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68화 (69/258)

68화 요정의 사랑 (4)

테네브로즈의 말이 새롭게 들렸다.

요정에게는 도덕 대신 깊은 사랑이 있다고.

처음에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사랑이 도덕을 이기는 경우는 인간 중에서도 꽤 있으니까, 그런 식이겠지 싶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운영체제부터가 다른 것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니가 유독 병신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어. 그냥 종족 자체가 병신이었던 거야. 그걸 너무 늦게 알았다."

란드와르는 맥 빠진 투로 중얼거렸다. 퇴근하자마자 숙소로 돌아와서 침대에 드러누운 참이었다.

"그렇지요."

테네브로즈가 기회를 잡았다는 듯 한 마디를 얹었다.

"아니야. 니가 여기서 해야 할 행동은 그렇게 대답하는 게 아니라 가만히 있는 거야."

"그런가요?"

"그런가요가 아니라, 씨발아……."

응수할 가치가 없었다. 란드와르는 눈을 감고 묵상에 빠졌다.

어쨌든 울쿠스가 흰둥이들을 진심으로 아끼는 건 사실인 것 같았다. 녀석이 보인 표정이나 태도는, 지금까지 해온 행동은 위선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게 문제였다. 미움 받고 싶지도 않지만 흰둥이들이 고통스러워하는 것도 싫다는 상반된 생각이 부딪힌 끝에, 기묘한 절충안을 만들어낸 것이다.

말인즉슨 놈은 이기적인 애정결핍 박애주의자 개새끼였다. 그 단어들이 어떻게 같은 줄에 놓일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랬다.

"한 달 채우기도 전에 죽이게 생겼는데."

"조금만 기다려 보시지요."

"걱정을 좀 해라. 그전에 돌발행동 하면 어쩌려고."

"한 달 동안은 아무것도 안 할 겁니다. 딤 나겔의 목숨을 저당 잡아 놓았으니까요."

테네브로즈는 느긋한 태도로 설명을 늘어놓았다.

단순히 추적대에게 반기를 드는 것만으로는 딤 나겔에게 위해를 끼치기 어렵다. 하지만 만약 울쿠스가 극단적인 행동에 나선다면, 피송곳니 전체가 멸문당할 공산이 컸다.

그래서 테네브로즈는 딤 나겔을 들먹이며 한 달이라는 시간을 못박아 놓았다. 그동안은 서로 가만히 있자고.

물론 그런 일이 정말로 일어난다면, 멸문은 피할 수 없는 미래였다. 시기가 어쨌건 간에. 그냥 딤 나겔을 핑계로 고삐를 매었을 뿐이다. 섣불리 행동하지 못하도록.

"내가 그런 거 있으면 진작 얘기하라고 했지."

"나으리께서 제대로 안 들으신 겁니다."

"그래?"

"제가 처음 말씀드렸을 때에는 아니, 뭘 그런 걸 해, 라고 하셨는데요."

곰곰이 되짚어보니 정말로 그랬던 기억이 났다. 란드와르는 빠르게 인정했다.

"내가 미안해. 요정이 이 정도로 미친 종족인 줄은 몰랐어."

"광기는 일반적이지 않은 것을 칭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울쿠스는 평범한 요정 젊은이처럼 행동하고 있고요."

"저게 평범한 거냐."

"다들 그렇습니다. 충분치 못한 온정 속에서 자랐을 때, 심성이 포악하면 나트람이 되고 마음여린 아이들은 울쿠스가 되지요. 보통은 이 정도로 상황이 나빠지기 전에 가문끼리 조율을 합니다만… 여기에는 아무것도 없군요."

란드와르는 두 요정을 머릿속에서 대조했다.

일단 나트람은 사촌동생을 줄곧 괴롭힌 데에 더해 친동생 손발까지 자른 놈이었다. 반면 울쿠스는 미움 받는 게 두려워서 다 죽이겠다는 기적의 논리를 세우고 있었다.

둘 중에서 누가 더 양반인지는 분간하기 어려웠다. 더 멀리 생각을 뻗자 뭐가 더 낫고 자시고를 따질 필요가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냥 스펙트럼의 양극단일 뿐이었다.

요정이라는 종족 자체가 불가사의하게 느껴졌다. 이런 사고방식으로 사회를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둘만 붙여 놔도 세상이 망하겠는데 제국은 어떻게 세운 거냐."

