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몰락의 에티카 (4)
강현은 며칠간 일어난 일을 복기했다.
매튜 스커더풍의 하드보일드 탐정 겸 사무원이 되었고, 심리 상담을 한판 벌인 다음, 영세기업 계약직의 비애를 실감했다가, 이제는 또 게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정신 상태에 일관성이라는 게 있어야 하는데. 뇌가 카멜레온으로 변해가는 기분이다. 아무튼. 아무튼, 당면한 문제에 대해서만 고민하도록 하자.
이 로스터로 능묘 공략에 나서도 괜찮을지가 슬슬 불안해지고 있었다. 방어 담당과 근원거리 공격수가 하나씩. 게임적인 면에서 씨어리크래프팅(Theorycrafting)을 해 봐야 했다.
일단 선조의 영령만 어떻게든 통과하면 그다음부터는 비교적 쉬울 터였다. 영령으로 강화된 볼로디아는 란드와르와 거의 동급의 성능을 보였으니까. 이론적으로는 이 셋만으로 인스턴스를 주파하는 게 가능했다. 이론적으로는.
게임에서의 볼로디아는 방어 전담으로 분류됐지만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선조의 힘을 이어받기 전까지는 수호 능력이 활성화되지 않았던 것이다.
치유사를 구하지 않은 게 아쉬웠다. 저장도 불러오기도 안 되는 세상에서는 보다 신중해져야 했다.
큰 패턴은 테네브로즈의 보호장으로 넘긴다 쳐도, 그건 정신 집중을 요구하는 주문이었다. 도중에 다른 공격 마법을 시전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자잘하게 누적되는 피해를 감당할 방법도 필요했다.
물론 볼로디아의 정체를 밝힌 뒤에는 군부 치유사를 끌고 갈 수 있겠지만, 생판 처음 본 사람에게 뒤를 맡겨도 될지가 의심스러웠다. 게임에서 임시 동료를 고용하는 것과는 느낌이 달랐다.
강현은 멀리 생각을 뻗어 보았다. 말루카의 검문을 쉽게 통과할 수 있으면서, 믿을 만하고, 실력까지 좋은 지원가.
정답은 뜻밖에도 가까운 곳에 있었다.
헤이딘을 데려와야 했다.
* * *
요정 신은 두 가지 형태를 지닌다. 하나는 신위에 내재된 본상이며 다른 하나는 필멸자로서의 자아상이다. 이시 첼이 핏빛 뱀에 올라탄 여자로서 나타나는 것처럼.
와그다스의 주인, 슈문은 허공에 둥둥 떠 있는 종이 구체이자 검은 머리의 요정 소년이다. 그는 공격적인 전투에는 아무 능력이 없는 대신 공간 제어와 수성에 통달해 있다.
와그다스의 학자들은 슈문의 가르침에 따라 세계를 논리의 총합으로 이해한다. 모든 상태와 공간은 해석 가능한 명제의 집합이며 이러한 명제는 연결사를 통해 합성되거나 분리될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은 조건과 부정, 연산자와 기호를 통해 공간과 상태를 제어한다.
와그다스의 전투용 주문은 세 개의 대분류로 나뉜다. 피해를 감소시키는 <수호 영역>과 신의 영토를 현계에 덧씌우는 <차원 분리>, 그리고 대상의 상태를 보존하고 재현하는 <재정렬>이 그것이다.
* * *
"뒤에서 지원만 하라는 말씀이십니까?"
"무슨 소리냐. 너는 너대로 마법 쓰고 헤이딘이 따로 받쳐 주는 거지."
"그래도 말입니다. 결국 이 녀석은 못 쓰겠군요."
테네브로즈는 아쉬운 듯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용 비늘 부적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끼고 다닐 시제품이었다. 효과는 헤이딘의 반지처럼, 영혼을 담는 것.
하지만 각인이 새겨진 물건은 착용에 제한이 있었다. 각인은 기본적으로 주문을 물체에 고정시키는 기술. 주문이 경유하는 마력 경로가 서로 겹칠 경우에는 충돌이 일어났다.
