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몰락의 에티카 (1)
모두가 떠난 뒤, 울쿠스는 마지막의 마지막을 상상했다. 그게 연극이나 신화처럼 장엄하게 끝날 거라는 확신이 없었다. 스카르파는 심장을 먹고서도 여전히 혼잣말을 중얼거리기만 하고, 자신은 발악을 하다가 초라한 최후를 맞는다면 어떨까.
무엇이 어쨌건 가치 있는 죽음이라는 점은 명백했다. 어떤 식으로 목숨을 잃고 스카르파가 그걸 어떻게 느끼건 간에. 하지만 울쿠스에게는 그 형태만이 중요하게 느껴졌다.
한 줌 영혼만 허공에 남으면 이승의 일이야 아무렴 상관없는 것이 될 텐데, 그 다음부터는 모두가 살아있는 자들의 소관인데 그게 왜 그토록 마음에 걸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는 눈을 감고 좋은 생각을 사슬처럼 엮기 시작했다.
악당과 광인 하나씩이 제물대에 오르면 도시를 짓누르는 불행이 사라지며 그 번제물마저도 영예를 입을 것이니 좋은 일이로구나. 캐러웨이 부인도 흰둥이 아이들도 저항군 사람들도 모두가, 기쁨이 그 심장 속에…….
울쿠스는 의식의 흐름이 몇 갈래로 나뉜 뒤 다시 뒤엉키는 걸 깨닫고 멈췄다. 지난 며칠은 스카르파를 떠올리기만 해도 눈물이 왈칵 솟았는데 아직까지도 뺨이 건조하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야스와다의 요정들이 그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이제는 얼굴도 모를 어릴 적의 친구들. 마찬가지로 기억에 없는 부모님. 그리고 할아버지.
할아버지, 당신처럼 살고 싶지 않아 도망쳤는데 결국 똑같은 신세가 되었네요. 외줄을 타다가 이제는 낭떠러지로 구를 예정이지요. 물론 좋은 점도 있어요. 이러지 않았더라면 저는 온정이라는 게 무엇인지 평생 몰랐을 테니까요.
시간이 되돌아간다면 다른 길을 걸었을까 질문도 던져 보았지만 그건 아니었다. 만약 그랬더라도 똑같은 결정을 내렸을 것이며 똑같은 결말에 도달했을 것이다. 정해진 대본을 따라 읊는 배우처럼.
두 번째라면 초연보다는 능숙해지긴 하겠지. 최소한 아버지뻘 되는 요정에게 과자를 안겨주지는 않았으리라. 추적자님, 정말로 왜 그러셨습니까?
그는 거실 양끝을 오가며 낄낄 웃다가 한가운데에 뚝 멈췄다. 현기증이 치미는 동시에 공기가 희박해졌다. 커튼을 걷고 창문을 열어젖히자 청명한 추위가 덩어리째 밀려들어왔다.
별 몇 개가 희미하게 떠도는 하늘, 어둠으로만 이루어진 집의 윤곽들, 늑대 석상의 형형한 눈빛. 그 너머에 있는 것은 능묘로 이어지는 관문.
그리고 능묘에 있는 것은…….
여러 줄기로 나뉘어 들뜨던 정신이 한순간에 명료해졌다. 울쿠스는 서둘러 얼굴에 환술을 덧씌우고는 마력 결정 막대를 챙겼다. 스카르파를 만나야 했다.
* * *
관문 역할을 하는 것은 석상의 둥근 밑판이었다. 울쿠스는 그 위에 선 뒤 왼쪽 다리 밑의 작은 홈에 마력 결정을 살짝 잘라 넣었다. 공간 이동 각인이 작동하면서 시야가 잠깐 어두워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때에는 능묘의 복판이었다. 맞은편의 벽에서 요정 각인이 흐르듯 빛나며 희미한 황금빛을 발했다. 먼 옛날, 능묘가 세워질 적에 함께 새겨진 것이었다.
와그다스의 학자들은 영혼을 영구히 보존할 수 있도록 회로를 설계했다고 했다. 그러나 각인의 몇몇 부분은 이미 지워져 있었다. 세월 때문은 아니었다. 심장에 남은 힘이 마력을 방출하고 있는 탓이었다.
돌벽 곳곳에서 자라난 핏빛 살덩어리가 살아있는 것처럼 떨렸다.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몰랐지만 좋은 쪽은 아닐 게 분명했다. 바깥의 늑대인간들은 능묘가 이렇게 되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겠지.
심장의 나머지 부분은 울쿠스의 처지를 조롱하다가, 더 큰 힘을 거머쥐라며 속삭이곤 했다. 능묘에 오는 걸 꺼렸던 이유 중 하나였다.
지금조차도 예외는 아니었다.
[동생은 영을 다스리고 그 언니는 육을 거느리니… 피는 그 둘을 잇는 생명이노라.]
