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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77화 (78/258)

77화 몰락의 에티카 (5)

울쿠스는 그날 바로 휴직계를 냈다. 몸이 좋지 않다고 둘러대자 캐러웨이 부인은 선뜻 수락해 주었다. 진짜 이유를 말할 기회는 며칠 뒤에 왔다. 부인이 직접 찾아왔던 것이다. 그때 울쿠스는 와인을 두 잔 반쯤 마신 상태였다.

"반가워요, 부인. 부인께서 말도 없이 찾아오신 건 처음인 것 같은데요, 맞나요?"

"그래. 네가 그렇게까지 취한 모습도 처음이구나."

"그렇게라뇨, 고작 두 잔이에요. 한 모금만 더 마시면 세 잔이죠."

부인은 거실을 둘러보다가 부엌에서 잔을 들고 나와 탁자 맞은편에 앉았다. 울쿠스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저장고에서 치즈를 꺼냈다.

"술을 즐기는 편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입에도 안 대지 않았니?"

"가끔 혼자 마셔요. 마시면 하고 싶은 말이 많아지니까요. 그래서 도움이 될까 싶어서요, 네, 해야 할 말은 한참인데 도무지 입 밖으로 나오지가 않아서, 술이라도 마셔야 할 것 같거든요."

그는 자신이 왜 이러고 있었는지 곰곰이 따져 보았다.

캐러웨이 부인에게는 사건의 전말을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생각을 했는데, 역시 말할 자신이 없었다. 아무래도 평범한 늑대인간이 감당할 내용은 아니니까. 그래서 술만 마시고 있었다.

하지만 끝까지 감출 수도 없었다. 연극 막판에 볼로디아는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스카르파를 능묘로 데려갈 텐데, 캐러웨이 부인이 영문을 모른다면야 안 될 일이었다. 란드와르에게도 허락을 받았다.

치즈 접시를 내려놓고 자리에 앉자마자 질문이 날아들었다.

"누구에게 할 말이기에 그러니."

"글쎄요, 하려면야 누구에게든 할 수 있지요. 아무에게도 안 할 수도 있고요. 항상 그랬던 것처럼요."

울쿠스는 고개를 숙이고 키득키득 웃었다. 감춰 봐야 바뀔 것도 없는데 망설이는 꼴이 스스로 느끼기에도 우스웠다. 부인의 미간이 염려스러운 듯 좁아졌다.

"저번이랑 똑같은 표정을 짓는구나. 그때도 겨울이었는데. 이렇게, 와인도 한 병이 있었고……."

"제가 이랬던 적이 있었나요?"

"아니, 저번이 아니지… 실언을 했구나."

그는 정적 속에서 한 잔을 더 마셨다. 부인의 말을 이해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일곱 해 전 겨울에, 부인은 원래 아들과 대작했겠지. 타라곤이 죽고 스카르파가 미친 그 해에.

온몸에 번졌던 취기가 삽시간에 오한으로 변했다. 부인은 아들의 죽음을 슬픈 마음으로 배웅했으리라. 하지만 그게 아들 흉내를 내는 요정이라면 어떨까. 똑같은 애도를 받을 수 있을까.

울쿠스는 지금 느끼는 불안이 피해의식일 확률을 재어 보았다. 캐러웨이 부인은 곧잘 따뜻한 말을 건넸으니까. 심지어 지금은 먼저 찾아오기까지 했으니까. 헛된 희망인지는 몰라도 그 가능성에 걸고 싶었다.

"예전에는 정말 죄송했어요. 여기 막 왔을 때, 매일 울어서 투서가 더미로 쌓였잖아요."

"그 이야기를 듣는 게 몇 번째인지 모르겠구나. 지난 일은 괜찮다고 했잖니."

"아뇨, 지금이 마지막일 거예요. 앞으로는 이렇게 사과할 수도 없을 테니까요. 참, 이 모습으로 드릴 말씀은 아니지요……."