물론 충돌이 난다고 해서 장비 자체가 망가지는 건 아니다. 반나절에서 하루 정도, 각인이 일시적으로 효과를 잃을 뿐이다. 일상으로 따지면 짧은 시간이지만 전투 도중에 동작이 멈춘다면 치명적이다.
"그러려니 해라. 안 다치고 살아 있기만 하면 되는 거야."
계획은 이랬다. 어차피 수도원에서는 목숨이 위험해질 일도 없으니까, 나갈 때는 호위 사제를 붙여줄 수도 있으니까, 벨레다는 세카두에 남겨두고 헤이딘의 반지만 따로 받아 온다. 충돌이 일어나지 않도록 시제품 반지는 빼 둬야 한다.
제물용 영혼 슬롯이 사라지는 건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피해량이 부족해서 못 깰 우두머리는 아니니까. 게다가 예비용 제물이 없더라도 야스와다의 하위계 마법은 얼마든지 쓸 수 있다.
"그 늙은이가 우릴 제대로 살릴지 모르겠습니다."
"일단 추적대 출신이잖아. 카스바에서 놀고만 살지도 않았을 테고."
와그다스 학파의 마법은 미궁 제작과 각인술에 특화되어 있지만 전투에 쓸 수 있는 종류도 따로 있다. 계열은 세 가지. 수호 영역과 차원 분리, 그리고 재정렬.
수호 영역은 데미지 감소 장판이고 차원 분리는 무적기다. 모든 공격을 피하지만 상대를 공격할 수도 없는 무적기. 재정렬은 한 사람의 상태를 기억해 뒀다가 그 시점으로 되돌리는 효과가 있다. 쿨다운이 길긴 해도 큰 부상을 완전히 무효화할 수 있는 게 장점이다.
자잘한 건 수호 영역으로 버티고, 큰 패턴은 차원 분리로 넘기고, 피할 수 없는 부상에는 재정렬을 쓴다. 여기에서 제일 어려운 주문은 차원 분리다. 시전 타이밍을 잘못 맞췄다가는 리스크가 크니까.
"큰 기대는 안 해. 그래도 재정렬이랑 수호 영역만 재깍재깍 써 줘도 없는 것보단 낫지."
"그건 그렇습니다만… 순순히 따라올지가 의문인데요. 나으리께서도 늙은이 성격은 아시잖습니까."
실제로 헤이딘은 대학교 랩실에나 틀어박혀 있으면 딱 좋을 유형의 인간이었다. 학부생에게든 대학원생에게든 또라이라고 욕을 퍼먹지만, 몇몇 천재들에게는 은사가 되는 교수 말이다.
강현도 학부 시절에 시달린 적이 있었다. 무슨 과목이었더라? 컴파일러 이론? 그는 잠시 박 교수를 미친 영혼들 한복판에 내던지는 순간을 상상했다. 기분이 괜찮았다. 천재들에게는 물리적인 시련이 필요했다.
"신이 오라는데 순순히가 어디 있냐, 까라면 까는 거지……."
그렇게 말을 던져 놓고 보니 또 다른 논점이 떠올랐다. 나트람 형제와 딤 나겔은 서로 사촌 관계였다. 사촌의 손자라면 재종손이 되는 셈이었다. 6촌 친척을 죽이는 건 존속살해인가?
* * *
저택의 오른쪽 가장자리 방은 헤이딘과 벨레다의 거처였다. 문을 열고 들어간다면 슈문의 영토에 앉아 있는 요정 소년을 만나게 된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사제들은 그 방을 없는 것으로 취급했고, 덕분에 헤이딘은 여기가 아즈리온 교단의 심장부라는 사실마저 잊을 수 있었다.
그는 잘 지냈다. 카스바에서 살 때보다도 훨씬, 잘. 노예시장처럼 하찮은 문제로 골머리를 썩이는 대신 각인 설계와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펠로시도 요새는 수업을 꽤나 잘 따라오고 있었다.
란드와르가 돌아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미안하오만, 잘못 들은 것 같소."
