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선조의 능묘 (5)
지하층으로 향하는 통로는 백 걸음쯤의 길이였다. 천장에 새겨진 각인이 황금빛을 뿌리며 조명등 역할을 대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각인이 정화된 것과는 별개로 이시 첼의 흔적은 사방에 남은 채였다.
볼로디아는 엉겨 붙는 뱀들을 물어뜯고 떨쳐내느라 바빴다. 란드와르 역시 반대편에서 뱀을 처리하고 있었다. 망치를 한껏 들어 올렸다가 내려찍자 스파이크가 뱀들의 몸을 터뜨리며 핏빛으로 물들었다.
이제는 바닥이 돌로 이루어져 있는지 뱀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분간조차 가지 않았다. 지하층 통로가 이 지랄이라는 건 알고 있었는데, 역시나 눈앞에 두니 기분이 좋지 못했다. 꿀렁대는 살점을 밟아 나가는 느낌이 달가울 리가 없다.
란드와르는 잠시, 고깃덩어리의 섬 위에 멈추어 한 손으로 망치를 쥐었다. 뱀 한 마리가 갑주를 타오르고 있었다. 떼어내서 멀리 던진 다음 짜증스레 외쳤다.
"멀었냐? 더 죽여야 돼?"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란드와르는 고개 너머로 테네브로즈의 모습을 힐끔 보고는 수긍했다. 통로 한복판에 서서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반지에서 연신 뻗어 나오는 마력 줄기가 접근하는 뱀들을 밀쳐내는 중이었다.
야스와다 마법에서, 주문을 강화하기 위해 사용되는 제물은 여러 종류였다. 영혼은 가장 범용성 높고 효과적인 제물이었지만 여의치 않을 때에는 피나 심장으로 대신할 수 있었다. 피에는 영혼이 깃들어 있다. 조금이나마.
달리 말하면, 통로에 나타나는 뱀들도 잘 다져 놓기만 하면 제물로 바치는 게 가능했다. 영혼이 없는 피조물이긴 해도 결국엔 이시 첼의 일부니까. 관건은 제물의 양이었다. 통로에 들끓는 뱀을 일시에 무력화시키기 위해서는 상당량을 으깨 놓는 게 우선.
"마음을 누르고 걸음을 늦추나 혼은 높이 달려서……."
이윽고 나지막한 노래가 들려오더니 테네브로즈를 중심으로 보라색 빛줄기가 거미줄처럼 뻗어 나갔다.
마력 갈래는 빠르게, 통로 전체로 범위를 넓히며 뱀들에게로 스며들었다. 주문은 살과 뼈를 가르는 대신 더욱 근본적인 것을 앗아가는 듯했다. 미끈한 비늘에는 아무런 상처가 없었지만 맹렬하게 번뜩이던 눈은 빛을 잃고 있었다.
노래가 끝나고 마력 줄기가 거두어졌을 때, 통로를 뒤덮은 것은 완벽한 고요였다. 아까 전까지는 암적색의 파도가 모든 곳에서 넘실대는 것처럼 보였는데도.
볼로디아가 감탄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엄청난 효과로군."
"신의 피를 제물로 바쳤으니까요."
영혼의 격을 결정하는 것은 개체의 강함이 아니라 근원적인 질료였다. 제물로 바칠 용도로는 갓 태어난 요정이 늑대인간 대장군보다 더 효과적이라는 뜻이었다.
따라서 통로의 뱀 떼가 위협적인 상대는 아닐지라도, 신의 파편인 이상 제물로서의 성능은 지극히 뛰어날 수밖에 없다. 나머지 절반을 단번에 제압한 이유였다.
"나으리, 우리 영감이 이 짓을 언제까지 해야 하냐고 불평불만이 많으십니다. 한 말씀 해 주시죠."
테네브로즈가 죽은 뱀들을 밟으며 가까이 다가왔다. 란드와르는 헤이딘이 어디쯤에 떠올라 있을지 가늠하다가 그냥 말했다.
"잘만 하시는데 뭐가 문제냐고 그래라."
헤이딘의 성능은 기대 이상이었다. 처음에는 재정렬만 잘 걸어 달라면서 데려왔는데, 의외로 맡은 일은 모두 해내고 있었던 것이다.
영혼 상태의 이점이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동은 테네브로즈에게 맡기고 마음 편히 주문만 시전할 수 있으니까. 게임으로 따지면 3인칭 쿼터뷰 시점으로 스킬만 누르는 셈이었다.