울쿠스는 커튼을 닫고서는 환술을 풀었다. 그리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 번 운을 떼자 그다음부터는 쉬웠다. 부인의 표정을 확인하느라 멈칫거리기도 했지만 어쨌건 마음에 담아둔 내용은 모두 읊었다. 란드와르가 아즈리온의 화신이라는 것은 제외하고. 그건 이야기하지 말라고 몇 번이고 주의를 들었던 것이다.

"저를 원망하시는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이것 때문에 곤욕을 겪지는 않을 거예요. 첫째 왕녀께 부탁을 드렸거든요. 부인이나 극단 사람들에게 죄를 묻진 말아 달라고요. 그분도 아즈리온의 이름에 맹세하셨어요."

침묵 속에서, 울쿠스는 부인의 얼굴을 보았다. 뜻 모를 표정과 빛없이 어두운 눈. 그 안에 담긴 것은 요정 청년. 타라곤과는 이목구비도, 머리카락 색도, 눈빛도 모두 다르다.

또다시 뺨이 축축해졌다. 이런 순간에조차 멋없게 울고 싶진 않았는데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이윽고 그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아무 이야기나 늘어놓기 시작했다.

"저는 스카르파와 함께 죽어요. 부인께서는 한동안 곤란해지실 테고요. 제 욕심 때문에, 미안할 일만 너무 많이 하고 가네요. 하지만 그래도… 저를 너무 싫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부탁이에요. 이게 최선이었거든요. 최선을 다했는데 결국엔 이렇게 됐어요. 미안해요."

부인은 그제야 처음으로 와인을 홀짝였고, 말했다.

"그런 게 아니란다. 아들을 두 번이나, 이런 식으로 잃는 게 어떤 일일지 곱씹어보고 있었을 뿐이야. 그만큼 헛된 죽음이 어디 있겠니. 오로지, 죽기 위해 싸움에 나선다면……."

타라곤은 한 번 죽었고 되돌아왔다. 겉껍데기 안에 요정을 넣은 채로. 이제는 그 겉껍데기마저 사라지려 하고 있었다.

울쿠스는 자신이 아들의 대용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되새겼다.

"저는 그냥 요정이에요. 모든 게 원래대로 되돌아가는 거죠. 피웅덩이를 탐낸 죄는 죽음으로 갚아야 하니까요."

"얘야, 나는 타라곤이 아니라 네게 말하고 있어."

울쿠스는 부인의 눈을 보았고 거기에 담긴 자신을 마주했다. 세상이 깊고 둔한 물방울 속에서 일그러졌다. 그는 한동안, 말없이 흐느끼다가 가까스로 몇 마디를 발음했다.

"하지만, 해야 해요… 모두를 위한 일이에요."

*  *  *

스카르파에게 사람은 소음과 그림자로 이루어진 덩어리일 뿐이다.

덩어리 속으로 손을 밀어 넣으면 속내를 들을 수 있다. 하지만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를 구분하기는 어렵다. 심장이 항상 속삭이기 때문이다.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동시에 들려올 때도 있다.

따라서 스카르파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는 항상 침대에 앉아 창밖에 시선을 멈춘다. 그러지 않으면 심장을 따라갈 것만 같기 때문이다. 나머지 살덩이까지 먹어치우라고, 더 넓은 세계를 거머쥐라고 부추기는 울림을.

울쿠스를 눈앞에 둘 때에만 스카르파는 삶을 되찾는다. 그가 요정인지 늑대인간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지러지는 세상 속에서 그 하나만큼은 형태를 갖추고 있어서, 그가 언제나 자신만을 떠올리고 있어서 고마울 뿐이다.

마지막으로 울쿠스를 만난 후로 얼마인지 모를 시간이 흐른다. 그림자들이 스카르파를 부축해 어딘가로 옮긴다. 모든 순간이 아득하게 느껴지더니 단번에 정신이 되돌아온다. 오늘은 군부 축연이 있는 날.

그녀의 곁에 있는 것은 검은 머리카락의 아이.

아이는 의자를 밟고 일어선다.

아이는 스카르파에게로 팔을 뻗는다.

