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최후통첩 (4)
"나가 있을 테니까 혹시 이상한 소리 하면 한 대 때려라."
"그런 이유로 남 때리는 취미는 없습니다."
"쟤한테 하는 소리야. 너 말고."
요정끼리의 독대를 청하자 다른 둘은 기꺼이 자리를 비켜 주었다. 울쿠스는 머리를 싸매 쥔 채 끙끙 앓다가 겨우 한 문장을 토해놓았다.
"어린 척 하면서 재미있으셨습니까?"
"즐겁지 않으면 왜 그랬겠나?"
"저를 속이신 겁니다."
"이봐, 젊은 친구. 그대도 좋았잖아. 그러면 된 거야."
거짓말을 한 것은 피차일반임을 지적했더라면 수긍했을 터였다. 그 점에 있어서는 울쿠스야말로 떳떳할 수가 없으니까. 하지만 이런 대응은 이것대로 반박할 말이 없는데다가 당혹스러웠다.
"부끄럽지도 않으십니까?"
"그대도 즐겼고 나도 즐겼는데 뭐가 부끄럽단 말인가?"
그는 밑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아즈리온의 허락을 받았는데도 주먹을 날리지 않은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몸싸움이나 주문으로나 이길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키 차이가 나긴 하지만, 추적자들은 보통 체력도 좋으니까…….
"그만둡시다. 다른 이야기나 해 보죠. 아즈리온이 자기네 교단의 기도문도 제대로 못 외우던 건, 그것도 위장의 일환입니까? 의심할 생각조차 못하게 하려고요?"
"실제로 몰라. 아마 나보다도 더 교리를 모를 것 같은데. 적어도 나는 세카두에서 지내는 동안 경전들은 모두 읽어 봤거든."
"지금 신성모독을 저지르신 겁니다."
"아니, 이건 이교도가 성흔까지 받은 신자에게 할 말은 아니지. 사실을 적시했을 뿐이야."
울쿠스는 세상을 이루던 몇몇 대전제가 무너지는 걸 깨닫고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즈리온은 이런 신이 아니었다. 어떤 신이어야 하냐고 묻는다면 답할 말이 마땅치 않았지만, 아무튼 이건 아니었다.
"도대체 언제 아즈리온의 부름을 받으신 겁니까? 어쩌다가요?"
"부름을 받았다기보다는, 나으리께서 먼저 오셨어."
테네브로즈는 울쿠스의 얼굴에 의아한 기색이 떠오르는 것을 알아보고는 가볍게 미소 지었다.
"나트람 영감이 선택받은 자들의 의회에 들어가더니 나를 치우려 하지 뭐야. 암살자들을 따돌린 다음 지하감옥으로 달려가서 포로들을 풀어줬지. 슈문을 따르는 요정들이었어. 날이 밝자마자 내가 그랬다고 자백했고."
"예?"
"생각해 봐, 야스와다에는 내 영혼을 고문하고 싶어 하는 놈들이 득시글거려. 하지만 그 상황을 원치 않는 놈들도 그만큼 많지. 내가 입을 열었을 때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는 아무도 모르거든."
"또다시 평형 문제로 되돌아가는군요. 예, 이해가 갑니다. 추적자님께서 감옥에 들어가시면 가문끼리 권리를 주장하느라 일이 멈추겠죠. 그게 확정되기 전까지는 건드릴 수가 없을 테고요."
테네브로즈는 흐뭇하게 웃었다.
"할아버지에게 배운 게 아주 없진 않군. 계속 말해 봐."
"뻔한 일입니다. 누군가는 영혼이 다른 가문에게 넘어가기 전에 죽여 없애려 할 테고, 누군가는 영혼을 취하기 위해 목숨을 지키고, 아, 그만두겠습니다. 이런 생각은 끔찍합니다……."
말루카에서는 떠올릴 필요조차 없었던 역학이 울쿠스의 머릿속에서 뚜렷한 형체를 갖췄다. 거의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는데도 그랬다. 그는 입을 다물고 서둘러 주제를 옮겼다.
