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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58화 (59/258)

58화 스카르파의 연인 (2)

딤 나겔은 손자를 사랑했지만 훌륭한 양육자라고는 할 수 없었다. 나트람에게 온 평생을 시달리면서, 긍정적인 감정들을 완전히 숨겨온 탓이었다.

따라서 울쿠스가 온정을 느낄 기회는 아주 적었다. 일부러 사고를 쳐서라도 관심을 끌 정도로.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다음이면 딤 나겔은 손자를 껴안고 가만히 눈물을 흘리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울쿠스는 인정투쟁이 가문의 명운을 걸기엔 너무나도 치졸한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만두었다. 딤 나겔은 가문 구성원 모두를 이끌고 외줄에 올라 있었다.

그는 할아버지의 책무를 이해했다. 이 도시에서 중립을 유지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도. 추적대에 들어간다면, 자신 역시 부모님과 똑같은 결말을 맞게 되리란 것까지.

"제가 추적대에 들어가는 걸 방해하셨더군요."

"나는 이 문제로 다툴 마음이 없다. 이유는 너도 알고 있을 테니."

"압니다. 저도 알아요. 열 살이 되기도 전부터, 사실은 태어났을 때부터 알고 있었죠. 저는 할아버지처럼 이 정원에서 썩어갈 겁니다. 명문가 자식들이 던져주는 이야깃거리를 받아먹으면서요."

"사람에게는 각자의 자리가 있는 법이다."

머리로는 그래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판단을 실행으로 옮기는 것은, 언제나 심장이었다.

"어릴 적부터, 다른 아이들이 제사장 자리를 입에 담고 추적대에 들어갈 꿈을 꾸는 동안, 저는 정원에 앉아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어야 했지요. 누가 누구를 어째서 미워하는지에 대한, 지긋지긋한 사연들 말입니다. 전 싫습니다. 모두 알지만… 싫단 말입니다."

딤 나겔은 복잡한 표정으로 손자를 바라보다가 외면하듯 창밖으로 눈길을 던졌다.

할아버지의 시선을 쫓던 울쿠스는 이내 고개를 떨어트렸다. 흑단 탁자가 시야를 가로막았다. 그는 눈물이 차오르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그래서 어쩌겠단 말이냐?"

질문 하나가 냉랭한 진압군처럼 닥쳐왔다. 그렇지, 어떻게 해야 할까? 울쿠스도 스스로에게 수없이 던진 질문이었지만 제대로 된 답을 얻어낸 적은 없었다.

교계에 나서는 것은 딤 나겔이 지금껏 쌓아올린 입지를 무너뜨리는 일이 될 것이다. 하지만 주어진 삶에 순응하는 것도, 원치 않았다.

그는 오래도록, 수렁을 닮은 정적 속에서 허우적댔다. 이게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에서조차 제대로 된 답을 내놓지 못한다면 결국엔 정원의 장미나무 신세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할아버지가 그런 것처럼.

"말루카의 피웅덩이 이야기를 하셨지요. 그것만 있으면 우리 바단 출신 귀족들이 명문가 놈들과 견주는 힘을 가질 수 있을 거라고요."

그는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르는 것을 느끼며, 절박한 심정으로 중얼거렸다. 가능한 목표가 아니라는 것은 스스로도 알았다. 도망치고 싶을 뿐이었다.

*  *  *

울쿠스는 오두막의 침대에 걸터앉아 지난 세 해 반을 복기했다. 이렇다 할 성공도 실패도 없는 세 해였다.

인간들과 어울려 다니다가 들키면 도망쳤고, 여의치 않을 경우에는 죽였다. 함께하던 자의 피를 보자니 껄끄럽기야 했지만 그러지 않으면 자신이 목숨을 내놓을 판이었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 울쿠스는 많은 변화를 받아들였다. 귀는 두 해 전에 잘랐다. 깊이 잠든 도중에라도, 누군가가 가까이 다가오면 곧바로 눈을 뜨는 체질이 되었다. 잠든 상태에서 환술이 풀리면 그대로 죽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비하면 인간 말을 배우기는 쉬웠다. 비록 평생을 야스와다에서만 살긴 했지만, 두 종족의 언어는 뿌리가 같았으니까. 요정이 대륙 남단에 틀어박히고 교류 자체가 끊기면서 분화가 일어났을 뿐이다.

인간들은 그를 변방에서 올라온 촌뜨기로 생각했다. 억양이 독특하고 이상한 낱말을 섞어 쓰는 탓이었다. 그러나 시골 청년을 향한 온정은 순식간에, 요정에의 적대감으로 모습을 바꾸곤 했다.

울쿠스는 어느 순간 그런 일에도 익숙해졌지만 한편으로는 전혀 다른 욕망이 자라나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요정이라는 걸 알게 되더라도 돌아서지 않을 사람이 필요했다. 거짓말이 탄로 나는 순간을 걱정하지 않고도 마주할 수 있는 상대가.