스카르파는 아이를 감싸 안고, 속삭인다.

아주 깊은 잠을 자게 될 거라고.

깨어났을 때는 연극도 모두 끝나 있을 거라고.

아이의 몸이 솜인형처럼 허물어진다.

*  *  *

연극은 꽤 그럴듯했다.

무대를 돋보이게 만드는 건 배우의 연기력뿐만이 아니었다. 환영 전문 마법사들이 특수효과를 뿌려대고 있었던 것이다. 달과 별이 허공을 수놓다가 한순간에 사라지더니 짙은 안개가 무대를 덮쳤다.

물론 환영 마법의 특성상 한계가 있긴 했다. 환영으로 만들어낸 기물은 모두 반투명이었으니까. 게다가 자세히 보면 실이 여럿 달린 것까지도 확인할 수 있었다. 시전자에게서 뻗어 나온 마력 갈래였다.

하지만 마냥 즐기기에는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볼로디아가 정체를 드러내기 전에, 울쿠스를 먼저 능묘에 보내 두어야 했던 것이다.

란드와르는 1막이 끝나자마자 울쿠스를 데리고 나왔다. 테네브로즈도 함께였다. 그는 건물 뒤편으로 돌아 나온 다음 따라온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이제 뭐 해야 하는지 알지."

울쿠스는 14번가의 늑대 석상을 써서 능묘에 먼저 가 있을 예정이었다. 스카르파가 녀석과 함께 움직인다면 캐러웨이 부인이 곤란해질 테니까. 진상은 급한 일이 끝난 다음에 밝혀도 괜찮았다.

"예. 바로 달리면 3막이 끝나기 전에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한 달 사이에 이야기를 몇 차례 더 나눈 덕분에 울쿠스의 태도는 꽤 차분해져 있었다. 체념이나 수긍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단호함이 느껴졌다.

"후회는 없냐. 죽으러 가는 거잖아. 혹시 승산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만약 도망쳐서라도 살아남는다면, 원하지 않는 곳에서 원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야겠지요. 가장 만족스러울 때 끝을 보려 해요."

"그러냐."

그냥 보내기보다는 마지막 대화라도 나누는 게 도리일 듯해서 던진 말이었다. 곧바로 후회가 올라왔다. 죽음을 앞둔 상대에게 이러는 것이야말로 못할 짓이 아닌가 싶었다.

"내가 너랑 이래도 되는지 모르겠다."

"어떤 뜻으로 하시는 말씀이신가요?"

"어쨌든 결과는 똑같을 텐데 괜히 쓸데없는 질문이나 하고 있는 것 같아서 그래."

"요정 한 명이 받기에는 과분한 관심이라고 생각합니다."

다행히도 울쿠스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녀석은 잠시 말을 멈추고는 하늘로 시선을 옮겼다. 막막한 어둠을 배경으로 색이 서로 다른 별 몇 개가 드문드문 떨어져 있었다.

"할아버지께서는 별점술에도 능하셨습니다. 한 사람의 앞날을 점칠 때는 명반을 쓰셨지만 밤하늘을 보면서 세계의 운명을 읽기도 하셨지요. 별의 움직임과 위치를 보면 신들의 뜻을 엿볼 수 있다고요."

"내 뜻이 널 죽이는 거고, 그게 네 운명이니까 받아들이겠다는 거냐."

"세계의 운명을 결정하는 건 결국 신들의 의지입니다. 필멸자의 마음이 아니지요. 그리고 저는, 정말로 분에 넘치는 은혜를 입지 않았습니까……."

지금까지의 전개가 란드와르의 뇌리를 스쳤다.

흰둥이 저항군을 죽이지 않기로 결정했던 것. 울쿠스가 극단적인 마음을 품었을 때에도, 어떻게든 설득에 나섰던 것. 그래서 모두가 동의하는 결론을 이끌어낸 것. 이런 식으로 얼굴을 맞대고 있는 것까지.

