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사랑과 전쟁 (5)
"우리 애가 와서 말해 주던데요. 길 가다가 검문에 걸렸는데, 순찰 도는 군부 대원들이 그쪽더러 기둥서방이랬다고."
"아, 그래요. 꼬마가 그랬군요. 그런 일도 있었죠……."
"서로 좋다는데 어쩌겠습니까. 그런데 펜닐은 나랑은 의견이 다를 것 같아서."
"갈 때마다 비슷한 일을 겪지요. 참고 있어요. 참을 수밖에 없으니까요. 지금까지 계속 그랬습니다."
"인내심이 대단한데요. 내가 그 입장이었으면 찔러 죽……."
란드와르는 흠칫 멈췄다. 이강현이었을 때에는 그냥 기분 나쁠 때 하던 헛소리였는데 판타지 세상에 와서 이러고 있으니 말에 괜스레 무게가 실렸다.
펜닐이 비록 예의 없는 잡놈이긴 했지만 그런 이유로 사람을 죽일 수는 없었다. 그건 결투와도, 욕설과도 다른 일이었다. 만약 그게 정당화가 가능했더라면 이강현은 VC(*Venture Capital) 심사역을 다섯 명쯤 담근 연쇄살인마였을 터였다.
"…이면 안 되죠. 기분이 나쁘다고 사람을 죽이면 안 되는 겁니다, 그렇죠?"
"그렇죠."
울쿠스는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갑작스러운 질문을 던졌다.
"아즈리온 교단은 사제를 어떤 식으로 뽑나요?"
"보통은 훈련원에서 수련을 받죠. 어릴 때부터."
"사제님들도 훈련원 출신인가요?"
"그건 아니고, 경우가 조금 다릅니다. 형님도 마찬가지고요. 제대로 된 사제처럼 안 보이는 건 나도 알아요."
"아."
짧은 신음이 새어나왔다. 체념과 안도가 조금씩 섞여 있었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알겠어요. 다행인지 아닌지 모르겠네요."
"다행일 게 뭐가 있고 아닐 게 뭐가 있습니까."
울쿠스는 세 번째 잔을 들이켰다. 그리고 오래도록 침묵했다. 그걸 기점으로 얼굴에 붉은 기가 올라오더니 말이 갑자기 길어졌다.
"그냥요. 설명 드리기가 어렵네요. 미안합니다. 교리를 잘 아는 분이시길 바랐는데. 사제님 탓을 하려는 건 아니에요. 제가 너무 무리한 기대를 한 거죠."
"예에."
"언제나 그랬던 것 같아요. 기대도 많고 욕심도 많았는데 된 건 없어요.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있긴 하죠. 사실 욕심만큼은 됐어요. 그런데 그 욕심이라는 게."
란드와르는 자신이 또 잘못된 사람에게 술을 먹인 게 아닌가 의심했다. 격언 하나가 그의 뇌리를 스쳤다… 와인의 첫째 잔은 식사를 돕고, 둘째 잔은 사랑을 더한다. 그리고 셋째 잔은 싸움을 부추긴다.
그것까진 아니더라도 느낌이 싸한 게 술버릇이 좋지 못할 것 같았다. 경험칙에 따르면, 이런 부류는 보통 취하기만 하면 신세한탄을 끝없이 늘어놓았다. 중언부언하면서, 알아듣지도 못할 문장들로.
그전에 이야기를 마쳐야겠다는 계산이 섰다.
"그래서, 교리를 잘 아는 사제한테 털어놓고 싶은 고민이 뭡니까?"
"아니에요. 그냥 제가 잘 해결해 보려 합니다. 어차피 저도 정리를 못 하고 있거든요. 해야 하는 일은 너무 많은데, 되는 건 아무것도 없고. 그런데 나흘 뒤까지는 어떻게든 마음을 정해야 해요."
나흘 뒤라면 테네브로즈가 다시 찾아가기로 약속된 날이었다. 울쿠스의 원래 속내가 짐작이 갔다.
아즈리온 교단의 힘을 빌려 추적대를 내쫓으려다가, 제대로 된 사제가 아니라는 말에 단념한 것이다. 혹은 자신의 정체를 들키지 않으면서 뜻을 전할 방법을 찾다가 포기한 걸지도 모르고.
아마도 둘 다일 터였다.
"나흘 뒤면 휴일일 텐데요."
"손님이 와요. 반갑지 않은 손님입니다. 예전에는… 개자식이다 쳤는데,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긴 하는데, 잘 모르겠어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와서 뭘 할지도 모르겠고요."
"집을 비우면 되지 않습니까. 아니면, 도와 드려요? 다시는 못 오게 해줄 수 있는데. 두들겨 패는 건 전문입니다."