"야스와다의 신이 깨어났다고 하셨으니까… 아즈리온이 요정들을 청소하려 내려왔겠군요. 추적자님은 그걸 도왔고요."
울쿠스는 테네브로즈가 그전부터 아즈리온을 따랐으리라고 판단했다. 아무것도 아닌 요정족 사형수를 시종으로 들이진 않을 테니까.
따라서 지하감옥에서의 만남은 약속된 것이었으리라. 화신을 내려 보내기 전에 언질을 주었겠지. 먼저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거기까지는 계산이 쉬웠다. 테네브로즈의 입장이 마음에 걸릴 뿐이었다.
"때마침 3교구에서 소생 계획이 진행되고 있었거든. 거기에 있던 녀석들을 모두 죽였어. 그대의 혈족이 교계에 나서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지."
별점술사의 칼린카가 아이들을 먹어치웠다는 소식을 전할 때처럼, 가볍고 낭랑한 어조였다. 울쿠스에게도 요정 사회는 기껍지 못한 것이었지만 이런 태도 역시 달갑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3교구에 소속된 사제들은 이백 명이 약간 넘었다. 그만큼의 은혜가 있는 셈이었다. 원한 관계에 있는 요정들이, 서로에게 저주를 내리지 않도록 막아주는 은혜가. 하지만 테네브로즈는 그런 것쯤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양새였다.
"사랑이 야스와다를 지탱한다고 말씀하셨지요."
"그래, 갑자기 그건 왜 묻나?"
"추적자님께는 요정의 마음마저도 없는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누님들께서 저승에 발을 담글 때 함께 잃어버렸지."
울쿠스는 문득 톱니바퀴 하나가 맞물리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가문에서 쫓겨난 것과 아즈리온 사이에 무슨 관련이 있을 듯했다.
딤 나겔이 들려준 이야기는 이랬다. 테네브로즈는 어떤 신에게 자신의 누님을 바쳤고, 금지된 주문을 시도했고, 그리고…….
"아즈리온도 영혼을 제물로 받습니까?"
"주인님은 그런 분이 아니야. 이상한 질문을 하는군."
"추적자님께서 동족을 저버리신 게 언제쯤이었을지 짚어보고 있었습니다. 가문을 떠나오신 게 기점이라고 치면, 추적자님의 누님께서는……."
테네브로즈의 눈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낯설도록 신랄한 목소리가 이어 들렸다.
"여기에서 그런 걸 물어보는 게 현명한 일인가?"
확신을 얻기에는 충분한 반응이었다. 이번이 두 번째였다. 처음 만났을 때에도 테네브로즈는 누님을 죽였다는 말에 반응했다. 진상은 짐작조차 가지 않았지만, 거기에 단서가 있는 게 분명했다.
오래된 의문이 잇달아 떠올랐다. 그의 누님들. 한 명은 죽었지만 한 명은 살아 있다. 차기 가주라 불리던 청년을 쫓아낸 어둠달 일족. 금지된 주문. 그리고 다시, 자신의 부모님에 대한 것.
그들이 황무지로 떠났을 때, 테네브로즈 또한 교구에서 자리를 비웠다고 했다. 황무지를 다녀오고도 남을 시간동안. 따라서 두 가지 가능성이 있었다.
첫째.
아즈리온은 요정의 영혼을 먹어치우는 신이고, 이 사제는 제물을 구하기 위해 나트람의 밑으로 들어갔다. 사냥감을 제일 먼저 물어뜯는 건 사냥개일 수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그 사냥감은 울쿠스의 부모를 포함했다.
둘째.
아즈리온과 그의 누님들 사이에 관련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짐작할 수 있는 형태는 아니다. 무엇보다도 아즈리온은 전사들의 신이고, 금지된 주문들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그는 나트람 밑에서 첩자 역할을 하는 동시에 몇몇 요정에게는 선행을 베풀었다. 울쿠스의 부모는, 우연일 뿐이다…….
