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선조의 능묘 (1)
겨울의 서늘하고 건조한 공기. 불빛. 대사의 사이사이를 메우는 침묵. 소리가 넘어가지 않도록 조심하며 일하는 작업반 인부들. 무대로 이어지는 통로는 암막으로 가려져 있다. 천 년 전에 죽어 사라진 사람들의 숨결이 그 너머에서 스멀거린다.
볼로디아는 암막 속으로 몸을 밀어 넣는다. 바로 다음 순간, 그녀는 익숙한 제복의 벽 앞에 선다. 관중석에서는 깊은 그늘이 수백 명의 얼굴을 음각으로 새기고 있다.
순혈 배우가 그녀 앞에 무릎을 꿇는다. 마지막 장의 대사가 귓가로 흘러든다. 그리고 다시 침묵. 이제는 볼로디아의 차례다.
"…네 딸들은 대대로 이 도시를 다스릴 것이다. 피웅덩이의 힘이 쇠하고 너의 동족들이 자유를 맞을 때까지."
무대의 하늘을 이루는 환영이 천천히 빛을 잃는다. 여기까지가 원래 대사이므로. 그녀는 관중석을, 그 한가운데의 스카르파를 힐끔 본다. 폭포처럼 흐르는 붉은 머리칼은 어둠에 파묻힌 불티 같다. 볼로디아는 계속 말한다.
"그리고 먼 훗날, 나와 이어진 아이가 왕가에 다시 나타날 것이다. 능묘를 닫는 소임은 붉은 머리의 아이에게 주어진 운명이니, 기억하거라. 너와 너의 딸들은, 혼령으로서, 나의 분신을 섬기리라……."
웅성거리는 소리가 차츰 커지면서 극장을 가득 메운다. 볼로디아는 몸을 돌려 관중을 똑바로 마주 보고, 가면을 집어 던진다. 죽음과 같은 정적이 사방을 뒤덮는다. 그리고 짧은 시간이 흐른다.
"볼로디아!"
누군가의 외침을 시작으로 그녀의 이름이 잇달아 들려온다. 경멸과 경악을 섞어, 볼로디아! 중부의 대장군이 일어나 으르렁거린다.
"수치를 모르는 배반자가 인간 시늉을 하며 돌아왔구나! 왕가의 핏줄이 피웅덩이를 탐낸 죄까지 사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느냐?"
"나는 왕실의 의무를 저버린 적이 없다."
볼로디아는 그녀를 똑바로 마주본다. 더한 질타가 쏟아진다.
"우리는 네가 마요르가 왕의 심장을 취하는 것을 보았다. 네가 피를 뒤집어쓴 채 도시를 떠나는 것을 보았다. 네가 남긴 글들을 보았다!"
"그것 또한, 부정하지 않겠다."
"그렇다면 무슨 변명을 하겠느냐? 무엇으로 속죄하겠느냐?"
질문과 함께 깊은 어둠이 밀려온다. 볼로디아는 어깨에 와 닿는 열기를 느낀다. 티아가 그녀의 뒤에서 날개를 펼친다. 경악이라는 단어로도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이 모두를 정적 속으로 밀어 넣는다.
볼로디아의 외침이 그 침묵을 깨고 나온다.
"나, 볼로디아는 일곱 해 전의 악업을 거두기 위해, 천 년의 시간을 마무리 짓기 위해 여기에 왔다. 아즈리온께서 나의 뜻을 지지하신다!"
스카르파의 입가에 어린 것은, 여전히 뜻 모를 미소.
"동생아, 연극은 여기에서 끝났다. 우리의 삶으로 되돌아가자. 승리가 누구의 것이든, 우리의 결말을 마주하자."
그제야 스카르파의 얼굴에 만개한 꽃처럼 환한 웃음이 피어오른다. 그녀는 잠든 딸을 어루만지던 손길을 멈추고, 일어선다.
* * *
벽에 새겨진 각인은 암적색으로 빛났다. 곳곳에 자라난 살덩어리 때문에 능묘 자체가 피를 흘리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실제로 피를 흘리고 있었다.
강현은 고색창연한 비유조차 현실이 될 때는 아주 낯설어진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지난 두어 시간 동안의 일이 머릿속에서 명멸했다.
스카르파가 먼저 능묘로 향했다. 란드와르 일행도 대장군들에게 대강의 사정을 설명한 후 이곳으로 왔다. 울쿠스는 2막이 끝날 때 미리 이동했으니까, 이미 지하층에 가 있을 테고…….
공략과 패턴은 설명해 두었다. 이제 실행에 나서기만 하면 된다.
그는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일직선의 홀 끝에 제물대가 놓여 있었다. 평소에는 죽은 왕의 영혼을 능묘에 모실 때 쓰는 것이지만, 반대로 각인에 담긴 영혼을 불러낼 수도 있었다.
그러니까, 저걸 클릭…하면 첫 번째 네임드가 팝업됐다. 커서를 오브젝트에 가져다 놓은 다음 아이콘이 톱니바퀴 모양으로 변하는 걸 확인하고, 클릭. 게임에서나 통할 이야기지만.