사실 요새는 똑같은 물건을 하나 더 만드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마저 들고 있었다. 누구에게든 반지를 끼우기만 하면 두 명 같은 한 명이 되니까.
"그나저나 똑같은 거 하나 더 만들 수는 없냐고 여쭤봐라. 마법사야 어디서든 구해서 집어넣는다고 치고."
물론 벨레다가 용 비늘 부적을 만들고 있긴 했지만, 기능이 부족했다. 제물에 쓸 영혼을 저장할 뿐이지 의식까지는 보존하지 못했던 것이다.
테네브로즈는 잠시 허공을 바라보다가 란드와르에게로 시선을 되돌렸다.
"안 된다는데요. 정신까지 멀쩡히 남기려면 슈문의 영토를 빌려야 한다고 합니다."
"와그다스 애 넣으면 된다는 거잖아."
"당사자 의견부터 청취하고 오시랍니다. 당사자가 있다면요."
지극히 상식적인 반론이었다. 정신이 멀쩡하고 삶이 만족스러운 사람이라면 자발적으로 반지행을 택하진 않을 테니까. 애당초 와그다스 마법사들을 만나려면 황무지까지 가야 했다. 비상식적인 쪽은 자신이었다.
란드와르는 잠시 자괴감을 느꼈다. 요정 놈이랑 붙어 다니다가 옮았나?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고는 잡상을 치워 보냈다. 그러자 시답잖은 대화 아래 감춰 두었던 긴장이 밀려왔다. 통로 끝까지 남은 거리는 고작 서른 걸음. 그만큼을 걷고 문을 열어젖히면 익숙한 얼굴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울쿠스가, 스카르파가, 이시 첼의 심장이 저 너머에 있었다.
* * *
<선조의 혼령> 전투는 핏빛 뱀이 치명상을 입고 도망가는 것으로 끝난다. 놈을 뒤쫓아 지하층으로 내려갔을 때, 플레이어 일행은 가장 먼저 울쿠스를 마주하게 된다.
울쿠스는 오로지 스카르파를 지키기 위해 싸운다. 심장의 나머지 부분을 흡수하는 동안에는 의식을 잃고 깊은 혼수상태에 빠지기 때문이다. 그는 혈기 피조물을 잇달아 불러내며 적에게 맞선다.
몰려드는 피조물을 모두 제압하면 스카르파를 감싼 보호장이 사라진다… 그리고 뱀은 최후의 발악을 위해 스카르파의 몸을 억지로 차지한다.
* * *
지하층 표면에는 각인이 드러나 있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런 광원이 없는데도 어둡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무리 없이 주위를 살필 수 있을 정도였다.
방은 정확한 원형이었고, 그보다 지름이 작은 원형 구조물 하나가 가장자리에 내접했다. 구조물은 우물과 비슷한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아래로 향할수록 둘레가 넓어졌기 때문에 원뿔의 위쪽을 잘라낸 듯 보이기도 했다.
가파른 계단이 바닥과 구조물의 상단을 이었고, 보호장이 그 위에 돔처럼 얹혀 있었다. 계단의 마지막 칸에 선 것은 창백한 금발의 남자. 입구를 등진 채 무언가를 내려다보듯 고개를 숙이고 있다.
누구인지는 안다. 앞으로의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도 알고 있다.
사감에 매몰될 수는 없었다. 죽음을 각오한 상대에게 동정이나 연민을 품는 것은 무례일 뿐이었다. 바로 몇 시간 전에, 2막이 시작되고 울쿠스를 떠나보낼 때, 놈은 최선을 다해 전투에 임하겠다고 말했던 것이다. 란드와르 역시, 최선을 다해 달라고도.
"스카르파가 내게 힘을 허락했다… 모든 것을 무너뜨릴 힘을!"
이윽고 울쿠스는 몸을 홱 돌려 구조물 아래의 불청객들을 눈에 담았고, 울부짖었다.
그 문장은 란드와르에게도 익숙했다. <이스트리아 퀘스트>를 플레이하는 동안, 수없이 들은 대사였던 것이다. 하지만 여기는 게임이 아니었고, 울쿠스 역시 한낱 우두머리가 아니었으며, 그 말에는 가늠할 수 없는 무게가 실려 있었다.
"―일어나거라, 하수인들아! 침입자를 막아라!"
