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선조의 능묘 (3)
마무리까지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마지막 일격을 꽂아 넣는 동시에 오염체를 감싼 껍데기가 터지면서 황금색 광채가 홀을 가득 채웠다. 빛은 잠시 제자리를 맴돌다가 사방으로 뻗어 나갔고, 각인의 홈을 따라 흐르기 시작했다.
란드와르는 신축 아파트의 점등식을 연상했다. 죽어 있던 돌덩어리가, 한순간 빛으로 가득해지는 순간을 다른 무엇으로 비유할 수 있단 말인가…….
아닌가? 판타지 세상에서 이러면 안 되나?
[그 몸으로 내 종복을 처치하다니, 얕잡아 본 것에 대해서는 사과 말씀 드리겠소. 나라고 해서 힘이 충분한 건 아니지만.]
…뒤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란드와르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핏빛 뱀이 나타나서 뭐라 헛소리를 늘어놓고 있었다. 그랬다. 여기는 레이드 던전의 한복판이었고 지금은 1페이즈가 막 끝났을 뿐이었다.
[서로 초라한 꼴로 재회하게 되어 유감이오. 기억이 온전하셨더라면 그간의 회포를 나누어 보려 했소만, 아무래도 여기는 좋은 장소가 아니겠지.]
잠깐 듣다가 무시하고 차원 균열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미리 가서 진형을 잡아 놓으려면 서둘러야 했다.
대사가 기억과는 다른 게 약간 신경이 쓰였지만, 그거야 뭐, 그럴 수도 있는 일인 듯했다. 시뮬레이션을 어떻게 만들었는진 몰라도 세상을 그대로 옮긴 건 아니니까. 말쯤이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균열에 발을 담그자마자 열기 섞인 어둠이 눈앞을 덮쳤다.
* * *
현계로 돌아왔을 때는 시야가 온통 붉었다. 일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아니, 잘못됐다고 생각한다면 잘못된 것일 수도 있고…….
"이…씨발."
란드와르는 손등으로 이마를 훔쳤다. 그새 상처가 다시 터졌는지 머리에서 핏물이 줄줄 흘렀다. 담배빵을 지져도 금방 아무는 몸인데, 재생의 반지까지 끼고 있는데 이러는 걸 보면 꽤나 깊게 찢어진 모양이었다.
눈을 몇 번 더 깜박이고서야 사방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바로 앞에서, 새로 생긴 균열이 빠르게 크기를 넓히는 중이었다. 곧 있으면 저길 통해서 뱀이 나타날 터였다.
"나으리, 꼴이 말이 아니십니다."
그 너머에서 테네브로즈가 외쳤다. 란드와르는 균열이 홀의 중앙을 완전히 가로막기 전에 서둘러 넘어갔다.
"남 걱정할 시간에 너 할 일이나 해라."
"예?"
"내가 돌아오면 제물대 뒤에 가서 숨으라고 했잖아. 기억 안 나냐."
2페이즈에서, 테네브로즈는 실로 중대한 특임을 맡을 예정이었다. 함부로 중앙에서 날뛰다가 뱀한테 물려 죽으면 곤란했다.
란드와르는 녀석을 제 위치로 보낸 다음 적절한 자리에 섰다. 걱정 섞인 질문이 들려왔다.
"싸울 수 있겠소?"
"살이 좀 찢어진 겁니다. 팔다리는 멀쩡해요."
란드와르는 그렇게 대답하면서 균열 너머의 허공을 보았다. 역대 왕의 영혼들이 모여들어 있었다. 중앙에 있는 것은 첫째 왕. 그 곁에는 마술사 왕, 에스테르가 붙어 있다.
눈이 마주치자 에스테르는 가볍게 미소지었다. 그녀는 주먹쥔 왼손으로 오른쪽 손바닥을 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란드와르의 머리 위쪽에 거대한 주먹의 형상이 나타났다.
[몸을 갖춘 것도 정말 오랜만이군. 심장에만 갇혀 있는 게 어떤 기분인지, 당신께도 알려드리지!]
동시에, 균열로부터 핏빛 뱀이 솟구쳤다.
* * *
2페이즈가 시작되면 늑대인간 왕들은 모두 영혼 상태로 되돌아가고, 대신 핏빛 뱀이 현계에 모습을 드러낸다. 체력을 빈사 상태까지 깎으면 뱀은 심장 속으로 되돌아가고, 동시에 지상층이 정화된다.
