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사랑과 전쟁 (3)
그 지점에서 군부 대원이 다급히 들어오더니 볼로디아를 데리고 중앙청사로 돌아갔다. 지나가는 동안에도 이름을 아는 자들이 계속 보였지만 머리에 담기지는 않았다.
대원이 다시 멈춘 곳은 4층 오른편의 취조실이었다.
사면이 먹색으로 도배된 작은 방. 그 안에 있는 것이라고는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의자 둘뿐. 장교의 자리는 입구와 가까운 쪽이고 취조 대상은 언제나 그 반대편이다. 볼로디아에게는 익숙한 장소였다. 문가가 아니라 벽을 등지고 앉은 건 처음일지라도.
대원은 아무 귀띔 없이 문을 닫고 나갔다. 볼로디아는 잠시간 어둠 속에 버려졌다. 스카르파의 눈 안에, 빛이 없고 흔들리지 않는 두 눈 안에 갇힌 듯했다. 그녀는 낯익은 장교가 들어와 불을 켤 때까지 그대로 멈춰 있었다.
"성함이, 예, 타우베스 씨. 아즈리온 교단의 사제고요."
"그렇소."
"무례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만, 이 절차 자체가 특별대우라는 점을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예, 사제분이 아니었더라면 세카두로 돌아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을 가능성이 높아요. 우선 그 점을 인지하셔야 합니다."
장교는 귀찮은 기색과 심각한 투가 절반씩 섞인 표정으로 무언가를 계속 읊었다.
왕의 정신은 온전치 못하며 그녀가 하는 이야기는 모두 사실무근이라는 것. 첫째 왕녀에 대한 말들은 특히 입에 담아서는 안 된다는 것.
군부 당국은 보안에 위해를 끼치는 이방인이라면 누구든 억류할 권리가 있었다. 인간 도시들과 아홉 개 교단에게 인준 받은 권리였다. 자칫하면 외교적 문제로 번질 가능성이 컸지만, 늑대인간의 품성과 피웅덩이의 위험성 때문에 유지되는 조항이기도 했다.
"우리는 이방인들이 도시 사정을 알게 되는 것을 꺼립니다. 경계하지요. 경거망동했다가는 도시 전체가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알고 있소."
볼로디아는 장교를 똑바로 응시했다. 분명히 눈앞에 얼굴을 두고 있는데도 보이지 않았다. 머릿속이 가득 찬 나머지 다른 것이 틈입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러니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함부로 하면 결말이 좋진 않을 겁니다."
"말할 생각이 없소."
"우리의 태도가 무례하게 느껴질지도 모르지요. 사제분께서도 알겠지만, 이 도시는 위험한 것을 지켜 왔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도시의 약한 고리가 드러나는 걸 원치 않습니다."
"능묘 밑에는 피웅덩이가 있지. 심장도."
볼로디아가 던지듯 중얼거리자 장교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녀는 무슨 말을 덧붙이는 대신 피웅덩이가 집어삼킨 목숨을 떠올렸다. 요정이 아니라, 평생 동안 도시에 갇혀 서로를 의심하면서 살아야 했던 사람들을.
피웅덩이가 사라진다면 정말로 많은 게 바뀔 터였다.
지금처럼 서로를 의심할 필요도, 요정이 숨어들 가능성 때문에 흰둥이 거주지를 들쑤실 필요도 없다. 늑대인간들은 산맥 너머에 고립된 채 살아가는 게 아니라, 대륙의 중부로 뻗어나가서…….
순간 먼 미래에 대한 환시(幻視)가 그녀의 눈앞을 스쳤다. 취조실과 고문실이 사라지고, 왕가의 혈통이 무색해지며, 왕궁 건물의 용도마저 변하는 미래였다.
그때가 되면 동생이 알던 도시는 무너졌다고 해도 좋으리라.
"…나는 당신들의 헌신을 알고 있소. 그것을 존중하오."
늑대인간의 삶을 짓눌러 온 것은 숨 막히는, 숭고한 구태였다. 볼로디아는 지금껏 도시를 수호한 것이 바로 그 구태임을 부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언젠가는 뿌리 뽑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 헌신에 흠집을 내고 싶지 않소."
그녀는 앞으로 할 일이 모두에게 응당의 보상이 되리라는 확신을 느꼈다.
스카르파와, 군부 대원과, 흰둥이들에게.
그리고 자신에게도.
* * *
란드와르는 커다란 볼로디아를 기다리면서 작은 볼로디아와 이야기를 나눴다. 보통은 꼬마가 질문을 툭툭 던지고 그가 심드렁하니 대답하는 식이었다.
왕녀라지만 나이는 속일 수 없는지 주제가 계속 날뛰었다. 검술 훈련법을 잠깐 묻더니 곧바로 인간 세상에 대한 것으로 호기심이 옮겨갔다. 그리고 이제는 강현의 천체물리 지식을 시험하고 있었다.
"인간은 달이 왜 남쪽에서 뜨는지 알고 있나?"
아, 이 세상은 달이 남쪽에서 뜨는구나.
동쪽도 서쪽도 아니고 남쪽에서…….
