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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75화 (76/258)

75화 몰락의 에티카 (3)

란드와르는 먼저 떠났고 상담실에는 요정 둘만 남아 있었다. 울쿠스는 비교적 사소한 잡담을 이어가다가 주머니에서 지혜의 고리를 꺼냈다. 마구잡이로 엉킨 채였다.

"이건 돌려드리겠습니다.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마땅치 않을 것 같아서요."

이 방을 나가면 곧바로 캐러웨이 부인을 만나 휴가 이야기를 꺼낼 작정이었다. 그 다음부터는 사무실에 얼굴을 들이밀 일이 없어지는 것이다.

"시간은 조금 남았는데, 못 풀었군."

"앞으로도 안 될 것 같아요. 포기했습니다."

"방법을 알려주지. 어렵지 않아."

테네브로즈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얽힌 매듭을 모두 풀어낸 뒤 구멍을 따라 줄을 교차시키기 시작했다. 검고 흰 구슬이 줄을 따라 움직이며 서로 위치를 바꾸길 반복하더니 울쿠스가 보기에도 꽤 그럴듯한 모양이 나왔다.

"자, 마지막으로 이곳에 있는 매듭을 당겨주면……."

그러고는 줄이 다시 엉켰다. 테네브로즈는 보란 듯이 지혜의 고리를 검지로 쥐어 들고는 빙긋 웃었다.

"안 돼."

"예?"

"원래 저 장난감은 줄만을 움직여서 풀 수 있는 게 아니야. 정답을 알려주지."

일전에 들었던 설명이 울쿠스의 뇌리를 스쳤다. 몇 개의 구멍에 줄을 꿰어둔 사각판. 줄에는 희고 검은 구슬이 매달려 있고, 한쪽으로 두 구슬을 모두 모으면 된다.

당혹감과 배신감이 밀려왔다. 그는 멍하니, 테네브로즈의 손가락이 움직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사각판 양옆을 잡고 비틀듯이 힘을 주자 판이 반으로 접혔다. 그리고…….

"이렇게 판의 형태 자체를 틀어 놓아야 한단 말이야."

"도대체 저한테 왜 그러십니까?"

울쿠스는 그간 쌓인 울분을 벌컥 터뜨렸다. 이 추적자가 상상했던 것과 같은 악당인지 아닌지는 이제 딱히 중요하지도 않았다. 소년 흉내를 내고 답 없는 문제를 던져놓는 악취미의 근원이 궁금할 뿐이었다.

테네브로즈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

"이건 평범한 장난감이 아니야. 저승을 상징하는 성물이지. 제국 시절의 부장품이거든. 그대의 선조들 중 몇 분도 무덤에 이런 껴묻거리가 있을 테고. 삶을 속이려 들었다가 끝내 굴복한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훈장이야."

"그렇습니까."

곧바로 분노가 누그러졌다. 추적자의 저의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이 남아 있었지만, 이런 이야기라면 들을 가치가 있었다. 어쨌건 그는 울쿠스가 살아온 시간만큼을 더 겪었기 때문이다.

"판 자체를 비트는 게 아니라면 실만으로 구슬 두 개를 같은 쪽으로 옮겨놓기는 불가능해. 여기에서 실은 사람의 의지를 의미하고, 두 개의 구슬은 소망이거나 과업이 돼."

"그렇다면, 사각판은 무슨 의미입니까?"

울쿠스는 잠시 생각하다가 되물었다.

"세계의 질서지. 한 명의 힘으로는 바꿀 수 없는 것들 말이야. 요정 소년에게는 야스와다의 규칙이 되겠고, 지금의 그대에게는 신의 뜻이겠군."

"받아들이란 말씀이셨군요. 반박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는 어조가 울적해지는 것을 느꼈다. 테네브로즈는 뜻모를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다가, 지혜의 고리를 가볍게 던진 뒤 다시 받았다.

"만상은 보통 이런 식이야. 필멸자들은 욕심을 부리기에는 너무 작고 하찮으니까. 하지만 그대의 생각만큼 무력하진 않지. 처참한 패배에서조차 무언가가 자라나기 마련이거든. 그건 때때로, 다른 삶을 억누르는 질서를 완전히 바꿔 놓기도 해……."

테네브로즈는 사려 깊은 태도로 요정 젊은이를 응시했다. 거창한 대의나 사명을 짊어지기에는 너무 심약한데다가 정의롭지도 못한 청년을. 그러나 두 악덕이 없었더라면 지난 여섯 해도, 이런 결과까지도 없었을 터였다.

"그대는 일상을 잃겠지만 반신의 사랑은 얻었어. 늑대인간도 모두, 그대의 이름을 기억할 테지. 이 정도면 요정 한 명이 이뤄낸 일로는 충분한 게 아니겠나?"

*  *  *

"그렇군……."

소식을 전해들은 볼로디아는 그렇게 중얼거리고서는 한동안 멈춰 있었다. 침묵이 흐른 후 똑같은 낱말이 다시 허공을 쳤다.

