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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57화 (58/258)

57화 스카르파의 연인 (1)

"나으리, 저는 살생을 즐기지 않습니다. 가능하다면 목숨 빚을 만들어두려는 편입니다… 그건 여러모로 도움이 됩니다."

테네브로즈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란드와르는 그제야 놈의 결함을 정확히 파악했다.

오락가락하는 정신머리나 희박한 도덕률까지는, 그럴 수 있었다. 그건 통제가 됐다. 어차피 필요할 때에는 알아서 제정신으로 돌아오는 놈이었다.

정말로 치명적인 문제는 녀석이 자의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한다는 데에서 왔다.

"그런데 왜 진작 얘기를 안 했냐."

테네브로즈가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건 처음이 아니었다. 헤이딘과 어떤 식으로 엮였느냐는 질문 앞에서는 두 번이나 답을 피해갔고 이번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결과가 좋았으니 다 좋은 것이라 치고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울쿠스와 이야기를 나누는 건 제 몫이지 않습니까. 스스로 처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정말로? 말하기 싫어서 안 한 게 아니라?"

"저는 제 이야기를 하는 일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나트람의 밑에 있을 때부터 그랬습니다."

란드와르는 그게 거짓말은 아닐 거라고 판단했다. 포도밭 골목에서, 세이버리와 싸웠다고 욕을 먹은 후에도 놈은 비슷한 답을 내어놓았던 것이다.

― 저도 필요할 정도로는 생각하면서 행동하고 있습니다.

― 그런 놈이 이걸 처음부터 말해야겠다는 생각은 왜 못 했냐.

― 나트람 어르신은 제가 길게 떠드는 걸 싫어한답니다.

하지만 그게 진심인 것과는 별개로, 이건 타협하지 못할 부분이었다. 단순히 사리분별이 안 되는 것까지는 죄가 아닐지라도 사리분별이 안 돼서 실수를 저지르는 건 죄인 것처럼.

"아니야. 네가 나한테 미리 얘기해줬어야 하는 게 맞아. 넌 지금 단독행동을 한 거라고. 내 말을 듣고 움직인 게 아니라."

란드와르는 말루카에서 자신이 별 쓸모가 없으리라는 걸 예상하고 있었다. 게임에서도, 제대로 된 전투는 <선조의 능묘>에서만 한 번 있었고 나머지는 증거를 수집하는 게 고작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금은 울쿠스를 설득하는 것 자체가 관건이 된 판이다. 실제로 행동에 나서는 건 테네브로즈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여전히 결정권은 란드와르에게 있었다.

"결정권자는 나야."

"예."

"판단도 내가 해."

그에게는 사람을 모아서 야스와다의 신을 제압할 책무가 있었다. 정의감이나 숭고한 희생심이 아니라, 계약서에 명시된 책무가.

따라서 계획을 짜는 것도, 선택을 내리는 것도, 주위 사람의 처분을 결정하는 것도 모두 란드와르의 권한이자 책임이었다. 결과가 어떻든 간에 테네브로즈가 그 영역을 침범해서는 안 됐다.

"대업에 방해가 될 일은 하지 않습니다."

"그걸 네 선에서 판단하고 끝내지 말라는 거야. 방해가 되는지 안 되는지는 내가 듣고 결정할 거니까. 무슨 행동을 하기 전에 나한테 우선 결재를 받아. 내가 뭔가 물어보면 똑바로 대답하고."

물론 녀석의 태도는 지금까지는 도움이 됐다.

혹은 별문제가 없었다.

지금까지는, 결과적으로.

하지만 이 변수가 앞으로 어떤 식으로 작용할지는 불분명했다. 그나마 확신할 수 있는 점은 둘이었다. 정보는 많을수록 좋으며 무언가를 몰라서 얻을 이득은 없다는 게.

"요정이 얽힌 문제라면 보통은 네가 나보다 더 유능하겠지. 요정 개개인에 대해서는 무조건 그럴 거야."

란드와르는 녀석의 반응을 확인하기 위해 잠시 멈췄다. 표정에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그런데 나는 세계가, 이 거대한 흐름이 어느 방향으로 굴러가는지를 대충 알아. 그래서 내가 너한테 명령을 내리는 거야."

