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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69화 (70/258)

69화 최후통첩 (1)

"잘은 모르겠지만, 알겠소. 요정을 이해하려 한 게 잘못이라는 생각이 드는군."

볼로디아는 기나긴 묵상 끝에 합리적인 결론에 도달했다. 그랬다. 중력파의 원리는 중요하지 않았다. 허공에서 사과를 떨어트리면 땅에 닿는다는 것만이 중요했다.

"납득하시니 좋군요. 그러면 다른 문제를 생각해 봅시다."

강현은 곧바로 다음 주제로 넘어갔다.

"대장군님께서도 스스로 아시겠지만, 아무리 왕족에게 면책 특권이 있을지라도, 이 시점에서 첫째 왕녀가 갑작스레 돌아오는 건 모습이 좋지 않습니다."

여기 있는 건 첫째 왕녀가 아니라 아즈리온 교단의 사제 타우베스였다. 육 년 전의 사건도 제대로 해결되지 않았다.

몇 백 년 전까지만 해도, 서로 혈겁을 벌이는 게 늑대인간 왕가의 전통이었다지만 그건 단순한 왕위 싸움. 반면 피웅덩이는 종족의 명운이 걸린 문제였다. 대뜸 볼로디아가 나타나서 스카르파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다 치면 반기를 들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물론 방법은 있다. 이 땅의 거주민들은 아즈리온이 공증만 서 주면 달이 내일부터 북쪽에서 뜬다고 해도 믿을 사람들이다. 이교도인 늑대인간들도 마찬가지.

"사람을 모아놓고 천사를 불러야 할 겁니다."

관건은 그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알게끔 하는 데에 있다. 선전의 역할은 그런 것이다. 보도자료를 뿌리고 기자회견을 벌이지 않으면 세기의 대발견조차 묻히고 마니까.

그리고 당연하게도, 흰둥이 백 명보다는 군부 중역 열 명에게 알리는 게 더 효과가 좋다. 퍼지는 속도뿐만이 아니라 정보의 품질조차도.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짐작이 가는군. 무대도 준비되어 있으니……."

"그렇습니다."

캐러웨이 극단과는 별개로, 란드와르 일행도 연극을 하나 꾸며야 했다.

테마는 왕의 귀환. 무대팀은 천사들.

장소는 군부 축연.

다음 날, 늦어도 모레쯤이면 충분히 다듬어진 급보가 말루카 전역에 뿌려질 것이다.

*  *  *

울쿠스가 스카르파를 일부러 만나지 않은 지 열흘 남짓이 되었다. 군부에서 호출이 오지 않는 걸 보면 그녀가 먼저 연인을 찾지도 않는 듯했다.

그에게는 다행이었다. 얼굴을 맞대면 스카르파는 어김없이 나머지 심장 이야기를 꺼낼 텐데, 거부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음의 방향이 정해졌을지라도 결단을 내리는 건 다른 문제였다.

"피곤해 보이는구나. 별장에서 조금 쉬다 오는 건 어떠니?"

"아녜요, 아직 진로 상담도 두 명이나 남았는걸요. 그것만 끝내면 많이 편해질 거예요."

밝게 웃고는 저녁식사를 입에 밀어 넣었다. 빵은 물에 적신 종이뭉치 같았고 스튜는 아무런 맛이 없었다. 요새는 모든 게 그렇게만 느껴졌다. 아마 표정에도 드러나고 있겠지.

캐러웨이 부인은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말을 더했다.

"고민이 있으면 말하렴. 내가 아니라면 누가 들어 주겠니."

사건의 전말을 아는 늑대인간은 그녀가 유일했고, 그건 울쿠스의 몇 안 되는 고민거리 중 하나이기도 했다. 스카르파가 염원을 이룬다면 캐러웨이 부인은 그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알게 될 것이다.

