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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70화 (71/258)

70화 최후통첩 (2)

울쿠스는 창백해진 표정으로 굳어 있다가, 란드와르와 볼로디아가 맞은편에 앉자마자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울기 시작했다. 소리도 안 내고 눈물만 줄줄 흘리는 게 장마철 반지하방 창문 같았다.

"이야기는 들었소만 이런 자일 줄은 미처 몰랐소."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이 있으니까요."

"이렇게까지 다양할 거라곤 상상해본 적이 없다오."

"원래 겪지 못한 건 상상할 수가 없다더군요."

몇 차례 더 말을 걸어 보았지만 울쿠스는 정지 상태를 유지했다. 감히 신의 음성을 무시하다니 건방진 놈이었다. 란드와르는 관두고 테네브로즈에게 홱 질문을 던졌다.

"사제야, 요정이 마흔이면 인간 나이로는 몇 살쯤이냐."

"다른 종족끼리 직접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열여섯쯤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은데요. 요정 대부분은 성년식을 치르고서도 한동안은 소년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깨달음을 얻고요."

"그냥 애기네?"

"능력과 지혜의 불균형은 젊은 요정의 미덕이지요."

정신연령이 그 밖의 능력을 못 따라간다는 말을 이런 식으로 포장하는 것도 재주였다. 그래도 이놈의 실제 나이가 생각했던 것보다 낮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묘하게 납득이 갔다.

못해도 스물쯤은 될 줄 알았는데, 열여섯이라. 폭탄 발사 버튼을 품에 안은 중학생치고는 엄청난 인내심을 발휘한 셈이었다. 기괴한 사고방식과는 별개로 존경심마저 느껴졌다.

그런데 존경심은 존경심이고, 여기서 이러면 안 되지. 너는 이제부터 우리랑 깊은 이야기를 해야지… 생각이 거기에 미치는 찰나 테네브로즈의 입이 다시 열렸다.

"정신 차리게 만들 방법을 알고 있는데요."

"알면서 왜 말 안 했어."

"나으리께서 싫어하실 것 같아서요."

"결과가 좋으면 내가 싫어하겠냐. 일단 해."

녀석은 울쿠스의 목을 억지로 돌려 시선을 맞대고는 검지로 허공에 기호를 그렸다. 란드와르는 그 방법이란 걸 단번에 알아보았다.

즉발 혼란. 지속시간은 8초.

"저거 풀렸을 때 상태 더 나빠지면 욕먹을 준비나 해라."

"명문가에서는 아이들이 울면 이런단 말입니다. 저도 큰삼촌께 많이 당했습니다."

"니들이 그래서 안 되는 거야."

란드와르는 이를 바득 갈며 울쿠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주문의 효과가 막 끝난 참이었다. 요정의 눈에 초점이 돌아오면서 표정이 변했다. 공포였다. 아니, 경악인가? 뭐든 간에.

녀석은 타조처럼 고개를 휙휙 돌리다가 도망갈 곳이 없음을 재차 깨달았고, 옷소매로 눈가를 훔쳤다. 의외로 결과가 괜찮았다.

"요정아, 다시 울지 말고 잘 들어라."

"예."

"기본적으로 니가 악당이고 내가 선역이야. 그렇게 울면 내가 나쁜 놈 같잖아."

"…죄송합니다."

앗, 씨발. 이런 소리나 하려던 게 아닌데.

"본론으로 넘어가자면… 너한테 무슨 의견을 구하러 온 건 아니고, 가만히 듣고만 있어라. 일단 내가 명색이 신이니까 말은 편하게 한다."

"예?"

짧은 되물음과 함께 울쿠스의 시선이 볼로디아에게로 향했다. 불쾌한 기시감이 밀려왔다. 포도밭 골목에서도 자신보다는 볼로디아가 무신 역할에 더 어울릴 거라는 소리를 들었던 것 같은데.

…어쨌거나 자신의 잘못은 아닌 듯했다. 이강현은 예나 지금이나 지극히 상식적인 한국인답게 행동하고 있었으니까. 잘못은 꿈에 기어 들어와서 계약서 들이민 놈들에게 있는 것이었다.

"내가 이야기를 안 했군. 형님 쪽이 왕녀고 동생 쪽이 우리 화신 나으리야. 합당한 예를 갖춰야지."

테네브로즈는 말에 마침표를 찍으면서 볼로디아에게 걸린 환술을 풀었다. 이제 울쿠스의 대각선 자리에 앉아 있는 건 머리를 짧게 자른 순혈 늑대인간이었다.

볼로디아는 탁자 유리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힐끔 보고서는 운을 뗐다. 생각이 복잡한 탓인지 미간이 좁아져 있었다.

