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최후통첩 (3)
볼로디아는 명예로운 대우를 약속하면서 경계심을 누그러뜨리는 것으로 대화를 열었다. 스카르파도, 울쿠스도, 반역자로 기억되진 않으리라고. 오히려 영웅으로 만들 의향도 있다고.
울쿠스는 극단 사람들의 처분을 물었고, 그것 또한 눈감아 주겠다는 서약을 얻어냈다. 하지만 그러고서도 확답은 나오지 않았다. 고민 섞인 정적만 깊어질 뿐이었다.
이윽고 볼로디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괜찮다면, 사사로운 이야기로 주제를 돌려 보지."
"아닙니다. 답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다만……."
"확고한 문제 앞에서 망설임이 생길 때에는,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오."
울쿠스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본론은 사소한 질문이 몇 차례 오간 뒤에야 시작됐다.
"당신네 가문은 중재자 역할을 맡았다고 들었소."
"중재자라기보다는… 수선공에 가깝지요. 이 가문의 실수가 저 가문의 흠결을 덮고, 저 가문은 또다시 다른 가문에게 빚을 지고 있어요. 그런 사실들을 아교 삼아 요정 사회의 흠집을 기우는 겁니다."
란드와르는 그새 울쿠스의 표정에서 긴장이 달아난 것을 보고 내심 감탄했다. 볼로디아도 볼로디아지만 저놈도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
죄를 지었으니 죽여 달라고 읊던 게 방금 전의 일이었는데 이제는 또 제 인생사를 줄줄이 늘어놓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자신이 사지로 몰아넣은 사람을 상대로.
하기야 생각해보면 친하지도 않았던 인간 사제를 집에 들인 다음 푸념 섞인 술주정을 부리던 놈이었다. 말루카에서 지내는 동안 이런 대화를 할 상대도 마땅치 않았을 테고…….
일단은 가만히 들어 보기로 했다. 분위기가 썩 괜찮았다.
"당신은 그게 싫어서 도망쳐 나왔다지."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다른 아이들은 세상을 넓히러 떠나는데 저는 뒤에 남아 해진 곳을 보수해야만 하는 겁니다. 실수라도 하면 곧바로 목숨이 달아날 테고요… 지긋지긋했습니다."
울쿠스는 의기소침한 태도로 고개를 떨어트렸다.
"많은 걸 바라진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울릴 사람들이 필요했어요. 평화로운 일상 속에서 웃고 떠들고 싶었죠. 그런데 이제 보니 그게 바로 욕심이었던 겁니다… 주제넘은 탐욕으로 큰 죄를 지었습니다."
"이런 일은 한 명의 욕심만으로 일어나는 게 아니라오. 쌓인 낙엽에 불티가 날아와 앉았을 뿐이지. 불티에게 죄가 있는 만큼 낙엽을 거두지 않은 이들에게도 죄가 있는 게 아니겠소."
볼로디아의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떠올랐다.
"내게는 그 상황을 막을 기회가 이미 있었소. 어쩌면 말루카에서 살아왔던 매 순간이 바로 기회였는지도 모르지."
스카르파의 혼례 결투를 막을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타라곤이 죽은 직후에 왕위를 찬탈할 수 있었지만, 여전히 그러지 않았다. 그리고 동생을 내버려둔 채 북부 기지에 틀어박혔다. 볼로디아는 충성스러운 대장군이었으므로.
"어머니가 선택을 강요할 때마다 나는 규칙 속으로 도망쳤소.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지만, 항명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러기가 두려워서 법도를 방패로 삼았던 거요."
도망치더라도 문제는 그 자리에 남기 마련이었다. 어떤 건 스스로 사라지기도 하지만 어떤 건 도리어 크기를 키운다. 일곱 해 전에, 한 명의 목숨으로 막을 수 있었을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규모로 변해 있었다.
"내게는 이제 도망칠 곳이 없소. 고향에서는 역적이 된데다가 동생을 달랠 방법은 영영 사라지고 말았지. 결단을 내리지 않는다면 도시 전체가 먼지가 될 거요."