울쿠스는 고개를 숙인 채 눈동자만을 움직여 부인을 보았다. 가냘파 보이는 이목구비 위에 인자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별 일 아녜요, 부인. 제가 감당할 일인걸요."

"할 말이 있으면 얼마든지 해 보려무나. 네가 아무 이유도 없이 나를 찾아온 적은 별로 없잖니."

"용건도 없이 함부로 들르는 건 실례니까요."

"네가 그걸 실례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캐러웨이 부인의 관용이 얼마나 두터울지가 미지수였다. 그녀는 아들의 가죽을 뒤집어쓴 누군가를 아꼈다. 하지만 그 안에 있는 요정을 어떻게 생각할는지는…….

도시에 정착한 후로 다섯 해가 지났다. 하지만 울쿠스는 단 둘이 있을 때 부인을 어머니라 불러 본 적이 없었고, 그게 가능할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그는 요정이었고 타라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캐러웨이 부인 역시도 똑같이 생각할 것이라 믿었다. 그 믿음은 미묘한 거리를 유지하는 데에 도움을 줬지만 은근한 고통이 되어 심장 한편을 꾹꾹 찔러오기도 했다.

"부인께서 저를 나쁘게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그럴 리가."

오래도록 풀어놓지 못한 말뭉치가 울쿠스의 입을 틀어막았다. 스카르파를 만나러 가기까지는 긴 시간이 남은 듯했다.

*  *  *

란드와르는 하루에 한 번씩 티아가 보내오는 녹취록을 들여다보았다. 울쿠스는 매일 징징 짜는 걸 제외하면 멀쩡하게 살고 있는데다가 개판을 치지도 않았다. 심지어 스카르파와도 접촉이 없다고 했다.

이쯤 되자 또 다른 걱정이 새록새록 솟아났다. 놈이 지금까지 인생사를 뭉갰던 것처럼 빨간 버튼을 누르는 일까지 미뤄 버리면 곤란했다. 스카르파가 심장을 먼저 먹어서 악의를 흡수해야만, 볼로디아가 신위를 물려받으면서도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으니까.

따라서 제일 좋은 미래는 울쿠스가 타라곤의 삶을 택하는 것이다. 독단적으로, 스카르파에게 심장을 먹이는 미래까지도 그럭저럭 괜찮다. 하지만 이대로 계속 살면 모든 일이 어그러졌다.

찾아가서 칼을 들이밀고 협박하든 말로 풀든 간에, 결착을 내야겠다는 판단이 섰다. 때마침 장학재단 업무도 거의 마무리 단계였다.

"지금 장학재단 일이 거의 끝났거든. 진로상담도 다 봤고."

"그렇군요."

"그러니까 내일 퇴근하고 나서 울쿠스 보러 가자. 더 기다릴 필요 없다."

일단 란드와르 일행의 정체를 밝힌 다음 세탁기를 돌려주겠다며 합의안을 제시할 작정이었다. 그 다음에는 서로 보기 껄끄러울 테니 휴가 쓰고 드러누워 있으라 하면 되겠지.

아직까지 실행에 안 옮기고 망설이는 걸 보면 선뜻 받아들일 거라는 계산이 있었다. 물론 정체를 알게 된다면 울쿠스는 경악하겠지만, 뭐, 그거야 그놈 소관이고…….

"설마 지금까지 기다리신 게 그거 때문입니까?"

"오냐. 왜?"

"세상의 명운에 비하면 너무 사소한 이유 같습니다만."

"그건 그런데."

시간 단축이야 가능했지만 란드와르는 딱히 일정을 재촉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게임 기준으로는, 통상적인 스피드런과 거의 비슷한 속도로 일을 진행해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중요한 자원이라는 것은 그게 다다익선이라는 이야기와는 약간 다르다. 너무 이른 것과 너무 늦은 것은 결과면에서는 큰 차이가 없으니까. 다음 핵심 시나리오가 본격적으로 열리는 건 게임이 시작되고서 여섯 달 후. 말루카에서의 일을 끝나면 다섯 달째가 되니까 사이에 한 달이 남은 셈이었다.