란드와르는 확실한 입장을 떠 보았다. 저번처럼 돌발행동을 했다가는 곤란하니까. 그때는 반지에 칼린카의 영혼을 담아 갔다지만 지금은 늑대인간 말고는 제물용 영혼을 공수할 데가 없었다.
"그래 주신다면 고맙지요… 하지만 그럴 수는 없어요. 제가 감당할 일입니다. 자세히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요."
환하고 서글픈 웃음이 흰둥이 늑대인간의 입가를 물들였다. 진심이 느껴졌다. 비록 그 안에 있는 게 요정일지라도. 란드와르는 잠시, 멈춘 듯 굳어 있다가 내뱉었다.
"그렇습니까."
"이야기를 잘 해보려 해요. 그 다음에 사제님께 다시 상담을 부탁드릴지도 모르겠네요."
일단은 테네브로즈를 타라곤의 집에 보내도 괜찮겠다는 판단이 섰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모르겠지만 덤빌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그래요, 잘 해보시고. 고민 상담은 여기서 끝입니까?"
"조금 더 있다가 가시지요, 이왕 오셨는데요. 괜찮은 치즈가 있어요. 미리 꺼내 뒀어야 했는데 잊고 있었네요. 요즘은 아무것도 기억을 못 하고 지내요. 머릿속이 가득 차서요. 원래도 똑똑한 편은 아니었는데 훨씬 멍청해졌죠."
울쿠스는 답할 새도 없이 일어나더니 비척비척 주방을 향해 걸어갔다. 란드와르는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경계심을 푸는 건 고마운데, 그런데 씨발, 레이드 우두머리가 이러면 안 되지.
사무실에 있을 때에는 란드와르를 꺼리더니 이제는 또 태도가 변했다. 지금 보니 애정결핍이라는 게 남녀관계나 가족에만 국한된 문제는 아닌 것 같았다. 그냥 정에 굶주려 있는 듯했다.
녀석은 잘린 치즈가 담긴 접시와 함께 돌아왔다. 까망베르처럼 흰 곰팡이 껍질이 무른 속을 감싼 것이었다. 접시가 탁자에 놓이자마자 다시 푸념이 시작됐다.
"영수증에 각종 서류도 잔뜩 쌓였어요. 한창 학기가 끝날 시기라서 미리 준비를 해 둬야 하는데요. 게다가 올해는 기초학교를 졸업하는 애들이 셋이나 있어서, 진로 상담도 제 몫이에요."
"고생이 많으십니다."
"고생이라기보다는, 제가 한 점으로 줄어들어서 완전히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정말로 그럴지도 몰라요. 사방에서 문제가 밀려오거든요. 밀려와서 저를 짓누르죠. 쓰레기를 밟아 누르는 것처럼요."
빈약한 어휘력은 이공계생의 미덕 중 하나다. 잔뜩 취해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씨발, 소리만을 거듭하다가 술이 깨기 때문이다. 반면 울쿠스는 아주 문창과적으로 주정을 부리는 새끼였다. 좋지 않았다.
"취하면 원래 말이 많아집니까?"
"그렇지요. 그래서 잘 안 마시는데, 어쩌다 보니. 사제님이 가져오셔서. 술이 필요하기도 했고요. 이런 말은 보통 어머니 앞에서만 해요. 어머니께도 거의 안 하죠. 그런데 요새는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서 속으로만 삭이다가, 미안합니다."
이런 요정을 양자로 맞아들이는 게, 자학 섞인 푸념을 들어주는 게 어떤 기분일지는 잘 몰랐다. 일단 서른네 살의 이강현에게는 전혀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캐러웨이 부인의 의견은 다른 모양이었다. 귀찮을지라도 망나니는 아니니까. 그러면 정을 붙일 수도 있겠지.
란드와르는 그쯤에서 생각을 매듭짓고서는 스카르파 이야기를 꺼내들었다. 지금이라면 쓸 만한 정보가 나올 것 같았다.
"애인은요."
"예?"
"왕 말입니다. 그 앞에서도 이러시는가 해서."
울쿠스는 키득키득 웃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제님은 취하지도 않았는데 그런 말을 함부로 입에 담으시네요. 이야기를 잘못 들으면 끌려가서 사라질 수도 있어요. 하는 게 아니라, 잘못 들으면요."
"예, 잘못 들으면요. 안 그래도 형님이 그거 때문에 갇힐 뻔했거든요."
볼로디아도 스카르파를 만났다가 곧바로 취조실 신세를 졌다. 함구하겠다고 서약한 뒤에야 겨우 풀려났다고 했다… 대답을 들은 울쿠스의 얼굴에 울적한 기운이 일었다. 그는 네 번째 잔까지 비운 뒤 말했다.
