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몰락의 에티카 (2)
숙소로 돌아온 란드와르는 티아에게서 녹취록을 건네받았다. 동족끼리만 하고 싶은 얘기라 쳐도 확인은 해야 하니까. 테네브로즈의 보고만 듣고 넘기기에는 중요한 일이었다.
목욕을 마치고서는 침대 등받이에 기대앉았다. 다섯 장 가량의 종이가 실에 묶여 있었다. 망치와 똑같은 원리라서, 쓸모가 없어지면 천계로 돌려보낼 수 있다고 했다. 대신 성흔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읽을 수조차 없다고.
"그건 뭡니까?"
테네브로즈가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너랑 울쿠스가 대화한 거."
"이럴 줄 알았습니다."
란드와르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놈한테 사찰 이야기는 한 적이 없는데. 귀에 도청기가 달려 있다거나 감시 카메라를 설치했다는 류의 고백은 누구에게 하더라도 손해였다.
"뭐, 천계에서 감시하는 거 알고 있었어?"
"신들은 종복을 통해 세상을 들여다봅니다. 그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그런 식으로 포장해 놓으니까 또 타당하게 들렸다. 란드와르는 내키지 않는 투로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종이를 천천히 넘겼다. 눈여겨볼 점 없이 또라이같은 대화가 몇 줄. 그리고 탈옥에 대한 것이…….
― 나트람 영감이 선택받은 자들의 의회에 들어가더니 나를 치우려 하지 뭐야. 암살자들을 따돌린 다음 지하감옥으로 달려가서 포로들을 풀어줬지. 날이 밝자마자 내가 그랬다고 자백했고.
중요한 부분은 아니었지만 왜인지 뒤통수가 얼얼했다.
"너 그거 누명 아니었어?"
"무슨 말씀이십니까?"
"포로 풀어줬다고 감옥 갇힌 거."
"사람들이 안 믿어줬을 뿐이지 제가 한 게 맞는데요."
"왜 안 믿었냐."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니까요. 슈문을 따르는 녀석들이라 그런가, 마력 구속구만 풀어줬더니 알아서 잘 도망가더군요."
게임의 인트로가 뇌리를 스쳤다. 요정 사제의 죄목은 배신자와 내통하고 포로를 몰래 풀어주었다는 것. 형벌은 죽음.
하지만 잘 따져 보니 그게 누명이라는 말은 어디에도 없었다. 감옥에 갇힌 놈이 배신을 하면 그런 이유가 있기 마련이니까, 그래서 착각을 하게 된 모양이었다.
"너 왜 사실대로 말 안 했어."
"전 나으리께서 착각을 하고 계시는 줄도 몰랐는데요. 애초에 물어보지도 않으셨잖습니까."
"그러게 말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누명을 쓴 다음 억울해서 동족을 배신하기 마련이다. 그게 바로 배신자 캐릭터의 전형적인 배경 스토리기도 하고.
하지만 테네브로즈는 평범한 정신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이놈이 정상적인 사고방식으로 행동했을 거라고 믿은 게 패착이었다.
현기증을 억누르며 좀 더 읽어 내려갔다. 숨기는 게 많고 사기에 능한 새끼라서 그런지 핵심을 교묘하게 왜곡하는 솜씨가 예술이었다. 누가 보면 야스와다에 있을 때부터 아즈리온을 따라다닌 줄 알겠다.
잠깐만. 그 가능성도 아예 없지는 않을 듯했다. 감옥에 갇혔던 요정을 뭘 믿고 데리고 다닌단 말인가. 그것도 줄곧 함께할 동료로…….
<아뇨, 저희 명부에는 기존에 없던 자입니다.>
그래요? 그러면 이유가 뭡니까?
<아즈리온님께서 마음에 들어 하십니다. 정확한 이유는 말씀해주지 않으십니다만, 개인적인 호감 같더군요.>
결론을 내기는 쉬웠다. 테네브로즈는 예전부터 아즈리온을 따랐던 척 기망(欺罔)을 시도하는 사기꾼 종자였고 아즈리온은 그걸 마음에 들어 하는 신이었다. 그렇게 외울 수밖에 없었다. 이해가 가지 않더라도, 현상은 현상이니까.
하지만 뭐가 어쨌든 간에 놈이 감옥에 제 발로 기어들어간 이유는 석연찮았다.
"너 그러면 왜 그랬어."