"그렇군."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극본을 가져온 뒤 란드와르가 볼 수 있도록 펼쳤다. 일전에 들었던 설명처럼 마지막 장의 마지막 장면은 아즈리온의 대사로 끝나고 있었다. 왕의 후손이 대대로 능묘를 수호하리라는 내용.

"저번에도 말했다시피, 이 뒤에는 예언이 하나 더 있었소. 붉은 머리를 가진 아이가 태어나서 늑대인간을 해방시킬 거라고."

"기억이 납니다."

"항상, 당신이 내게 심장을 취하라고 했을 때부터, 공교롭다는 생각을 했소. 스카르파가 그렇게 된 탓에 당신과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이니 말이오."

인과의 사슬을 꿰어 맞추려면 먼 과거를 거슬러 올라야만 했다. 스카르파가 붉은 머리가 아니었더라면 과분한 기대를 받았다가 버려지는 일도 없었을 것이므로.

마요르가가 스카르파에게 가혹하지 않았더라면, 타라곤과 사랑에 빠지지 않았더라면, 타라곤이 혼례 결투에서 죽음을 맞지 않았더라면. 스카르파가 심장의 꼬드김에 넘어갈 이유는 물론이고 울쿠스가 발견할 시체조차 없는 세상에서는…….

"이대로라면 나는 동생의 심장을 취하고 신위에 오르게 되오. 붉은 머리의 왕족 덕분에 늑대인간이 피웅덩이에서 풀려나는 거요. 예언이 이루어지는 셈이지. 무대에는 아즈리온의 천사까지 내려올 예정이고."

"그렇겠습니다."

란드와르는 대답을 마치고서는 마른침을 삼켰다. 볼로디아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알 듯했다.

"당신이 아즈리온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소. 하지만 천사를 불러낼 수 있으니 질문을 전할 수도 있겠지."

"말씀하시지요."

"이 모든 게 운명 아래 있었는지, 혹은 예언이 미래를 만들었는지가 궁금하오."

예언이라는 게 보통은 이런 식이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리스 신화에도 이런 이야기가 있지 않았던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동침한다는 예언을 듣고 코린토스를 떠난 오이디푸스. 그는 자신의 진짜 부모를 상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마주하게 되고…….

듣지 않았더라면 성취되지 않았을 예언들은 어김없이 비극으로 끝났다. 지금조차도. 늑대인간들에게는 희극이지만 스카르파에게는 거대한 비극이니까.

란드와르는 운명이라는 것을 생각했다. 그게 모두 신의 의지라면 신이란 인성이 처참하게 뒤틀린 개자식들이었다. 저 위에 계신 분들 입장에선 수천 수백말의 장기말 중 하나쯤이야 어떻게 되든 아무렇지도 않겠지만 같은 기물이 보기로는 그랬다.

스카르파를 괴롭히는 게 심장을 처리할 유일한 방법이라면, 입맛이 쓰긴 해도 납득했을 터였다. 하지만 이건 훨씬 합리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던 문제였다. 그냥 심장이 흡수되는 기전과 능묘 각인에 쌓인 영혼의 양을 정량적으로 파악한 다음…….

<나와서 설명 드릴까요?>

볼로디아가 듣고 언짢아할 수준이 아니라면요. 여기서 잘못 말하면 미친 신 하나 더 생기는 겁니다. 빨리 가서 시나리오 써 와요. 눈감아 줄 테니까.

<방금 전까지는 불의에 분개하시더니 이번에는 거짓말을 부추기는군요.>

댁들이 대책 없는 양아치든 뭐든 간에, 산 사람은 살아야죠. 볼로디아까지 타락하면 늑대인간들은 뭐가 됩니까…….

<다행히 그 정도까지는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는 좀 더 나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 대답과 동시에 티아의 환영이 둘 사이에 나타났다. 천계에 대한 악감정과는 별개로, 판타지 세계의 문제들에 둘러싸여 있다가 검정색 정장을 보니 묘하게 반가웠다. 천사는 볼로디아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서는 정중히 묵례했다.

"아즈리온님의 직속 부관을 맡고 있습니다. 티아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반갑소."

"질문에 대해서 답변 드리자면, 그건 예언이라기보다는 지령이었습니다. 계획 역시 따로 준비되어 있었고요."

"이게 바로 그 계획이었다는 소리가 아니길 바라오."

"아닙니다. 대전쟁 말기에, 불미스러운 사고로 해당 계획이 유실되었을 뿐입니다. 내부적인 문제로 큰 불편 안겨드린 점 사과드립니다."

"신도 뭔가를 잃어버리는군. 물건도 아니라 생각을 말이오."

볼로디아는 부언을 요구하는 것처럼 란드와르를 보았다.

"저도 위쪽에서 어떤 식으로 일이 진행되는지는 잘 모릅니다. 그래도 제 입장에서는… 아예 못 믿을 소리는 아닙니다. 사실일 겁니다."

똑같은 생각을 떠올리기야 했지만 지금까지 겪은 일들을 생각하자면 납득이 됐다. 이게 심정적으로 믿어지는 현실이 개탄스러웠다.

