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요정의 사랑 (1)
울쿠스는 꿈조차 없는 잠에 빠져들었고, 아침이 되어 깨어났다. 당혹감과 공포가 밀려왔다. 인간 사제에게 너무 많은 말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본론은 전혀 꺼내지 않았지만, 그는 치명적인 말실수를 저질렀다. 할아버지에 대한 것. 욕심에 대한 것. 스카르파에 대한 것.
인간 사제 스스로는 이상한 점을 알아차리지 못했더라도, 단서를 던지는 것만으로도 위험에 빠질 수 있다. 만약 이 이야기가 다른 누군가에게로 흘러간다면…….
"어제 일은 미안해요. 쓸데없는 소리가 너무 많았지요. 다른 사람들에게는 말씀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미안해해야죠, 손님이 처음 가는 집에서 설거지까지 하고 왔는데. 내가 남한테 말할 건 없으니까 그쪽 술버릇부터 고쳐요. 아니면 아예 금주를 하는 것도 좋을 것 같고."
시가 연기를 훅 불어 내쉰 란드와르는 낄낄 웃었다. 울쿠스는 약간의 안도와 혼란 속에서 사무실로 돌아왔고, 서류 더미를 붙잡았다.
이번에는 일에 진척이 조금 있었다.
* * *
"누구도 실망시키고 싶지 않습니다. 배신하고 싶지 않아요."
"그대는 왕을 죽이고 북부 대장군을 광기로 몰아넣었어. 이미 충분한 악당이지. 대체 뭘 배신하고 싶지 않다는 말인가?"
"누군가를 만족시키려면 누군가를 속여야 합니다. 고향에 계신 할아버지, 이곳의 어머니, 다른 늑대인간들, 스카르파… 아무도 실망시키고 싶지 않습니다. 영원히 이런 상태가 이어졌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제 소망입니다."
"이봐, 젊은 친구. 누구도 배신하지 않겠다는 건 모두를 배신하겠다는 거야. 언젠가는 선택을 해야 해."
울쿠스의 태도는 우호적이진 않았지만 저번처럼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진척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스카르파를 사랑했고 흰둥이를 아꼈다.
테네브로즈는 어떻게든 결론을 이끌어낼 필요성을 느꼈다.
"그나저나, 인간 사제를 집에 불러들였더군. 무슨 이야기를 나눴나?"
"이 도시에 추적자들이 얼마나 퍼져 있는지 궁금합니다."
"겁먹을 필요는 없어. 나는 그대의 불충을 완전히 눈감아주고 있으니. 솔직하게 말해 보라고."
"나트람에게 이야기를 전하시겠지요."
"그대를 고발하려면 정신의 감옥에서 한 말로도 충분해. 아니면, 그래, 카위르는 어떤가?"
테네브로즈는 서리칼날의 아이에 얽힌 이야기가 고발로 이어지진 못하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카위르를 부추겨서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은 울쿠스였지만, 테네브로즈 역시 진상을 감춘 사람으로서 책임을 피할 수 없었다. 지금의 발언은 울쿠스의 마음을 건드리기 위한 수작일 뿐이다. 나트람의 사냥개에게, 사실은 다른 면모가 있었음을 깨닫도록.
그런 여지를 만들어 두는 건 허허벌판에 과실수의 씨앗을 뿌리는 것과 비슷한 일이었다. 대부분은 싹이 트기는커녕 위치마저 잊히고 말지만 몇몇은 그럴듯한 열매를 맺는다.
"예, 꿈을 꿨습니다. 추적자님께서 저를 살려 주셨더군요. 할아버지께서는 그걸 두고 미치광이의 변덕이라 하셨지요."
"딤 나겔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그대의 의견을 말해야지."
"변덕이 제 구명줄이 된다면, 좋습니다. 하지만 그게 언제 교수대의 밧줄로 변할지 누가 가늠할 수 있겠습니까."
"변덕이 들끓기 전에 말하는 게 좋을 텐데!"
