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사랑과 전쟁 (4)
볼로디아는 조카를 만난 후로 줄곧 침묵을 지켰다.
아이의 어머니를 죽인다는 생각 때문에 망설임이 생긴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오히려 그것마저도 속죄의 일부분이라고 믿었다. 언젠가, 작은 볼로디아가 자신의 이모를 원망할지라도.
하지만 결단을 내린 뒤에도, 다른 방법이 없다는 걸 알아도 감정은 남기 마련이다.
"숙소에 술이 있소?"
군부 수레에서 내리자마자 꺼낸 말은 그런 것이었다. 란드와르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술은 않으셨던 것으로 압니다만."
"마시면 동생을 보게 되거든. 그 후로 줄곧 그랬소."
란드와르의 얼굴에 착잡한 기색이 떠올랐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가면 드리겠습니다."
그는 약속을 지켰고 볼로디아는 자신의 방에서, 브랜디와 함께 앉아 있었다. 어둠 속 작은 병은 마력등 곁에서 공명하는 황금색 불꽃처럼 보인다. 그 불꽃이 넘쳐 흐르면서 유리잔으로.
와인에는 악령이 숨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혹은 그 반대로, 낱말 찾는 걸 도와준다고도. 와인을 증류해서 브랜디를 만들면 어떻게 될까. 악령은 열기에 죽고 낱말은 한데 모이는 걸까. 혹은 그 반대일지도 모른다.
볼로디아는 반쯤 찬 유리잔을 손안에서 흔들었고, 쓴 약이라도 마시듯 단번에 들이켰다. 향기롭고 알싸한 맛이 노을녘에 기우는 빛처럼 목을 두드렸다. 그리고 다시 한 차례.
마력등을 끄자 적막을 닮은 그늘이 밀려왔다. 이곳은 망치 집결지 중심부의 고급 여관. 혹은 일곱 해 전의 북부 기지. 어쩌면 그 이전의 어딘가.
볼로디아는 고개를 들어 허공을 응시했다.
스카르파가 어둠으로부터 흔들리며 걸어 나왔다.
* * *
이강현은 그런 이유로 술을 마시는 게 알코올 중독으로 가는 첩경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만약 볼로디아의 자제력이 충분하더라도 트라우마틱한 환각을 보는 사람한테 술을 쥐어 주는 건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강현은 신의 몸을 얻는다는 게 어떤 일인지도 알았다. 시가를 속담배로 피워도 괜찮고 위스키는 꽃향기 나는 물이 된다.
그러니까, 얼마 지나면 중독이 되고 싶어도 못 될 텐데 너무 말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강현이 그런 것처럼. 매일같이 술을 퍼마셔도 느껴지는 게 없었다.
잠깐만. 설마 이것도 중독인가.
지구에서는 혼자 있을 땐 안 마셨는데.
그는 새삼스러운 사실을 깨닫고 충격에 사로잡혔다. 길지는 않았다. 중독이든 아니든 간에 현상적인 문제는 없었기 때문이다. 몸을 망치는 것도 아니고 머리도 멀쩡하다. 그러면 됐지.
이래도 되나? 정말로?
"내가 이러고 살아도 되는지 모르겠다."
"오늘은 또 무슨 일로 그러십니까."
"우울한 인간한테 술 먹이면 안 된다고. 저러다가 중독자 되는 건데."
"고작 그런 걸로요. 살생은 더더욱 안 되는 일인데요."
"니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냐."
"그래서 저는 병자에게 술을 준 다음 후회하지도 않는답니다."
과연 일관적인 새끼였다. 혀를 쯧 차는 순간 미뤄 두었던 의문이 고개를 내밀었다.
"됐고, 이거 다 마치고 나랑 같이 왕궁 좀 가자. 영혼 볼 애가 하나 있다."
"능묘 일까지 처리한 다음 말씀이시지요. 그때 제가 할 일이 남아 있을까 싶은데요. 세카두로 돌아가면 끝이 아닙니까."
"그냥 내가 궁금해서 그래."
그는 작은 볼로디아를 만났던 일을 털어놓았다. 그게 울쿠스의 아이인지, 펜닐의 아이인지가 의문이었다. 둘 중 어느 쪽이라도 딱히 놀라지 않을 것 같았지만 어쨌건 알고 싶었다.
"볼로디아도 지금은 심란해서 생각을 못 하는 거지 나중 가면 궁금할 거야. 내가 장담한다."
"이제 보니 나으리는 세상 사람을 자신의 잣대로 판단하는 습관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너 지금 씨발, 내 욕하는 거지?"
"나으리께서는 자신의 잣대가 부끄러우십니까?"
