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79화 (80/258)

79화 선조의 능묘 (2)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란드와르는 상체를 숙여 주문을 피하면서 오염체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암적색의 몸은 액체로 이루어진 듯 출렁이면서도 일정한 형태를 유지했다. 상반신은 인간형 거수를 연상시켰지만 뚜렷한 얼굴이 없었고, 바닥까지 이어진 하체는 소용돌이치는 피 같았다.

각인을 막고 있는 오염체는 괴수도, 돌연변이도 아니다. 굳이 분류하자면 요정 신의 하수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즈리온이 직속 부관으로 티아를 거느리고 있는 것처럼.

어쨌거나 쉬운 상대는 아니다.

[섬락…….]

가까이 다가가자마자 음산한 울림과 함께 거대한 팔이 날아들었다. 즉시 옆으로 몸을 날린 란드와르는 오염체의 특성을 상기했다.

가까이에서는 근접 공격을 하고 멀리 있는 상대에게는 피의 창을 쏘아 보낸다. 속도는 비교적 느리지만 둘 다 잘못 맞았다가는 뼈가 우그러진다. 게다가 단순한 물리 공격으로는 처치할 수 없다. 마력 덩어리를 반으로 갈라 봤자 다시 붙을 뿐이니까.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주문이 각인된 무기로 상대하거나,

아즈리온의 권능을 빌리거나.

아즈리온의 신격은 무예와 살육. 그중 살육에는 단순히, 목숨을 앗아가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건 물체의 근원에 직접 타격을 가하는 능력이다. 게임식으로 설명을 붙인다면 고정 피해가 된다.

따라서 그 힘을 나누어 받은 사제들은 마법사와 동등한 전력으로 간주된다. 근접 거리라는 한계가 있을지라도 아즈리온 신앙에는 그만큼의 가치가 있는 셈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화신의 성능은 사제들보다도 압도적이다.

<가동하겠습니다. 모든 타격이 근원에 대한 것으로 전환됩니다.>

본신의 권능을 이끌어 내기는 어렵지 않다. 쌓아둔 신앙심을 태우기만 하면 된다. 문제는 신앙심 관리에 실패했을 때의 리스크다. 삐끗해서 신앙심이 음수로 돌아서면 평범한 인간이 되고 마니까.

<현재 신앙심 잔량으로는 15분가량 연속 유지가 가능합니다.>

속삭임과 함께 어두운 기운이 망치를 감싸고 돌기 시작했다. 오염체의 팔을 재차 피하고서는 허리께를 후려쳤다. 망치가 박힌 지점에서부터 검은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고통스러운 울부짖음이 석벽을 강타했다. 바로 다음 순간, 오염체가 격렬하게 출렁이면서 새어나가던 마력을 단번에 폭발시켰다. 그 힘은 란드와르를 멀리 밀치고서는 쓰러트렸다. 반사적으로 몸을 굴리자마자 피의 창이 등줄기를 스쳤다.

등이 욱신거리며 경련이 일었다. 갑주를 걸쳤을지라도 고순도의 마력 덩어리가 근처에서 터진다면 충격을 받기 마련이다. 하지만, 하지만 이런 부상쯤은 사소하다. 도리어 고통 덕분에 정신이 명료해지고 있었다.

<다시 엉겨붙는 혈기, 지속시간 5초 남았습니다.>

땅을 짚고 일어서며 홀의 전경을 눈에 담았다. 살덩이 파편은 거의 뭉쳤고, 피의 창은 오염체의 머리 위에서 형체를 갖추고 있다. 발밑에는 핏덩어리가 엉기는 중이다.

모서리에 장판이 깔리자마자 옆으로 뛴다. 머리를 겨누던 창이 그 뒤의 각인과 부딪히며 격한 진동을 일으킨다. 공간이 뒤흔들리고, 살덩어리들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망치로 내려치자 곤죽이 되어 바닥에 붙는다. 여전히 꿈틀거리긴 하지만 아까와 같은 속도는 아니다.

[죽음……!]

무시하고 앞으로 달려들자 오염체는 주문 시전을 멈추고 후려치듯 팔을 휘두른다. 망치가 그에 맞서 허공에 호를 그린다. 망치 옆면의 스파이크가 오염체에 박히면서 균열이 놈의 한쪽 팔을 뒤덮고 올라간다.

거센 울부짖음이 홀을 가득 메우더니 충격파가 다시, 란드와르의 몸을 멀리 튕겨낸다. 살점이 기회를 잡았다는 듯 사방에서 기어온다. 다리가 순식간에 살덩어리로 뒤덮인다.

