능묘 (7)
사방에서 치솟는 핏줄기를 바라보며, 볼로디아는 란드와르가 했던 말 하나만을 부여잡고 있었다. 이제 고작 삼 분쯤이 남았을 뿐이라고. 그러고서는 스카르파와 이야기할 시간이 잠깐은 있을 거라고…….
[이것으로… 끝은… 아니다…….]
이윽고 스카르파의 몸이 무너지면서 혈마력도 서서히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볼로디아는 마력이 완전히 걷히기도 전부터 구조물의 계단을 밟아 올라가고 있었다. 란드와르가 몇 걸음의 간격을 두고 그 뒤를 따랐다.
스카르파는 한때 피웅덩이를 담았던 구덩이에 쓰러져 있었다. 볼로디아는 그 안으로 뛰어들어간 다음 인간 형상으로 되돌아왔고, 동생을 자신의 무릎에 뉘였다. 미약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스카르파의 입이 달싹이더니 가느다란 목소리를 불어 내쉬었다.
"울쿠…스는?"
"죽었다. 모두 끝났어."
잠깐의 침묵이 있었다. 이윽고 그녀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가면서 시선이 볼로디아에게로 향했다.
"언니, 언니가 강한 사람이라 다행이야. 나는 모든 걸 망쳐 놓기만 했는데."
"너는 이런 세상을 여섯 해동안 견디지 않았느냐."
"결국 나를 구한 건 언니인걸."
질문이 휘몰아쳤다. 지금이라도 치유사에게 데려가면 살려낼 수 있지 않을까? 핏빛 뱀은 자신의 영토로 도망쳤고 스카르파는 제정신을 차렸다. 그렇다면, 굳이 심장을 취할 필요가 있을까?
수천 겹의 물음표 속에서 볼로디아는 단어를 잃어버렸다. 스카르파의 울림만이 꺼져가는 숨처럼 단속적으로 들려올 뿐이었다.
"불공평하다고 생각했어. 항상 나를 달래는 건 언니였다는 게. 나한테 언니는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둘 중 하나였는데 언니한테 나는 불쌍한 사람들 중 하나일 뿐이었다는 게. 나한테 언니가 중요한 만큼이나 나도 언니한테 중요한 사람이 되고 싶었어."
그러고는 말이 멎었다. 볼로디아는 여전히 굳어 있다가, 동생의 몸이 붉은 액체가 되어 흐르기 시작하는 것을 깨닫고 다급히 입을 열었다.
"아니다. 너는 내게……."
그러나 뜻을 전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볼로디아는 피의 복판에서 뜯겨 나간 살덩어리를 발견했고, 그것을 두 손바닥에 쥐었다. 그녀는 허망하게 중얼거렸다.
"네 무덤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고민했는데, 내가 바로 묘지가 되겠구나."
우는 법을 떠올리려 애썼지만 잘 되지 않았다. 눈물을 마지막으로 흘린 지 오래되었다.
* * *
테네브로즈는 구조물의 곁을 돌아 울쿠스를 발견했다. 주검은 기묘할 정도로 깨끗했고 얼굴에는 미소마저 떠올라 있었다. 아까 전까지의 소란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 앞에 무릎 꿇고 앉은 테네브로즈는 위를 힐끔 올려다보았다. 란드와르와 볼로디아의 등이 얼핏 보였다.
"우리도 망자에게 예우를 갖춰야겠군요. 딤 나겔의 핏줄에게 남기실 말씀은 있으십니까?"
"가끔은 무관심이야말로 예의가 되는 법이지. 장례나 잘 치러 주거라."
헤이딘은 그렇게 대답하고서는 반지 속으로 사라졌다.
테네브로즈는 정신을 집중하고 울쿠스의 가슴팍에 손을 얹었다. 영혼은 아직 육신에 남아 일렁였지만 그것을 담을 그릇은 깨져 있었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르면 공기 중으로 퍼져 나가고 말 것이다.
무덤을 만드는 관습은 여기에서 왔다. 땅에 파묻어야만 저승으로 혼이, 온전히 옮겨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제국이 무너지고도 천 년이 흐른 지금, 정확한 이유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테네브로즈는 그 몇 안 되는 이들 중 하나였다.
