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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59화 (60/258)

59화 스카르파의 연인 (3)

울쿠스는 한동안 잠을 설쳤다. 스카르파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머릿속을 휙휙 날아다녔다. 그녀의 말이 모두 옳다면, 타라곤의 죽음을 확신할 수 있는 건 볼로디아가 유일했다. 이 오두막까지 타라곤을 데려온 다음, 옆에 묘지까지 파둔 장본인 말이다.

하지만 스카르파는 타라곤이 살아 있다고 우겼고, 볼로디아는 그 주장을 받아들였다. 그러고는 북부 기지에 틀어박혀 나오질 않게 되었다…….

할 일은 명백했다. 일단은 함구를 부탁했지만, 이대로 간다면 스카르파는 타라곤의 생존을 모든 곳에 떠들고 다닐 터였다. 그전에 볼로디아를 제거해야 했다.

울쿠스는 가능하다면 살생을 피했지만 필요한 경우에는 서슴지 않았다. 지금이 바로 그 때였다. 타라곤의 죽음을 아는 유일한 사람을 없애버린 뒤, 한 명의 늑대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는 더 많은 사람의 온정을 원했다.

*  *  *

울쿠스는 멍한 표정으로 피웅덩이를 내려다보았다. 분명히 할아버지에게는 피웅덩이를 찾아오마고 장담했는데 막상 이렇게 되고 보니 자신이 원한 게 이거였나 싶었다.

사실은 전혀 원치 않았을 것이다. 그건 야스와다를 떠날 구실에 불과했으니까. 하지만 어떤 요정도 오지 못한 곳에 처음으로 발을 내디뎠다는 사실에는 묘한 중압감이 서려 있었고, 울쿠스는 한동안 굳은 듯 멈춰 있었다.

성취감을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뿌듯함도 없었다. 분명히 판을 짠 건 자신이었는데 어느 시점부터는 사건을 따라잡는 데에만 급급한 입장이 되고 말았다.

일단 스카르파를 꼬드겨 능묘에 들어가는 건 쉬웠다. 돌이켜 보면 그게 이 계획에서 제일 순탄했던 부분인 듯했다. 그 다음엔 피가 담긴 유리병을 건네받았고, 마요르가 왕을 데려와 달라고 부탁했다. 지배의 주문을 걸도록.

하지만 유리병은 아무 효과도 없었고 왕은 스스로 지하층으로 걸어들어갔다. 혼잣말로 판단하건대 스카르파에게 무슨 귀띔을 받았던 듯했다. 무언가를 하면 소원이 이루어질 거라고.

지상층으로 돌아온 왕은 이미 광기에 물든 상태였다. 울쿠스는 그 순간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돌아가고 있음을 직감했다. 하지만 도망치기에는 너무 늦었다.

스카르파에게 볼로디아를 부르도록 시켰다. 그녀는 즉시 중부로 내려왔고, 능묘에서 미쳐버린 어머니를 마주쳤다. 그때 울쿠스가 한 일이라고는 능묘 구석자리에 숨어, 볼로디아가 마요르가를 죽이고 광기에 사로잡히는 모습을 지켜본 것밖에 없었다.

대장군들 역시 그 장면을 보았다. 볼로디아는 스스로 도시를 떠났다. 허울뿐이긴 하지만 왕위는 스카르파에게로 넘어갈 예정이었다. 이제 울쿠스는 새로운 왕과 함께 지하층에 내려와서, 피웅덩이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는 입속으로 거듭 중얼거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유리병이 그랬던 것처럼, 피웅덩이에 아무런 힘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 의아함을 키웠다. 티끌만큼의 마력조차 없었다. 그건 그냥 썩어가는 피일 뿐이었다.

혹시, 피웅덩이는 전설에 불과했던 걸까?

하지만 그렇다기에는 지난 천 년이 마음에 걸렸다. 두 종족이 모두 얼간이라서 이런 쓰레기를 두고 그 오랜 시간동안 다퉜을 리가 없었다. 무언가가 있긴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왕족 둘이 이미 미치지 않았던가…….

"타라곤."

울쿠스는 멍하니 서 있다가 그게 자신의 새로운 이름임을 깨닫고 고개를 들었다. 스카르파가 웅덩이 반대편에서 그에게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 창백한 손가락이 서서히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어. 어렸을 때부터였던 것 같아. 열한 살쯤. 아무도 나를 보지 않게 되었을 때부터, 능묘에 오면 이상한 목소리가 들렸지. 자기를 가지라고. 그러면 내가 원하는 게 모두 이루어질 거라고. 그게 항상 무서웠어. 무서워서 여기를 피했어."

스카르파는 무언가를 건져내고는, 일어섰다. 진득한 피가 쏟아지며 그녀의 치맛단을 흠뻑 적셨다. 작고 마른 손이 감싸 쥔 것은 기묘한 형태의 살덩어리였다.