"예?"
"그냥 다른 가문 가서 전향하겠다고 하면 됐던 거 아니냐. 정신지배가 걸린다 쳐도 나트람은 확실히 엿 먹일 수 있을 텐데. 굳이 감옥으로 걸어들어갈 이유가 없잖아. 며칠 더 살아도 어차피 사형당할 텐데."
"주인님을 만나려고 그랬던 게 아닐까요?"
란드와르는 성격이 급속도로 안 좋아지는 것을 느꼈다. 불가항력이었다.
"개 같은 소리 한다."
"나으리께서 제 충성심을 의심하시니 마음이 아픕니다."
개소리를 거듭하는 걸 보니 뭔가 있긴 있다는 직감이 왔다. 여기에서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는 건 유치원생도 안 할 짓이었다.
"내가 지금 니랑 장난하는 거 같냐?"
어조가 돌변하는 동시에 놈의 얼굴에서도 웃음기가 달아났다. 망설이는 듯한 침묵 끝에 세 문장이 돌아왔다.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은 아닙니다. 그저… 개인적인 문제일 뿐입니다."
미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놈이 울쿠스랑 처음 만나고 돌아온 직후의 일이었다. 그때도 숨기는 게 많다면서 욕을 했었지. 결론이 어떻게 났더라?
― 누구랑 뭘 하고 살았는지는 안 묻는다. 앞으로도 그럴 거야.
― 예.
― 대신 뭔가 하기 전에는 무조건 나한테 설명한 다음 허락을 받아. 지금처럼 일 다 끝내고서 사실은 이랬습니다, 하지 말고. 그러지 않으면 난 너를 수도원에 가둘 수밖에 없어.
그 말대로라면 여기에서 멈춰야 했다. 나트람을 들이받지 않고 냉큼 감옥으로 들어간 건 지금 일이랑은 딱히 관련이 없으니까. 단순히 요정 특유의 은원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니, 관련이 없나? 애초에 아즈리온이 이놈을 주운 것부터가 그것 때문인데…….
그냥 넘어갈 일인지, 끝까지 파헤쳐야 할 문제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이렇게 의뭉스러운 놈을 옆에 두는 게 현명한 일인지도. 본신이 이 새끼를 마음에 들어 하는 이유까지도.
씨발, 진짜 왜지?
* * *
테네브로즈가 수상쩍은 사기꾼이며 아즈리온의 취향이 기괴한 것과는 별개로 해는 멀쩡하게 떴다. 극단 사무실로 출근을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주무시는 사이에 변동사항이 하나 생겨서 말씀드립니다. 울쿠스가 스카르파를 만나고 왔다더군요.>
애가 실천이 빠르네. 이야기는 잘 했답니까?
<다른 신의 영향력이 짙은 곳에서는, 신도가 없을 경우 원활한 추적이 어렵습니다. 다만 집으로 돌아온 시점부터 돌려 보면… 나쁜 방향은 아니었던 것 같군요. 안심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갔더니 울쿠스가 없었다. 조금 늦나 싶더니 점심을 먹을 때까지도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개인사로 근무를 째다니 되어먹지 못한 놈이었다. 그래도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주기로 했다.
식사를 마치고 사무실 건물로 돌아온 란드와르는 일단 한 대 물었다. 뭔가를 먹을 필요도, 식후땡의 의미도 없는데 이 짓을 습관적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 놀라웠다. 아무튼. 담배연기는 머리 회전을 돕는다. 기분 문제일지라도 그렇다.
정신이 맑아지긴 했는데 생각할 게 마땅치 않았다. 지금까지 실컷 머리를 굴려서 결말을 봤으니까, 이제는 좀 쉬어도 될 것 같았다. 그러니까 머릿속으로 요정놈들 욕을 좀 해 주고, 천계 욕도 하고, 티아 씨, 듣고 있죠? 계속 들으시길 바랍니다…….
<그러실 시간에 입구 쪽으로 가 보시는 게 좋겠는데요. 울쿠스가 오고 있거든요.>
이제야 사무실로 어기적어기적 기어오는 모양이었다. 불을 끈 다음 건물 뒤편을 돌아나왔다. 아니나 다를까 울쿠스가 입구 계단을 막 오르고 있었다. 낯설 만큼 상쾌한 표정이었다.
"좋은 일 있어요? 이야기 잘 되셨나?"