그 목소리를 기점으로 돌벽의 살덩어리들이 일제히 피를 쏟아냈다. 핏줄기는 의지를 갖춘 것처럼 울쿠스의 앞으로 모여들어 웅덩이를 이루더니 거대한 뱀으로 변했다. 뼈 장신구를 갖춘 여자가 그 위에 올라타 있었다.
[어린 요정아, 네게 피의 힘을 주마. 괴수들의 영과 육이 모두 네 몫이니, 영광과 권세를 거머쥐어라. 나머지 조각을 모으거라.]
뱀의 혓바닥이 귓가를 스쳤다. 이미 여러 차례 겪은 일이었지만 도무지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울쿠스는 정신을 다잡으려 애쓰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제가 원하는 건 승리나 지배가 아닙니다. 영광과 권세도 원치 않습니다. 저는 그저……."
그는 길게 항변할 필요가 없음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이건 모두 심장이 빚어낸 환각에 불과했다. 뱀도, 여자도. 왕실 별채로 이어지는 관문이 바로 근처에 있었다. 작동시키기만 하면 악몽이 끝났다.
[헛된 꿈을 꾸는구나. 그 아이가 네 정체를 알고서도 사랑을 베풀었을 것 같으냐? 이게 바로 하나가 될 유일한 길임을 왜 모른단 말이냐?]
하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굳은 피가 다리를 옥죄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뱀을 빤히 바라보다가, 별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심장을 얻고 스카르파를 제 손으로 죽인다면, 그래서 무엇이 남겠습니까? 곁에 아무도 없이, 홀로……."
[사소한 온정마저도 힘이 없으면 취할 수 없는 것을.]
뱀이 그런 이야기를 주절거릴 때면 울쿠스는 구역질을 느꼈다. 그에게서 온기를 앗아간 건 모두 권세나 영광 같은 것이었는데도. 나트람의 탐욕이 그랬고 딤 나겔의 역할이 그랬다. 그는 침묵을 지켰고 뱀은 계속 속삭였다.
[…힘을 주마.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얻어낼 힘을.]
순간 바닥을 메운 피가 사라지면서 다리에도 감각이 돌아왔다. 울쿠스는 답하는 대신 곧바로 반대편으로 달려 나갔다. 뱀이 그를 좇았다. 각인의 황금색 빛을 가리는 선혈. 벽을 가득 덮는.
관문 역할을 하는 것은 홀 끄트머리의 제물대였다. 그 앞에 무릎 꿇고 앉은 울쿠스는 서둘러 마력 결정을 꺼냈다. 손바닥에 얹힌 막대는 실뱀으로 모습을 바꾸더니 팔꿈치를 타고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자신의 것이 아닌 웃음소리가 가슴팍에서 거칠게 울렸다. 울쿠스는 눈물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고 실뱀을 움켜쥐었다. 뱀은 잠시 몸부림치다가 원래 형태를 되찾았다.
심장이 보여주는 환각보다는, 스카르파가 이런 세상에서 여섯 해를 버텼다는 사실이 더욱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란드와르의 말이 옳았다. 그녀를 살려두는 것은 자신만의 소망에 불과했다. 다른 누구도, 심지어 당사자도 원치 않을…….
마력 막대를 조금 잘라 제물대 구석자리의 홈에 밀어 넣었다. 각인이 작동하며 그를 다시 왕실로 옮겼다.
* * *
모서리 뒤편에 숨은 울쿠스는 살짝 고개를 내밀어 인기척을 확인했다. 밤에 별채를 지키는 건 바깥의 경비 넷뿐이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조심을 기해야 했다. 이따금 하인들이 스카르파를 돌보기 위해 새벽까지 오갔던 것이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멈췄던 숨을 내뱉고는 무너지듯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벽에 등을 딱 붙이자 냉기가 등줄기를 따라 온몸으로 퍼졌다. 빠르게 돌던 피도 차즘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평정을 완전히 되찾기 위해서는 당연한 사실들을 떠올려야만 했다. 심장의 나머지 부분이 영향을 미치는 곳은 능묘뿐이다. 이곳은 왕실 별채. 적막 속에 두런거리는 것은 오직 자신의 심장.
숨죽여 걸으면서 스카르파의 마음을 떠올렸다. 능묘에서 언니에게 최후를 맞는다면, 스카르파는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자신을 팔아넘겼다고 원망하는 게 아닐까. 혹은 오히려, 어떤 것도 느끼지 못할지도 모른다. 왜곡과 무지야말로 광기의 얼마 되지 않는 미덕이므로.
