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선조의 능묘 (4)
뱀의 이야기에는 흥미로운 구석이 있었다. 일단 아즈리온이 상태가 안 좋다는 건 알 놈들은 다 아는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그 아는 놈들이 두 경우 중 하나라서 문제지. 이미 죽었거나, 아니면 그걸 감춰야 하거나.
심지어 다른 세계에서 불려온 사람들이 있다는 것까지도 아는 듯했다. 이방인이라는 게 단순히 멀리서 왔다는 뜻으로 쓰였을 리는 없으니까.
하기야 요정 신쯤 되는 작자라면 내막을 알고 있어도 이상하진 않다. 말투로 보아서는 예전에는 가까이 지냈던 것 같기도 하고.
…생각은 거기에서 멎었다. 전투가 시작됐던 것이다.
[당신께 충분한 힘이 남았기를 빌지. 천 년간 벼른 일인데, 너무나도 손쉽게 끝나면 섭섭하거든!]
역삼각형의 머리가 쏘아지듯이 움직였다. 열린 입 사이로 송곳니가 차갑게 번뜩이고 있었다. 란드와르는 간발의 차이로 피하고서는 망치를 휘둘렀다. 옆면의 스파이크가 비늘을 으스러뜨리며 들어가더니 뼈를 만나 튕겼다.
핏방울이 허공을 가로질렀지만 뱀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란드와르를 노렸다. 그녀에게 이 정도의 부상은 사소한 것이었다. 바닥에 흩뿌려진 피는 의지를 갖춘 것처럼 모여들었고, 살점은 빠르게 자라났다.
거의 동시에, 볼로디아가 균열에서 빠져나온 살덩어리들을 으스러뜨린 뒤 전장으로 복귀했다. 비늘이 빠르게 돋아나 살을 덮으려는 순간 날카로운 발톱이 그곳을 파고들었다.
갈고리 형태의 뼈가 앞발에 닿았다. 그녀는 뼈를 지지대로 삼아 올라탔고,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잠시 몸부림치던 뱀은 이내 멈추고 정신을 집중했다.
핏줄기가 꿈틀거리며 자그마한 뱀의 형태를 갖추더니 볼로디아의 발을 옭아맸다. 작은 이빨들이 가죽을 뚫고 들어왔다. 비늘을 뜯고 살점을 물어뜯을 때마다 더 많은 뱀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는 동안 정면에 선 란드와르에게도 갖가지 공세가 쏟아지고 있었다. 우상단에서는 송곳니가 번뜩였고, 그 반대편에서는 주문 공격이 날아들었다. 둘 모두를, 가끔은 셋을 동시에 피하면서 유효타를 박아 넣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기억을 잃고서도 그럴 수 있다니, 그 점은 칭찬하겠소. 허나―]
그 말과 함께 둔통이 복부를 강타했다. 바로 다음 순간, 란드와르는 바닥에 나동그라진 자신을 발견했다. 현기증과 함께 짜증이 치솟았다. 씨발, 넉백이 몇 번째야.
하지만 불평은 길지 않았다. 사방에서, 아예 숨통을 끊어 놓겠다는 것처럼 투창이 쇄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두 피할 수는 없다. 어딘가에는 맞게 될 것이다.
이 패턴도 염두에 두긴 했으나 막상 닥치니 숨이 턱 막혔다. 기분일 뿐이었다. 기분이 어쨌건 할 일은 해야 했다. 앞으로 내달리는 동시에 예리한 창이 갑주를 꿰뚫고 들어온다.
옆구리가 찌르듯 아프더니 눈앞이 어두워진다.
"이…씨발아."
정말로 그렇게 말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사실 목구멍에서 터져 나온 건 격노로 찢어진 포효였는지도 모른다. 열기 어린 암흑이 정신을 압도하기 직전에, 란드와르는 익숙한 얼굴을 본다.
테네브로즈가 제물대를 돌아 나와 전장에 합류한다.
* * *
내가 머무는 곳은 깊은 우주.
내 목적지는 별들.
그리고 내 이름은…….
* * *
재정렬의 재사용 대기시간은 하루. 뿐만 아니라 시전하기 전에, 한 시간쯤을 들여 대상의 상태를 파악하고 모두 기억해두어야 한다. 그러지 않는다면 주문 시전이 아예 불가능하다.
쿨다운도 길고, 사전작업도 필요한데다가, 타겟도 하나뿐인 생존기. 제약이 큰 만큼 효과는 확실하다. 몸이 반토막이 나도 목숨만 붙어 있다면 되돌릴 수 있으니까.
"진짜 괜찮냐? 내가 걱정 안 해줘도 돼?"