"예."

"나는 말이다, 네 습성 때문에. 뭔가 감추고 마음대로 판단하는 습관 때문에 큰 흐름이 가로막히는 게 걱정이다. 무슨 소린지 알겠냐."

테네브로즈는 깊이 고민하더니 한 문장을 내어놓았다. 원하던 대답은 아니었다.

"저는 나으리를 배반하지도 않습니다."

"배신은 네가 아니라 네가 말하지 않는 내용이 하는 거야."

란드와르는 가늘게 뜬 눈 사이로 요정을 보았다.

여전히, 이놈을 제어할 수 있을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 말해도 너는 계속, 하기 싫은 이야기가 있으면 입을 다물고 있겠지. 어차피 나는 모르니까. 이상한 부분이 보이면 계속 캐묻긴 할 건데 거기에서까지 말을 안 하면 나는 알 방법이 없어."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그 태도가 나를 엿 먹일 거야."

"그럴지도 모릅니다."

뭐라 변명이라도 했으면 차라리 화를 냈을 텐데, 이렇게까지 솔직히 나오니 도리어 머리가 맑아졌다. 그는 명징한 정신 속에서 생각을 뻗었다.

둘 중 하나였다. 일이 끝나자마자 요정 녀석을 동료 목록에서 제외하거나, 어쩔 수 없다 치고 그냥 살거나. 성격을 고친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나트람의 개로 지내면서도 뒤로는 온갖 일을 벌이던 놈이었다. 주인이 바뀌었을지라도 본성까지 변하진 않는다.

게임상의 경로를 따라갈 경우, 테네브로즈는 공략에 있어 필수적인 요소가 아니었다. 야스와다 학파의 주문이 필요하다면 지금 당장에라도 벨레다와 헤이딘으로 대체하는 게 가능했다…….

하지만 녀석에게는 전투 동료 이상의 값어치가 있었고, 고민은 길었다.

"누구랑 뭘 하고 살았는지는 안 묻는다. 앞으로도 그럴 거야."

"예."

"대신 뭔가 하기 전에는 무조건 나한테 설명한 다음 허락을 받아. 지금처럼 일 다 끝내고서 사실은 이랬습니다, 하지 말고. 그러지 않으면 난 너를 수도원에 가둘 수밖에 없어."

그건 이강현이 내놓을 수 있는 최선의 결론이었다.

*  *  *

사무실에 앉은 울쿠스는 멍한 표정으로 지혜의 고리를 만지작거렸다. 무슨 소용이 있는 일은 아니었다. 구멍들 사이로 줄을 빼낼 때마다 매듭은 꼬여갔고 밀린 서류도 산더미였다.

하지만 장학재단은 닥친 문제에 비해서는 사소했다. 저 멀리 야스와다에서는 잠든 신이 깨어났고 추적대는 스카르파를 노렸다. 스카르파의 신위를. 설상가상으로 나트람의 사냥개까지 중간에 끼어들어 사건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늑대인간들은 이 사실을 몰랐다.

방법이 없었다. 군부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는다면 놈들은 일단 스카르파를 어딘가에 가둔 뒤 도시에 숨어든 추적대를 찾아 말루카를 뒤엎을 터였다.

그 과정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건 흰둥이일 게 뻔했다. 요정은 체구 때문에 순혈로 위장할 수 없으니까, 그쪽으로 의심이 쏠리는 것이다. 게다가 타라곤의 정체가 들킨다면 캐러웨이 부인까지도 위험해졌다.

따라서 군부의 힘을 빌리진 못한다. 하지만 이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 캐러웨이 부인과 스카르파와 저항군 사람들과 극단 배우들과 장학재단의 아이들이 어제처럼 살아갈 수 있도록. 오로지 울쿠스 자신의 힘으로…….

그는 스스로가 불가능한 미래를 꿈꾸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아무것도 아닌 요정 청년이 말루카에서 해낼 수 있는 최선은 타라곤으로 살아가는 것뿐이었다. 군부나 추적대에게 맞설 능력은 되지 못했다.