울쿠스는 스카르파가 거처하는 내실 앞에 섰고, 테네브로즈의 말이 사실이기를 기원했다… 필멸자가 감히 주인께 청합니다. 제 생각을 모두 듣고 계신다면, 제가 요정이라는 걸 알면서도 옆에 두었다면 이 문을 스스로 열어 주십시오. 제가 문고리에 닿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두 손을 모아 쥐고는 오래도록 멈춰 있었다. 기도의 끝에 있는 것은 붉은 머리의 반신. 그러나 벽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는 없었고 울쿠스는 문고리에 손을 얹을 수밖에 없었다.
그제야 처음으로 눈물이 났다. 활짝 열린 창문과, 창백한 달빛과, 침대에 걸터앉은 스카르파의 뒷모습이 얇은 물방울 속에서 이지러졌다. 울쿠스는 가까이 다가가 옆에 앉았다. 마른 손가락이 그의 어깨에 닿았다.
"줄곧 기다렸어, 요즘은 한 번도 오지 않았잖아. 너를 불러달라고 할까 싶었는데 가만히 있기로 했어… 너한테도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아즈리온도 볼로디아도 이 도시에 와 있다고 하면, 스카르파를 죽이기 위해 왔다고 하면 믿을까. 이해는 할 수 있을까. 울쿠스는 조용히 울먹였다.
"생각하고 있는 게 있으면 말해. 너는 나를 볼 때마다 울잖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솔직해지기만 하면 내가 얼마든지 도와줄 텐데."
"아니야, 생각을 조금 더 해야 해… 아직은 아니야……."
울쿠스는 고개를 가로저은 뒤 소용없을 묵상에 잠겼다. 적막 속에서, 세상이 물을 한 겹 뒤집어쓰고는 번들거렸다. 이윽고 스카르파가 그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고는 속삭였다.
"있잖아… 타라곤은 내 앞에서 눈물을 보인 적이 없어."
말뜻을 이해하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울쿠스는 고개를 홱 돌려 스카르파를 보았다.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타라곤은 나를 주인님이라 부르지도, 문을 열어 달라고 부탁하지도 않아."
스카르파의 얼굴에는 차분하고 뜻 모를 미소가 걸려 있었다. 울쿠스는 모든 단어가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그대로 굳어 있었다. 두 팔이 그를 옥죄듯 감쌌다.
"내가 항상 말했잖아, 솔직해져도 괜찮다고. 네가 조금만 솔직해진다면, 뭐든 도와줄 수 있을 거라고……."
곧이어 더 많은 생각이 몰아닥쳤다. 왜? 타라곤이 가짜라는 걸 알았더라면, 그럴 만큼의 이성이 있었더라면 왜 잠자코 있었단 말인가? 언제부터 알고 있었기에?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어. 심장이 알려줬다는 건 기억이 나. 네가 사실은 요정이라고, 남은 심장을 노리는 것뿐이라고 항상 속삭였지… 무시하기도 했고 흔들리기도 했어. 사실은 그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도 못했을 때가 더 많았던 것 같아. 하지만 마지막으로는, 네가 누구든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어."
스카르파는 잠시 말을 멈추고는 울쿠스의 귀를 만지작거렸다. 반으로 잘린 탓에 우둘투둘한 귀를. 시간이 고통스러울 만큼 느리게 흘렀다.
"타라곤이 결투에 나가겠다고 했을 때, 나는 그러지 말라고 계속 말렸어. 그럴 필요가 없다고. 살아 있어 달라고. 전날에라도 기권표를 던지라고 했어. 하지만 타라곤은 제멋대로 죽어 버렸단 말이야, 나를 내버려두고……."
귓바퀴에서 손을 뗀 스카르파는 가슴팍이 붙도록 울쿠스를 꼭 끌어안았다. 서늘한 밤공기에도 식지 않은 온기가 옷 한 겹씩을 사이에 두고 이글거렸다.
"타라곤은 그렇게 갔지. 언니도 떠났어. 나한테 그 사람들은 모든 것이었는데 그 사람들한테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거야. 아무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았지. 내 말을 들으려 하지도 않았어."
울쿠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스카르파의 목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내가 평생 동안, 정말로 가졌던 건 너뿐이었어. 네가 항상 내 생각을 하는 게 좋았어. 네가 나 때문에 행복해하는 것도, 울먹이는 것도, 나를 즐겁게 하려 애쓰는 것도… 모두 좋았어. 아마 그건 내 소원 중 하나였던 것 같아. 그래서 네게도 소원을 안겨 주고 싶었어."
완전히 다른 종류의 눈물이 울쿠스의 뺨을 타고 흘렀다. 환희일까? 환희라기에는 너무 차갑고 무거웠다. 하지만 가슴을 내리누르던 무언가가 사라진 것만큼은 분명했다. 그는 이제 아무렴 괜찮다고 생각하면서, 스카르파의 말을 기다렸다.
"언니를 만났어. 언니가 나한테 미안하다고 말했어. 그러니까 이제, 남은 소원은 하나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