<약속을 지킬 때가 왔군. 그대는 저승의 방식으로 말하는 법을 배우지 않았을 거야. 그러니 나 혼자만 떠들도록 하지.>
그는 울쿠스의 영혼에 생각을 밀어 넣었고, 천천히 요정 도시들의 이름을 나열했다.
<타마기스… 바단… 야스와다… 와그다스… 나우파나… 가디스.>
각각의 순서는 요정 순례자들의 여행길과 일치했다. 앞선 도시들의 차례는 간혹 바뀌었으나 종착지는 언제나 가디스였다.
<요정 제국은 여섯 개의 도시를 거느렸지만 실제로 기록에 남아 있는 것은 다섯뿐이야. 가디스는, 첫 번째 도시는 이 땅에 존재한 적이 없거든. 그건 저승의 일부야. 현계와도, 신들의 영토와도 다른 곳이지.
솔로틀이라는 신이 그곳을 돌보지. 신이라기보다는 청지기에 가깝겠군. 저승의 주인은 따로 있으니까… 그분께서 꿈을 꾸는 동안, 솔로틀은 영혼을 깨끗이 닦아 다시 올려보내는 일을 맡아.
하지만 어떤 영혼들은 지상으로 돌아가는 대신 가디스의 주민이 될 수 있어. 저승에 영원히 머무르면서, 멈춘 듯한 삶을 살아가는 거야.
새로운 주민을 찾아내기 위해 솔로틀은 정원사를 거느리지. 그들은 세상을 떠돌며 망자의 혼을 거둬. 가치 있는 영혼이 땅에 스며들어서, 다른 것들과 섞이지 않도록 말이야.
제국은 이런 정원사들을 좋아하지 않았어. 특히 야스와다에서는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의 금기였고.
생각해 봐, 야스와다의 신은 영혼으로 불장난하기를 즐겨. 솔로틀은 반대로, 그걸 씻어내는 게 일이야. 서로 사이가 좋을 리가 없지.>
야스와다에서나 인간들의 세상에서나, 테네브로즈는 이런 이야기를 입 밖에 낸 적이 없었다. 그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이방인들이 어떤 부류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저승에서 보낸 전령임이 분명해지면 즉시 죽이려 들 것이다.
그러나 생각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그대가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야. 누님들을 사랑하던 요정 청년이 하나 있었어. 두 분 중 하나가 목숨을 거둔 날, 솔로틀이 청년을 찾아왔지. 정원사 직분을 맡을 이가 필요하다고.
청년은 기꺼이 받아들였고, 그 삯으로 누님의 영혼을 땅에 남겨 달라 청했어. 솔로틀은 살아 계신 분의 몸에 죽은 분의 혼을 옮겨 주었지. 두 명이 번갈아 몸을 쓸 수 있도록.>
무슨 심정으로 제안을 받아들였는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의 테네브로즈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었다.
― 네게서 복잡한 마음을 덜어내려 한다. 대신 그 자리에 충성과 수긍을, 그리고 끝없는 평안을 넣어 주마. 정원사로서의 일에 도움이 될 게다.
고뇌와 비애는, 연민은, 그리고 격정은 흔적으로만 존재했다. 사소하긴 해도 무시할 수 없는 흔적이었다. 잘려나간 팔에 환상통을 느끼는 것처럼, 때때로 있을 리 없는 감정이 몰려왔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 아니라면 테네브로즈는 행복했다. 슬픔과 고민을 알지 못하므로. 정원사들은 복잡한 마음을 가질 수 없었으며 테네브로즈도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나트람과 나는 뜻이 맞았어. 그 늙은이에게는 사냥개가 필요했고, 나는 정원사로서의 소임을 다해야 했거든. 가디스에 거주자를 더하려면 직접 목숨을 거두어야 했지. 혹은 가장 먼저 주검을 발견하거나. 장례식에서 혼을 빼앗을 수는 없으니까.
물론 내가 그대의 부모를 죽였다는 이야기는 아니야. 최소한 절반은 아니지. 나트람에게서 명령을 받은 건 그대의 아버지거든. 황무지로 가는 임무에서, 반려를 죽이고 돌아오기로 했다더군.