그렇게 외치면서 가까이 붙자 울쿠스가 바로 얼어붙었다. 이유는 알았지만 기분이 영 좋지 못했다. 이런 씨발, 내가 지금 죽이겠다는 것도 아닌데.
"아니, 누가 보면 내가 나쁜 사람인 줄 알겠네. 당분간은 그냥 살 거니까 얼굴 펴요. 나한테 할 얘기도 있을 텐데."
"예, 그건 맞습니다만… 말씀 편하게 해 주십시오."
"공은 공이고 사는 사 아닙니까. 사무실에서는 존대를 해야지."
사무실에는 울쿠스에게 달갑지 않을 상대 하나가 더 앉아 있었다. 테네브로즈였다. 칸막이 너머에서 과자를 통째로 들고 와서 먹어치우는 중이었다. 녀석까지 끌고 상담실로 향했다.
"이거 안에서 닫으면 안 열리지?"
"아, 바깥에서 여는 걸 막으려면 걸쇠까지 닫아야 해요. 제가 하겠습니다."
"그러면 문은 됐고. 사제야, 보호장 좀 쳐 봐라."
그제야 울쿠스의 표정에 안도한 기색이 돌아왔다. 화신에게 존댓말을 듣는 상황을 견딜 수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란드와르는 녀석이 걸쇠를 잠그고 자리에 앉기까지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일 괜찮게 풀렸다는 건 들었거든. 계속 얼굴 보기도 껄끄러울 테니까 휴가 쓰고 쉬어라. 스카르파랑 이야기도 하고 안 가본 데도 가 보고 그래. 어차피 이제 일도 별로 없으니까."
"그래도 될까요? 아무리 그래도 계속 제 몫을 떠넘길 수는……."
"언제부터 그런 걱정을 했다고 그러냐. 네가 서류 보든 말든 바뀔 거 없으니까 가서 놀라는 거야. 두 달도 안 남았다. 그거 엄청 짧은 시간이야."
잠시 말을 끊고 울쿠스의 표정을 확인했다. 한 달 반쯤 뒤에 죽는다는 것보다는 그 동안 놀 수 있다는 사실에 더 큰 기쁨을 느끼는 듯했다. 저래도 되나? 당사자가 행복하다면 참견할 일은 아니지만…….
"그런데 그전에 네가 말해줘야 되는 게, 스카르파랑 나눈 대화는 우리가 정확히 몰라. 다른 신이 간섭하는 곳에서는 감청이 잘 안 된다더라."
울쿠스의 뺨에 붉은 기색이 돌았다. 본론이 나오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추적자님의 말씀이 맞더군요. 아마 스카르파는 제가 여기서 하는 이야기까지도 모두 듣고 있겠죠. 하지만, 네, 그렇게 말하고 오라고 했으니까요, 괜찮을 거예요."
란드와르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던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녹취록의 마지막 줄을 본 후로, 볼로디아와 따로 그 가능성을 논의했던 것이다. 스카르파가 울쿠스의 정체를 인지하고 있을 경우를.
"길게 이야기했어요. 제 할아버지 이야기도 했고 대장군님에 대한 이야기도 했어요. 아마 여기 온 후로 그렇게 함께, 오래 있었던 건 처음일 겁니다. 제 원래 모습도 보여주었고요. 징그럽다는 소리를 들을까 걱정했는데 신경 쓰지 않더군요."
그러더니 울쿠스는 사랑에 빠진 중학생처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기나긴 장광설은 이런 문장으로 끝을 맺었다.
"소원이 있다고 했어요. 연극에서, 마지막 대사를 그대로 해 달라고요. 그것만 해 주면 그 다음부터는 뭐든 괜찮다더군요. 그전에, 따로 부르지는 않을 거라고도……."
마지막 대사는 아즈리온이 첫째 왕에게 내린 예언이었다. 왕가에 태어날, 붉은머리 아이에 대한 것 말이다. 스카르파가 마요르가의 눈 밖에 난 후로는 대사가 수정되었다는 설명을 들은 적이 있었다.
무슨 의도인지 짐작이 가더니 의문이 하나 생겼다. 의외로 정신이 멀쩡해 보였던 것이다. 최소한 자신이 원하는 걸 파악할 능력은 되는 듯했다.
"하나만 묻자. 그러면 스카르파는 제정신인 거야?"