"나으리, 생각해 보십시오. 울쿠스는 다섯 해 동안 흠잡을 데 없는 평화를 누렸습니다. 흰둥이를 향한 사랑과 순혈에의 미움이, 그리고 버림받음에 대한 두려움이 절묘한 균형을 이뤘지요. 야스와다의 일상은 그런 식으로 유지됩니다."

"균형이 깨지면 이 지랄을 하는 거고?"

"예."

이쯤 되자 도리어 사고가 명쾌해졌다. 인간용 사용설명서로 요정을 작동시키려 했기 때문에 머리가 꼬인 것이었다. 이제 강현에게는 완벽하진 않아도 충분한 지침이 있었다.

"우리끼리 소설만 잘 쓰면 될 거 같은데."

"그렇습니까."

"개인 대 개인으로 가면, 이해당사자가 셋이잖아. 울쿠스랑 스카르파랑 볼로디아. 다른 애들은 울쿠스가 어떤 놈인지를 아예 모른단 말이야. 그나마 캐러웨이 부인이 있긴 한데."

지금 이 시점에서, 울쿠스를 극단적인 결정으로 몰아넣은 생각은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스카르파를 살리고 싶다.

둘째, 스카르파가 계속 살아있다면 흰둥이들은 불행할 것이다.

셋째, 하지만 스카르파와 함께 죽는다면 진상을 알게 된 흰둥이들이 자신을 경멸할 것이다.

첫째는 불가능했다.

둘째는 어쩔 수 없는 진실이었다.

하지만 셋째는, 충분히 바꿀 수 있는 문제였다. 볼로디아와 아즈리온이 세탁기를 돌려주겠다고 나서면 그만이니까.

"볼로디아가 걔를 직접 만나야 돼. 각본 잘 만들어서, 영웅으로 죽게 해 줄 테니까 뭐가 좋은 일인지 잘 판단하라고. 내가 옆에서 아즈리온 자격으로 공증 서 주고."

테네브로즈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그러셔도 됩니까?"

"내가 지금 생각을 잘못 하고 있는 거냐. 네 얘기대로면 이게 정답인 거 같은데."

"아뇨, 저도 그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긴 했습니다만… 나으리께서 직접 제안하시니 낯설 뿐입니다. 죽이는 쪽으로 마음을 정하셨을 줄 알았는데요."

"너는 나를 네 달째 보면서 그러냐."

사실 강현으로서도 애정결핍 미친놈한테 표백제 붓고 세탁기에 돌리겠다는 발상이 달갑진 않았다. 걸레를 빨아서 행주를 만들게 생긴 판이었다. 아니, 행주도 아니고 신부용 면사포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울쿠스를 냉큼 죽이기도 싫었다. 동정심인가 싶었는데 매몰비용 생각이 먼저 났다.

지금까지 마음 돌려놓겠다고 한 게 얼만데, 씨발, 니가 이런 식으로 나오면 안 되지. 니가 이러면 내가 뭐가 되냐… 이 지능이 부족하고 정신건강이 나쁘고 충동적이고 은혜를 모르는 씨발놈아…….

*  *  *

설명이 끝나고서, 볼로디아는 오래도록 침묵을 지켰다.

특유의 초연함은 아니었다. 세탁기를 돌려야 한다는 말에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그냥 지금 들은 이야기를 처리하지 못하고 뇌가 뻗어버린 듯했다.

그럴 만도 했다. 늑대인간들의 사고방식은 규범과 서열을 기준으로 돌아갔으니까. 둘이 서로를 침범할 때에는, 혹은 감정이 이성을 압도할 때에는 어길 때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그건 그들의 세상을 움직이는 대원칙이었다.

그리고 볼로디아는 전형적인 늑대인간이었다.

"왜지?"

볼로디아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여기가 만화 속이었으면 머리 위에 물음표가 끝없이 솟아나는 광경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너무 깊이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헌데… 그게 왜 그렇게 되는지 잘 모르겠소. 그런 이유로… 그런 결론에… 어떻게?"

말문마저 막힌 듯 볼로디아는 계속 더듬거렸다. 란드와르는 그 심정을 완벽히 이해했다. 단지 그의 사고방식이 좀 더 편리할 뿐이었다.

"이해하는 게 아니라 외우시면 됩니다."

