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61화 (62/258)

61화 사랑과 전쟁 (2)

란드와르는 받아들이기엔 너무 낯선 사실을 처리하기 위해 심호흡했다. 그랬다. 스카르파는 칠 년 전에 혼례를 올린 데다 부군도 멀쩡히 살아있으므로 아이가 있다 쳐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논리적으로는 완벽히 타당했다.

"제가 이방인이라 귀하신 분을 몰라 뵙고 실례를 저질렀군요. 왕녀님… 왕자님? 뭐라고 불러야 합니까?"

"나는 왕이 될 거다."

"예, 왕녀님. 동생은 있으십니까?"

"없다."

"나이는 어떻게 되시고요?"

"다섯 해 전 여름에 태어났다."

그 지점에서 뇌가 급가속했다.

일단 괴수의 혼은 모계 유전이다. 어머니가 순혈이면 자식도 순혈이라는 소리다. 스카르파가 돌연변이긴 해도 일단은 왕족이니까, 그 점에서는 문제가 없었던 모양이다.

달리 말하면, 머리색을 결정하는 데에 아버지 쪽은 아무 영향도 줄 수가 없다. 거기에 더해 울쿠스가 스카르파를 만난 건 여섯 해 전이었으므로…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잠깐만. 처음 보는 꼬마의 가족사를 가지고 소설을 쓰는 건 정말로 예의가 아니다. 게다가 생물학적으로도. 물론 로야페타에는 절반쯤 요정이고 절반쯤은 인간인 족속들이 있긴 하지만, 늑대인간과 요정도 피가 섞일 수 있을지는 분명치 않다…….

<원래 계시던 세계와 이 세계의 규칙은 다르다고 말씀드리죠. 46개의 염색체와 유전자는 잊으세요. 유물론적 사고방식은 도움이 되지만, 이 세계의 유물론적 사고는 영혼까지도 포함합니다.>

티아의 지적이 의식의 흐름을 끊었다. 란드와르는 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느낌 속에 멈춰 있다가, 가까스로 한 문장을 떠올렸다.

늑대인간이랑 요정이랑 자도 애가 생긴다는 거죠?

<이론상으로는요. 그걸 실천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요. 참고로 세 종족 모두 어릴 때에는 모습이 엇비슷하니까, 상상하시는 경우라도 들키진 않았을 겁니다. 열 살은 넘어가야 티가 나겠군요.>

결론만 말합시다. 그래서 애 아버지가 누굽니까?

<아시겠지만, 교단 통합 명부에 등록되어 있지 않은 존재를 상대로는 조회가 불가능합니다. 대신 운명부에 협조를 얻어서 조사를 진행할 수는 있겠죠. 딱히 권장 드리는 사항은 아닙니다만.>

란드와르는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천계표 뒷조사가 가능할지라도… 남 침대 사정을 확인하는 건 상식인이 할 짓이 아니었다. 심각한 수준의 프라이버시 침해인데다가 용사 노릇과도 아무 관련이 없다. 관련이 있었으면 애가 게임에 구현이 됐겠지.

따라서 현명하고 예의 바른 사람이라면 신경 쓰지 않는 게 도리였다. 강현도 그 사실을 알았다. 그런데 씨발, 인간 마음이 그게 되나.

<일을 마치신 뒤, 테네브로즈의 도움을 받으면 되겠습니다.>

티아가 대안을 제시했다. 야스와다 학파의 마법을 쓰라는 것이다. 고위계 주문 중에는 영혼을 들여다보는 것도 있으니까.

그게 최선이라는 걸 알았지만, 부족했다. 일을 마치려면 아직 두 달쯤이 남았다. 아침 드라마를 여기에서 끊은 다음 2달간 결방하면 방송사 건물에 불을 질러도 무죄였다.

정말로, 사랑과 전쟁이 따로 없었다. 란드와르는 울쿠스에 대한 평가가 실시간으로 변해가는 것을 느꼈다. 놈은 단순한 애정결핍이 아니라 기혼자와 간통하는 애정결핍이었다.

하지만 다시 잘 생각해보니 살인도 엄청난 범죄가 아닌 세상인데 그러려니 할 수 있는 듯했다. 펜닐과의 결혼은 강제였고 간통죄는 대한민국에서조차 폐지가 되었다.

애당초 스카르파는 왕이니까 후궁쯤이야 들일 수 있을 테고, 그리고… 아니, 씨발. 이강현이 원하는 것은 도덕적 논의가 아니었다. 죄목을 일일이 나열한 다음 거기에 반론을 붙여 봤자 소용이 없었다.

어차피 울쿠스는 스카르파를 지키다가 죽을 놈이다. 불륜이든 로맨스든 그 정도면 숭고하다. 비록 녀석이 볼로디아의 인생을 꼬아놓은 악당일지라도. 아무튼 간에. 속죄는 목숨으로 할 예정이니까.

그러니까, 중요한 건 윤리가 아니었다.

애 아빠가 중요했다.

"왕녀님은 부모님 중 어느 쪽을 닮으셨습니까?"