둘 다 지금으로서는 확신하기 어려웠다. 전자로 마음이 기울기야 했지만 금지된 주문이 시전되었다는 증거는 부족했다. 그리고 만약 두 번째 경우일지라도, 그가 범인일 공산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울쿠스는 잠시 고민하다가 테네브로즈를 직시했다.
"저는 스카르파와 함께 죽습니다. 바뀌지 않을 종착지가 한 걸음 앞에 있는데 현명한 선택과 어리석은 선택이 무슨 차이겠습니까… 말씀해 주시지요."
"그건 가문의 문제야. 외부인이 의문을 품을 일은 아니지."
그는 자신에게 대답을 강요할 권리가 없음을 깨달았다. 명분 또한 마땅치 않았다. 아즈리온과, 금지된 주문과, 두 누님에 얽힌 경위가 무엇이건 그와는 완전히 관련이 없었으니까. 어떤 식으로 변명하더라도 위험하고 무모한 호기심 이상은 아니었다.
"다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제 부모님에 대한 겁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것도 내가 한 일이 아니야."
"그렇다면 도시를 떠난 동안 무엇을 하셨습니까? 세카두에 들러 아즈리온의 종복을 만났습니까, 아니면 황무지로 향했습니까?"
테네브로즈는 전등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어쩌면 그 너머의 무언가를. 침묵이 길어졌다. 울쿠스는 덧붙여 말했다.
"진실을 안다고 해서 앙갚음을 하지도 않을 테고 대업을 그르치지도 않을 겁니다. 제가 모시는 신에게, 스카르파에게 서약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말씀해 주십시오."
"황무지로 갔지."
그는 고개를 내리지 않은 채, 생각에 잠긴 어조로 대꾸했다.
"그곳에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답할 수 없어."
곧이어 의지가, 혹은 정제된 생각 덩어리 같은 것이 울쿠스의 머릿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들린다기보다는 느껴졌다.
<…능묘에서 이야기해 주지. 어쨌거나 우리 둘 중 하나는 죽을 테니. 만약 스카르파가 승리를 거둔다면, 내 영혼이 저승으로 도망가기 전에 잘 붙잡으라고.>
울쿠스는 얼떨떨한 기분 속에서 눈을 깜박였다. 이건 야스와다의 마법이 아니었다. 만약 그랬더라면 명문가들은 모든 대화를 이런 식으로 나누었을 터였다. 생각 자체를 전달하는 것만큼 안전하고 효과적인 소통은 없으니까.
<그렇게 멀뚱하니 있으면 안 돼. 화를 내든 수긍하든 해야지. 이게 뭔지는 물어보지 말고. 듣는 귀가 너무 많거든.>
금지된 주문의 일종인 모양이었다.
직감이 울쿠스를 결론으로 이끌었다. 테네브로즈가 이렇게까지 솔직히 나오는 이유도, 주문의 정체도, 이걸 엿듣는 자가 누구인지도 모르겠지만, 최소한 거짓 약속은 아닐 거라는 판단이 섰다.
"더 묻지 않겠습니다. 능묘에서 영혼을 거두는 쪽이 제가 되길 바라지요."
"나는 그대가 영민해서 좋아. 충동적인 성미는 나이가 들면 차차 나아질 테고… 그전에 목숨을 끊어야 하는 게 아쉽군."
내용과는 별개로 적의를 느낄 구석은 없었다. 그는 지금 상당한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의 패를 보여준 것이다. 그게 뭐냐며 소리 내어 따지기 시작한다면 일이 난처해질 터였다.
물론 신뢰를 얻기 위해 가짜 미끼를 던졌을 가능성도 고려했다. 높진 않을 듯했다. 테네브로즈 입장에서 가장 좋은 수는 세카두에 들를 일이 있었다는 식으로 빠져나가는 것이니까. 그 경우에는 반박할 구실조차 없었다.
"그나저나 그대는 불멸자들이 얼마나 음흉한 족속인지 잘 모르는 모양이야. 한 사람의 호기심을 위해 신의 명예를 걸다니, 당사자가 듣고 있을 거라는 걱정은 없나?"