특히 이 오두막에 들어선 후로, 그것은 단순한 욕망이라기보다는 목표 같은 것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오두막을 발견한 건 묘한 악연 덕분이었다. 산맥 어귀에서 만난 채집가들과 어울리다가 정체를 들키고 말았던 것이다. 되는대로 도망 다니던 울쿠스는 산맥 한복판에 덩그러니 놓인 자신을 발견했다.

그 후로는 처절한 생존의 연속이었다. 괴수의 피로 배를 채웠고 감당할 수 없는 상대를 만나면 숨었다. 방향조차 모른 채 무조건 앞으로 걸어 나갔다. 어느 쪽으로든 간에, 언젠가는 산이 끝나리라 믿으면서.

여름부터 시작된 야인 생활은 겨울이 되어서야 끝났다. 산기슭 끝자락에서 오두막을 발견했던 것이다.

울쿠스는 기대감으로 가득차서 문을 두드렸고, 한참을 기다리다가, 끝내는 그냥 들어가는 편을 택했다. 그리고 얼어붙은 시체를 발견했다. 늑대인간이었다. 칼에 깊이 찔린 듯 복부의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웅덩이를 이루고 있었다.

두 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첫째, 자신은 산맥을 잘못된 방향으로 넘어왔다. 오른편이 아니라 왼편으로.

산맥 왼편은 늑대인간들의 땅이었다. 인간이 상대라면 환술을 쓰고 도움을 구할 수 있겠지만 늑대인간들에게는 문전박대를 당할 게 뻔했다. 그들이 이방인에게 얼마나 날을 세우는지는 울쿠스도 들어 알고 있었다.

둘째, 살인사건에 얽히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무슨 사연인지는 몰라도 여기에 계속 남아 있다가는 범인으로 몰릴 위험이 컸다. 늑대인간을 죽이고 오두막을 차지한 요정이라니, 실로 고색창연한 그림이 아닌가.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울쿠스는 엉엉 울면서 신세를 한탄하다가, 해야 할 일을 했다. 환술로 늑대인간의 얼굴을 베낀 다음 시체를 파묻는 것이다. 이렇게 버려져 있는 걸 보면 죽음을 아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으리라는 계산이 있었다.

어차피 근처에 구덩이도 파인 상태였다. 무덤을 만들려다가 그만두고 돌아간 모양이었다. 울쿠스는 누구인지 모를 살인자에게 감사를 표했고, 이 오두막이 충분히 외진 곳이기를 빌었다. 원래 주인의 얼굴을 베끼긴 했지만 늑대인간처럼 말하고 행동할 자신은 없었다.

*  *  *

아늑하고 평화로운 겨울이 흘러갔다.

산맥에 비하면 오두막은 천국이나 마찬가지였다. 초라한 겉모습과는 달리 욕실과 주방을 갖춘데다가, 수도는 물론이고 마공학 온열기구까지 설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물론 피범벅인 침대보와 요를 빨아 말리는 건 조금 버거웠지만 괴수에게 쫓기다가 낙엽을 덮고 잠들기보다는 나았다.

게다가 이제는 방문객을 만나더라도 웬만큼 응대할 자신이 있었다. 오두막에 있던 책으로 늑대인간의 말을 익혔던 것이다. 발음이나 억양은 논외로 두더라도, 문장쯤은 수월하게 만드는 수준이었다.

애당초 늑대인간들의 말은 고대 요정어와 인간 언어 사이의 중간 지점에 놓여 있었고, 그래서 배우기가 수월…했다고는 할 수 없었다. 현대 요정어에도, 인간어에도 없는 격변화에 익숙해져야 했으니까.

하지만 그것조차 해결이 됐다. 어차피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겨울 내내, 오두막에 틀어박혀 소설과 희극 대본 열아홉 개를 외우듯 읽다 보니 생각마저 늑대인간어로 할 지경이었다.

덕분에 울쿠스는 봄이 되고서도 떠날 시일을 차일피일 미루고만 있었다. 애써 적응한 판에, 죽을 위험을 무릅쓰고 산맥을 넘을 엄두가 나지 않는 탓이었다.

물론 여기에서 늑대인간으로 늙어 죽을 마음도 없었다. 거창한 야망 때문은 아니었다. 삶은 괴수 고기가 지겨웠다. 심지어 이제는 얼마 없던 향신료마저도 다 떨어져가고 있었다.

사람을 만나고 싶은 마음도 컸다. 거울 속의 자신과 대화를 한참이나 이어가다가, 걷잡을 수 없는 고독감에 울음을 터뜨릴 때가 많았다.

하지만 야스와다에 돌아가서 주어진 미래를 받아들이는 것도, 싫었다. 파릇파릇해진 산의 풍경을 즐기다가도 할아버지의 삶을 떠올리기만 하면 숨이 막혔다. 사촌형님에게 소중한 것들을 모두 빼앗긴 채, 온갖 귀족 가문 사이에서 위태로운 곡예를 벌이는 삶은…….