해는 동쪽에서 뜨더니 왜 달은 남쪽에서 뜨지? 땅바닥에서 올라온다는 소리인가?
판타지 세계의 다섯 살과 말상대를 하려니 괴로웠다. 강현은 지구인의 상식이 침범당하는 것을 느끼며 머리를 싸매 쥐었다. 대화가 여기까지 와 놓고 보니 이 세상이 구체인지 평평한지부터가 궁금했다.
티아가 곧바로 대답해 주었다.
<평평합니다. 지구에 비하면 훨씬 작고요. 78억 명이 걸어 다닐 만큼은 안 되죠.>
별은 어떻게 움직이는 겁니까? 애초에 우주가 있긴 해요?
<여기에 염색체가 없는 것처럼 핵융합을 일으키는 천체도 없어요. 별은 이면 세계의 흐름을 따라 운행하는 마력 덩어리일 뿐이죠. 애초에, 이 세계가 쿼크와 렙톤으로 구성됐다고 믿는 것부터가 너무 지구중심적인 발상이라고 생각하진 않으시나요?>
전기기사 자격증을 갖춘 공대 졸업생 이강현에게는 너무 가혹한 이야기였다. 그는 생각을 멈추고 기초적인 과학 상식을 떠올리는 것으로 정신 치유를 시도했다.
항성은 자체 중력으로 묶인 플라즈마 덩어리고, 염색체 갯수가 다른 종끼리는 교잡이 불가능하며, 그리고, 그리고 씨발.
씨발, 내가 왜 이러고 있지. 그는 정말로 생각을 멈췄다.
"전 모릅니다. 왜 남쪽에서 뜹니까?"
"나도 모른다. 알면 왜 물어보겠나?"
"그렇군요."
어색한 침묵 속에서 강현은 자신의 인생을 되짚었다.
굴곡은 좀 있었지만, 아니, 사실은 롤러코스터를 타다가 낭떠러지에 처박힌 수준이었지만, 아무튼 상상할 수 있는 형태의 삶을 살았는데 이제는 아니게 되었다.
여기가 지구와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라는 게 분명히 느껴졌다. 요정도 늑대인간도 마법도 실컷 본 판에, 이제야 그걸 실감한다는 게 우습고 재미있었다.
이 세계의 대원칙이 양자장론의 표준 모형을 따르든 마력의 영향을 받든 말루카에서 할 일에는 변함이 없는데도. 이렇게 거시적이면서도 사소한 이유로.
"인간은 왜 갑자기 웃나?"
"인생이 재미있어서 웃었습니다."
"인간은 사는 게 재미있구나."
"살아 있으면 할 수 있는 것도 많고 좋지요."
"나는 별로 재미가 없다. 인간 도시도 가보고 싶고 저 밑 소극장에도 놀러가고 싶다. 하지만 안 된다. 왕이 되려면 배워야 하는 게 많다."
"왕이라는 거, 그냥 안 하면 되지 않습니까."
"왕이 없으면 무덤에 못 들어간다고 한다. 거기에 중요한 게 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나 말고 왕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강현은 고개를 돌려 꼬마를 보았다. 다섯 살짜리 아이가 옆에 앉아서, 말간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고집 세 보이는 눈매 뒤편으로 유년기 특유의 순수함이 엿보였다.
지구에서나 이곳에서나, 애는 결국 애라고 생각했다. 이 꼬마가 펜닐과 똑같은 사람으로 자란다면 조금 속상할 거라고도.
"세카두에 오실 일이 생길 겁니다. 구경을 시켜 드리지요."
"인간이 그걸 어떻게 아나?"
"신의 뜻입니다."
"신?"
"아즈리온의 뜻이지요. 무예의 신 말입니다."
꼬마의 눈이 갑자기 커졌다.
"맞아, 그 신이 첫 번째 왕한테 예언을 해 줬다. 이번에 볼 연극도 그 내용이다. 두 달쯤 뒤에 한다."
"아즈리온의 성흔이 어떤 모양인지는 아십니까?"
"알지만 본 적은 없다. 인간 중에서도 대단한 사제들만 그런 걸 받는다고 한다."
란드와르는 꼬마에게 팔을 내민 뒤 손바닥을 가볍게 쥐었다가 폈다. 손등에 불꽃이 번지듯 일며 낫과 망치의 형상을 이뤘다. 성흔이었다.
"다른 이들에겐 말하지 마십시오. 저와 왕녀님만의 비밀인 겁니다."
의미심장한 투로 웃자 아이는 잠시 굳어 있다가 맹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꽤나 귀여웠다.
* * *
볼로디아는 장교와의 대면을 마친 뒤 풀려났다. 이윽고 다른 대원이 오더니 그녀를 다른 곳으로 이끌었다. 나가는 방향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연병장으로 가는 것 같지도 않았다.
"어디로 가는 거요?"
"왕녀님을 뵙게 될 겁니다. 관심을 보이시더군요."
"왕녀? 왕녀라면……."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가능성이 볼로디아를 후려쳤다. 생각하기 싫어서 아예 떠올리지 않았는지도 몰랐다. 혼례의 목적을 감안하면 그렇게 될 것이 자명했는데도.