"둘 다 안 닮았다. 할머니랑 똑같다고 한다. 그런데 내 이름은 이모님이랑 같다. 어머니가 직접 지어 주셨다. 이모님은 본 적이 없다."

…여전히 호기심은 해결되지 않았지만 당연한 사실을 상기시키는 데에는 도움이 됐다. 볼로디아는 스카르파의 언니였고 이 꼬마한테는 이모였다. 심지어 이름까지 따서 붙인 모양이었다.

볼로디아에게도 꼬마를 보여줘야 할 것 같았다. 정확한 목적을 짚을 수는 없을지라도, 그냥 그게 옳은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연병장에는 무슨 일로 오셨고요?"

"강한 인간이 결투를 하고 있다기에 왔다. 붉은 머리고 남자고 인간인데 강해서 신기했다. 그래서 이유를 물어보러 온 거다."

"그러면 제 형님도 한번 만나 보시죠. 저와 함께 왔습니다."

볼로디아가 스카르파를 만나는 동안 란드와르는 연병장에 있기로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대화를 마치면 군부 대원이 란드와르를 데리러 올 터였다. 그때 꼬마가 말을 꺼내면 되는 것이다. 이 인간의 일행을 만나보고 싶다고.

"형님?"

"저보다 키가 더 큽니다. 칼도 잘 다루고요."

표정을 보아하니 관심이 있어 보였다. 란드와르는 꼬마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이름을 작게 중얼거렸다. 볼로디아. 아버지가 누구든 간에, 작은 볼로디아는 큰 볼로디아의 조카였다.

짧게 묵상한 그는 끄트머리를 자른 시가를 라이터와 함께 주머니에 넣었다. 담배 연기를 맡는 건 숙소로 돌아간 이후의 일이 될 듯했다.

*  *  *

볼로디아는 중앙청사의 모든 길을 기억했다. 완고해 보이는 잿빛 건물 뒤편의 왕실까지도. 그녀는 안내역을 맡은 군부 대원을 따라 걸으면서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겨울로 넘어가는 가을이었다. 건조하고 마른 공기에서는 낙엽 냄새가 났다. 타라곤이 찾아와 검술 사사를 부탁했을 때도 이런 날씨였던가. 혼례는 겨울에 올렸으므로 신부를 위한 꽃다발은 없었을 것이다. 기껏해야 경기장의 모래에 쏟아지던 피가, 마치 꽃잎처럼.

그해 겨울, 볼로디아는 괴수의 피가 눈을 녹이며 가라앉다가 중간쯤에서 함께 얼어버리는 모습을 수없이 보았다. 동이 트도록 산맥을 서성이던 끝에 북부 기지 집무실로 돌아와 끼적이던 것은 소용없는 일기들. 가끔은 동생에게 보내는 편지.

대부분은 쓰자마자 태워 버렸는데 그러지 않은 것도 몇몇 있었다. 업무용 수첩이나 책에 잠시 꽂아두었다가 잊어버린 이면지 따위가. 사건이 수습되는 동안 누군가는 보았겠지만 스카르파에게 전달이 되진 않았을 것이다.

하나라도 보냈어야 했는데.

후회가 깊어지더니 어느 순간 마음에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어쩌면 불어난 생각이 서로를 뒤덮은 탓에 무엇도 분간하지 못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막연히 따라 걷던 볼로디아는 낯익은, 결코 잊을 수 없는 목소리에 흠칫 정신을 차렸다.

"나가 줘."

군부 대원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목소리의 주인을 보다가 등을 돌려 침실을 나섰다. 볼로디아는 엷은 그늘에 잠긴 뒷모습을 알아보았다. 비스듬한 햇볕이 붉은 머리에 사선을 놓고 있었다.

"아즈리온 교단의 사제, 타우베스가 말루카의 왕을 뵙습니다."

그녀는 단조로운 목소리로 정해진 인삿말을 읊었다. 정말로 해야 할 말은 혀 밑에 남겨두고서. 언제나 그랬다. 급보를 받고 중부로 내려왔을 때에도, 결국에는 어머니에 대한 것만을 묻게 되었다.

남은 속내를 풀어놓을 기회는 영영 없을 것이다.

동생은 정신이 온전치 못했으며 자신은 어쨌든 타우베스의 신분을 유지해야만 했다. 그리고 모든 게 밝혀졌을 때, 스카르파는 능묘에 잠들 터였다. 볼로디아는 그 사실을 되새겼고, 다시 말했다.

"제 반려에게 관심이 있어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스카르파는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로 입을 열었다. 몽롱한 것 같으면서도 심지가 있는 목소리였다.

"우리는 대부분 태어난 곳에서 죽을 때까지 살아. 어머니가 하던 일을 딸이 물려받지. 그래서 나는 여기에 앉아 있어… 당신의 반려는 행복한 사람이겠지, 이곳을 떠났으니까."

"펠로시는 고향 사람들을 그리워합니다. 함께 오지 못하는 것을 아쉽게 여기지요."