거기에 울쿠스의 지분이 아예 없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지금조차도 그랬다. 녀석이 14번가로 가지 않고 그대로 내뺀다면 계획이 심각하게 꼬일 테니까. 아니, 그 이전에, 울쿠스가 스카르파의 곁에 남지 않았더라면 일이 모두 어그러졌을 테니까.

그러니까, 운명보다는 정답이라는 단어를 쓰는 게 더 적절할 것 같았다. 세상사에 완벽한 정답이란 없다지만, 정답에 한없이 가까운 최선은 있기 마련이다. 최소한 이강현이 믿기로는 그랬다.

"요정아, 이제부터 나는 좀 쓸데없는 소리를 할 거야."

"예?"

"당연히 이 판을 짠 건 나야. 저항군들을 안 죽인 것도, 너한테 여지를 준 것도 나지. 그런데 선택을 한 건 결국 너거든. 넌 배신을 할 수도 있고 지금 도망갈 수도 있는데 안 그러잖아. 그러면 이건 운명이라기보다는… 정답인 거야."

"정답이라고요."

울쿠스는 잠시 생각하더니 그 단어를 반복했다.

"나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결과를 내려고 노력해. 너도 나랑 같은 정답을 봤고 같은 판단을 한 거야. 그러니까, 운명에 휘둘렸다고 느끼는 것보다는, 네 뜻과 내 뜻이 일치했을 뿐이라고 믿는 게 좋지 않겠냐."

말장난이거나 정신승리일지도 모르겠지만, 이 말은 해 주고 싶었다. 비장한 사명을 짊어지고 죽으러 가는 놈인데. 꼭두각시로 죽는 것보다는 자기 의지로 죽는 게 훨씬 낫지 않나…….

"아즈리온의 화신에게서 이런 이야기를 들을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알아서 생각해."

짧은 침묵이 있더니 읊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렇게 말씀하시더라도, 싸우는 시늉만 하다가 목숨을 내어주진 않을 겁니다. 저는 스카르파에게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왕의 편에 설 사람은 저뿐입니다……."

"그러냐."

"그러니까, 당신께서도, 당신의 세계에 최선을 다했으면 좋겠습니다."

요정이 아즈리온의 화신에게 남기기에는 건방진 말이었다. 하지만 그걸 가지고 갈굴 마음은 딱히 없었다. 어차피 본신도 아닌데.

"알았으니까 가라. 늦겠다."

란드와르는 피식 웃었고, 요정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울쿠스는 그를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테네브로즈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약속을 어길 분은 아니라 믿고 있습니다."

대답을 들을 의도는 아니었는지 녀석은 곧바로 달려 나갔다. 란드와르는 멀어지는 뒷모습만을 지켜보다가 툭 질문을 던졌다.

"무슨 약속 했냐?"

"일단은 딤 나겔을 건드리지 않겠다 했고, 부모 이야기를 해 주겠다고도 했습니다. 몸은 죽더라도 하루 이틀은 혼이 남아 있으니까, 마법을 쓰면 대화를 나눌 수가 있지요."

죽은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마법이 뭐가 있더라? 란드와르가 알기로는 야스와다 학파에 하나가 있었다. <저승닻>. 억지로 시체를 되살려내서 말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 꼴을 떠올리자니 미간이 좁아졌다.

"쟤한테 저승닻 걸겠다는 소리냐."

"그건 심문을 위한 마법이지요… 다른 주문을 알고 있습니다."

"무슨 주문이냐."

"뜻만을 전하는 겁니다. 야스와다에서는 자주 쓰이진 않습니다. 벨레다의 반지에 각인된 것과 비슷한 주문이지요."

란드와르는 표정을 풀고서는 수긍한 투로 고개를 끄덕였다. 헤이딘은 소리를 내지 않고서도 벨레다에게 뜻을 전하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딤 나겔은 몰라도, 두 번째는 꼭 지켜야 된다. 죽을 놈 소원인데."

"여부가 있겠습니까."