테네브로즈는 홍소를 터뜨리더니 쾌활한 어조로 외쳤다. 긴 망설임 끝에 울쿠스의 입이 열렸다.
"추적자님께서 저를 죽이진 못할 겁니다."
"왜, 또 덤빌 생각인가? 내 혈마법 실력이 궁금하다면 사양은 않겠어."
"고향에 계신 할아버지는 이야기가 다르지요… 약속해 주십시오. 미치광이의 변덕이 그분마저 감싸기를요."
"딤 나겔을 너무 얕잡아보는군. 가출한 손자의 불충 따위로 없앨 수 있는 자가 아니야. 하지만 그대가 원한다면, 약조하지. 내가 모시는 분의 명예를 걸고."
테네브로즈는 벽에 걸린 장식용 단검을 쥐고는 자신의 엄지에 작은 상처를 냈다. 그걸 미간에 가져다 대고 콧등을 따라 아래로 긋자 붉은 선이 얼굴의 중심에 남았다. 맹세를 뜻하는 요정들의 의식이었다.
그러고서도 울쿠스는 한동안 숙고했다.
"나트람에게 무슨 명예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알겠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협조적이어서 좋군."
"교단의 사제들과 손을 잡으려 했지요. 야스와다의 신을 깨웠고 이곳의 피웅덩이마저 노리고 있으니 내쫓아 달라고요."
"그러면서도 정체를 감출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군부가 사제들에게 보고를 들은 다음, 어떻게 나설지는 생각해 봤어?"
"그래서 결국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룻밤을 낭비했어요."
울쿠스는 이마를 짚었다. 손바닥 아래로 타오르는 듯한 열기가 느껴졌다. 그는 머릿속에서 들끓는 문장들을 깨닫고 공포와 경탄을 동시에 느꼈다. 요정이라면 해서는 안 되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진심이기도 했다.
"제가 맞설 상대는 추적자님 한 분이 아니라 야스와다 전체입니다… 그 잔악한 놈들이 이곳으로 밀려드는 꼴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솔직히 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가서 추적대에게 전해 주십시오. 다음에 일어날 일은 제가 감내할 테니."
테네브로즈는 입가에 차오르는 웃음을 감추려 애썼다. 울쿠스는 이제 요정에게서 완전히 돌아섰다. 그건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란드와르에게 협력하는 건, 경우가 달랐다.
아마도 완전한 독자 노선을 탈 터였다. 흰둥이와 스카르파를 둘 다 지킬 수 있도록. 란드와르가 화신이라는 걸 알게 되더라도 연인의 목숨을 애걸하겠지.
게다가 정체를 밝히는 것은 아직까지는 계획에 없었다. 그는 군부 연극까지 긴 시간이 남았다는 사실을 되새겼다. 한 달 반쯤. 마음을 약간 더 흔들어 놓기에는 충분했다. 적당한 화두도 상대 쪽에서 먼저 던진 상태였다.
"그러면 다른 이야기를 해 보지. 잔악한 요정들이라. 그대는 스스로가 동족과 완전히 다르다고 믿나?"
"저는 죄책감이 무엇인지 배웠습니다.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죽이지도 않습니다. 악행을 꺼립니다… 저는 인간들의 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 인간은 요정에게 아무런 도덕이나 윤리가 없다고 믿지. 그건 사실이야. 수백의 목숨을 거두고서도 태연하게, 피웅덩이 속에서 오찬을 즐길 수 있는 종족이 아닌가."
"저는 아닙니다."
"정말로?"
테네브로즈는 그렇게 되묻고서는 울쿠스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초록색 눈동자는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번득이고 있었다… 하지만 자기확신은 그 무엇의 증거도 되지 못했다.
마음은 대개 편리한 방향으로 움직여간다.
진실을 향해서가 아니라.
"아끼는 사람들을 지키려 합니다. 제 방식으로요."
"이건 내 질문에 대한 답변이 아니야. 그대는 도덕과 사랑을 혼동하는군."
"사랑은 숭고한 감정이지요."
