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66화 (67/258)

66화 요정의 사랑 (2)

울쿠스는 생각할 시간을 청했고 테네브로즈는 받아들였다. 그러나 긴 정적이 지나간 끝에, 그가 내놓은 것은 결론이 아닌 또 다른 질문이었다.

"제게 이러시는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아즈리온의 화신이 내려와서 심장을 처분한다고요. 예, 좋은 일이지요. 좋은 일이지만 그건 추적대의 소관이 아닙니다. 그런데 추적자님께서는 마치 그게 정해진 미래인 것처럼 이야기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둘 중 하나만을 고르라고 했을 텐데."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면 저는 아무 판단도 내리지 못합니다."

테네브로즈는 느긋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울쿠스에게도 최소한의 정보가 필요했다.

"야스와다의 신께서 깨어나셨다고 했지. 그러면 아즈리온도 가만히 있지는 않아."

"거기까진 저도 압니다. 화신을 내려 보내겠지요. 하지만 아즈리온은 지난 여섯 해 동안 스카르파를 내버려 두었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눈감아주지 않겠습니까."

"아니, 그건 침대에 앉아 있는 광인이 지키기에는 너무 큰 힘이야. 신위가 요정에게로 넘어간다면 적수가 하나 늘어날 테지."

천계에서 상황을 지켜볼 때와는 달리, 일단 땅을 밟은 이상 아즈리온의 경로에는 말루카가 들어갈 수밖에 없다. 스카르파는 어떤 식으로든 처리해야 하는 존재. 요정에게 죽는다면 신위가 넘어가는데다가 그러지 않더라도 위험하다.

"정보사 쪽에서도 행동에 나서고 있어."

울쿠스는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였고, 자신의 내면에 틀어박혔다. 테네브로즈는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머릿속에서 그 문장을 뒤바꿔 보았다.

추적대는 어떻게 움직이고 있을까?

야스와다에서 울쿠스의 행방을 아는 자는 공식적으로 없었다. 달리 말하면, 추적대는 말루카에 관한 정보가 부족했다. 조금이라도 깊게 파헤쳤다면 타라곤의 정체를, 그리고 스카르파의 상태를 알아냈을 테니까.

말루카에 한정했을 때, 정보적 우위를 점한 건 인간 측이었다. 이 상황에서 추적대가 스카르파의 심장을 차지할 가능성은 사실상 없었다.

하지만 이 땅에 남은 옛 신의 흔적은 한둘이 아니었고, 추적대도 각각의 방식으로 움직일 터였다…….

그는 가능한 경우의 수를 헤아리다가 멈췄다. 울쿠스가 긴 묵상으로부터 빠져나와 입을 열고 있었다.

"스카르파에게 남은 미래는 둘밖에 없다는 말씀이시지요. 추적대에게 죽거나, 아즈리온에게 죽거나. 제가 결정할 수 있는 건 흰둥이 옆에 남을지, 아니면 스카르파와 함께 최후를 맞이할지 하는 문제뿐이고요."

"그런 셈이지."

"미래를 확신할 수 있으십니까? 이미 요정들은 도시에 침투했는데 여기 있는 사제는 되어먹지 못한 양아치란 말입니다. 자기네 교단의 기도문조차 제대로 외우질 못하지요. 그 형님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고요……."

짓궂은 문장이 웃음과 함께 혀끝을 두드렸다. 아니, 그 되어먹지 못한 양아치가 바로 아즈리온이야. 나는 그분의 뜻을 받들어 여기에 왔고… 테네브로즈는 가까스로 참았다.

"최소한 추적대는 내 소관이지."

울쿠스의 눈이 흔들렸다. 여기에 다른 요정이 있었더라면 테네브로즈에게 먼저 고발장이 날아갔을 터였다. 그는 지금 야스와다의 목표를 방해하고 스카르파의 신위를 아즈리온에게 넘겨주겠다고 공언한 셈이었다.