울쿠스는 대화를 견디기 어렵다는 듯, 커튼으로 뒤덮인 창가를 힐끔힐끔 곁눈질했다. 가능하다면 당장에라도 석상을 써서 어딘가로 떠날 기세였다. 볼로디아의 눈에 사려깊은 빛이 언뜻 스쳤다.
"이제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군. 그간 외면한 과오를 정산하기는 피차일반이니… 당신은 가문의 일을 피해 여기로 왔지. 우리가 이렇게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마지막 결단조차 내리지 못했을 테고."
"제가 대장군님께 올릴 수 있는 답은 죄송하다는 것뿐입니다. 다른 이야기를 할 자격은 없을 것 같아요."
"그렇다면 내가 질문을 드리지. 도망친 곳에서는, 만족하셨소?"
볼로디아는 물음을 던지고서는 그저 기다렸다. 답을 재촉하거나 다그치지 않고. 울쿠스는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운을 뗐다.
"캐러웨이 부인의 아들로 살면서 많은 연극을 보았어요. 꿈과 영광이 한순간에 피어났다가 사라지지요. 조명이 꺼지고 막이 내려가면 그게 모두 초라한 거짓말로 변한다는 사실이 아쉽게만 느껴졌습니다. 제게는 지난 다섯 해가 바로 그렇습니다."
"그래서, 허구이기 때문에, 연극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시오?"
"저는 타라곤의 삶에 만족했습니다. 고통스러울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랬습니다. 바로 오늘까지도요. 하지만 거기에, 자기만족 말고 무슨 가치가 있느냐 하면……."
울쿠스는 의기소침한 태도로 말끝을 흐렸다.
"한때, 스카르파는 타라곤의 연극에서 살아갈 빛을 보았다오. 그리고 당신은 거짓말을 겹겹이 쌓아 이 도시를 지켰지. 거짓말에는 무너질 것을 다잡는 힘이 있소."
"위안이 되는 말씀이군요."
"하지만 연극에 종장이 있는 건, 거짓말은 결국 진실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탓이라오. 그건 삶을 마주하는 시기를 유예하는 역할밖에는 되지 못하오."
받아들이고 해결해야 할 현실에서 영영 눈을 돌린다면, 남는 건 파멸뿐이다. 겉보기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이 계속될지라도.
"결말을 볼 때가 왔소."
볼로디아는 울쿠스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았다.
* * *
"아이를 잘 달래시더군요. 전 그런 건 못 합니다."
"나이의 문제라기보다는, 같은 상황을 겪은 사람끼리는 통하는 게 있기 마련이지. 당신은 그런 적이 없어 보여서 내가 나섰다오."
"저는 어쩔 수 없는 문제라면 고민하지 않습니다. 편리한 사고방식이죠. 이럴 때에는 약간… 방해가 되지만요."
울쿠스는 볼로디아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후, 오랜 고민에 잠겨 있다가, 마음을 정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테네브로즈와 독대하기를 청했다. 요정끼리만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그러려니 하고 잠깐 밖으로 나온 참이었다. 태도를 보아서는 다른 마음을 품고 있지도 않은 듯했다. 그냥 순전히, 동족과 의견을 나누고 싶은 것이다. 어차피 천사들이 감시중이니까 돌발행동을 하더라도 충분히 막을 수 있다.
대화가 길어질 듯했다. 란드와르는 품에서 시가 케이스를 꺼내고는 볼로디아를 힐끔 보았다. 인간 남자 모습으로 되돌아온 채 늑대 석상을 등지고 있었다.
"연초 좀 피우겠습니다. 냄새가 싫으시면 멀리 있다 오지요."
"나는 괜찮소. 오가는 사람도 없고."