그래서 울쿠스는 늑대인간이 된 자신의 모습을 눈앞에 그리곤 했다.

겉모습만 바꾼 게 아니라 몸가죽까지 뒤집어쓸 수 있다면.

그랬더라면 곧바로 말루카로 내려가서 누구든 만났을 텐데.

그리고 늑대인간의 삶을 기쁘게 받아들였을 텐데.

얼마 지나지 않아, 상상은 현실이 되었다.

*  *  *

"잠깐만요. 잠깐만……."

울쿠스는 평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머리가 새빨간 여자가 오두막에 들이닥치더니 자신을 껴안고 엉엉 울기 시작했던 것이다. 일어날 때까지만 해도 평소와 다름없는 아침이 될 거라고 믿었는데.

"기억이 없어요. 당신은 누구입니까? 저는 누구고요?"

거울을 보면서 희극 대사를 주절댄 게 효과가 있었는지 말은 막힘없이 나왔다. 여자가 그 소리를 듣자마자 더 큰 소리로 울기 시작한 게 문제였을 뿐이다.

"아니지. 일단 앉아 봐요."

울쿠스는 여자를 침대에 앉힌 뒤 남은 향신료를 긁어모아 차를 끓이기 시작했다. 다음에 다시 만날 때, 식재료를 넉넉히 부탁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면서.

보아하건대 여자는 오두막의 주인과 깊은 관계인 것 같았다. 어쩌면 연인이거나 아내였을지도 모르겠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단순한 지인에게 이러진 않을 테니까.

잠깐만, 붉은 머리 늑대인간이라고? 울쿠스가 알기로, 색조 있는 머리카락을 가진 늑대인간은 한 명도 없었다. 이렇게 키가 작은 늑대인간 여자도. 늑대의 발을 연상시키는 손등을 제외하면, 여자는 평범한 인간과 똑같아 보였다.

그제야 미뤄 두었던 질문들이 몰아닥쳤다. 남자 쪽은 왜 오두막에서 죽어 있었던 걸까? 여자는 어디에 살기에 이 허허벌판에 갑자기 나타났고? 애초에 이런 오두막이 여기 있는 이유는 뭐지?

생각이 뚝 멎었다. 그는 여자의 곁에 멍하니 앉아 있다가 타는 냄새에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물이 졸아붙은 주전자가 이제는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불을 끄고 창문을 활짝 연 다음 여자와 대화를 시도했다. 대강이나마 상황을 파악한 건 시간이 한참이나 흐른 뒤였다.

"…정리해 볼게요. 내가 혼례 결투에서 치명상을 입고 여기로 옮겨졌단 말이죠. 당신의 언니가 나를 옮겼고요, 당신은 둘째 왕녀인데 돌연변이고, 나랑은 서로 연인이었던 거예요. 맞나요?"

울쿠스는 지금껏 들은 이야기가 사실인지를 의심했다. 내용도 내용이었거니와 여자의 상태 역시 멀쩡해 보이진 않았다. 차라리 과대망상 환자의 헛소리라고 치부하는 게 훨씬 합리적인 판단일 것 같았다.

"네가 살아있길 매일 기도했어. 기도했는데 무서워서 못 왔어. 혹시나 네가 죽어 있을까봐. 그 후로 처음 온 거야. 네가 살아 있어서 정말로, 정말로 다행이야……."

하지만 스카르파의 표정에는 무슨 말로도 설명하기에 부족한 환희가 서려 있었고, 울쿠스는 그녀를 강하게 끌어안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맞닿은 가슴 아래로 두근거리는 심장이 느껴졌다. 박동하는 온기가 거기에 있었다. 이윽고 울쿠스는 야스와다를 떠난 시간동안, 자신이 줄곧 찾아 헤매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알아차렸다.

비록 그가 뒤집어쓴 것이 죽은 연인의 환영에 불과할지라도.

작가의 말)

* 요정어 ― 늑대인간어 ― 인간어는 저지 독일어 ― 네덜란드어 ― 표준 독일어와 대응되는 방언연속체를 이루며 그에 준하는 수준의 소통이 가능함(관계상의 유사성일 뿐이지 언어적 특징이 그렇다는 뜻이 아님). 요정 제국이 몰락하던 시점에 이미 활자 매체가 널리 보급되었기 때문에, 천 년간의 교류 단절이 가져온 분화가 크지 않았다고 가정함.

* 따라서 작중의, 타 문화권간 인물 대화는 <서로 대충 말한 다음 대충 이해한 결과>를 한국어로 세련되게 옮긴 것임을 밝힘. 소통 과정에서 발생하는 모종의 착오는 없는 것으로 가정함. 한편 란드와르는 천계표 번역기를 달고 있으므로 모든 문화권의 언어를 올바른 뜻으로 전달할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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