"이봐, 젊은 친구. 사랑은 갖가지 마음의 작용 중 하나에 불과해. 그 자체로 선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 애당초, 우리의 영혼을 채운 게 바로 그것 아닌가."
요정의 마음은 장난감을 아끼는 어린아이와 같았다. 어떤 인형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바칠 수 있지만 관심 없는 장난감은 어떻게 되든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걸 부수고 치워 버리지 않는 것은, 그럴 이유 역시 없는 까닭이었다.
"의문을 품은 적은 없나? 아주 어린 요정들조차 거리낌 없이 암살 계획을 세우는데, 이런 족속이 어떻게 제국을 세우고 다스렸는지 궁금하지 않아?"
"예. 솔직히 인정하겠습니다. 항상 하던 생각이었지요. 야스와다조차, 잘못 건드리면 곧바로 무너질 모래성처럼 보이는데요. 할아버지에게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귀족 가문들이 서로를 참아 주는 게 신기하다고 느꼈어요. 아무리 얽힌 게 많다고 쳐도."
테네브로즈는 가볍게 웃었다.
요정 젊은이들의 정신은 철부지 아이와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그들이 요정 사회의 역학을, 자신의 심장 속에서 꿈틀거리는 감각을 완전히 이해하기까지는 수십 년이 더 필요했다.
"그대는 딤 나겔에게서 배울 게 아직 많군… 그게 바로 요점이야. 은혜는 원한만큼이나 겹겹이 쌓여 있거든. 모든 원한을 덮고도 남을 만큼, 두텁고 넓게."
서리칼날의 모티스는 은빛매의 쉭겐을 증오했지만 행동에 나서진 않았다. 음모조차 꾸민 적이 없다. 오히려 쉭겐이 누군가의 모함을 받아 죽지 않도록 애썼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반려를 잃을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요정들과 각각의 가문은 그러한 관계 속에 갇혀 있었으며 그것은 도시의 약한 부분을 봉합했다. 한 명의 증오와 격노가 야스와다 전체를 뒤흔들지 않도록.
"제국은 견고한 사랑 위에 세워졌지. 야스와다도 마찬가지야. 그대의 마음이 이것과 다르다는 증거가 있나? 확언할 수 있어?"
"저는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죽이려 하지 않습니다. 그게 잘못되었다는 걸 압니다."
"계속 대답을 피하는군."
테네브로즈의 말에, 울쿠스는 인간 사제와 나눴던 대화를 복기했다. 그는 실제로 펜닐을, 군부 대원들을 참았다. 순혈의 멸시를 감수하면서 말루카를 지켰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모든 죄를 씻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껏 흘린 피가 그의 눈앞에서 출렁였다. 인간 세상을 떠돌던 시절에 죽였던 사람들이. 물론 친했던 이의 숨통을 끊으면서 저주를 들었을 때에는 뼈저린 아픔을 느꼈다. 지금도 그 순간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반면 대부분의 살생에 대해서는, 무감각했다. 그것은 가시덤불을 쳐내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길을 가로막는 방해물을 없앤 것이다.
볼로디아와 카위르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래도…….
"저는 펜닐을 살려 두었습니다."
그는 더듬거리면서 다시 운을 뗐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혈마법을 써서 펜닐을 죽인다면 모두가 그대의 정체를 알게 되겠지. 곧바로 도시를 뜨더라도, 의심에는 끝이 없을 거야. 극단 사람들부터가."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겁니까?"
"그대가 펜닐을 내버려두는 건 죄책감이나 윤리 때문이 아니야. 흰둥이들의 온정이 한순간에, 증오로 바뀔 수 있다는 공포지. 사랑하는 이들을 떠나야 하는 상황을, 그들에게 미움 받는 상황을 두려워하는 거란 말이야."
울쿠스는 불안한 태도로 눈을 깜박였다.
"그렇습니까. 그래서요?"
"그대가 지키려는 게 평화인지를 따져 보라는 거야."
그는 천천히, 볼로디아가 하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피웅덩이가 사라진다면 늑대인간들이 서로를 의심할 필요가 없으리라는 것을.