"말루카에 다녀오자고 했습니다. 벨레다에게 허락도 받았어요. 어차피 반지 내부는 슈문의 영토와 연결되어 있다고 들었습니다. 테네브로즈와 함께 다니다가, 쉴 때는 여기로 돌아오실 수 있는 겁니다."
그제야 꽃밭을 헤매던 정신이 되돌아왔다. 헤이딘은 이곳에 온 것을 후회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아늑한 연구실이었지 영광스러운 무용담이 아니었다. 물론 누군가는 세상을 구해야겠지만, 그 일의 중요성은 의심치 않았지만, 용사가 꼭 자신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나보다는 정보사 사제들이 도움이 되지 않겠소?"
"눈에 띕니다."
더 논의할 필요가 없다는 투였다. 헤이딘은 입을 벙긋거리다가 펠로시를 보았다. 흥미진진하다는 듯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벨레다에게는 허락을 받았다고 하니 기댈 곳이 여기밖에는 없었다.
"얘야, 우리가 추론규칙에서의 전칭기호와 존재기호까지 진도를 나갔지? 중요한 부분이야. 네 기억력은 좋은 편이 아니니까, 수업을 멈추면 곧바로 잊고 말 텐데……."
"저처럼 기억력 나쁘고 멍청한 늑대인간 하나 가르치는 것보다는 그게 더 중요하죠. 복습에 예습까지 꼼꼼하게 해 놓을 테니까 다녀오셔요!"
펠로시는 상쾌하게 웃으며 헤이딘을 향해 손바닥을 흔들어 보였다. 그는 제자 육성의 덧없음을 느꼈다. 기껏 가르쳐놓은 제자들이 스승을 팔아넘긴 것이다.
"하지만 주문을 적시적소에 쓸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벨레다에게 물어봤는데 와그다스 마법에도 능숙하시다더군요. 덕분에 여러 차례 목숨을 건졌다고 들었습니다."
헤이딘은 자신이 어쩔 수 없는 신세가 되었음을 깨닫고 고개를 떨어트렸다. 부적만 잘 만들면 될 거라고 생각했던 게 패착이었다.
* * *
테네브로즈는 손깍지로 머리를 받치고 누운 채 허공을 바라보았다. 반투명한 요정 소년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있었다.
"이야, 나무 반지에 새기기에는 호화스러운 주문들인데요. 거처를 바꾸실 생각은 없습니까? 용 비늘이 조금 남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영혼을 영구히 보존하고, 외부 세계와 소통할 통로를 만들고, 그걸 구체화시킨다. 모두가 야스와다와 와그다스의 고위계 마법들이었다. 가디스의 것도 약간 섞인 듯했다.
<방법을 알았으면 이미 했겠지.>
소년의 입이 움직였지만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생각이 직접적으로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헤이딘은 슈문의 영토 바깥에서는 이런 식으로만 뜻을 전할 수 있었다.
"영혼을 담는 법도 알아내신 분이 옮기는 법을 모르시다니요."
<스스로 고안한 게 아니다. 궁전에서 미완성 도면과 관련 주문식을 발견했을 뿐이야. 물론 개량은 내 몫이었지만…….>
기억의 궁전은 슈문이 추종자에게 베푸는 은혜 중 하나였다. 궁전은 정신세계의 형태로 존재했고, 역사상의 모든 각인 도면과 증명을 모아두고 있었다.
물론 궁전에 접근할 수 있다고 해서 세계의 비밀을 깨우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각각의 지식은 정리되지 않은데다가 끔찍하게도 방대했다. 심지어 틀렸거나 비효율적인 것까지 섞여 있었다.
관건은 필요한 것만을 찾아내 응용하는 데에 있었다. 헤이딘은 나트람에게 감금당한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궁전을 헤매면서 지냈다. 달리 말하면, 그건 제정신으로는 하지 못할 일이었다.
<수십 년을 써서 그 도면을 겨우 찾았단 말이다. 궁전 어딘가에는 분명히 영혼을 옮기는 방법도 있을 게다. 하지만 그걸 찾아내는 데에는 또 얼마가 걸릴까? 몇십 년이? 어쩌면 몇백 년일지도 모르지. 계속 찾고는 있지만 진척이 없어.>
테네브로즈는 잠시 생각하다가 질문을 던졌다.