"여기에 앉아 있으면 심장 소리가 들려. 심장이 나한테 말을 거는 거야. 그 울림만 잘 따라간다면 눈을 감아도 누구와도 부딪히지 않고 걸을 수 있어서, 세상이 꼭 소리로 이루어진 것 같지."

볼로디아는 테네브로즈의 보고를 상기했다.

의심하기도 했지만, 사실은 스카르파를 마주하기 전까지도 불신 섞인 희망을 가슴에 두었지만 이제는 부정할 수가 없었다. 동생은 심장을 집어삼켰고 그 힘에 사로잡혔다. 피붙이들이 그녀를 저버렸기 때문에.

"나한테는 이 도시의 소리가 들려. 그게 무슨 느낌인지 알아?"

"…모르겠습니다."

"오래전부터, 그 소리가 들리기 전부터 도시가 무너지기를 빌었지. 내가 미워하는 사람들과 사랑하는 사람들이 다함께 안식을 찾을 수 있도록. 그 모두가 불길처럼 하나가 되어 치솟다가 훅 꺼지는 순간을 수없이 상상했어……."

스카르파는 노래하듯 경쾌한 어조로 계속 중얼거렸다.

"언제나 떠나고 싶었어. 이곳이 아니라면 어디든 좋다고 생각했어. 인간 도시든, 황무지든, 요정의 땅이든, 어디든지. 혹은 산맥을 떠돌다가 괴수의 식사가 되는 게 나았을지도 몰라. 나는 이 도시의 사람이었던 적이 없으니까. 처음부터."

반신격을 얻은 지금조차도 스카르파는 시들어가는 꽃처럼 보였다. 별채에 갇힌 채, 햇살을 향해 겨우 잎을 내미는 꽃.

볼로디아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멈췄다. 군부 대원은 바로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었으며 이 대화마저 귀에 담고 있을 터였다.

"언니는 나와도, 어머니와도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어. 다른 이들이 내 앞에서 혀를 찰 때 언니만큼은 내게 걱정 섞인 눈길을 보내 주었거든. 내가 언니에게 원한 것은 그 눈길뿐이었는데."

이번의 침묵은 유독 길었다. 볼로디아는 짓누르는 듯한 고요 속에서 자신이 동생에게 어떤 존재였을지를 상상했다. 치졸하고 사소한 동정이 그녀에게는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를, 진실로, 처음으로 알 수 있었다.

이제야, 처음으로.

만회하기에는 너무 늦었는데도.

"그래서인가, 무리한 부탁을 했어. 언니가 나를 달래 주었더라면, 아니, 달래 주지 않더라도 나는 그렇게 살았을 거야. 그렇게 됐지. 거부할 권리는 태어났을 때부터 없었으니까. 만약 그럴 수 있었더라면 나는 태어나지 않았을 테니까."

스카르파는 혼례가 정해지기 직전의 일을 말하고 있었다. 타라곤과 도망칠 수 있도록, 차원문을 열어 달라 부탁했던 때를. 그건 볼로디아에게도 깊은 후회로 남아 있었다.

차갑게 쳐내는 대신 잠깐이라도 안아 주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정략결혼은 세상의 끝이 아니며 타라곤도 여전히 만날 수 있으리라고 말해 주었더라면.

아니, 그 후에라도, 타라곤을 죽음으로 이끌지 않았더라면.

어머니를 죽이고 왕위를 물려받았더라면…….

"언니는 내 혼례에 오지 않았어. 그래서 나는 왕의 자리에 앉아 있는 언니를 생각했지. 상상 속의 언니는 어머니와 똑같은 모습으로, 똑같이 말하고 있었어. 내가 마지막으로 본 모습이 그거였거든."

짧은 정적을 틈타 볼로디아는 오래도록, 심장 한편에 얹혀 있던 말을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미안하다고. 그러나 홀가분한 느낌은 없었다. 스카르파에게 들렸을 것 같지도 않았다.

"언니가 나를 한심하게 여겼을 거라고 생각했지. 그래서 내 혼례에도 오지 않고, 급보를 받아서 중부에 왔을 때에도 서둘러 자리를 피했던 거라고. 하지만 아니었던 거야… 언니의 일기장을 봤어."

순간 귓전에서 북 소리가 나더니 현기증이 일었다. 스카르파에게 편지를 전하는 것은 별채에 들어서기도 전부터, 어쩌면 일곱 해 전의 그 시점부터 계속된 염원이었는데도.

"언니는 그때 어머니를 죽였어야 했다고 끝없이 중얼거렸어, 종이들 속에서. 언니는 나한테 사과하고 있었어. 나는 그제야 언니가 정말로 원한 게 무엇이었는지를 알았지. 언니가 돌아오면, 함께 도시를 무너뜨리자고 말하기로 했어……."

스카르파는 한 손으로 침대를 짚은 채, 몸을 홱 돌려 볼로디아를 보았다. 설탕 공예로 빚은 것처럼 섬세한 이목구비. 그 안에 도사린 것은 조각상의 눈.

"그게 바로 우리의 뜻이니까."

눈이 있되 공허하며 보지 않는 시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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