단, 2페이즈부터는 차원 균열이 항시 열려 있다. 살점 돌연변이들이 수시로 기어 나온다는 뜻이다. <엉겨붙는 혈기> 역시 주기적으로 시전된다.
돌연변이가 현계에 너무 많이 쌓이기 전에, 그 돌연변이들이 혈마력에 접촉하기 전에 빠르게 전투를 끝마치는 것이 관건이다. 파티의 종합 피해량을 체크하는 구간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에스테르를 잘 이용한다면 적은 인원으로도 공략이 가능하다. 각인이 완전히 정상화되기 전까지, 왕들의 정신은 지극히 불안정해지기 때문이다.
에스테르는 피아를 구분하지 못하고 주문을 쏟아낸다. 해당 공격을 모두 뱀에게 유도시킬 수만 있다면, 그녀에게는 마법사 동료 셋 이상의 가치가 있다.
* * *
볼로디아와 란드와르는 뱀의 머리가 입구를 향하도록 자리를 잡았다. 놈의 관심이 테네브로즈에게로 쏠린다면 곤란했다. 물론 요정 마법사의 존재는 알고 있겠지만, 눈앞에서 덤비는 둘을 내버려 두고 방향을 틀지는 않을 터.
테네브로즈는 제물대 뒤편의 좁은 공간에 선 채 마력 결정을 손에 쥐고 있었다. 마법진을 그리기 위해서였다. 하위계 주문들은 약식으로도 충분히 시전할 수 있었지만, 신의 일부에게 유효타를 넣으려면 충분한 제의(祭儀)가 필요했다.
적절한 문양을 그리고서는 정가운데에 섰다. 뱀의 뒷모습을 눈에 담는 사이, 걱정 섞인 타박이 머리 위편에서 울렸다.
<중간에 위험하다 싶으면 멈추거라. 시체를 되살리지는 못하니까.>
뱀의 시야에서는 벗어났지만 에스테르의 눈까지 가릴 수는 없었다. 마법진을 그리는 동안에도 온갖 마법이 쉼 없이 날아들었다. 상황이 여의치 않을 경우에는 헤이딘이 막아 주었지만 대부분은 스스로 피했다.
하지만 주문식을 읊을 때는, 그러니까 정식으로 주문을 시전할 때에는 정신 집중이 필요했다. 완전히 무방비 상태가 되는 셈이었다. 헤이딘이 지켜 주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이제부터, 재정렬과 차원 분리는 다른 용도를 위해 남겨두어야 했던 것이다.
"아무렴요, 지금 읊을 조가(弔歌)가 제 장송곡이 아니길 빌어야지요……."
테네브로즈는 품에서 작은 손칼을 꺼낸 뒤 팔뚝을 깊이 그었다. 피가 후두둑 쏟아지며 마법진을 적셨다. 피는 영혼에 비하면 급이 한참이나 낮은 제물이었지만 위력을 증폭시킬 수 있다면 뭐든 해야만 했다.
곧이어 나지막한 목소리가 피 냄새를 덮었다.
"심장 없는 가슴과 타오르는 정신 속에서, 살아남아라, 내 모든 생각아……."
죽음을 애도하는 노래는 마법적인 힘을 지녔으며 가끔은 주문식으로 쓰이기도 했다. 지금 시전하려는 주문은 총 세 가지. 영혼을 천천히 부식시키는 것. 주기적으로 생각의 흐름을 끊는 것. 고통을 불러일으키는 것.
"…감히 미래가 과거를 잊을 때까지."
<엎드려라!>
마지막 소절에 마침표를 찍자마자 예상치 못한 격통이 가슴팍을 후려쳤다. 허리가 반사적으로 구부러지더니 핏빛 마력 줄기가 머리 위를 쌩하니 스쳐 지나갔다.
테네브로즈는 상황을 파악하고서는 헤이딘을 올려다보았다. 피할 수 있도록, 일부러 고통을 가한 것이다. 못마땅한 투덜거림이 들려왔다.
<경고를 하자마자 죽을 일을 만드는구나.>
"이토록 반응이 빠르신 분이 나트람 영감에게는 왜 지셨는지 모르겠습니다."
<형님 실력이 웬만한 수준은 아니니 말이다. 게다가 직접 맞서는 것과 구경만 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지 않겠느냐… 할 일이나 하자꾸나.>
뱀에게 저주를 내리는 것까지는 무사히 마쳤지만, 그건 임무의 절반에 불과했다. 훨씬 중요한 절반이 남은 채였다.
테네브로즈는 고개를 들어 에스테르를 올려다보았다. 깡마른 손이 독수리처럼 허공을 날고 있었다. 날개가 한 번 움직일 때마다 마력이 덩어리지며 형체를 갖춘다.