그러니까, 너무 서둘러봤자 득은 많지 않았다. 게다가 볼로디아를 복권시키는 작업도 남은 판이다. 자칫 무리수를 걸었다가는 뒤처리가 귀찮아질 위험이 있었다.

"어차피 공연까지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쟤 일찍 휴가 보내면 내가 그거 다 처리해야 됐어. 요즘은 특히 씨발, 일 잘한다고 다 나한테 넘기는데……."

화신씩이나 돼서 남 경리 업무를 짬처리 당하는 건 외젠 이오네스코도 못 쓸 부조리극이었다. 그 남이 요정이라면, 무찔러야 할 중요 악역 중 하나라면 말할 것도 없다.

란드와르는 이를 질끈 악물었다. 이 새끼를 봐주고 있는 자신이 바로 보살이었다.

*  *  *

상황이 비극적이라고 해서 언제나 비극 속에서 살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울쿠스는 여전히 출근을 했고(출근해서 멍하니 앉아 있거나 시종 소년과 놀았다) 일을 했으며(란드와르에게 대부분의 서류를 떠넘겼다) 울다가 잠을 잤다. 그리고 별다를 것 없는 하루하루에 빠르게 적응했다.

그렇게 절망감과 비애가 일상이 되자마자 그는 자신이 대형 사고를 칠 위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속내를 현실로 옮길 만큼 심장이 두꺼웠더라면 테네브로즈를 처음 만난 당일에 저질렀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몇 년도 전에, 이미.

이렇게 되어놓고 보니 한 달을 확실히 못박아놓은 게 고맙게 느껴졌다. 뭐가 어쨌든 간에 그동안에는 지금과 같은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

한 달이 끝나면? 그 질문은 언제나 주위를 맴돌았지만 외면은 쉬웠다. 어차피 그는 평생 동안 당면한 문제로부터 도망쳐 왔으며 지금조차 예외는 아니었다.

그건 그때 가서 따지고 볼 일이었다. 이렇게 망설이면서 늑장을 부릴 안건이 아니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시간이 조금은 남았으니까…….

"제가 모르는 사이에 한 달의 의미가 바뀐 모양이군요."

울쿠스는 심란한 표정으로 테네브로즈를 내려다보았다.

약속 당일도, 휴일도 아닌 평일에 찾아온데다가, 문을 열어주자마자 당연하다는 것처럼 거실 탁자에 자리를 잡았다. 누가 보았더라면 친구인 줄 알 정도로 뻔뻔스러운 태도였다.

"어제부로 변했어. 한 달 동안은 잘 지냈나?"

"그럭저럭 괜찮았습니다. 추적자님 덕분에 다시 나빠졌지만요."

울쿠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모습을 내민 걸 보면 뭔가 중요한 일이 생긴 모양이었다.

"여기서 그대의 피를 볼 일은 없으니 걱정하지 마. 오늘은 삶에 도움이 될 충고를 하나 하러 왔을 뿐이야. 아주 중요한 문제지."

"그런 가르침은 할아버지께 충분히 들었습니다. 혈족도 아닌 이를 스승으로 모실 마음은 없어요."

"아니, 가르침에 핏줄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딤 나겔도 사정을 알면 내 편을 들 거야. 일단 앉아."

울쿠스는 한숨을 내쉬고서는 맞은편 의자에 걸터앉았다.

며칠간은 테네브로즈 개인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하지 않고 지냈다. 그의 꿍꿍이가 무엇이건 간에 지금 내린 결론과는 큰 관련이 없었기 때문이다.

설령 이 추적자가 따르는 게 인간들의 신일지라도, 울쿠스에게도 신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세계에 옛 연인 하나만을 남겨놓으려는 미친 신이.