목숨을 거둔 다음에야 진실을 알려주겠다는 발상이 참 녀석다웠다. 짜증을 내지는 않았다. 테네브로즈에게는 테네브로즈의 방식이 있었고 울쿠스는 거기에 동의했다. 그렇다면 그건 란드와르가 간섭할 부분이 아니었다.

거기에서 생각을 멈추고 시가를 빼어 물었다. 어차피 3막까지는 시간이 조금 남았으니 한 대 태우고 들어가야겠다 싶었다. 한동안 허공에 연기만 자욱하더니 테네브로즈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나으리께서도 곧 죽을 녀석에게 엄청난 말씀을 하셨습니다."

"곧 죽을 테니까 말이라도 잘 해 준 거야."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는데요."

"내 기분이 좋지."

악당에도 종류가 있는 법이다. 그냥 비겁하고 무책임한 놈이 있는 반면 소신과 신념을 갖춘 놈이 있다. 후자에게는 예우를 갖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울쿠스를 테빈이나 아드벡 같은 놈이랑 똑같이 취급할 수는 없었다.

"기분이 그렇게나 중요합니까."

"나는 사람 죽이는 거 안 좋아해. 찝찝한 느낌은 최대한 없애려는 거야."

"피를 볼 일이 한참이나 많을 텐데요. 그럴 때마다 사연을 듣고 격려사를 남길 생각은 아니시겠지요."

하여간 쓸데없이 신랄한 새끼였다. 란드와르는 시가를 깊이 빨아들이며 마음속으로 푸념을 중얼거렸다.

알지, 당연히 알지. 지금은 여유를 부리는 거고, 나중 가면 고기 다지듯 요정들을 죽이게 되겠지. 아직은 핵심 시나리오 중에서 하나만을 겨우 끝냈을 뿐이니까…….

"그때가 되면 또 태도가 바뀌겠지."

"지금은 그러지 않으시는 이유가 궁금한데요."

"안 그래도 일처리가 되니까. 최대한 안 그러고 싶어."

언젠가는 동정심이고 죄책감이고 폐기해야겠지만, 사고방식이라는 게 하루아침에 바뀌는 게 아니었다. 테네브로즈는 란드와르를 빤히 바라보다가 한 문장을 툭 던졌다.

"복잡한 마음은 불편하군요."

"네가 너무 단순한 거야."

현대인 이강현의 마음과 요정 테네브로즈의 마음 사이에는 엄청난 거리가 있었다. 그 사이의 어딘가에는 화신 란드와르에게 적합한 마음이 있을 터였다. 정확한 지점을 찾긴 어려웠다.

생각을 뻗어나가던 그는 티아의 속삭임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제 3막이 시작됩니다. 들어가서 준비하고 계셔야겠어요.>

*  *  *

란드와르는 곧바로 시가를 끄고서는 공연장으로 돌아갔다. 온갖 사람들이 무대 뒤편에서 분주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간이 의자에 앉아 있던 볼로디아가 가면을 살짝 들어올려 시선을 맞췄다.

"돌아오지 않을까 걱정했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볼로디아의 배역은 아즈리온.

아즈리온은 극 중간중간에, 늑대 가면을 쓴 모습으로 등장한다. 대부분의 대사는 첫 번째 왕을 향한 조언이다. 분량은 적을지라도 중요한 배역이다. 연극의 피날레를 알리는 것 역시, 아즈리온의 예언이다.

"준비는 되셨겠지요."

그렇게 물은 란드와르는 앞으로의 전개를 머릿속에 그렸다.

3막이 끝나갈 무렵, 볼로디아는 다시 무대에 오르게 된다. 극의 마지막을 장식하기 위해. 그녀는 수정되기 전의 대사를 읊은 다음 군부 중진들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테네브로즈가 환술을 풀면 볼로디아는 가면을 벗어던진다. 그 아래의 얼굴은 인간 사제 타우베스가 아닌 말루카의 첫째 왕녀. 천사가 볼로디아의 결백을 증명하고, 스카르파는 최후를 맞이하기 위해 능묘로 걸음을 옮긴다.

말루카의 최종장이 눈앞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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