"나트람이 그걸 원합니까?"

"전혀."

테네브로즈는 손끝에 난 상처를 보고는 자신의 얼굴을 상상해 보았다. 맹세를 위해 그은 핏줄기가 콧등을 따라 이어져 있을 터였다. 주인의 명예를 내걸겠다는 서약.

그는 지금껏 수많은 사람 앞에서 그 일을 했고 모든 약속이 지켜졌다. 핏줄기의 끝에 있는 존재는 한낱 필멸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트람이 목줄을 쥐고 있던 시절에도.

지금조차도.

"나는 나트람을 충정으로 섬긴 적이 없어."

언제나.

*  *  *

딤 나겔은 복잡한 주문이 각인된 금속판 앞에 서 있었다. 손을 얹자 각인이 작동하며 푸른빛을 허공에 띄워 올렸다. 이윽고 빛으로 이루어진 점과 선이 기하학적인 형상을 만들어냈다.

별점술에 쓰이는 명반命盤이었다.

명반은 별의 흐름을 살필 수 있도록 밤하늘을 모사한 도구였다. 각각의 별은 강력한 마력의 갈래였으며 신의 뜻과 운명의 운행을 예고했다.

14개 주성은 신의 의지.

4개 보좌성은 필멸자를 뒤흔드는 운명.

그리고 의지와 운명을 잇는 선이.

궁위에 따른 별들의 위치는 쌍성의 조합과 12개 격국을 정했으며 선이 그 속에서 의미를 만들었다. 해석을 가르는 선의 종류는 두 가지. 별을 스스로 감싸는 자사화와 서로 다른 별을 잇는 비성사화.

지난 십 년 동안, 손자의 명운을 들여다보는 것은 딤 나겔의 일과가 되어 있었다.

"오궁에 정요가 없이 경양이 독좌하여 마두대검이 되니……."

큰 틀에서 마두대검의 격국은 방황과 성취를 의미했다. 우등한 격이면 번영했으나 열등한 격은 한 번의 영광을 겪고 몰락하기 일쑤였다.

여기까지는 익숙했다. 거의 여섯 해 가까이를 보아 온 형국이었으므로. 울쿠스의 별은 한동안 망설이듯이, 혹은 안정된 것처럼 멈춰 있었다.

무언가가 뒤틀리기 시작한 건 한 달 전부터였다.

"자미가 거문을 쫓고, 자사화가 한가운데를 가로질러서……."

거문이 상징하는 것은 원초적인 생명력과 피였고, 바단의 귀족들에게는 가장 친숙했다. 이시 첼의 의지가 그 별을 거느렸기 때문이다. 신위의 주인이 사라진 후로도 거문은 계속 움직였다.

그러나 자미는 다른 모든 흐름으로부터 벗어난 별이었다. 그것은 4개의 보좌성 중 하나였지만 주성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자미가 뜻하는 것은 죽음과 그 이후의 적멸(寂滅). 그리고 태고의 힘.

"죽음을 막아서려 하는구나."

딤 나겔은 오랜 시간을 살아오면서 수많은 이의 점괘를 보았으나 이토록 불길한 수는 처음이었다. 자미는 모든 격국의 중심을 지키는 별이었으며 스스로 움직이지 않았다. 전운이 감돌고 아즈리온의 화신이 땅을 거닐 때조차도.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저 멀리로 눈길을 던졌다. 명반을 수놓은 푸른빛과는 달리, 요정의 도시는 아득한 흑암에 잠겨 있었다.

"얘야,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딤 나겔은 주름진 두 손으로 테라스의 난간을 붙잡았다. 그는 여기에서 수많은 이들의 최후를 전해 들었다. 딸 부부의 죽음마저도. 그런 소식은 대개 추적자나 가문의 전령을 통해 전해졌다.