살덩어리에 대해서도, 들은 적이 있었다. 피웅덩이 가장 아래에는 옛 신의 심장이 잠들어 있다고. 그걸 취하는 자는 신위를 얻을 거라고… 하지만 심장은 반절이 뜯겨 나간 상태였다.

"네가 죽었다는 건 처음부터 알았어. 하지만 널 살릴 방법도 알고 있었어. 소원이 이루어지도록, 심장을 약간 뜯어먹기만 하면 됐어. 그래도 될까 고민하느라 시간을 낭비했을 뿐이야."

진실이 울쿠스를 후려갈겼다. 이 사태를 설계한 건 그가 아니었다. 스카르파의 의지가, 옛 신의 힘이 운명을 조종했을 뿐이다. 자신은 분수를 모르는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심지어 잘못된 배역을 맡은…….

"네가 항상 내 곁에 있었으면 좋겠어. 모두가 죽고, 세상에는 너랑 나만 남는 거야. 우리가 오두막에서 항상 이야기했던 것처럼."

스카르파가 천천히 가까워졌다. 울쿠스는 축축하고 차가운 손길이 자신의 목덜미를 더듬는 것을 느꼈다. 등을 통해 심장의 울림이 전해졌다. 전쟁 뿔피리처럼, 맹렬하고 파괴적인 울림이.

"나를 떠나지 마."

*  *  *

스카르파가 오로지 타라곤을 사랑했다는 점은 울쿠스에게는 천운이었다. 나머지 심장까지 먹으려는 걸 제지하자 순순히 들어 주었으니까. 대신 그녀는 타라곤이 도시에 들어와 살기를 원했다.

이판사판이라는 계산이 섰다. 캐러웨이 부인과 독대할 자리를 부탁한 다음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읊었다. 말할 것은 말하고 숨길 것은 숨겨 가면서.

이야기를 이어가는 동안 그는 자주 울었다. 믿는 건 부인의 자유지만 그러지 않았을 때 닥칠 결과는 장담할 수 없다는 말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다행히도 설득은 효과를 발휘했고 울쿠스는 캐러웨이 부인의 아들이 되었다. 주목이 쏠리진 않았다. 첫째 왕녀가 어머니를 죽이고 산맥으로 사라진 사건에 비하면 연극배우의 귀환 따위는 사소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스카르파에게 관심을 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녀의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인데다가 볼로디아의 일기장도 발견된 탓이었다. 왕을 죽여야 했다는 후회로 가득 찬 수첩이었다.

이해하기 쉽고 간단한 요약이 사람들의 심상에 자리 잡았다.

볼로디아는 왕위를 찬탈할 마음을 오래전부터 품고 있었다. 마요르가 왕을 죽인 왕녀는 피웅덩이마저 탐냈고, 저주를 받아 미치고 말았다…….

말루카는 빠르게 평안을 되찾았다. 스카르파 대신 그의 부군인 펜닐이 섭정을 맡았고 대장군들이 그를 보좌했다. 북부 대장군도 새로 뽑혔다.

그 모든 소란 속에서도 군부는 자신의 역할을 다했으며 각지의 수확량과 생산량은 엄격하게 관리되었다. 흰둥이 저항군을 진압하는 일 역시 잊지 않았다.

따라서 사람들은 첫째 왕녀에 대한 일을 거의 떠올리지 않게 되었다. 배급이 원활하게 나오는 이상, 누가 왕좌에 올라 있는지는 두고두고 곱씹을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차피 늑대인간들은 왕족끼리 칼부림이 나는 상황에 익숙했다.

대신 모두의 관심은 스카르파의 연인에게로 옮겨갔다.

이상한 점은 그들이 갖가지 소문을 입에 담으면서도 타라곤의 정체는 결코 의심하지 않는다는 부분이었다. 치명상을 입은 사람이, 완전히 사라졌다가, 두 해만에 돌아온 데에는 분명 석연찮은 구석이 있는데도.

…울쿠스는 이것마저 신위의 영향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스카르파는 괴수의 영혼을 조종할 수 있었고, 그 힘은 무언가를 강렬하게 믿는 것으로 발현되었다.

문제는 그게 소망이 아니라 무의식적인 믿음이라는 데에서 왔다.

그녀는 말루카 사람들이 타라곤을 받아들이리라 믿었고, 그래서 그렇게 되었다.

그녀는 흰둥이들이 타라곤을 좋아하리라 믿었고, 그래서 그렇게 되었다.

그녀는 군부 사람들이 타라곤을 미워하리라 믿었고, 그래서 그렇게 되었다.