날도 늦은데다가 겨울인 탓에 광장은 텅 비었다. 란드와르는 능숙하게 시가 끄트머리를 자른 뒤 불을 붙였다. 연기는 어스름한 공기를 헤치고 나아가다가 별을 만나기 전에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볼로디아가 던지듯 물었다.
"예전부터 궁금했소. 연초나 술 같은 것들 말이오, 신에게도 효과가 있는 거요?"
"아뇨, 습관일 뿐입니다. 대장군님께서도 신위를 얻기 전에 많이 즐겨 놓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취하지도 않고 연초 때문에 뒷목이 뻐근해질 수도 없거든요."
자신이 한때 인간이었다는 이야기는 북부에서, 열차를 타고 내려오면서 이미 설명을 마쳤다. 그 후로 비슷한 질문을 받은 적은 없었지만 내심 신경을 쓰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인간이었다가 신이 되는 건 어떤 기분이오?"
란드와르는 생각이 그대로 튀어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막았다. 천계 놈들이 어떤 종류의 양아치인지 벌써부터 알려줄 필요는 없을 듯했다. 어차피 볼로디아는 자신과는 다른 대우를 받을 거라고도 했고.
"글쎄요, 별 생각이 없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신들은 아득한 시간을 산다고 들었소. 세계의 시작과 끝을 보는 자들이라고. 허나 내 세상의 길이는 서른일곱 해 정도밖에는 안 되오.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서 그 평생이 찰나처럼 느껴진다면, 그리고 거기에 대해 어떤 비애도 느끼지 못하게 된다면……."
영원히 신으로 남을 사람이, 두 해만 지나면 원래 세계로 돌아갈 사람한테 이런 걸 묻고 있는 상황이 어쩐지 우스웠다.
그래, 천 년쯤 살면 그중에서 서른일곱 해쯤은 티끌 같겠지. 그런 일도 있었구나, 하고 무덤덤해지겠지. 이런 고민은 물론이고 평생의 은원조차도 하찮은 게 되고 말겠지.
한때 소중했던 것들이 빛바래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얼마나 슬픈 일인지는 강현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란드와르로 보낸 시간은 고작 네 달쯤에 불과했다. 이강현으로 살아온 서른네 해를 잊을 정도는 안 됐다.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화신 노릇을 하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견뎌 보지도 못했어요. 아직도 인간이었을 때의 기억이 생생합니다. 사태가 끝나면 다시 인간의 삶을 되찾을 테고요."
"필멸자 한 명이 짊어지기에는 과중한 사명 같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아직까지는 잘 하고 있으니 다행이지요."
볼로디아는 잠시 침묵하더니 물었다.
"내가 신이 된다면, 수많은 인간들 사이에서 당신을 찾을 수 있겠소?"
"다른 곳에서 다른 삶을 살고 있을 겁니다. 완전히 다른 세계지요."
"인간으로서의 당신이 궁금하오."
"좋았을 때도 있었고 나쁠 때도 있었습니다. 화신 노릇을 하기 직전에는 아주 나빴어요."
그는 가볍게 웃으면서 지구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을지를 생각해 보았다.
거기에는 마력도 마법도 없답니다. 대신 물리법칙과 화학 공식이 세상을 이루고 그 위에는 다시 숫자들이 있지요. 예, 숫자들요. 금리와 대출원금 같은 단어에 매달린 숫자들이 사람들을 휘어잡고 흔든답니다. 저 역시 거기에 한참을 시달렸고요…….
마력으로 이루어진 세계와 숫자로 이루어진 세계 중에서 무엇이 더 마법적인지는 분간하기 어려웠다. 예전에는 금융현상은 물론이고 물리법칙까지도 숫자로 해명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저 당연했는데 여기에 와 놓고 보니 낯설었다.
"당신의 태도에는 어떤 느낌이 있소. 이 사람은 고뇌라는 걸 겪어 보지 않았겠구나, 하는. 단순히 편하게 살았을 것만 같다는 소리는 아니오. 엄청난 역경을 마주치더라도 태연하게 넘겼을 것 같다는 말이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저는 어쩔 수 없는 문제라면 고민하지 않습니다. 선택하고 바꿀 수 있는 것에 대해서만 깊이 생각하지요."