그러나 지금, 전령 역할을 맡은 것은 별이었다. 무력감이 밀려왔으나 순간이었다. 생각이 깊어짐에 따라 더한 공포가 그를 사로잡았다. 제국의 긴 역사에서 그 별이 움직인 것은 단 한번뿐이었다.

저승의 주인이, 눈을 뜨고 있었다.

*  *  *

테네브로즈는 이야기를 마친 뒤 하나를 당부했다. 자신을 다시 만나기 전까지는 어떤 결론에 이르더라도 행동에 나서지 않도록. 그러지 않으면 딤 나겔의 목숨은 보장할 수 없다고 했다.

"약조하셨잖습니까, 그분께는 해를 입히지 않겠다고."

"나는 그대에게 한 달을 줬어. 그러니 그대도 내게 한 달을 줘야 해."

"한 달 동안 생각만 하고 있으라는 겁니까? 그 사이에 추적대가 왕궁으로 향하면요?"

"의심이 너무 많군. 그럴 속내였더라면 여기 오지도 않았을 거야. 스카르파만을 노린다면 그대는 딱히 필요가 없거든."

울쿠스는 내키지 않는 투로 고개를 끄덕였다. 테네브로즈가 이어 말했다.

"지혜의 고리는 풀었나?"

"완전히 엉켰습니다."

"줘 봐. 시간이 남으면 그거라도 하고 있으라고."

테네브로즈는 얽힌 매듭을 손쉽게 풀었고, 떠났다.

이제 울쿠스에게 남은 기한은 한 달이었다.

그는 거실에 홀로 앉아 한 달이 꼬리를 물며 끝없이 이어지는 세계를 상상했다. 두 번째 휴일마다 테네브로즈가 찾아오고, 자신은 시간을 조금만 더 달라며 애걸하는 미래를.

그게 가능하다면 선택을 끝없이 미룰 수 있을 텐데.

불가능한 망상이라는 걸 알았지만 의식의 흐름을 멈추기는 쉽지 않았다. 그는 지혜의 고리를 잠시 만지작거리다가 내려놓았다. 명징한 정신이 필요했다.

― 추적자님은, 누구를 섬기십니까?

― 나중에 대답해 주지. 듣는 귀가 있을지도 모르니.

테네브로즈에 대해 알려진 사실은 적었다. 그는 무슨 이유로인가 가문에서 쫓겨난 뒤 나트람의 수하가 되었다. 그리고 수많은 요정의 피를 보았다. 울쿠스가 아는 것 역시 그 범주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어떤 것도 분명치 않게 느껴졌다. 이건 출세를 쫓는 사냥개가 할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테네브로즈 스스로도 말하지 않았던가. 스티그미르를 처리한 것도, 울쿠스의 부모를 죽인 것도 자신이 아니라고.

야스와다에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더라면 비웃었겠지만 지금은 오히려 믿고 싶었다. 믿을 수밖에 없었다. 상대를 앉혀놓고 선택지를 던지는 건 추적대의 방식이 아니었으니까.

테네브로즈는 야스와다 학파의 고위급 마법사. 영혼을 조작해 꼭두각시로 만들 능력은 충분했다. 정신지배처럼 복잡한 주문이 아니더라도, 환각과 공포를 잘 활용하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심지어 놈은 울쿠스를 정신의 감옥에 가두기까지 했다. 야스와다에서는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인 일이었다. 갇힌 자는 꼼짝없이, 모든 사실을 드러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테네브로즈는 짧은 문답을 마친 뒤 그를 풀어주었다. 애당초 심문 과정에서 던진 물음들 역시 추적대가 관심을 가질 주제와는 거리가 멀었다.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진실이 그의 뇌리에서 윤곽을 갖췄다. 의심할 수 있는 구석은 많았지만 확신을 향한 마음은 그것을 모두 덮을 정도로 컸다.

이 미친 추적자는 지금껏 나트람과 도시 전체를 속여 왔던 것이다. 그의 배후에 있는 것은 무언가 다른 존재였다.