고개를 숙이자 손에 들린 거대한 망치가 보였다. 거기에 더해 천계표 장비인 묵색 갑주까지 걸치고 있다. 이 모든 순간이 태블릿 속의 데이터였던 순간이 그립더니 마음이 기묘할 정도로 차분해졌다. 서른네 살 이강현의 자아는 잠시 꺼 둘 시점이었다.
"제물대를 쓰시면 됩니다."
란드와르는 볼로디아를 보고는 말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했고, 제물대 위에 한 손을 얹었다. 곧이어 낮은 목소리가 벽에 부딪혀 메아리치듯 울렸다.
"왕실의 일원이 선조를 만나길 청합니다."
각인의 빛과 똑같은, 암적색의 연기가 제물대 위에서 일렁이더니 뚜렷한 형체로 변했다. 볼로디아를 닮았지만 조금 더 엄해 보이는 인상의 여자였다. 검은 머리카락을 귀 양옆으로 땋았고, 나머지 머리카락은 뒤로 늘어뜨렸다.
"마요르가의 딸, 볼로디아가 첫 번째 왕을 뵙습니다."
그렇게 말한 볼로디아는 무릎을 꿇어 예를 취했다. 왕은 그녀 뒤편의 인간과 요정을 차갑게 응시했다.
"이방인들과 함께 무엇을 하러 왔느냐?"
"심장을 얻으려 합니다. 힘을 빌려주십시오."
"심장은 이미 주인을 찾았다."
"제가 취할 몫입니다."
"감히 우리의 주군에게 대적하겠다는 것이냐?"
첫 번째 왕이 으르렁거리는 동시에 더 많은 왕들이 허공에서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걸 기점으로 사방에서 핏빛 마력이 장막처럼 치솟으며 퇴로를 막았다. 개전의 표시였다.
"딸들아, 오거라! 누가 이 반역자를 벌하겠느냐?"
"제게 기회를 주십시오!"
혼령 하나가 그렇게 외치더니 즉시 뛰어내렸다. 각인이 번뜩이며 그녀에게 육신을 부여했다. 고집이 세 보이는 인상과 잔인한 미소. 볼로디아는 왕의 정체를 알아보았고, 미간을 좁혔다.
"저번에는 네가 승리를 거두었지. 이제 내게는 잃을 목숨이 없으니, 네 것을 취해야겠구나!"
마요르가 왕은 광소하며 늑대의 모습으로 변했다. 늑대인간들은 무예를 연마했지만 생사를 가려야 하는 전투에서는 언제나 괴수 형상으로 맞섰다.
볼로디아는 눈을 감고 내면에서 넘실거리는 힘에 정신을 집중했다. 카스바에서 구출되고서, 정신을 차린 후로는 처음으로 변신을 시도하는 셈이었다.
영혼의 반절은 이전과 비슷하지만 훨씬 깊고 어두운 마력으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뼈와 살이 뒤틀리며 다른 자리로 옮겨가는 것이 느껴졌다. 시야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것들을 비추기 시작했다. 영령들을 꼭두각시처럼 옭아맨 마력의 갈래.
그 실타래가 시작되는 곳은, 돌벽 너머의 지하층.
"사죄하지는 않겠습니다, 어머니!"
볼로디아는 그렇게 울부짖으며 돌진했다. 상대의 목덜미에 송곳니를 박아 넣으려는 순간, 붉은 머리의 전사가 차원 균열 속으로 몸을 밀어 넣는 모습이 얼핏 시야를 스쳤다.
* * *
선조의 혼령 전투는 두 개 페이즈로 나뉜다.
1페이즈에서, 외부조는 <선조의 시험>을 치르며 역대 왕의 혼령들과 맞서야 한다. 첫째 왕은 일정 주기로, 혹은 앞선 왕이 패배할 때마다 육신을 거두고 다른 영혼을 전장으로 내려보낸다.
관건은 각각의 왕을 일정 주기 안에 처리하는 데에 있다. 둘 이상의 왕을 한 번에 상대하는 상황은 곧잘 외부조의 전멸로 이어진다.
그러는 동안 내부조는 <이면 세계>로 들어가 각인의 오염을 정화해야 한다. 마력 흐름을 오염시키는 방해물을 해치운 뒤 각인을 재가동하는 것이다. 외부조의 피로가 누적되기 전에 임무를 끝마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각인이 재가동되고 내부조가 현계로 돌아오는 순간, 2페이즈가 시작된다. 지상층을 뒤덮고 있던 혈마력이 한데 모여 실체를 갖추는 것이다.
* * *
어둠은 빛의 부재라고들 한다. 아무것도 없는, 아주 기본적인 상태인 셈이다. 그러나 란드와르의 발밑에 고인 어둠은 그런 주장을 부정하려는 듯 짙고 치밀했다.
하지만 고개를 들면 전혀 다른 광경이 펼쳐진다. 허공을 따라 흐르는 마력 갈래들은 회로 기판처럼 일정한 규칙을 지니고, 복잡하게 얽혀 있다. 마력의 빛은 와그다스 학파 특유의 금색이 아닌 바단의 암적색.