침묵이 잠시 있더니 테네브로즈가 재차 입을 열었다. 듣는 귀라는 말이 그런 뜻이었을까? 아즈리온에게는 들려주기 껄끄러운 내용이라서? 울쿠스는 저의를 짐작하려 애쓰다가 되물었다.
"스카르파 말입니까?"
"누구든 간에. 신들은 종복을 통해 세상을 들여다보지. 그리고 그대는 스카르파의 가장 충성스러운 신도가 아닌가."
이건 교리 기초 수준의 상식이었다. 신위가 온전할 때에 한해서.
하지만 이렇게 심장이 여러 갈래로 찢어진 경우는 극히 드물었고,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는 명확히 밝혀진 게 없었다. 모든 과정을 옆에서 지켜본 입장에서도 확언할 수 있는 부분은 많지 않았다.
"스카르파는 고작 반신격을 얻었을 뿐입니다. 볼로디아 역시 신으로서의 능력은 없지 않습니까."
"그거야 우리 나으리께서 축복을 내린 덕분이지. 광기와 함께 신위도 억제된 거야."
"어쨌건 반신들이 그게 가능했더라면 스카르파가 요정을 곁에 두진 않았겠지요."
"정말로?"
테네브로즈의 눈이 즐거운 듯 반짝였다.
"볼로디아가 스카르파를 만났을 때,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더군. 심장이 말을 건다고."
"예, 압니다. 저도 매번 듣는 소리니까요."
심장에는 전대의 악의가 남아 있었다. 지난 여섯 해 동안, 그것은 스카르파에게 한결같은 말을 주절거렸다. 나머지 심장까지 취하라고. 그러면 소원을 이뤄줄 수 있다고. 도시를 무너뜨리자고.
"끔찍하고 안타까운 혼잣말이지요. 옆에서 뭐라 대답하든 차이가 없어요. 물론 보통은 평범한 대화가 가능하지만, 실수로 주제를 잘못 틀었다가는……."
울쿠스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고, 이어 말했다.
"게다가 이것도 제 앞이라서 상태가 좋은 편이라더군요. 제가 없을 때에는 아예 밀랍인형처럼 멈춰만 있다고 합니다."
"다른 내용은 입에 담은 적이 없나? 도시의 소리가 들린다는 식으로."
"곧잘 그러지요. 제 기분이 들린다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까지도 알 수 있다고요. 하지만 그것마저도 결국에는 똑같은 결론으로 향하고 맙니다."
"자, 나는 그대가 어떻게 지냈는지는 정확히 몰라. 하지만 기적을 숨 쉬듯 겪는 이는 그걸 일상으로 착각하기 마련이지. 아니면 그대 스스로가 외면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고."
갑작스러운 화두를 앞에 두고 울쿠스는 묵상에 잠겼다.
의심할 여지는 많았다. 심장은 스스로의 의지를 갖춘데다가 필멸자의 생각 따위는 쉽게 읽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능묘에 발을 들이면 심장의 나머지 부분이 속삭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지금껏, 스카르파의 말에 무게를 두지 않은 이유를 가늠해 보았다.
자학이 우선이었을 것이다. 진실을 알았더라면 스카르파가 자신을 내쳤을 게 분명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애인의 겉가죽을 뒤집어쓴 요정을 사랑할 수는 없을 테니까. 지금도 그 믿음은 한결같았다.
하지만 희박한 가능성에라도 희망을 걸어 보고 싶었다. 그것이야말로 울쿠스의 염원이었으므로. 동료였던 인간들에게 정체를 들키고, 쫓겨 다니길 반복하다가, 스스로 귀를 잘랐을 때부터.
타라곤의 삶을 걸쳐 입은 지금조차도.
"그 말씀에 확신이 있으십니까?"
"모르지. 나으리께도 말한 적이 없어. 순전히 내 상상이거든."
테네브로즈는 울쿠스를 향해 상체를 쑥 내밀었다. 짓궂은 장난을 부추기는 소년처럼 보였다.
"하지만 연극을 마친다면, 관객의 뜻은 물어봐야지 않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