"의외로 걱정이 많으십니다. 평소에는 제가 숨만 쉬어도 욕을 하시던 분이."
"아니, 이 새끼야. 내가 이 상황에서 욕까지 하면 그건 쓰레기잖아. 멀쩡한 사람을 쓰레기로 만들고 있어."
전투를 끝마치자마자 신앙심을 불태우면서 몸을 회복하는 중이었다. 란드와르는 질린 표정으로 테네브로즈를 바라보았다. 요정 놈은 걱정에 비해서는 멀쩡했다.
아니, 멀쩡해서 문제였다.
"다시 붙었는데 뭐가 불만이십니까."
테네브로즈는 보란 듯이 두 팔을 머리 위로 올렸다. 이놈을 설명하기에는 사이코패스라는 단어로도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앞에서 제 사지가 토막 났는데 태도가 해맑았다.
"좀 벌벌 떨면서 울어야 되는 거 아니냐. 정신적 충격도 받고."
"그러면 나으리께서 싫어하실 텐데요."
"그건 그런데 웃는 것도 정상은 아닌 거 알지."
"이래도 욕을 하고 저래도 욕을 하시는데 어쩌란 말씀이십니까?"
"나는 모르지. 니가 알아서 잘 해야지."
"나으리께서도 정상은 아니십니다."
란드와르는 혀를 쯧 차고서는 그간의 일을 복기했다.
다른 둘이 뱀을 상대하는 동안 테네브로즈는 제물대 뒤편에서 특임을 준비했다. 마술사 왕의 주의를 끌어서, 에스테르가 시전하는 마법이 모두 자신에게 쏟아지도록 하는 것이다. 그 상태로 뱀의 등에 올라타고…….
깔끔한 전투였다. 공략 사이트에 영상을 찍어 올려도 될 정도로.
하지만 게임의 깔끔함과 현실의 깔끔함 사이에는 엄청난 거리가 있다. 동료 하나에 재정렬을 걸고 유도 폭탄으로 이용하는 건 트릭 플레이의 기초였지만, 그걸 현실에서 하려니 기분이 묘했다.
유닛이 커맨드에 맞추어 움직이는 건 게임에서나 통할 이야기. 현실에서 시키면 항명은 기본이고 탈주까지 일어날 사안이었다. 테네브로즈에게 전략을 제안할 때에도 놈의 능력보다는 그 걱정이 앞섰다.
― 대충 그런 식인데, 너 말고 할 애가 없어. 알잖아. 하기 싫겠지만…….
― 하면 그만이지요.
― 할 거야? 괜찮아? 그래도 돼?
― 저는 말을 잘 듣고 유능한 사람인데요.
― 그런 놈이 원소학 배우라고 할 때는 왜 개겼어?
― 물을 만드는 건 유능한 사람이 아니라도 할 수 있는 일이잖습니까.
이윽고 란드와르는 아즈리온의 깊은 뜻을 알아차렸다. 이 짓을 하려면 제정신이 아닌 동료가 필요했던 것이다. 눈앞에서 팔다리가 잘렸다가 다시 붙는 상황을 선뜻 받아들일 사람은 많지 않을 테니까.
녀석의 성격이 이 상황에 도움이 된다는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다. 부정할 수는 없는데, 성장 과정이 궁금했다. 생물이 아니라 잘못 프로그래밍된 로봇 같았다.
그는 잠시 정신의 신비를 탐구하다가 그만두었다. 테네브로즈가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그나저나 싸우실 때에는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뭐가."
"평소 모습과는 많이 다르시던데요."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배에 구멍이 난 다음부터는 기억이 끊겨 있었으니까.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전투가 끝나고 뱀도 도망친 후였다.
의식이 순간적으로 날아가는 건 이미 몇 번 겪은 일이라 놀랍진 않았다. 당장 군부 대원들이랑 결투를 할 때도 그랬고.
"몰라. 가끔 그래."
강현은 그게 본신의 영향력이 강해지면서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짐작했다. 티아에게 물어봤을 때도 대강 비슷한 답이 돌아왔다.
"아예 다른 사람을 보는 듯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런가보지. 신경 안 써."
몸의 통제권이 완전히 넘어가는 게 달가운 일은 아니었지만, 뭐, 필요하다면 그럴 수 있는 듯했다. 어차피 그는 전사 란드와르와 이강현을 철저히 구분하고 있었으니까. 거기에 카테고리가 하나 추가되었을 뿐이다.
강현은 지극히 합리적인 사람이었고 내면의 문제를 처리하는 법도 알았다.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인격이고 정체성이고 간에 맡은 일만 멀쩡하게 할 수 있으면 되는 것이다.