"어떤 식으로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군… 이미 몇 번 보았지만, 다시 인사하겠소. 한때는 북부 대장군이자 첫째 왕녀로 불렸던 사람이오."

"예?"

멍청한 되물음이 한 번 더. 그리고 적당한 길이의 침묵. 울쿠스는 두 손바닥에 재차 얼굴을 파묻었다가 묘하게 상쾌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입가에는 해탈한 미소까지 띄우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끝을 볼 줄은 몰랐습니다만, 알겠습니다. 그래도 이곳은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도시 한복판에서 제가 죽으면 어머니가 많이 곤란해지실 거예요. 제 주제에 이런 부탁을 드리려니 죄송하지만, 마지막으로 선처를……."

목소리는 표정과 정반대로 울먹거리고 있었다. 란드와르는 다급히 말허리를 끊었다.

"너 죽이러 온 거 아니야. 마음만 고쳐먹으면 살 수도 있어."

"나 또한 원한을 느끼고 있지는 않소. 협의가 필요할 뿐이지."

볼로디아도 옆에서 거들었지만 울쿠스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래전부터 마음에 담아 두었을 게 분명한 문장들이 줄줄이 흘러나왔다.

"대장군님께는 씻을 수 없는 죄를 진데다가 스카르파를 부추겨서 도시를 무너뜨릴 생각마저 하고 있었지요. 그것만이 아니더라도, 요정 주제에 이 땅에 숨어든 것만으로도 죽음은 합당한 벌입니다. 어쩌면 너무 사소한 처벌일지도 모르지요."

너무 이성적이고 상식적이고 타당한 말을 이놈에게서 들으니 낯설었다. 사람이 발악도 못 할 정도로 궁지에 몰리면 이렇게 되는 모양이었다.

란드와르는 상황 정리의 필요성을 느꼈다. 마음에도 없는 신위를 들먹이면서 꼰대질을 하자니 미안했지만, 이게 아니라면 말을 들어먹지 않을 것 같았다.

"요정아, 나는 사제 란드와르가 아니라 아즈리온의 화신 자격으로 여기 있는 거야. 그러면 너는 내 말을 가만히 들어야 돼. 죽여 달라고 대드는 게 아니라."

"죄송합니다. 죽음으로도 갚지 못할 죄를 지었습니다."

"한 번만 더 죄송하다고 하면 진짜 죽인다. 죽여서 군부에 가져다준 다음 내일 소식지 1면에 띄울 거야. 그러니까 그 꼴 나기 전에 조용히 하고 묻는 말에만 대답해."

울쿠스는 입을 다물었고 볼로디아도 한층 복잡해진 표정으로 란드와르를 보았다. 테네브로즈는 또 녀석대로 흐뭇하게 웃고 있는 게 눈에 거슬렸다. 심장 깊은 곳에서부터 흡연욕구와 폭력에 대한 갈망이 끓어올랐다.

참았다. 아직은 참아야 했다.

"북부 대장군이 미친 거 눈앞에서 봤지. 어설프게 반신격이 된 것까지도 알 테고."

"그렇습니다."

"내가 축복 내려서 잠깐 제정신으로 돌아왔거든. 지속시간이 두 달쯤 남았어. 그 안에 신위를 제대로 물려받지 않으면 완전히 끝장나는 거야."

"예."

"스카르파가 심장을 먹고 대장군한테 죽어야 돼. 그래야 나머지 심장에 담긴 악의를 감당할 수가 있어."

역순은 불가능했다. 볼로디아가 먼저 심장을 먹고 스카르파를 죽일 경우에는 선조들의 영령이 있더라도 악의를 버텨내지 못했다. 스카르파가 액막이 역할을 해 줘야 하는 셈이었다.

"…예."

"네 역할은 스카르파가 심장을 먹게 만드는 거야. 그것만 하면 캐러웨이 부인이나 네 정체 같은 것쯤은 불문으로 넘길 수 있어. 목숨도 살려줄 테고."

"그렇습니까."

울쿠스의 눈동자가 굴러가더니 볼로디아를 보았다. 첫째 왕녀의 의향이 마음에 걸린다는 투였다.

"옛 신의 심장만 사라진다면 말루카의 법도는 대부분 무용해질 거요. 지킬 것이 없는데 도둑을 경계해서 무엇 하겠소… 그러니, 역사에만 남을 조항을 빌미로 누군가를 벌하진 않으려 하오."

적절한 보증이 들어왔다. 란드와르는 생각을 정리하기에 충분한 시간이 지나길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울쿠스가 의견을 밝힐 차례였다.

"입장을 솔직히 말해 봐라. 반박하거나 의심하고 싶으면 그렇게 해. 욕을 해도 넘어가 준다."