"잘은 모르겠지만 그렇진 않을 겁니다. 심장의 광기는… 거부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광기라기보다는 사실, 세상이 뒤바뀌는 것에 가깝거든요."
"세상이 뒤바뀐다고."
"없는 게 보이고 허공에서 속삭임이 들려오거든요. 그런데 자신에게는 그게 모두 진짜인 듯 느껴지는 겁니다. 대신 제가 곁에 있으면 심장 소리가 잦아든다고 하니까……."
"그렇구만."
스카르파의 상태가 납득이 갔다. 환각과 환청을 견디고 받아넘길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성을 유지하겠지만, 대부분은 그게 안 되니까. 자신의 감각을 의심하다가 사고방식까지 뒤틀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세상이 무너져도 어떤 건 끝끝내 남는다. 스카르파에게 남은 건 울쿠스였다. 항상 그녀를 생각하면서 전전긍긍하던 누군가의 존재가.
…종족의 벽을 뛰어넘은 사랑이 잠깐은 감동적이다 싶더니 현대인 이강현의 자아가 초를 치기 시작했다.
이게 씨발, 이렇게 감동적이고 훈훈하게 끝날 연애담이 아니었다. 결국 저항군은 치정극에 휘말려서 좆 빠지게 헛고생만 한 셈이었다. 울쿠스가 숙주로 삼은 곳뿐만이 아니라 다른 곳도 마찬가지로.
강현은 타라곤이 살아남은 세계를 상상했다. 스카르파는 순순히 결혼한 다음 때때로 애인을 만났겠지. 마요르가 왕은 늙어 죽고 볼로디아도 별 수 없이 왕위를 물려받았으리라.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이 계속되면서…….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의 운명이 연인 한 쌍의 마음에 달려 있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도 끔찍하게 느껴졌다.
지구에서는 대개, 구조와 위계에 힘이 있다. 대통령도 회장님도 직함 떼고 덩그러니 맨땅에 던져 놓으면 사람 한 명에 불과하니까. 하지만 이곳에는, 존재 자체에 힘이 있다. 정신머리가 어떻든 간에 신은 신이고 세상을 뒤엎을 능력이 된단 말이다.
그게 문제였다. 이런 씨발, 판타지 세상은 이래서 안 됐다.
<너무 냉소적인 접근 같은데요.>
갑작스러운 지적에 강현은 현실로 되돌아왔다.
그새 테네브로즈와 울쿠스는 저들끼리 사랑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 지랄이 따로 없었다. 저기에 끼어들 바에는 티아를 상대하는 게 나을 듯했다.
사회구조론적 접근이라는 겁니다.
<결국엔 지구를 설명하는 이론일 뿐이죠.>
그래서 생각만 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기 사는 놈들한테는 이런 얘기 안 해요. 말싸움을 해서 이길 일도 아니고, 이긴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고.
<원래 세계에서는 하셨단 말씀이신가요?>
거기서도 안 했어요. 애초에 전공도 아닌데다가 사회니 뭐니 깊이 생각한 적도 없어요. 그냥, 친구를 잘못 만났더니, 안 좋은 버릇이 들어서…….
강현은 거기에서 멈췄다. 티아도 더 묻지 않았다.
…그는 요정 두 놈이 길게 떠드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뭐가 어쨌든 말루카에서의 일도 마지막 장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퇴근한 다음, 볼로디아에게 스카르파의 뜻을 전하고, 군부 축연까지 기다리면 끝이었다.
공연이 끝날 때 볼로디아는 정체를 밝힐 것이다. 스카르파가 능묘로 먼저 내려가고 란드와르 일행이 그 뒤를 쫓는다. 스카르파와 울쿠스는 거기에서 죽는다. 늑대 신이 왕위에 오른다.
이토록 거창한 전개에도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게 이상했다.
강현은 질문을 던져 보았다. 자신이 지구인이라서, 이걸 게임의 연장선으로 인식하는 탓일까? 혹은 반대로, 화신 역할에 몰입해서 그러는지도 몰랐다. 이건 아즈리온의 화신에게는 평범한 업무니까.
일처리에 방해만 되지 않는다면 둘 다 괜찮은 마음가짐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어쨌거나 카스바에서 걱정한 것에 비해서는 잘 되고 있는 셈이었다. 그는 의식의 흐름을 일상적인 쪽으로 틀었다.
좋은 게 좋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