이제부터 저걸 원래 색으로 돌려놓아야 한다.
"티아!"
란드와르는 깊게 심호흡하고서는 외쳤다. 익숙한 목소리가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예, 연결 상태 괜찮습니다. 외부조 전투 정상적으로 진행중입니다.>
이곳은 능묘 지상층의 이면 세계. 테네브로즈와 볼로디아를 현계에 남겨두고는 란드와르 혼자 이공간에 들어온 상황이었다.
이면 세계의 형태 자체는, 기본적으로 현계의 능묘와 똑같다. 직사각형의 홀 한쪽 끝에는 제물대가 있고 그 반대편 끝에는 두 차원을 서로 잇는 균열이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각인 내부의 마력 흐름에 직접적으로 간섭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시작하시면 됩니다. 이면 세계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조금 다른 점 양지하시고요.>
이어지는 보고에 란드와르는 망치를 고쳐 쥐었고, 제물대를 향해 걸어갔다. 그 앞에 솟아난 살점 더미를 강하게 찍어 내리자 피가 치솟으며 뺨을 적셨다. 선혈이 어둠과 뒤섞이며 뱀의 형상으로 변했다.
란드와르는 곧바로 망치를 휘두르는 대신 조금 기다렸다. 이건 환영에 불과했다. 심장에 남아 있던 악의가 구체화된 것이다. 진짜는 원래 세계로 돌아간 뒤에 만나게 될 것이다.
이윽고 뱀이 쉭쉭거리는 소리를 내며 비아냥댔다.
[지고하신 분께서 친히 행차하셨군! 당신의 권속이 이렇게 된 걸 보니 어떻더이까?]
본신한테 하는 이야기였다. 이강현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소리란 뜻이었다.
"몰라, 씨발."
[인간의 몸에 갇히더니 기억마저 잃은 모양이지. 그 꼴로 전장에 나서다니, 용기만은 칭찬해 드리겠소…….]
뱀은 헛소리를 주절거리다가 흩어지듯 자취를 감췄다. 동시에 벽에 자라난 살덩이들이 뽑혀 나오며 서로 뭉치기 시작했다. 수액 괴물과 비슷하지만 좀 더 역겨운 형태의 돌연변이들이 그를 향해 기어왔다.
정확히는, 란드와르 뒤편의 차원 균열을 향해.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살점 돌연변이들이 균열을 넘어가지 않도록 막으면서, 마력 흐름을 방해하는 오염체를 제거하면 됩니다.>
압니다, 그걸 모르면 제가 왜 이러고 있겠습니까…….
속으로 투덜거린 란드와르는 꿈틀거리는 덩어리를 향해 망치를 휘둘렀다. 풀스윙. 망치 머리가 허공에 반원을 그리더니 엉겨붙은 살점이 육편이 되어 비산한다. 다른 놈들에게도 똑같이 한 방씩을. 벽에 날아가 붙었다가 다시 한 점을 향해 모여드는 살점.
정화를 끝마치기 전까지 살점을 완전히 죽일 방법은 없다. 이런 식으로 모이는 것들을 흩어 놓아야 할 뿐이다. 파편 하나를 꾹 눌러 밟으면서, 란드와르는 모든 게 좆같다고 생각했다. 불평은 길지 않았다. 붉은 기운이 발밑에 모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무슨 우두머리든 간에, 큰 흐름은 대개 비슷하다. 장판은 피하고 쫄은 처치해야 한다. 발밑에 뭔가가 생기면, 외곽에 깔고 돌아온다. 쫄을 장판에 올려야 할 때도 있고 빼야 할 때도 있다.
지금은 빼야 할 때다. 살점이 혈마력과 접촉하면 제압 불가 상태로 변하니까.
<엉겨붙는 혈기, 지속시간 3초 남았습니다.>
벽에 바짝 붙자마자 핏덩어리가 발끝에서 떨어지더니 그 자리에 웅덩이처럼 고였다. 란드와르는 뒤를 힐끔 보았다. 차원 균열까지 남은 거리는 20미터가량.
사실상의 타임어택인 셈이다. 재생성되자마자 바로 쪼개 놓는다 쳐도 어쨌건 살점은 계속 움직이니까. 그 와중에도 어둠은 주기적으로 깔릴 테니까.
내부조의 대원칙은 세 가지.
살점이 핏덩어리를 먹으면 안 된다.
살점이 균열에 들어가지 않도록, 최대한 막는다.
그러면서 오염체를 처리한다.
<시작하시죠.>
티아의 속삭임을 느끼며 짧게 기도했다. 아즈리온 님, 심신미약자한테 이런 부탁을 하려니 죄송스럽지만, 아무튼 잘 해 주십시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제물대에 올라선 후 천장을 향해 팔을 뻗었다. 실체화된 마력 갈래가 손가락에 잡혔다. 단번에 뜯어내자 각인을 이루는 힘이 역류했다. 핏빛 안개가 휘돌며 시야를 가리더니 공간이 뒤흔들렸다.
진동이 잦아들자마자 암적색의 마력이 쏘아져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