기댈 구석은 스카르파가 유일했다. 그녀에게 나머지 심장을 먹이는 방법도 있었던 것이다. 사실은 그게 그나마 유력한 해답 같았다.

정말로? 말루카가 먼지로 변하고 스카르파와 자신만이 살아남는 게?

심지어 이 상황을 해결한다고 해서 행복한 결말을 맞을 수 있는 것조차 아니었다. 정말로 야스와다의 신이 깨어났다면 말루카뿐만 아니라 이 땅 전체가 전란에 휩싸이고 만다.

울쿠스는 현기증을 느끼며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지혜의 고리는 이제 복구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복잡하게 꼬여 있었다.

다음 휴일까지 남은 시간은 보름.

그때가 되면 테네브로즈가 다시 찾아온다.

유예기간을 벌어준 게 다른 누구도 아닌 그라는 사실이 얄궂게만 느껴졌다. 나트람의 사냥개이며, 울쿠스의 부모를 죽였고, 수많은 사건에 한 발을 걸치고 있는 추적자.

그리고 어린아이의 잔꾀를 눈감아준 신관.

테네브로즈는 자신이 울쿠스의 부모를, 스티그미르를, 누님을 죽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의 목숨을 두 번째로 살려주려 한다고도… 울쿠스는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기대를 걸어볼 곳이 없는 탓이었다.

곧이어 마음속에서 외마디 질문이 터져 나왔다.

정말로?

신중해야 했다. 하루짜리 기억 때문에 신뢰를 주는 건 어린아이도 하지 않을 짓이었다. 이것마저 나트람의 계략일 공산이 컸다. 하지만, 그렇다면, 왜? 무엇을 위해서? 딤 나겔을 엮어넣을 작정이라면 구태여 자신에게 시간을 줄 필요가 없었다…….

"그건 뭐예요?"

울쿠스는 남자아이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시종 소년이 맞은편에 앉아 지혜의 고리를 빤히 보고 있었다. 그는 손등으로 눈가를 쓱 문지르고서는 태연한 척 대답했다.

"장난감이야. 실을 구멍 사이로 넣었다가 뺐다가 하면서, 거기 달린 구슬을 반대편으로 옮기는 거지."

"제가 보기엔 안 될 것 같은데요. 너무 꼬였잖아요."

"그러게 말이야……."

소년과 함께하는 교단 사제들에게 상담할 궁리도 해 보았으나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들 역시 말루카에서는 이방인이었고 이야기를 모두 들은 뒤에는 군부를 찾아갈 게 뻔했기 때문이다.

한숨을 내쉰 울쿠스는 소년에게 줄 과자를 찾기 위해 칸막이 너머로 걸음을 옮겼다.

*  *  *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울쿠스는 수레를 빌려 타고 군부 중앙청사로 향했다.

중앙청은 군부의 핵심이자 왕실의 다른 이름이었다. 그는 보통 두 가지 이유로 그곳에 갔다. 극단 공연 때문에 담당 실무자를 만나기 위해. 혹은 스카르파를 보기 위해.

물론 집 앞의 석상을 이용한다면 능묘를 경유해 별채로 들어갈 수 있었지만, 울쿠스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그러지 않았다. 출입 기록도 없이 왕실 한복판에 나타났다가는 의심을 살 게 뻔했다.

게다가 능묘에 들어가고 싶지도 않았다. 심장이 나뉜 후로, 능묘의 지상층은 끔찍한 장소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공식적인 경로로만 스카르파를 만났다.

부군인 펜닐은 그런 방문을 용인하고 있었다. 동정심이나 죄책감의 발로는 아니었다. 섭정 노릇을 똑바로 하기 위해서는 일단 미친 왕을 진정시켜야 했던 것이다. 그녀가 별채에 틀어박혀 바깥엔 나오지 않도록.

"대낮에 보란 듯이 찾아오는 이유가 궁금하군. 군부 대원들이야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긴 하지만, 자네에게도 체면이라는 게 있을 게 아닌가."