<이게 될 일인지 모르겠구나.>
"나으리께서 하라고 하셨잖습니까. 신의 결정을 의심하는 건 아니겠지요."
이번에 시전할 주문은 <타오르는 고통>. 늪지대를 지나올 때, 용을 수레에 충돌시키기 위해 썼던 마법이었다. 지금 할 일도 그때와 비슷했다. 에스테르의 시선을 집중시켜서, 모든 주문 공격이 자신에게 쏟아지게끔 하는 것이다.
영혼으로 바칠 제물도, 괴수의 심장도 없으니만큼 효과는 적겠지만, 괜찮다. 주의를 조금이라도 돌려놓을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정말로 문제가 되는 건 주문이 성공한 다음의 일이다.
<타오르는 고통>이 제대로 들어간다면, 그 순간부터 테네브로즈는 걸어 다니는 폭탄으로 변했다. 각인 전체의 마력이 실린 공격이 한 점으로 모이는 것이다.
그중에서 가장 위협적인 마법은, 마력을 주먹 형태로 뭉쳐 바닥을 내려찍는 것. 떨어지는 속도가 느린 대신 파괴력이 높다. 갑주를 입고 있어도 밟아 누른 것처럼 우그러질 수준이니까. 피하지 않으면 사실상 즉사인 셈이다.
<네놈은 의심해야지.>
"어려운 건 모두 어르신의 몫이니까요. 믿고 있습니다."
테네브로즈가 할 일은, 쉽다면 쉽고 어렵다면 어려웠다. 뱀에게 최대한 접근해서 각종 주문을 유도하는 것이다.
주먹이 떨어질 때에는 헤이딘이 차원 분리를 써 주고, 사소한 주문들은 몸으로 받아낸다. 치명상을 입으면 재정렬로 복구한다. 피해가 뱀에게만 누적되게끔.
<두렵지도 않으냐?>
"나으리께서 하자고 하셨는데요. 저는 시키는 거라면 뭐든 합니다."
<네놈이 그렇게 충성스러운 성격은 아닐 텐데.>
순간 에스테르가 황금빛 화살을 쏘아 보냈다. 가까스로 피한 테네브로즈는 그게 벽면에 박히더니 연기가 되어 사라지는 모습을 응시했고, 말했다.
"잡담이 너무 깁니다. 시작하지요."
* * *
뱀은 요정 마법사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무슨 수작을 부리든 신경 쓸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다. 놈은 하잘것없는 필멸자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늑대인간 역시 마찬가지였다. 심장의 나머지 부분이라는 면에서는 가치가 컸지만, 그뿐이었다. 죽이고서는 힘을 취하면 그만인 것이다.
대신, 뱀의 주의는 인간 형태의 전사에게로 쏠려 있었다.
[비록 파편일지라도, 당신의 목숨을 거둘 수 있다니 기쁜 일이오. 이 순간을 얼마나 고대해 왔는지 당신은 결코 모르시겠지.]
전사의 미간이 좁아지더니 상스러운 말이 튀어나왔다.
"모른다니까, 씨발. 다른 사람이라고."
[이런 상상은 하고 싶지 않지만, 만약 이방인이 그 몸을 빌려 쓰고 있다면…….]
뱀의 머리가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움직이더니 전사에게로 바짝 붙었다. 그녀는 시선을 똑바로 맞추고는, 음산한 어조로 속삭였다.
[그 몸으로 떠들 때는 예의를 갖춰 주길 바라오. 드높으신 분께서 이렇게 된 걸 보면, 정말로 마음이 미어지거든.]
뱀은 피투성이 심장에 깃든 악의의 총체였다. 지금껏 심장을 거친 이들의 정신이 한데 모여, 전혀 다른 인격을 만들어낸 것이다. 아득한 세월을 지나오면서 수많은 기억이 망각 속에 잠겼지만 그런 만큼 분명해지는 것도 있었다.
먼 옛날, 늑대는 긴 잠에 들면서 다섯 요정에게 별을 선물했다. 별을 얻자 그것은 심장으로 변했고 요정들은 신이 되었다. 하지만 신들이 만들어낸 세상은 늑대의 마음에 들지 않았고…….
뱀의 상체가 움직이며 다시 전사와 거리를 두었다. 그녀는 광포한 웃음을 터뜨리며 육신에 갇힌 늑대를 내려다보았다.
[초라한 꿈을 끝내드리지. 내게 고마워할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