산맥을 뒤덮은 괴수들은 수가 줄고 인간 도시로 통하는 교역로가 생긴다. 차원문 역시 완전히 개방된다. 이방인들이 말루카를 활보한다. 흰둥이들은 평생, 농작지에 갇히는 대신 세카두와 타일라프람으로 떠날 수 있다.
"그러니, 저번에 했던 질문으로 돌아가자고. 가정을 해 봐. 요정이 아니라 아즈리온의 화신이 스카르파를 죽이고 심장을 처분한다면 어떻겠어?"
"싫습니다."
울쿠스는 고민조차 하지 않고 내뱉었다.
"흰둥이들은 진실로 행복해질 텐데. 이런 숨 막히는 평화가 아니라, 진짜 자유를 누리는 거야. 산맥 너머의 인간들처럼."
"하지만……."
울쿠스의 입이 굳게 다물렸다. 테네브로즈는 충분한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말했다.
"이것 봐, 그대가 원하는 건 결국 요정 하나의 행복이란 말이야. 그걸 위해서 수많은 흰둥이들을 속이고 있는 거지. 이 갑갑한 도시에 가둔 채."
잠시 말을 멈춘 그는 울쿠스의 표정을 확인하고서는 흐뭇하게 웃었다. 좀 더 몰아붙여도 괜찮겠다는 계산이 섰다.
"그대가 지금까지 스카르파를 달래느라 노력한 건 알겠어. 칭찬할 일이지.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이 문제를 두고 망설이는 건 수구일 뿐이야. 반동이고."
울쿠스는 머뭇거리다가 반론했다.
"군부 놈들은 역겹고, 스카르파는 터지기 직전의 폭탄 같지만… 그래도 흰둥이들은 잘 지냅니다. 도시는 평화롭고 배를 곯는 사람도 없어요. 모아둔 돈이 없고 일할 수 없는 사람조차 배급을 받아 살아가지요."
"진심인가?"
"아주 틀린 말은 아니겠지요."
자신감이라고는 없는 목소리였다. 테네브로즈는 가볍게 미소 짓다가 입을 열었다.
"그대가 후원하는 저항군들 앞에 가서 말해 봐. 군부 취조실에 끌려간 적이 있는 흰둥이들에게도. 그렇게 가족을 잃은 이들에게도……."
그 지점에서 어조가 격렬해졌다. 그는 뒤틀린 희열을 폭발시켰고,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대는 사냥개처럼 외쳤다.
"아니, 타라곤의 어머니에게 가서 말해! 그대는 이 도시에 완벽히 만족하고, 왕과 군부는 말루카를 은혜와 자비로 통치하며, 그들의 모든 행동을 납득한다고. 그리고 대답을 들어!"
"압니다. 저도 압니다. 예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중얼거린 울쿠스는 줄 끊긴 꼭두각시처럼 고개를 떨어트렸다.
테네브로즈는 젊은 요정을 침묵 속에 내버려둔 채 거친 웃음을 터뜨리다가, 뚝 멈췄다. 격정이 한순간에 사라지더니 혐오감이 밀려왔다.
그는 때때로 다른 누군가가 자신의 몸을 차지하는 듯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오래전에 시전된, 금지된 주문의 부작용이었다.
가디스 학파의 마법은 그에게 무감각한 평온을, 그리고 주인에 대한 맹종을 부여했지만 이따금 정반대의 효과를 일으켰다. 암실에 갑자기 눈부신 빛이 몰려드는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그는 동요를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면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다행히도 울쿠스가 제정신을 되찾기 전에 평정이 돌아왔다.
절박한 질문이 탁자에 오른 건 한참이 지난 뒤였다.
"야스와다의 추적자시여, 도대체 제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고향 일은 일단 잊어. 선택지를 줄 테니, 거기에 대해서만 생각해. 스카르파와 함께 도시를 먼지로 만들거나, 아니면 캐러웨이 부인의 아들로 살아가면서 교역로가 열리는 모습을 보거나. 하나를 골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