별 생각 없이 뱉은 소리였는데 제대로 카운터펀치를 얻어맞았다. 씨발, 그래, 부끄럽지… 전쟁이 나냐 안 나냐가 문제인 판에 애 아빠나 궁금해 하고 있는데…….
란드와르는 그 지점에서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시가의 존재를 상기했다. 일단 한 대 피우고 와야 할 듯했다.
머리가 띵했다.
* * *
펜닐은 하급 대원들이 건방진 인간 사제에게 모두 패배했다는 소식에 짜증을 느꼈지만 그들을 처벌하지는 않았다. 결투에서 졌다는 이유로 징계를 내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왕의 애인을 잘근잘근 괴롭히는 것으로 마음을 가라앉혔다.
덕분에 울쿠스는 완전히 신경이 곤두섰다. 스카르파를 만나고 온 날뿐만이 아니었다. 날마다 울면서 밤을 샜고 일감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추적대를 떠올리기만 하면 머릿속이 텅 비었다.
저항군들을 만나긴 했는데 마찬가지로 제대로 된 말은 하지 못했다. 앞으로는 못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고, 이유는 말해줄 수 없다고 중얼거리다가 돌아왔을 뿐이다. 척 보기에도 상태가 이상했는지 저항군은 캐묻는 대신 그냥 보내 주었다.
그런 나날이 계속되던 끝에 울쿠스는 정상적인 요정이라면 상상조차 하지 못할 발상에 이르고 말았다. 아즈리온의 사제들에게 고민 상담을 해 보자는 것이다. 물론 있었던 일을 그대로 읊는 게 아니라, 상당한 각색을 거쳐서.
울쿠스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기묘한 일이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요정들의 옛 신과, 그 심장과, 추적대에 얽힌 이야기를 도대체 누구에게 털어놓는단 말인가?
스카르파는 고장난 축음기였다.
캐러웨이 부인은 평범한 선인에 불과했다.
하지만 아즈리온은 요정을 죽이는 신이었다.
울쿠스는 거기에 명운을 걸기로 했다.
스카르파가 이시 첼의 신위를 물려받은 건, 감출 수 있다. 막을 수 있다. 육 년간 그래 왔으니까. 따라서 이시 타브만 다시 잠든다면 도시는 평화로운 일상을 유지할 터였다. 추적대는 야스와다로 돌아가고, 그리고…….
"어, 표정이 안 좋으신데. 요즘 잠 못 자고 그래요?"
"고민이 있어서요. 사실 그 문제 때문에 사제님과 상의를 하고 싶은데……."
"말씀해 보시죠."
울쿠스는 란드와르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매일 밤마다 새벽까지 술을 퍼마시면서도 멀쩡한 인간 남자를. 심지어 순혈 대원들과의 결투에서도 모두 이겼다고 했다.
타고난 강골이든, 수련의 결과든 간에 뛰어난 전사라는 건 명백했다. 하지만 훌륭한 사제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아니, 자기네 교단의 기도문조차 바로바로 떠올리지 못하는 사람이 멀쩡한 사제일 리가 없었다.
그는 잠시 고민했다. 타우베스를 눈앞에 둘 자신이 없어서 동생 쪽에게 말을 걸었는데, 잘 생각해 보니 이 인간과는 아예 대화가 안 될 것 같았다.
"아뇨, 형님분께 이야기를 전해 주실 수 있을까 해서요. 사제님과 이야기하고 싶어요."
"저도 사제입니다만."
"하지만……."
"형님은 사람 만나는 거 안 좋아합니다. 그쪽도 형님이랑 같이 있으면 불편한 건 피차일반일 테고요. 그러니까 서로 좋게 가자는 겁니다. 서로 좋게요, 예?"
인간 사제의 미간이 좁아지더니 어조가 고압적으로 변했다. 울쿠스는 항변하려다가 그만두고 고개를 떨어트렸다. 불지옥 바깥으로 발을 내딛자마자 얼음지옥을 마주친 기분이었다.
"알겠습니다. 퇴근한 다음에 뵙기로 해요."
"근처 술집에서 회식이 있긴 합니다만."
"아뇨, 제 집으로 가요. 여럿이 있는 곳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거든요."
하지만 단 둘이 있는 상황일지라도, 제대로 말을 꺼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상대도 상대였거니와 내용부터가 문제였다.
야스와다에서는 옛 신이 깨어났고 요정들은 기세를 몰아 이곳의 피웅덩이까지 노리고 있다. 도시 안에까지 침투한 상태다. 쫓아내야 한다.