대전쟁의 실체를 비로소 알 것 같았다. 그러니까 그건 성격 나쁘고 단합 안 되는 것들과 일 못 하는 머저리 집단이 싸워서 머저리들이 이긴 싸움이었다. 판교 스타트업 개발자를 랜덤으로 뽑아서 신위를 줘도 이놈들보다는 세상 운영을 더 잘 할 판이었다.

어리석음을 상대할 때에는 신들의 싸움마저도 헛되노라. 누구의 말이더라? 프리드리히 실러. 오를레앙의 처녀 중에서. 맥락은 전혀 다르지만.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티아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고민이 깊은 듯했다.

"일단, 왕가의 전설이 진실이라는 말씀부터 드리겠습니다. 첫째 왕은 단순한 후손이 아니라 아즈리온님의 피조물이지요. 직접 첫 번째 왕을 빚으셨고, 붉은 머리의 아이에 대한 것 역시 그분의 의중에 있었습니다만……."

잠시 말을 멈춘 티아는 환영 너머의 어딘가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누군가에게 따로 지시를 듣는 듯했다. 밝혀도 되는 정보와 숨겨야 할 정보를 구분하고 있겠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문득 포도밭 골목에서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아즈리온 교단과 말루카 왕실은 아즈리온의 신격에 대한 해석을 두고 대립하고 있다고 했다.

― 왕가의 오래된 전설 중에는 아즈리온의 본신이 머리 아홉 개 달린 늑대라는 말이 있거든. 그 늑대가 자신의 형상을 본떠서, 직접 빚은 피조물이 첫째 왕이라는 거요.

― 아즈리온의 신격은 무예와 살육일 텐데요. 생명을 창조하는 신은 아닙니다.

― 그렇지. 그래서 왕가에서도 이걸 믿는 이들은 아주 적고, 나 역시 마찬가지지만… 그대의 부탁이니 솔직히 이야기한 거요.

교단이 틀렸고 늑대인간들이 옳았단 말인가? 어째서? 신도들에게 그런 거짓말을 할 이유가 무엇인지, 전혀 짐작이 가질 않았다… 이윽고 티아의 입이 다시 열렸다.

"지금의 아즈리온님은 심각한 제약을 받고 계십니다. 창조의 권능은 물론이고 대부분을 잃으셨지요. 의심을 사지 않으려면, 인간들이 당시의 활약상을 대부분 잊게 만들어야 했습니다. 살육과 무예의 신으로만 알려질 필요가 있었지요."

"원래부터 이 정도의 힘만 지녔다고 역사를 고쳤군. 있던 권능이 사라졌다고 말할 수는 없으니."

"그렇습니다. 이 점은 기밀로 남겨 주셔야 합니다."

"하지만 능력과 정신은 별개일 텐데. 제약이라는 게, 생각해 두었던 것을 모두 잊어버릴 정도요?"

"그렇습니다."

"그 계획을 다른 이들은 전혀 들은 바가 없고?"

"…그렇습니다."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란드와르는 불현듯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천계 놈들이 무능하고 일을 못 한다는 느낌을 받은 건 단순한 기분이 아니었다. 일을 못 할 실체적인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다른 신들은 세상에 직접 개입하지 못한다.

화신을 내려 보낼 수 있는 건 아즈리온뿐이다.

심지어 제약을 받기 전에는 생명을 창조할 능력까지 있었다.

그만큼 아즈리온은 중요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만신전의 핵심이라 봐도 무방할 터였다.

그런데 그 핵심이 맛이 가 있으면?

여기에 비하면 아즈리온의 본상이 인간인지 머리 아홉 개 달린 늑대인지는 사소한 문제였다. 이걸 지금까지 알려주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뒤통수가 얼얼했다.

"자세한 부분은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만, 저희로서도 최선을 다하고 있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볼로디아는 티아를 뚫어져라 노려보다가 란드와르에게로 눈길을 옮겼다.

"이런 이야기를 감히 믿어도 될지 의심스럽소."

"저도 처음 듣는 내용입니다만, 예. 이것도 사실일 겁니다."

하지만 감춘 이유만큼은 납득이 갔다. 진실을 알았더라면 다들 계약서에 도장을 찍기 전에 도망갔을 테니까. 이토록 삐걱거리는 조직에 명운을 걸 사람은 도박중독자밖에는 없다…….

생각을 해볼 때였다. 일단 불미스러운 사고가 일어난 게 대전쟁 말기. 그 후로는 천 년간 줄곧, 똑같은 상태였다는 말이 된다. 그동안에 내려온 아즈리온의 화신도 자신과 비슷한 경우였겠지. 지구든 어디든, 다른 곳에서 끌려온 조력자들.

다행히도 역대 화신들은 멀쩡히 임무를 수행했다. 아즈리온의 정신이 온전치 못하고 천계 놈들이 무능하긴 해도, 그것 때문에 좆되진 않았다는 소리였다. 그러니까 자신도 할 수 있을 터였다.

아니다. 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시점에서 같은 배를 탄 셈이니까. 지금까지는 그것 때문에 발목이 잡히지도 않았으니까. 믿음이 안 간다는 이유만으로 걷어치우기에는 너무 멀리 왔다.

어차피 서른네 살 이강현에게는 잃을 것도 없다.

그러니까, 씨발, 해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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