"다들 그래요. 제가 왕의 애인이라는 건 알지만 거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모르죠. 제가 말하지 않는 겁니다. 사제님께서도 대강은 아시겠지요. 제가 입을 열면 도시가 무너질 겁니다."
"그렇게 사는 게 힘들진 않아요?"
"힘들지요."
란드와르는 약간의 동정을 느꼈다. 스카르파만 포기하면 살려줄 수도 있을 텐데. 일이 모두 끝나기 전까진 마력 구속구를 씌우고 수도원에 가둬야겠지만. 아마 일이 끝난 후에도…….
"관두는 건 어떻습니까? 그러면 부군도 조용해지겠고."
"왕께서 저를 원하시는걸요."
순간 사극에 나올 법한 대사가 그 목소리에 겹쳐 들렸다. 마흔 살쯤은 먹었을 요정 남성이 연산군한테 끌려가는 궁녀처럼 말하고 있었다. 아니, 물론, 큰 차이가 없긴 한데. 그래도. 그는 애써 잡상을 몰아내고서는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주위 사람들이 위험해질 수도 있잖습니까."
"그러지 않으려고 애씁니다."
"그렇게 된다면요."
"그럴 일이 없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쥐어 짜내는 듯한 목소리였다. 란드와르는 더 몰아붙였다가는 상황이 좋아지지 않을 것임을 직감하고 멈췄다. 울쿠스가 다시 입을 연 것은 긴 정적이 흘러간 뒤였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저는 왕 곁에 있겠지요. 반드시 그럴 겁니다… 그러고 싶지 않아요. 극단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요. 극단 사람만이 아니라, 누구든지요."
란드와르는 울쿠스를 보고는 흠칫 놀랐다. 소리 없이 흐느끼고 있었다. 지금까지 느낀 감정과는 별개로, 가지가지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어, 다 큰 양반이 울지 말고. 몇 살이시더라."
"아주 어려요. 이런 고민을 짊어질 나이는 아니지요. 할아버지도 이런 상황은 못 겪어 봤을 겁니다… 아무튼, 서른둘입니다. 곧 있으면 서른셋이겠네요."
이제는 딤 나겔까지 입에 담고 있었다. 그래도 타라곤의 나이를 댈 정도로는 제정신이 남은 게 다행이었다.
"사제님은 나이가 어떻게 되지요?"
"서른넷입니다."
"그런가요……."
울쿠스는 거기까지 말하고서는 고개를 푹 떨궜다. 다시 보자 기절하듯이 잠들어 있었다. 그간 쌓인 피로에 술기운이 더해진 나머지 정신을 잃은 모양이었다.
란드와르는 녀석을 침대에 데려다 눕힌 뒤 설거지를 시작했다. 어차피 많지도 않았다. 치즈가 있던 접시와 유리잔 두 개. 끝이었다. 불을 모두 끄고 커튼까지 친 뒤 밖으로 나왔다. 늑대 석상이 빛을 밝히고 있었다.
앞다리에 기대어 앉은 란드와르는 고개를 들어 석상의 두 눈을, 맹렬하게 번뜩이는 보석을 바라보았다. 그 뒤편에 있는 게 사실은 능묘로 통하는 공간 이동 각인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수백 년 전에, 늑대인간 왕족들끼리 혈겁을 일으킬 때 만들어진 비밀 통로 중 하나라고.
그는 시가를 물고는 묘한 감상에 잠겼다. 인물 각각의 표면과 이면이 짝 맞추기 카드처럼 머릿속에 늘어졌다.
무능력자로 알려진 왕은, 이미 반신이 되었다.
서른네 살의 인간 사제 뒤편에는, 화신이 도사려 있다.
그 사제의 형님은, 왕의 실종된 언니다.
서른두 살의 흰둥이는, 그녀를 제거한 요정이다.
그가 아끼는 열네 살 소년은, 그 요정의 원수다.
울쿠스가 지금껏 거짓말을 쌓아 올린 만큼 란드와르 일당도 거짓말로 일관하고 있었다. 복마전이 따로 없었다… 이 복마전 속에서 사람들은 행복했다. 늑대 석상이 겉보기에는 아름답게만 느껴지는 것처럼.
거짓으로 빚은 평화가 영원할 수 있다면 참으로 좋을 터였다. 적어도 얽힌 사람들이 모두 죽어 먼지가 된 뒤에야 진실이 밝혀진다면. 그 누구도 상처받거나 실망하지 않을 것이므로.
가끔은 그런 일이 일어났다.
지금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