아무리 되어먹지 못한 사제일지라도 이런 식으로 설명하면 심각성을 이해할 터였다. 하지만 이걸 어떻게 알았느냐고 하면,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게다가 납득을 시켰다고 해서 거기에서 끝날 일은 아니었다. 교단은 군부와 함께 행동에 나설 테고, 가장 먼저 의심받을 집단은 흰둥이일 것이다…….
고민은 길었지만 답은 없었다.
말을 꺼낸 게 벌써부터 후회스러웠다.
* * *
스카르파를 만나고 온 후로는 며칠간 바빴다. 소극장에 무대를 올리느라 외근을 나가서 힘을 실컷 썼던 것이다. 군부 공연을 준비한다지만 극단 인원이 모두 거기에만 매달려 있는 건 아니니까.
울쿠스가 고민 상담을 신청한 건 넷째 날 공연이 끝나고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였다. 사제와 이야기하고 싶으니 볼로디아를 불러 달라고 했다. 란드와르가 아니라, 볼로디아를.
요정한테 가짜 사제 취급을 받으니 기분이 묘했다. 이유는 알고 있었다. 며칠 전, 교단 사제로서 기도를 올려 달라는 요청에 잠시 버퍼링이 걸렸던 것이다. 티아가 불러 주는 대로 따라 읊기야 했지만 이상한 티가 났을 터였다.
그런데 씨발, 내가 바로 아즈리온인데.
볼로디아를 울쿠스와 붙여 놓을 수 없다는 계산도 있었지만 괘씸한 마음이 더 컸다. 아즈리온 교단의 사제에게 무슨 고민을 털어놓으려는지는 몰라도 자신이 직접 가서 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기껏해야 스카르파 때문이겠지. 애당초 울쿠스가 고민할 일이라면 그것 말고는 없었다. 테네브로즈가 제대로 들쑤셔 놓고 왔으니까.
"그래서, 교단 사제가 필요한 고민이 뭡니까? 도시 한복판에서 괴수를 만나진 않을 테고, 죽일 요정이라도 있어요?"
란드와르는 와인병을 따며 말했다. 회식을 빼고 울쿠스의 집까지 따라온 참이었다.
"아닙니다……."
울쿠스는 기어들어가는 어조로 대답하더니 고개를 숙였다. 이걸 말해도 될까 가늠하는 투였다. 쉽게 본론이 나오진 않을 듯했다.
애당초 엄청난 수확을 기대하고 온 것도 아니었다. 놈이 이방인 사제에게 모든 내막을 밝힐 리가 없었다. 설득의 키는 결국 테네브로즈가 쥐고 있는 것이다.
… 그래도 일단은 술을 먹여야겠다는 계산이 섰다. 알코올이 입에 들어가면 무슨 말이든 하게 될 테니까. 란드와르는 잔 두 개에 차례대로 와인을 따른 뒤 하나를 반대편으로 밀었다.
"일단 한 잔 하시고. 말하기 어려우면 천천히 합시다."
울쿠스는 잔을 빤히 보다가 사약이라도 마시듯 한번에 털어 넣었다. 목소리가 다시 들려온 건 그러고서도 한참이 흐른 뒤였다.
"사는 게 힘들어요. 사람들 때문에."
"사는 게 힘들죠."
란드와르는 시큰둥한 투로, 하지만 적당한 진심을 담아 반복했다. 정확한 심경은 몰라도 힘들긴 힘들 터였다. 애인은 도시를 박살내겠다고 중얼거리고, 바로 며칠 뒤면 테네브로즈랑 만나야 하고, 그리고 펜닐까지 지랄을…….
순간 짜증이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작은 볼로디아 때문에 잊고 있었는데 싸가지가 범죄적으로 없는 놈이었다. 울쿠스가 다섯 해 동안 그 지랄을 모두 견뎌 왔다고 생각하니 존경심마저 느껴졌다.
"그렇지, 그 부군은 어떻게 참았습니까?"
"예?"
"사람을 불러 놓고 중부 대장군인지 뭔지랑 실컷 떠들지 뭡니까. 높으신 분들 보시기에 인간 사제들이 좆같다 이거죠."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됩니다. 도시를 지키는 분들이니까요."
흰둥이 역할에 깊이 몰입한 상태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요정에게 이런 지적을 받다니 뜻밖이었다. 란드와르는 가볍게 웃고는 울쿠스와 시선을 마주쳤다.
"누가 듣는 것도 아니고, 솔직히 삽시다. 그쪽도 시달린 게 많을 텐데."
울쿠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는 잔이 가득 차도록 와인을 부은 다음 단번에 들이켰다.
"사제님도 제 소문은 들으셨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