"이런 식으로 나오신다면 일이 좋게 흘러가진 않을 겁니다."

"용건도 들어보지 않고 협박을 하는군. 너무 경솔한 발언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불청객을 쫓아내려면 무엇을 꺼리겠습니까."

"그대가 이토록 생각이 짧은 사람이라 내가 온 거야. 그걸 알아둬야 해."

테네브로즈는 고개를 숙이고는 낮은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언짢은 기분과 미묘한 불길함이 스멀거리며 뒤엉켰다.

"자, 젊은 친구. 나를 봐."

"보고 있습니다."

울쿠스는 퉁명스레 대꾸했다.

테네브로즈는 탁자에 팔꿈치를 얹고는 손바닥을 펼쳤다. 그 뒤편으로 가려진 얼굴의 나머지 반절이 보였다. 물결치는 은발과 요정치고는 작은 귀. 그리고…….

영원과 같은 찰나가 지나갔다. 이제 그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건 란드와르의 시종이었다. 손등에 아즈리온의 성흔을 띄워 올리고 있는, 열네 살짜리 인간 소년.

"과자가 맛있더군. 잘 먹었어."

경쾌한 문장이 울쿠스를 통과해 나갔다. 그는 생각이 멎는다는 게 무슨 느낌인지를 절실히 깨달았고, 딱딱하게 굳었다.

지금까지 시종 소년이 보였던 행동이 눈앞을 주마등처럼 질주했다. 그게 사실은 음흉한 추적자와 동일인이었을 가능성보다는 이게 꿈일 가능성이 더 유력했다.

만약 전자라면 테네브로즈는 정신이 나간 게 틀림없었다. 상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항변이 울쿠스의 가슴속에서 터져 나왔다.

젠장, 추적자님, 도대체 왜 그러셨습니까? 위장을 할 거라면 방법이 많지 않았습니까. 최소한 아들뻘인 요정 앞에서 아양을 떨지 않는다는 선택지가 있었을 텐데요…….

하지만 입은 열리지 않았고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기계적으로, 테네브로즈의 움직임을 따라 눈길을 옮기는 것뿐이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현관문을 열더니 인간 둘을 차례대로 들여보냈다.

둘 다, 울쿠스도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다시 소개드리지. 무신 나으리와 첫째 왕녀님이야. 그대도 여러 차례 봤으니 인사는 생략해도 좋아. 앉아 있으라고."

말루카를 떠나기 전까지, 울쿠스는 평범한 요정 청년이었고 신을 모시는 예법은 익힌 적이 없었다. 만약 배웠다 치더라도 아즈리온의 화신에게 적용되는 법도는 아닐 터였다.

그 사실을 떠올리는 순간 더한 충격이 울쿠스를 강타했다. 그것은 사제 둘의 정체 때문만은 아니었다. 누가 무신이고 누가 왕녀인지 전혀 짐작할 수 없었던 것이다.

태도나 위엄으로 보아서는 형님 쪽이 무신일 공산이 컸다. 하지만 그렇다면, 동생 쪽이 왕녀라는 말이 됐다. 정말로? 그 날건달이? 아무리 환술을 썼다 쳐도 그 행동거지는…….

아니, 잠깐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울쿠스는 자신이 란드와르 앞에서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를 자각했다. 술주정을 부렸고, 온갖 일을 떠넘긴데다가, 스카르파와 함께 도시를 박살내겠다고 말했던 것이다.

상대가 누구든 간에 그런 이야기를 술술 털어놓는 건 너무 경솔한 행동이었다. 테네브로즈가 찾아오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이럴 수는 없었다. 그는 현실로 되돌아가길 빌면서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아니었다. 아직 꿈속에 있었다. 그래도 한 번만 더 시도하면 깨어날 것 같았다.

"야, 이거 대화가 되는 상태냐?"

"물이라도 뿌려 볼까요?"

"미친 소리 하지 말고."

건달 사제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윙윙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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