울쿠스는 오래도록 머뭇거렸다. 이윽고 옆에 앉은 테네브로즈가 사려 깊은 태도로 등을 토닥이더니 충고했다. 내용은 딱히 사려 깊지 않았다.

"자, 최악의 결과는 죽은 다음 정체가 까발려지는 거야. 그전에 신성모독 한번쯤이야 못할 게 어디 있겠나."

"하여간 이 새끼는 말을 해도."

"나으리께서 하신 말씀을 친절하게 바꿨을 뿐인데요. 저는 공격성이 낮고 사회성이 좋은 사람입니다."

"니가 하필 지금 그 소리를 하는 게 사회성이 없다는 증거야."

울쿠스가 입을 열었다. 훨씬 뚜렷해진 목소리였다.

"추적자님께서 그러고서도 목숨을 부지하시는 게 놀랍습니다."

"언제나 저승에 한 발을 담근 채 살아가고 있지… 속내를 털어놓을 준비가 된 모양이군. 나으리께도 그런 식으로 말해."

울쿠스는 당장에라도 토할 듯한 표정으로 테네브로즈를 바라보다가 란드와르에게로 고개를 홱 돌렸다. 이런 접근이 효과가 있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면 스카르파는요? 제게 속은 다음 홀로 능묘에서 죽어가야 한단 말입니까? 그 끔찍한 곳에서요?"

"비겁해지기 싫으면 너도 같이 죽어야지."

란드와르는 딱 잘라 말했다. 이놈을 죽이기 미안한 것과는 별개로, 이건 논의할 필요조차 없는 부분이었다.

"제게 자비를 베풀어주겠다고 하셨지요. 그런 은혜는 사악한 요정에게 어울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왕은 안쓰러운 삶 속에서 고통만을 겪은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는데, 스카르파가 죽는 건 확정이고 네 운명만 바꿀 수 있는 거야. 어쩔 수 없는 걸 어떻게 해 달라고 하면 안 돼."

란드와르는 철저한 낭만주의자와 철저한 합리주의자 사이의 간극을 실감했다. 울쿠스가 감정과 의지와 현실을 구분할 줄 아는 녀석이었더라면 귀찮게 찾아와서 최후통첩을 날릴 일도, 너무 당연한 사실을 재차 읊어줄 필요도 없었을 터였다.

"그리고 그게 객관적으로 제일 좋은 미래야. 너도 나한테 이야기하지 않았냐. 스카르파가 죽으면 흰둥이 남자애들도 얼마든지 바깥에 나갈 수 있을 거라고. 그러면 군부 놈들이 취조실에 애꿎은 사람 끌고 갈 이유도 없어."

"압니다."

"알면 어떻게 해야겠어."

"하지만……."

란드와르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이놈한테는 확실히 충격이 필요했다. 흰둥이 저항군을 다 죽이는 것까진 아니더라도, 아무튼 발밑에서 지뢰가 터지는 게 아니라면 움직이지 않을 놈이었다.

"다른 부분을 생각해 보자. 스카르파가 제정신이면 널 옆에 둘 것 같아? 타라곤이 아니라 생판 모르는 요정이라는 걸 알아도? 너 때문에 자기 언니가 그렇게 됐는데?"

"…아니겠지요.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스카르파가 정신이 나간 상태로 살아있는 건 누구한테 좋은 일이냐."

"저는 왕이 거짓말 속에서라도 행복하길 바랍니다. 명징한 정신을 갖추고 고통스럽기보다는, 아무것도 모른 채 행복한 게 더 나을 겁니다."

"그러니까 결국 너잖아. 그걸 원하는 사람은 너밖에 없어. 당사자가 그걸 원하는지는 누구도 모르는데 너만 그래. 내가 니 소원을 왜 들어줘야 되냐고."

"하지만……."

하지만. 또 하지만이다. 말문이 막히면 그 단어를 뱉는 듯했다.

혀끝까지 욕이 올라왔다가 겨우 내려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이런 부류를 달래줄 능력이 못 됐다. 심지어는 테네브로즈랑 독대했을 때보다도 소통이 안 되는 것 같았다.

자존심은 상했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정신상태 안 좋은 요정을 달래는 종류의 사회성에서는 자신보다 테네브로즈가 무조건 뛰어났다. 여기가 한국이고 상대가 보통 인간이었으면 풀배터리 검사나 받아 보라고 한 다음 끝냈을 텐데. 하지만 이스트리아의 요정을 위한 심리검사지는 어디에도 없었다.

란드와르는 속절없이 이만 악물었다.

"당신의 심경을 이해하오. 어떤 기분인지도 알고 있소. 그러니 괜찮다면, 이 대화에 몇 마디를 더하려 하오."

…그리고 구원투수가 벤치에서 마운드로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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