역경은 여럿 겪었다. 후배와 동업자가 잇달아 사고를 쳤을 때. 결국 정리하고 파산절차를 밟게 되었을 때. 그리고 무보험 운전자가 중앙선을 벗어나서 자신에게로.
이런 씨발, 마녀는 셋이 한꺼번에 온다더니 그 말이 딱 맞았다. 불행이 쏟아지던 시기였다.
그래도 살아 있으니까, 아직은 죽지 않았으니까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병원에 누운 채로 개인회생 절차를 알아보았고 퇴원하자마자 곧바로 빌딩 관리인 일자리를 구했다. 강철 같은 의지가 있었다기보다는 기계처럼 움직였을 뿐이다. 그게 최선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오히려 가까스로 상황이 수습되고 제정신이 돌아온 다음부터는 시체처럼 살았다. 관리실에 앉아 온종일 태블릿을 만지작거리면서, 가망 없는 내일을 기다리는 것이다. 누구도 만나지 않고.
이따금 자학이 필요할 때에는 자신을 짓누르는 숫자들을 들춰보았다. 그러고서는 어설픈 곡조에 이런 가사를 붙여 흥얼거렸다. 이강현은 개인회생 절차를 밟는 빚쟁이라네. 이 짓을 꼼짝없이 3년 더 해야 겨우 0이 된다네…….
서른넷에 3을 더하면 서른일곱. 서른일곱 살에 아무것도 없이, 다시 0에서부터. 동기와 친구들은 슬슬 대출을 끌어 전셋집을 자가로 바꿀 시기에. 그게 아니더라도 초등학교 들어간 애 하나씩은 있을 시기에.
그래, 친구.
"인간이었던 시절에, 죽을 뻔한 적이 있었습니다. 숨 쉴 때마다 빚이 늘고 있는데 거기에 더해 온몸까지 으스러졌죠. 구급차에, 구급차… 이 단어를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어쨌든 거기에 실려 가면서 그 걱정부터 했습니다. 아픔은 없었고요."
"그렇군."
볼로디아는 란드와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마땅한 답을 찾지 못한 듯 그 말만을 떨어트렸다. 지금으로서는 수십 줄짜리 동정보다는 한 마디의 동조가 더 위안이 됐다. 그는 계속 말했다.
"친구들이 수습을 도왔습니다. 금전적으로도 신세를 졌고요. 미안하게 느끼지 말란 소리는 들었는데, 볼 낯이 없더군요. 어떻게든 갚아야 한다고 생각을 해도 방법이 마땅치 않아서. 그러다가 기회를 잡았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소?"
강현의 직무는 계약직 구원자. 계약기간은 이스트리아 시간으로 2년. 필요하다면 1년 더 연장할 수 있음. 보수는 15억 상당.
한 세계의 운명을 다루기에는 너무 속물적이고 하찮은 동기였지만 그것은 강현의 모든 세상이기도 했다. 그 세상은 두 가지 규칙으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빚은 갚아야 하며 선은 지켜야 한다는 규칙으로.
그래서 꿈이라 생각하면서도, 맡은 일에 비해서는 너무 작은 돈이라 느끼면서도 약간의 희망을 걸고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이제 그 계약서는 더 많은 사람의 평생을 짊어지고 있었다.
볼로디아를 비롯한 말루카의 늑대인간. 세카두와 타일라프람과 다른 도시의 인간. 슈문을 따르는 도망자 요정 무리. 파르타와 정보사. 펠로시, 헤이딘, 벨레다, 테네브로즈, 로안.
모두의 이름이 란드와르의 머릿속에서 줄지어 섰다.
그 끝에 있는 게 파멸인지 구원인지는,
"아직은 모릅니다. 이 일이 끝나 봐야 압니다."
란드와르는, 이강현은, 빙긋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