그러나 그런 쓸모와는 별개로 펜닐은 항상 타라곤을 눈엣가시로 여겼다. 정무적인 이유로 맺은 혼약일지라도, 반려자가 다른 남자와 놀아나는 것을 좋아할 남자는 없는 법이었다.

"항상 이런 후회를 해. 허리를 찌르는 게 아니라 목을 쳤어야 했다고. 그랬더라면 흰둥이가 왕의 침소에 드나드는 꼴도 보지 않았겠지."

"그렇습니까."

"자네 생각은 어떤가? 이제라도 일을 바로잡을 마음은 없나?"

울쿠스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흑발의 남자를 직시했다. 만약 자신이 스카르파에게 나머지 심장을 먹이게 된다면 그 이유 중 하나는 저 개자식 때문일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아니, 사실은 신의 힘을 빌릴 필요도 없었다. 비록 마법 교습을 늦게 시작하긴 했지만 울쿠스는 혈마법에 재능이 있었고 혈기 피조물까지 빚을 수 있었다. 야스와다를 떠나 방랑하면서 전투 경험도 많이 쌓았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됐다.

"…죄송합니다."

"그래, 마땅히 죄송해 해야지. 자네가 살아남은 덕분에 일이 항상 귀찮아. 어디서 들었는지, 저번에는 자네 극단에 온 인간을 불러 달라고 하지 뭔가. 흰둥이와 혼례를 올렸다던 그놈 말이야."

"사제분께 말씀을 전하지요."

"흠."

펜닐은 성에 차지 않는 듯 비아냥거리는 소리를 몇 마디 더 뱉다가 울쿠스를 보내주었다. 그는 이마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복도를 따라 걸었다. 갖가지 생각이 머릿속에서 공명하며 더 큰 음률로 변했다.

자신은 정식 후궁조차 아니었고, 펜닐의 분노는 어느 정도 합리적인 것이었다. 심지어 상당 부분은 그의 책임조차 아니었다. 하지만 울쿠스는 그게 일종의 업보라고 믿었다.

타라곤을 상대할 때 손속에 자비를 두었더라면. 스카르파에게 조금의 희망이라도 남겨 두었더라면. 혹은 완전히 목을 쳐서, 모든 후환을 없앴더라면.

그랬더라면 역겨운 요정이 도시에 숨어들지도 않았을 텐데.

그는 소용돌이치는 번민 속에서 스카르파의 별채에 이르렀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여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침대에 앉아 창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여자가.

울쿠스는, 타라곤은, 잠시 기다렸다.

여자는 여전히 창밖을 본다. 물결치는 붉은 머리가 등허리까지 닿는다. 초겨울의 창백한 햇볕은 잔파도처럼 밀려오다가 그 머리카락을 만나 부서지고 만다.

해를 가리던 구름이 바람을 타고 천천히 밀려난다. 투명한 그림자가 꺾이듯 기울어지며 방에 선명한 사선을 놓는다. 그 선을 넘어간다면 모든 게 안식을 찾을 것만 같다.

타라곤은 움직인다. 잿빛 눈동자는 물 덩어리로 변해 한 걸음마다 출렁거린다. 땅을 잘못 디뎠다가는 눈물을 쏟을지도 모른다. 별채에는 눈부신, 눈부시도록 작고 위험한 왕이 있다. 피 묻은 칼날처럼 빛나는…….

타라곤은 스카르파의 곁에 앉아 어깨를 감싸 안았다. 고요를 닮은 온기가 느껴졌다. 그는 한동안 그대로 멈춰 있었다. 야스와다의 신과 추적대와 이시 첼의 심장에 얽힌 모든 고민을 저 멀리 밀어 놓은 채로.

그리고 스카르파의 입술이 달싹였다.

"나쁜 일이 있었구나."

"조금… 피곤할 뿐이야. 푹 쉬면 괜찮아질 거야."

"네 기분이 들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두, 내가 도와줄 수 있어."

"아니야, 스카르파, 정말로 아무 문제도 아니야."

"펜닐이 어젯밤에도 너를 헐뜯었어. 제일 먼저 죽여버릴 거야. 네가 조금만 솔직해진다면……."

평안이 다시 폭발했다. 울쿠스는 조용히 흐느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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