"혹시 실물을 보면 도움이 됩니까? 같은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실물이라는 게 남아 있겠느냐.>
"있을 것 같은데요."
그는 헤이딘에게 능묘 지상층의 각인을 상기시켰다. 늑대인간 왕들의 영혼을 담아둔 각인을. 그 힘이 볼로디아에게 옮겨 가리란 부분까지 이야기하자 헤이딘의 표정이 부쩍 밝아졌다.
<어떤 원리인지는 봐야 알겠지만, 보고 싶구나. 꼭 데려가 주어야 한다. 모두 조사하려면 하루 나절은 걸릴 게야.>
"아니, 작은 어르신, 우리가 갈 곳이 거기란 말입니다. 나으리께서도 말씀하셨을 텐데 완전히 노망이 나셨군요."
<뭐라고?>
"이젠 귀까지 먹으셨습니까?"
헤이딘은 그제야 란드와르의 설명을 되새겼다. 반신에게 맞서야 하니 뒤에서 수호 영역이나 잘 깔아 달라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났다. 그 전에 역대 왕들의 영령과 싸워야 할 거라고도.
이번에는 수긍이 빨랐다.
<그래, 알겠다. 아즈리온이 바로 곁에 있는데 반쪽짜리 요정 신쯤이야 두려울 것도 없지.>
"울쿠스 이야기는 하지 않으시는군요."
<반신을 거든다는 요정 말이냐? 나는 요정들은 잘 모른다. 누구인지 알고 싶지도 않아. 들어 봤자 금방 잊어버리거든.>
"그 기억력으로 각인은 어떻게 새기시는지 궁금합니다."
<내가 별채에서 본 요정들은 하인 둘과 형님밖에 없었단 말이다. 사람을 기억하는 데에 쓸 정신까지 각인 설계에 쏟았어. 평생의 반절을 그렇게 살았는데, 바뀐 게 없으면 그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겠느냐.>
분명히 예전에는 많진 않아도 친우라고 부를 수 있는 상대가 몇몇 있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모두 희미했다. 얼굴이나 이름은 물론이고, 그 존재 자체가. 누군가가 있었다는 사실만 겨우 떠오를 뿐이었다.
머릿속에 남은 건 나트람에 얽힌 몇몇뿐. 그의 맏딸과 두 아들. 딤 나겔과 테네브로즈, 러스터와 딜지, 그리고 쉭겐…….
"딤 나겔의 손자라면 아시겠습니까?"
테네브로즈가 한 문장을 더하고서야 겨우 기억이 났다. 란드와르가 이 이야기도 했는데, 경황이 없어서 그냥 넘겼던 듯했다.
<그 애가 태어나기도 전에 별채에 갇혔다. 말을 섞어본 적이 있기는커녕 얼굴도 몰라. 내가 무슨 소리를 할 수 있겠느냐.>
그는 말을 매듭짓고서는 우중충한 침묵에 빠졌다.
딤 나겔은 헤이딘이 기억하는, 얼마 안 되는 요정들 중 하나였다. 나트람의 존재는 미묘하면서도 강렬한 동질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간다면 딤 나겔은 형제에게 피붙이 둘을 잃게 되는 셈이었다. 나트람은 딤 나겔의 딸을 죽였고 헤이딘은 울쿠스의 목숨을 거두는 데에 일조할 예정이므로.
어쩔 수 없는 결말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딤 나겔도 이 일로 헤이딘에게 원망을 품진 않을 터 였다. 신중하고 현명한 사람이니까.
하지만 만약, 야스와다에서 그를 마주한다 치면…….
<우리가 고향에 돌아갈 일이 생길까?>
헤이딘은 한숨을 내쉬듯 질문을 던졌다.
"그럴지도 모르지요."
<딤 나겔의 피를 볼 일은?>
테네브로즈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일었다.
"그러지 않기로 약조했어요… 주인님의 명예가 걸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