슈문의 유적 근처에서 흔적을 잡았어…….>
테네브로즈는 거기까지 말하고서는 울쿠스를 저승으로 떠나보냈다. 다음 이야기는 저승에서, 어머니에게 듣게 될 것이었다.
반려라고 생각했던 이가 그녀를 배신했다는 것. 그녀가 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테네브로즈가 나타나 남편을 죽여 놓았다는 것. 그리고 그녀만을 가디스로 보냈다는 것. 남자의 주검은 흙바닥에 내버린 채로.
물론 울쿠스의 어머니를 살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정원사의 일이 아니었고, 테네브로즈는 남자의 주문이 무방비한 동반자에게로 향하는 장면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진실을 모두 알게 되었을 때, 울쿠스는 어떻게 반응할까? 살릴 기회를 내버렸다는 데에 원한을 품을까, 아니면 수긍할까?
둘 중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이제 그는 저승의 주민이었고 저승의 생각을 얻을 것이었다. 해가 뜨고 지는 데에 옳고 그름을 따질 이유가 없는 것처럼, 죽음에도 감상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니 울쿠스는 자신보다 더욱 많은 마음을 잃을 터였다. 테네브로즈는 슬픔을 느끼진 못했지만 그것이 슬픈 일이라는 사실은 기억하고 있었다.
* * *
늑대는 짙은 어둠 속에 웅크려 있었다. 털빛은 완전히 검었지만 어떤 각도에서 보기에는 희었고, 조금은 붉은 기운이 도는 것도 같았다. 거대한 몸에 붙은 아홉 개 머리는 잠든 채였다. 다물린 입 사이로 낮게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끝없이 새어나왔다.
늑대는 첫 번째 생명이 나타나기도 전부터 저승을 거닐었다. 인간과 늑대인간들을 빚은 것도, 별을 요정들에게 선물한 것도 그였다. 하지만 요정 신들이 만들어낸 세상은 늑대의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래서 그는 이방인을 불러들였다. 그들이 대신 지상을 다스리도록.
부름에 응한 일곱 이방인은 늑대의 꿈을 빌리길 청했다. 그들 스스로는 별을 다스릴 능력도, 요정들에게 맞서 이길 힘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름 없는 분이시여. 어떤 악몽을 꾸고 계시나이까?"
늑대의 허리에 기대어 앉은 남자가 나지막이 질문했다. 그의 목 위에는 요정이나 인간의 머리가 아니라 개의 두개골이 얹혀 있었다. 뼈에는 살점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고 텅 빈 눈구멍에는 선명한 녹색 불꽃이 이글거렸다.
남자의 이름은 솔로틀이었고, 까마득한 세월에 걸쳐 늑대를 곁에서 도왔다. 요정 제국도 황제도 없었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줄곧.
"…그 이방인들이 당신을 괴롭히는지요?"
이방인들의 만신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몰랐지만, 계약이 어그러졌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전쟁이 끝났는데도 늑대는 고통스러운 잠에 갇혀 있었다. 깨어날 기미도 없이.
주인을 구해 와야겠다고 생각했으나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솔로틀은 저승의 일원이었고 현계에 직접 간섭할 방법은 없었기 때문이다. 몇 안 되는 정원사들을 거느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따라서 기회를 잡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운도 따랐을 것이다. 야스와다 3교구에서는 소생 계획이 막바지에 접어들었고 정원사는 부제사장 직분을 얻은 상태였다.
그리고 늑대의 파편이, 아즈리온이 그곳에 나타났다.
하지만 해결된 것은 아직 없었다. 아즈리온의 몸을 빌려 쓰는 건 무언가 다른 존재였고 만신전의 이방인들이 정원사에게 우호적으로 나올 것 같지도 않았다. 정체를 숨기면서 동행하는 게 최선이었다.
솔로틀은 힘없이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당신께서 깨어나시면, 가장 먼저 이렇게 말씀드릴 겁니다. 꿈속의 일에는 관심을 두지 마시라고요. 요정이 인간을 노예로 삼든, 인간이 요정을 죽이든 그건 우리의 일이 아니란 말입니다. 어차피 모두가, 당신을 버리고 떠난 족속들이 아닙니까……."
그러나 푸념은 길지 않았다. 정원사가 저승에 한 명의 목숨을 더했던 것이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고, 새로운 주민을 맞아들이기 위해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