주문 공격이 이어질 것이다. 시야가 흔들리는 탓에 피할 방향을 가늠하기는 쉽지 않다. 왼쪽? 오른쪽? 살점 더미를 걷어차듯 뿌리치고, 어디로든 몸을 던진다. 피의 창이 바로 곁에서 폭발한다.

충격의 여파로 머리가 땅에 부딪힌다. 덥고 축축한 기운이 이마를 따라 흐르다가 시야 오른편에 맺힌다. 피다. 어딘가가 찢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팔다리는 멀쩡히 움직인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란드와르는 몸을 추스리고 일어선다. 검은 균열이 오염체의 몸에 깨진 도자기와 같은 흔적을 남기고 있다. 그 사이로 희미한 황금빛이 흐른다.

*  *  *

두 늑대는 서로 떨어져 거리를 재기도 했지만 탐색전은 길지 않았다. 혈향과 함께 괴수의 본능이 눈을 떴다.

그들은 걷잡을 수 없는 격노 속에서 서로에게 돌진했고, 뒤엉켰고, 목덜미를 노렸다. 동시에 사방에서 주문이 날아들었다. 테네브로즈의 것이든, 혼령이 쏘아 보낸 것이든 간에.

그 난전 속에서도 마요르가는 몇 차례의 공격을 노련하게 빠져나가 역습을 가하곤 했다. 그러나 결국, 마지막 순간에 승기를 잡은 것은 볼로디아였다. 그녀는 왼쪽 앞발에 무게를 실어 마요르가의 가슴팍을 눌렀다.

발톱이 두터운 털 사이로 잠기더니 피가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처음도 아니거늘, 무엇을 망설이느냐?"

볼로디아는 이것이 세 번째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마요르가의 목숨을 세 번째로 취하려는 것이다. 처음에는 스스로 칼을 거두었다. 그다음에는 광기에 사로잡혀 심장을 먹어치웠다.

그리고 이제는, 명징한 정신으로, 다시, 어머니를 발밑에 두고 있었다.

"망설이는 것이 아닙니다.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전장에 필요한 것은 낱말이 아니라 피다!"

그 외침과 함께 핏빛 화살이 볼로디아의 귓가를 위협조로 스치고 지나갔다.

일갈한 것은 마요르가가 아니라 첫 번째 왕 곁에 선 자였다. 지금껏 주문을 퍼부은 상대이기도 했다. 볼로디아는 공격이 이어지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서는 입을 열었다.

"허나 이곳은 전장인 동시에 혼령의 쉼터이기도 합니다. 이 자는 저의 적수이자 어머니지요. 그러니 왕가의 일원으로서 몇 마디 나눌 시간을 청합니다."

"무슨 말을 하려느냐?"

첫 번째 왕은 흥미롭다는 투로 되물었다.

볼로디아는 잠시 자신의 심경을 반추했다. 마요르가에게 원망을 쏟아내고 싶지는 않았다. 잘잘못을 따지기에는 너무 오랜 시간이 흐른데다가 돌이킬 수도 없는 일들이었다. 그저 내버려두는 식으로 결착을 짓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고서도 의문은 남았다.

"어머니를 능묘로 이끈 건 제 동생이었습니다. 심장을 먹으면 소원이 이루어질 거라고 말했다더군요. 무슨 소원을 비셨습니까? 더 큰 힘을 원하셨나요, 아니면 다른 뜻이 있으셨던가요?"

잠시 침묵이 있더니 냉랭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볼로디아는 흠칫 놀라며 가슴팍을 누른 발에 힘을 주었다. 마요르가가 차가운 어조로 내뱉었다.

"네가 싸움터에서, 이런 질문을 하지 않기를 빌었다! 네게서 그 유약한 성정이 달아나도록!"

"그리고 저는 어머니보다 강하지요. 언제나 그랬습니다."

"도시를 다스리는 것은 괴수를 죽이는 것과 다른 일이야!"

마요르가는 한 차례 죽은 지금조차 여전히 마요르가였다. 말루카의 모든 왕들처럼.

"왕위를 물려받았더라면 어머니와 똑같은 사람이 되었겠지요."

"되어야 하는 것이다. 약한 심성은 규율을 방해할 뿐이지."

첫째 왕이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댔다. 볼로디아는 규율이라는 것을 생각했다. 피웅덩이를 지키기 위해서만 만들어진 법과 규칙을. 천 년간, 도시는 물론이고 왕가마저도 짓누른 그 불행 덩어리가…….

앞발이 마요르가의 가슴팍을 파고들었다. 발톱은 가죽을 완전히 뚫고 들어가면서 살점에 닿았다. 볼로디아는 피가 울컥거리며 터져 나오는 모습을 지켜보았고, 첫 번째 왕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더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다음 상대를 내려보내시지요."