바닥을 덮은 포석이 덜걱거리더니 암적색의 소용돌이가 곳곳에서 용솟음쳤다. 분출이 멎으면서 치솟은 핏줄기 각각이 인간의 형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주인의 명령을 그대로 따르는 혈기 피조물들이었다.
피조물은 인간과 비슷하게 작동할 뿐이지 진짜 생명체는 아니다. 어떤 타격을 입더라도 곧바로 회복할 수 있다. 어깨를 으스러뜨리고 하체를 날리더라도 다시 재생한다는 뜻이다. 설령 몸을 모두 부수어 놓을지라도.
하지만 거기에도 한계가 있다. 피조물을 지탱하는 것은 시전자의 생명력. 피해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누적되면 놈들은 재생성을 멈추고 마력 덩어리가 되어 흩어진다. 그렇게, 모든 하수인이 사라지면 울쿠스가 최후를 맞으면서 보호장이 걷힌다.
지금부터 상대해야 할 피조물은 총 일곱. 치유사 피조물과 마법사 피조물 하나씩이 방의 양익에 고정 자리를 잡고, 나머지는 모두 가까이에 있는 상대를 따라다니며 근접 공격을 가한다.
다섯 명의 전사 피조물들은 그 수가 위협적일 뿐이지 특별한 능력은 없다. 공략의 키포인트는 치유사를 빠르게 제압하는 데에 있다. 놈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다른 피조물들의 유지력이 대폭 올라가기 때문이다.
따라서 볼로디아와 테네브로즈가 다른 넷을 이끌고 버티는 동안, 란드와르는 치유 전담과 근접 공격수 하나를 함께 상대해야 한다. 원거리 전담은 논외로 둔다. 흡혈 주문이야 성가시긴 해도 피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치유 전담을 처치한 후에는 중앙에 모여, 인원을 다시 배분한다.
…란드와르는 망치를 단단히 쥐고는 앞을 보았다. 피조물 둘이 형체를 갖추고는 전투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치유 전담과 근접 공격수 하나.
"자, 시작하자."
그 말이 신호탄이라도 된 것처럼 장검을 든 놈이 덤벼들었다. 망치 손잡이로 검격을 미끄러트리고서는 맞받아치듯 휘둘렀다.
둔기의 장점은 무게 그 자체에 파괴력이 있다는 데에서 온다. 찌르고 베는 기교가 없더라도, 단순히 힘주어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살과 뼈를 으스러뜨리니까. 놈의 상체가 케이크처럼 문드러지더니 피로 변해 바닥에 쏟아졌다.
빠르게 타겟을 바꾸어 치유사에게로 접근했다. 놈은 신관 예복을 입은 요정 형태였고, 다른 것들과는 암적색 마력 줄기로 이어져 있었다.
하지만 망치를 휘두를 여유는 나지 않았다. 전사가 그새 몸을 되찾고 뒤에서 접근해왔던 것이다. 몸을 돌리고, 적수를 으깨 놓고, 신관에게도 치명적인 한 방을.
물론 보기만큼이나 치명적이진 않다. 이렇게 부서진 것들이 재구성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고작 삼사 초. 이 짓을 한참은 반복해야 한다.
<신앙심이 좀 남았는데요. 켜 드릴까요?>
티아의 속삭임에 마음이 흔들렸으나 잠시였다. 본신의 힘은 오염체와 뱀을 상대하는 데에 쓰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귀찮고 힘들다는 이유만으로 자원을 낭비할 여유는 없었다.
하지만 좆같긴 했다. 지프차를 몰고 좀비 떼 한복판을 지나가는 것보다도 보람 없고 좆같은 일이다. 최소한 좀비들은 타이어로 밀면 죽지 않나.
그는 잠시, 이 새끼들이 인간이나 요정이었더라면, 망치로 다지면 곱게 죽는 생물체였더라면 상황이 좀 나았을까 생각해 보았다.
아니었다. 얼마나 강하든 간에, 상대가 누구든 간에, 서른네 살의 이강현에게 싸움은 개 같은 것이었다. 인격체를 죽이면 기분이 나빴고 이런 것들을 상대할 때에는 몸이 고달팠다.
"…씨발."
그러나 란드와르는 싸우기 위해 이곳에 왔다. 그는 끓어오르던 짜증을 격발시켰고, 내면의 열기에 몸을 맡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