란드와르는 명쾌한 해결책을 제시했다. 볼로디아는 수긍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그를 잠깐 보다가 재차 허공에 물음표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내가 들은 걸 정리해 보겠소. 그 요정이 마음을 아예 바꿔서, 도시를 먼저 부숴 버리려 한단 말이지. 그걸 막으려면 내가 직접 가서 예우를 해 주겠다 말해야 하고."

"맞습니다."

"그러니까, 내게는 그 이야기가 꼭 이런 소리처럼 들리오. 사람을 해치는 괴수를 소탕하려면 괴수에게 장교 직함을 내려야 한다는 말처럼. 둘 사이에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기에……?"

"울쿠스는 죽은 다음 흰둥이들에게 미움 받는 상황을 두려워하는 겁니다. 그럴 일이 없도록 보장을 해 주면 됩니다."

"미움받는 일이 싫어서… 다 죽이려 한다고… 왜……?"

볼로디아는 그 말을 끝으로 다시 넋이 나간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뇌 기능이 돌아오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것 같았다.

란드와르는 그녀를 내버려두고서는 다른 가능성을 계산하기 시작했다.

상황이 극단으로 치닫더라도 수습할 방법은 있었다. 힘을 제어하는 것과는 별개로, 심장 자체를 온전히 흡수하는 데에는 이틀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선조의 능묘> 던전을 공략할 때, 지하층에 스카르파가 얌전히 박혀 있는 것도 그 덕분이었다.

따라서 던전 개방 시점을 알아내는 것쯤은 어렵지 않을 터였다. 천계에서 울쿠스에게 모니터링 요원을 하나 붙여 놓으면 그만이니까. 어쩌면 이미 감시중일지도 모른다.

<운명부에서 전담 천사가 지켜보고 있습니다. 이상한 기미가 보이면 바로 말씀드릴 예정입니다.>

아, 예, 고맙습니다. 사찰이 아주 일상이신데요.

<감시 카메라를 어디에 설치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을 뿐이죠. 지금은 캐러웨이 부인의 집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있군요. 분위기는 괜찮아 보인다고 합니다. 음성 연결해 드릴까요?>

남 도청하는 취미는 없습니다. 중요한 얘기 나오면 그거만 전달해 줘요.

<알겠습니다. 그러면 이만 연락 끊겠습니다.>

놈이 지금 만나고 있는 상대가 캐러웨이 부인이라는 점이 얄궂었다. 울쿠스의 정체와 사연을 아는 흰둥이는 부인이 유일했으니까.

아마 그거 때문에 일부러 찾아갔겠지. 자신이 그래도 되는지 확신을 얻고 싶어서. 발상이 기상천외한 미친놈이긴 해도 고민은 있는 모양이었다.

…그 지점에서 생각이 다른 쪽으로 옮겨갔다.

따져 보면 매몰비용이고 뭐고 간에 울쿠스한테 잘 해줄 이유가 없긴 했다. 설렁설렁 시간만 때우다가, 티아에게서 통보를 받자마자 바로 14번가로 달려가면 끝날 일이었으니까.

강현은 자신이 세탁기를 돌려주려는 까닭을 곰곰이 짚어 보았다. 여기에서 큐 사인을 넣으면 울쿠스는 신화에 비극적인 영웅으로 남을 텐데도. 그건 사고방식이 뒤틀린 악당에게는 너무 큰 영예였다.

하지만 서글픈 웃음만큼은 진심이었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흰둥이들을 떠올리며 짓던 웃음 말이다. 차라리 쾌락살인범이면 진작 달려가서 찔러 죽였을 텐데.

울쿠스는 마음이 너무 여려서 모두를 죽이겠단 발상을 떠올리는 놈이었다. 그게 최선이라고 자기세뇌를 하면서.

이런 씨발, 마음이 너무 여린 주제에 사이코패스라서.

그런 녀석이 스스로 좆같은 선택을 하게 내버려두고 싶지 않았다. 비록 놈의 세계에서는 그게 완벽한 해결책일지라도 아닌 건 아닌 법이었다. 녀석으로서도 능묘에서 란드와르 일행을 마주친다면 기분이 끔찍할 게 아닌가…….

강현은 속으로 두 문장을 중얼거렸다.

어차피 둘 다 능묘에서 죽을 텐데, 갈 땐 가더라도 곱게 가야지.

그래야 내가 덜 찝찝하지.

망치에 피를 묻힐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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