원래 가문이, 어둠달이 별불꽃에 첩자를 심은 걸까? 울쿠스가 떠올릴 수 있는 가능성은 이것뿐이었지만 설득력은 없었다. 그럼으로써 얻은 이득이 무엇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득을 본 것은 나트람이었다. 사건의 진상이 어떻든 간에.

게다가 심장을 아즈리온에게 넘기겠다는 제안은, 어떤 식으로도 설명이 불가능했다. 그건 야스와다의 요정이 입에 담을 말이 아니었다.

만약 오래전부터 인간과 내통해왔다 치면, 그렇더라도, 왜?

*  *  *

파울리스는 등받이에 팔꿈치를 얹은 채, 흥미로운 표정으로 화면을 바라보았다. 테네브로즈의 정체를 의심하는 것은 울쿠스뿐만이 아니었다.

사실은 아즈리온을 제외한 신들 모두가 그랬다.

아즈리온은 지하 감옥에서 요정을 발견한 뒤 마력 구속구를 풀어 주었다. 일을 마친 후에도, 목숨을 남기기로 했다. 그런 배신자에게 자비를 베풀 이유가 없는데도.

"정말로 이유가 뭐야? 말해줄 때도 됐잖아. 잘 굴러가지도 않는 머리로 애쓰지 말고."

"마음에 들어. 그것뿐이다."

파울리스가 보기에도 요정은 준수한 장기말이었다.

의뭉스러운 구석이 있지만 그게 발목을 잡진 않았다. 주문을 다루는 능력도 수준급인데다 전투 외에도 쓸 구석이 많았다. 충성심까지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왜? 사형을 면하고 싶어 동족을 배신했을지라도, 충성심을 지니는 건 다른 문제였다. 운명부의 뒷조사를 거치고서도 마땅한 단서가 없었다.

석연찮았다. 아즈리온의 독단만 아니었더라면 진작 숨통을 끊었을 터였다. 아무리 쓸모 있다 쳐도 불확실한 변수를 옆에 둘 만큼의 가치는 없으니까.

"글쎄, 내가 보기에는 불길한데. 죽이는 게 낫겠어."

"네놈보다 불길한 게 있을까."

아즈리온은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는 이스트리아 만신전의 최고위 신이었고,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았지만, 언제나 잘못된 곳에 있다는 느낌에 시달렸다.

다른 신들은 그를 경계하거나 믿지 않았고 천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아즈리온 또한 그들에게 큰 관심이 없었다. 마공학과 연금술의 신만이, 그러니까 파울리스만이 귀찮게 근처를 맴돌 뿐이었다.

"여기는 싫어. 돌아가고 싶다."

"돌아가다니, 어디로?"

몰랐다. 여기가 어디인지도, 돌아가려는 곳이 어디인지도. 그런데도 그 문장들만큼은 오래전부터 아즈리온의 정신 한가운데에 박혀 있었다. 하지만 의심은 형체를 갖추다가도 금방 사라졌고, 망각에는 미묘한 의도마저 느껴졌다.

파울리스는 잠시 망설이더니 한 마디를 더 얹었다.

"미안해."

"뭐가 미안하단 말이냐."

그는 등받이 너머로 팔을 뻗더니 아즈리온을 가볍게 껴안았다. 눈앞이 희뿌예졌다.

"우리한테는 아직 네가 필요해, 아즈리온……."

"…아즈리온?"

"네 이름."

"내 이름."

그렇게 읊는 동시에 명징한 사실이 밀려들어오며 머릿속에 구획을 나누었다. 그가 알고 믿어온 세계가 윤곽을 되찾았다.

아즈리온.

현계에 간섭할 수 있는 유일한 신.

화신을 빌려 쓰는 건 다른 세계의 인간.

그리고,

"나는, 누구지?"

하지만 그 물음에는 동력이 없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즈리온은 자신이 그렇게 중얼거렸다는 사실마저 잊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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