이게 설령 다중인격이라 쳐도, 괜찮았다. 오히려 좋았다. 적시적소에 알맞은 인격을 갈아끼울 수 있는 건 축복이라고 믿었다. 삶에 도움이 된다면 병이라기보다는 장점이니까.
"나으리께서도 저만큼이나 마음이 편리하신 것 같은데요."
"너를 나랑 비교하면 안 되지. 나는 도덕을 알고 이해하는 사람이에요."
"저도 예전엔 그랬습니다. 요정치고는 비위가 약했죠."
"지금은."
뿌듯한 기색이 테네브로즈의 얼굴을 덮었다.
"지금은 아니지요. 그래서 저는 제가 좋습니다."
자기긍정도 이 정도면 범죄였다. 머리를 박았을 때와는 다른 종류의 현기증이 밀려왔다. 란드와르는 애써 혈압을 가라앉히고는 앞을 보았다.
다른 둘이 뒤에서 부상을 수습하는 동안, 볼로디아는 인간 형상으로 돌아와 왕들의 영령을 마주하고 있었다… 이렇게 늘어져 있을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의식이 끝나면 곧바로 지하층으로 내려가야 하는 것이다. 제대로 쉴 여유도 없는 현실이 개탄스러웠다.
능묘를 떠나자마자 잠이나 푹 자야겠다는 다짐이 섰다.
<그 전에 대장군들한테 자세한 상황을 우선 설명하셔야 할 텐데요. 피곤하시다면 제가 도와드리죠.>
아뇨, 아닙니다. 피곤하다고 뺄 자리는 아니니까…….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란드와르는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었다. 말라붙은 피가 거칠거칠했다. 곧바로 침실로 향하든, 아니면 대장군들을 만나든 간에 일단 목욕을 하고 싶었다.
* * *
원래의 빛을 되찾은 영령들은 제물대 바로 위에서 후손을 내려보았다. 볼로디아는 무릎을 꿇어 예를 갖췄고, 격식을 갖추어 인사를 올렸다. 거기에서부터 대화가 시작됐다.
"이 힘으로 무엇을 하려느냐?"
"제 아우의 목숨을 거두고 그 심장을 얻어내고자 합니다."
"그 말은 이미 들었다. 나는 이후의 일을 묻는 것이다."
볼로디아는 심호흡했고, 조용하지만 확신이 깃든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모든 곳에서 싸울 것입니다. 허나 이 모든 일이 끝났을 때는, 야스와다의 마지막 신마저 패퇴시킨 다음에는… 어떤 힘도 쓸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저 평화를 지키고 싶을 뿐입니다."
"여전히 나약한 말을 하는구나."
"평화와 행복 속에서라면 약한 심성은 죄악이 아닙니다. 사나운 기질은 오로지 불행 위에서만 가치를 얻지요."
늑대인간 왕들에게는 낯선 이야기겠지만, 뜻이 닿을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었지만 거짓을 고하고 싶지는 않았다. 볼로디아는 선조의 영령을 똑바로 직시했다. 첫 번째 왕은 뜻 모를 표정을 짓고 있었다.
홀가분한 정적 속에서 심장만이 무겁게 뛰었다. 이윽고 볼로디아의 머리 위로, 첫째 왕의 손이 내려와 닿았다. 자신의 기사를 마주하는 주인처럼. 그러나 그보다는 훨씬 큰 존중과 경건함이 서린 태도로.
곧이어 혼령들을 이룬 마력이 안개처럼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잠시 허공을 맴돌다가 볼로디아를 감쌌고, 일시에 스며들었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자신의 내면을 향해 정신을 집중했다. 인간과 괴수, 두 종류의 영혼이 서로 맞닿은 채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둘 모두 이전과는 달랐다. 훨씬 강인하고 정순한 힘이 느껴졌다.
육체의 주도권을 괴수 쪽으로 넘기자 살과 뼈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기묘한 활력이 온몸으로 퍼졌다. 새끼 뱀들이 뚫어낸 가죽은 빠르게 아물었고 녹색의 마력이 발톱을 따라 넘실거리다가 흩어졌다.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느껴졌다. 인생을 연극처럼 각각의 막으로 나눌 수 있다면, 자신은 한 막의 끄트머리에 서 있는 셈이었다. 이제 남은 장면은 지하층으로 내려가 스카르파의 목숨을 취하는 것뿐.
그리고, 그 후에는…….
돌끼리 긁히는 듯한 소리가 미묘한 감상을 깼다. 제물대 뒤편의 석벽이 열리며 너머의 통로를 드러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