"왕의 따님이십니다. 아직 나이는 어리시지만 예를 갖춰야 합니다."
"알겠소."
그래도 머리가 이미 충분히 복잡한 덕인지 마음이 크게 흔들리지는 않았다. 볼로디아는 잠자코 대원을 따라가며 조카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태도로 판단하건대, 멀쩡한 순혈로 태어났으리라. 그건 다행이지만…….
"형님, 오셨군요. 이 분입니다."
란드와르의 목소리가 볼로디아를 묵상으로부터 건져냈다. 그녀는 붉은 머리의 인간 청년 옆에 앉은 아이를 알아보았고, 태연한 척 인삿말을 읊었다.
"아즈리온 교단의 사제, 타우베스가 첫째 왕녀를 뵙습니다."
"정말로 이 인간보다 크구나. 와서 앉아라."
감탄한 아이는 대원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나가 있어라. 너희가 옆에 있으면 항상 훼방을 놓아서 싫다."
"왕녀님."
"싫다. 어차피 벽 너머로 다 들을 것이면서. 내가 무슨 말이라도 잘못 하면 바로 들어오겠지. 그러니까 나가서 멀리 떨어져 있어라."
대원은 석연찮은 투로 접견실을 나섰다. 문 닫히는 소리까지 듣고서야 볼로디아는 자리에 앉았다. 란드와르가 기다렸다는 듯 운을 뗐다.
"왕녀님의 존함이 볼로디아라는군요. 왕께서 직접 지으신 이름이라 합니다."
"이모님과 성함이 같다."
볼로디아는 아이를 보았다. 선이 굵은, 고집 세 보이는 이목구비. 목가에서 자른 검정 머리카락. 그녀보다는 마요르가를 닮은 얼굴이었다. 군부의 중진들이라면 모두 그렇게 느꼈을 터였다.
하지만 스카르파는, 그걸 분간할 수 있었을까.
분간하고 그런 이름을 붙인 걸까.
스카르파에게 자신이 어떤 존재였는지는 지금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얼마 없는 도피처였다는 것만 겨우 짐작할 뿐이었다. 어쩌면 동생의 세계에서, 그 언니는 타라곤만큼이나 중요한 인물이었는지도 몰랐다.
"왕께서 그분을 아꼈던 모양이군요."
"모른다. 이모님을 본 적도 없다. 여기 사람들은 이모님 이야기를 잘 안 해 준다."
"왜 보지 못하는지는 알고 계십니까."
"모른다. 강하다는 것만 안다. 북부 기지에 갔을 때 들은 건데, 혼자서 북부 산맥에 있는 괴수들을 다 죽이고 다녔다고 한다. 나도 그만큼 강해질 거다. 약한 건 안 좋다. 어머니는 약해서 불쌍해졌다. 흰둥이들도 그렇다."
그렇게 말하는 아이의 표정에는 동정과 멸시가 뒤섞여 있었다. 마요르가 왕의 얼굴이, 아이가 자라서 될 모습이 볼로디아의 눈앞을 얼핏 스쳤다.
그녀는 닫힌 문을 힐끔 보았다. 대원이 귀를 바짝 붙이고 있을지, 아니면 명령대로 멀찍이 떨어졌을지는 몰랐다. 하지만…….
"약함은 불행의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
"강한 괴수는 약한 괴수를 잡아먹는다. 약한 괴수들도 불쌍하다."
"우리는 괴수가 아닙니다. 그런 심성은 괴수의 것이지 사람의 미덕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녀는 천천히 일곱 해 전으로, 마요르가를 눈앞에 두었던 그 시점으로 되돌아갔다. 당시에도 볼로디아는 똑같은 낱말로, 똑같은 항변을 늘어놓았다.
왕은 묵살했고 첫째 왕녀는 수긍했다.
그리고 업보를 돌려받았다.
"사람이 해낼 수 있는 일은 강함과 약함만으로 정해지지 않습니다. 비참한 자를 궁지에 몰아넣는다면 그 죄를 치르게 되지요."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들어 본다.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 않아. 인간이라서 그런가? 인간들은 보통 약하니까?"
"아니오, 저는 약한 자들에게 가혹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하긴. 큰 인간도 강하다고 들었다. 동생이 그렇게 말했다."
아이는 팔짱을 낀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란드와르를 올려다보았다.
"큰 인간이 나를 가르치는구나. 너는 달이 남쪽에서 뜨는 이유도 모르는데."
볼로디아는 아이가 어리다는 데에 안도를 느꼈다. 마요르가는 그렇게 평생을, 수십 년을 살아 왔지만 아이는 아직 다섯 살이었다.
"어머니를 뵙고 왔다고 했지. 어머니도 이 이야기를 들으면 좋아할 거다. 어머니께도 해 주었느냐?"
하지만 안도가 다시 고뇌로 바뀌는 것은 순간이었다. 그녀는 뒤늦게, 자명한 결론에 도달했다. 큰 볼로디아는 아이의 어머니를 죽일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