소망이라면 새로 심어줄 수 있겠지만 믿음을, 사고방식을 바꾸는 건 불가능했다… 울쿠스는 자신의 운명을 자각했다. 평생을 말루카에서, 스카르파의 애인으로 살아가면서 비아냥에 시달려야 하는 것이다.

부인은 처음에는 요정을 집에 들이는 게 탐탁찮은 눈치였는데 한 달이 지난 뒤부터 그런 건 아무렴 괜찮은 문제가 되고 말았다. 울쿠스가 새벽마다 엉엉 울면서 모든 사람을 깨웠기 때문이다.

그게 세 달을 넘어가자 옆집과 윗집과 아랫집에서 쏟아지는 항의 투서가 문앞을 메울 정도가 되었다. 아들이 제정신이 아닌 건 이해하지만 좀 조용히 시켜 보라는 것이다. 언젠가는 열이 잔뜩 올라서 이런 문장으로 시작되는 편지를 줄줄이 쓰기도 했다.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여러분도 내 처지가 되어 보십시오…….>

하지만 그걸 답신으로 보내는 건 꼴사나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조금 더 고민한 결과 떳떳할 수조차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울쿠스는 그냥 더 시끄럽게 울기로 했다. 결국 캐러웨이 부인은 그를 농작지 인근의 전원주택으로 보냈다.

울쿠스는 그곳에서 다섯 달을 더 흐느끼다가 시내로 돌아왔다. 그러는 동안 가끔씩 스카르파를 만나기도 했는데 다음 날이면 온종일 침대에 누워 있기 일쑤였다. 수천 겹의 고뇌에 휩싸인 채. 가끔은 죽음마저 꿈꾸면서.

하지만 살아만 있다면 어떤 지옥에라도 적응할 수 있는 법이다. 정신 나간 반신이, 파멸이 바로 곁에 도사려 있기야 했지만… 그것만 아니라면 울쿠스는 행복했다.

이윽고 그는 파멸마저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  *  *

그는 지난 다섯 해에 걸친 관계를 애완견과 그 주인으로 정의했다. 누가 기르는 쪽인지는 분명치 않았다. 스카르파가 울쿠스를 사육하는 동안 울쿠스는 스카르파를 길들였다.

하지만 관계의 평형과는 별개로 힘의 균형은 미친 신에게로 기울어 있었다. 평화로운 일상이 흔적조차 없이 사라지는 건 한순간일 터였다. 그건 결코 잊을 수 없는 문제였다.

따라서 울쿠스는 언제나 중압감에 시달렸다. 캐러웨이 부인과 선량한 흰둥이들 사이에서 웃고 떠들 때조차도. 스카르파의 곁에 있을 때에는, 당연하게도.

고향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는 매일 밤마다 상반되는 감정 사이에서 길을 잃어버렸다. 이 뒤틀린 상황이 오로지 자신의 탐욕에서 비롯되었음을 곱씹다가도 이게 최선이라고 중얼거리기 일쑤였다.

옛 애인이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혹은 볼로디아와 마요르가를 제거하지 않았더라면 스카르파는 나머지 심장마저 먹어치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최소한 울쿠스는 그렇게 믿었다…….

그는 오랜 묵상으로부터 빠져나왔다.

창밖은 붉게 물들었고 그의 곁에는 스카르파가 멈춘 듯 앉아 있었다. 자신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할 때부터 한 번도 움직이지 않은 듯했다. 울쿠스는 소매로 눈가를 문질러 닦은 뒤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맞췄고, 돌아갈 준비를 했다.

"벌써 가는구나."

"미안해, 스카르파. 시간이 충분하면 좋을 텐데."

"밤에는 심장 소리가 더 커져. 혼자 있는 건 싫어. 너도 혼자 있을 때에는 항상 울잖아. 같이 있자, 그럴 수 있어……."

"나중에, 일이 모두 끝나면 몇 달이건 몇 년이건 함께 있자. 지금은 안 돼… 미안해."

그에게는 아직 열다섯 날이 남아 있었으며 할 일도 그만큼 많았다. 일단은 사무실로 돌아가서 인간 사제들에게 펜닐의 말을 전해야 했다. 스카르파가 타우베스를 보고 싶어 한다고 했으니까. 둘 중에서, 흰둥이와 혼례를 올린 쪽 말이다.

서류는 한참이 밀린데다가 며칠 뒤에는 저항군들과 만나기로 약속이 잡혀 있었다. 테네브로즈에 대해서도 생각이 필요했다. 더 많은 생각이.

그는 후회나 죄책감조차 자기만족이라는 것을 알았다. 만약 필요하다 치더라도 지금 당장 짊어질 수 있는 감정은 아니었다.

울쿠스는 일어섰고, 수천수만 번은 되뇐 두 문장을 다시 머릿속에 박아 넣었다.

주어진 일을 해야 한다고.

그리고 아직은, 살아 있어야만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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