*  *  *

전면에 나선 건 볼로디아였지만 요정들도 제 나름의 이유로 바빴다. 반투명한 요정 소년이 능묘 한가운데에 둥실 떠오른 채 푸념을 뱉고 있었다. 헤이딘이었다.

<설마 계속 이 짓을 해야 하는 건 아니겠지. 내가 원하는 건 책으로 가득한 방 한 칸과 안락의자가 끝이란 말이다. 누군가는 세상을 구해야겠지만 그게 나일 필요는 없지 않으냐.>

테네브로즈는 헤이딘이 쉼없이 투덜거리면서도 할 일은 잊지 않는 데에 내심 감탄했다. 재정렬을 쓸 일은 아직까진 없었지만 다른 두 마법은 정확한 순간에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몸을 움직일 필요가 없는 덕분에 생각할 여유가 많아진 것일까? 그렇다면 반지에 갇힌 채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겠다.

"그런 것치고는 잘 하시는데요. 늙어 죽지도 않으실 분이, 두 해쯤은 용사 노릇에 바쳐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나트람 영감이 죽는 꼴도 직접 보셔야 할 테고요."

<그러다가 반지가 망가질지도 모르지. 잃어버릴 수도 있고. 각인은 섬세한 기술이란 말이다. 아주 균형 잡힌 것처럼 보이는 주문들조차도 순간적인 충격으로 힘을 잃고―>

헤이딘은 흠칫 말을 멈추고서는 비스듬히 세운 손날을 콧등에 가져다 댔다. 입속으로 주문을 읊자마자 일렁이는 황금빛이 테네브로즈를 감쌌다.

바로 다음 순간, 거대한 주먹의 형상이 바닥을 강하게 내리찍었다. 돌바닥에는 실금이 어렸지만 테네브로즈는 멀쩡했다. 차원 분리의 효과였다. 슈문의 영토로 잠시 몸을 피하는 것이다.

그는 주문 지속시간이 끝난 걸 확인하고서는 잔소리를 토했다.

<천장을 좀 보거라. 그게 어려우면 계속 움직이기라도 해 봐. 하마터면 짓눌려 죽을 뻔하지 않았느냐. 반지는 박살이 났을 테고.>

"작은 어르신께서 이렇게 구해 주시는데 제가 굳이 그래야겠습니까?"

테네브로즈는 능청스레 대꾸하며 첫째 왕 곁에 선 늑대인간을 힐끔 보았다. 검은 머리를 한 갈래로 땋아 묶은 여자였다. 볼로디아의 발밑에 걸친 수호 영역을 흥미롭다는 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술사 왕, 에스테르.

다른 왕들이 육신을 갖추고 전장에 내려오는 동안, 에스테르는 영혼 상태로 주문 공격을 거들었다. 주먹을 내리찍거나, 핏빛 화살을 날리거나, 차원 균열을 하나 더 여는 식으로. 자잘한 투사체는 덤이다.

따라서 테네브로즈는 주먹은 전혀 피하지 않고 있었다. 시전 간격도 길었거니와 헤이딘이 모두 막아주었기 때문이다. 차원 균열을 닫고 지속시간이 끝난 저주들을 다시 시전하기에도 바쁜데, 주먹까지 계산에 넣었다가는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게 뻔했다.

헤이딘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됐으니 균열이나 닫자꾸나. 오른쪽 앞에 새로 생긴 게 하나 있다.>

열 걸음 앞에서, 공간이 천천히 갈라지는 게 보였다. 깨진 도자기를 연상시키는, 암적색 테두리 속에서 어둠이 출렁이고 있었다.

이런 균열이 완전히 열리도록 내버려 둔다면 이면 세계의 돌연변이들이 기어 나올 위험이 컸다. 통로가 하나 더 생기는 셈이니까.

"저도 보입니다. 눈 없는 사람이 눈 있는 사람에게 훈수를 두는군요."

<혀 없는 사람이 되기 전에 조용히 하거라. 야스와다 마법도 네놈만큼은 알고 있으니.>

"함께 죽고 싶다는 말씀이십니까? 이 나이에 듣기에는 너무 낭만적인 고백인데요……."

이죽거린 테네브로즈는 상체를 숙여 찢긴 듯한 틈새에 손끝을 담갔다. 주문을 무효화하는 방법은 기본적으로 하나였다. 다른 종류의 마력을 주입시켜서, 충돌을 일으키는 것.

그러나 이번에는 무언가가 달랐다. 불길한 느낌이 손가락을 타고 오르더니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재빨리 뒤로 물러나자마자 균열이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게냐?>

"아무것도 안 했는데요. 피한 겁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