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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56화 (57/258)

56화 지혜의 고리

"나는 그대 목숨을 두 번째로 살려주려는 거야. 다음에 만날 때에는 분위기가 괜찮았으면 좋겠군."

그건 테네브로즈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었다.

물음표가 밀려왔다. 두 번째라고? 처음은 언제였단 말인가? 다음은 또 언제고? 그러나 질문은 길지 않았다. 참을 수 없는 졸음이 울쿠스를 덮쳤다.

*  *  *

어린 요정은 자신의 친족에게 주문식을 배웠고, 수업은 대개 아홉 살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울쿠스는 열한 살인데도 아직 마법을 쓰지 못했다. 할아버지인 딤 나겔이 그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수십 해 전, 피송곳니의 가주 자리를 물려받은 딤 나겔은 교계와 전혀 엮이지 않을 것임을 공표했다. 사촌형에게 겁을 먹었을 뿐이라 비웃는 자들도 있었으나 그 선택은 도리어 그에게 기묘한 권위를 부여했다.

딤 나겔은 도시의 사건들로부터 한 발짝 물러나 있었기 때문에 그 모두를 알 수 있었다. 가문끼리의 불화가 깊어질 때마다 요정들은 그를 찾아 의견을 구했다. 그 과정에서 딤 나겔은 야스와다 교계에서 무시할 수 없는 부외자로 발돋움했다.

모든 가문이 딤 나겔을 죽이고 싶어 했지만 그것은 언제나 염원에 그쳤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자들에게서 절대적인 비호를 받았다. 만약 누군가가 행동에 나선다면 그의 원수가 딤 나겔을 지킬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손자가 중재자 역할을 이어받길 원했고, 울쿠스에게 마법을 가르치는 대신 온갖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귀족 가문끼리의 은원과 세력 간의 역학을.

울쿠스는 할아버지의 뜻을 이해했지만 불만을 품기도 했다. 수많은 감정이 소년의 마음속에서 맞부딪혔다. 추적대에 들어가고 싶었다.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는 것도 싫었다…….

"만지면 안 돼요."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정원에 나온 울쿠스는 애완 칼린카에게 팔을 뻗는 남자를 발견했고, 외쳤다. 남자가 움직임을 멈추고는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신관 예복을 입고 있었다.

"할아버지 보러 오신 거예요?"

"그래, 여쭐 게 있어서 왔단다. 집에 계시니?"

"잠깐 나가셨어요."

"그러면 여기에서 기다려야지."

울쿠스는 신관에게로 다가갔다. 새까만 고양이는 소년과 남자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몸을 홱 돌려 덤불 속으로 내뺐다.

"그냥 고양이가 아니라 칼린카에요. 요즘은 마력이 짙어서, 잘못 건드리면 사나워져요."

울쿠스는 신관의 옆에 앉아 말했다. 오후 햇살을 머금은 잔디는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안 그래도 바로 어젯밤에 사고가 났단다. 네 또래 애들이 당했어."

"어쩌다가요?"

"서리칼날 꼬마가 점을 쳤는데, 점괘가 마음에 안 들었던 모양이야. 친구들을 데리고 별점술사를 죽이러 간 거지. 그랬다가 애완 칼린카한테 다 뜯어 먹혀서 죽었단다."

신관은 날씨라도 읊는 어조로 말했지만 울쿠스는 묘한 희열을 느꼈다. 서리칼날 가문의 또래라면 한 명뿐이었다. 서리칼날의 카위르.

며칠 전까지만 해도 함께 놀던 아이였다. 사이가 좋지는 않았다. 녀석은 심심하면 울쿠스를 놀려 댔다. 열한 살이나 되었는데도 아는 주문이 한 개도 없다면서. 그게 딤 나겔을 향한 모욕으로 변했을 때, 울쿠스는 걷잡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어떻게든 앙갚음을 해야 했다.

바로 어제 기회가 생겼다. 평민 별점술사를 만나고 돌아온 카위르가 점괘를 두고 한참을 투덜거렸던 것이다. 녀석을 부추기기는 쉬웠다. 건방진 평민을 혼내 주는 건 어떻겠냐고 말을 걸자 도와줄 거냐는 질문이 되돌아왔다.

울쿠스는 할아버지 핑계를 댔다. 할아버지에게 혼날 게 무서워서 밤에는 나가지 못하겠다고. 마법도 배우질 않았다고. 먼저 제안을 한 다음 내뺀다면 녀석이 그대로 움직일 거란 계산이 있었다. 과연 예상대로였다. 카위르는 겁쟁이라면서 코웃음을 치더니 다른 아이들에게로 갔다. 그리고 함께 별점술사의 집에 쳐들어갈 동료를 찾기 시작했다.

별점술사가 칼린카를 여럿 기른다는 건 알고 있었다. 공기중의 마력도 꽤나 짙어질 시기였다. 아이들이 별점술사의 집에 기어들어간다면 무슨 사고가 날지는 뻔했다. 운이 좋아서 살아남더라도 다리 하나씩은 잃을 거라고 생각했다. 울쿠스는 태연한 척 말했다.

"남의 집에 함부로 들어가니까 그렇게 되죠."

"그래, 점괘가 싫다고 칼부림을 내면 안 되지……."

신관은 말끝을 흐리더니 던지듯 물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이런 말을 하던걸. 네가 전날에 카위르랑 같이 있었다고."

"별로 안 친해요."

"하지만 칼린카가 위험하다는 이야기는 해 줄 수 있었을 텐데. 나한테 그랬던 것처럼."

뜻 모를 미소 앞에서, 울쿠스의 머리가 빠르게 굴러갔다. 설마 다른 애들이 무언가 말한 걸까? 카위르를 부추긴 게 그라고? 이 신관은 그것 때문에 여기에 온 거고?

그는 밝은 웃음소리에 생각을 멈췄다.

"내가 괜한 질문을 했구나. 어리석은 짓을 하다가 죽은 건 그 애들 잘못이지 네 탓은 아니니까."

울쿠스는 신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다른 속내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한순간에 긴장이 달아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 소년은 온갖 이야기를 줄줄 늘어놓는 자신을 발견했다. 친구에게도, 할아버지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것들이었다.

"저는 예전부터 그 애 싫어했어요. 절 놀리는 것까지는 참을 수 있는데 할아버지 욕까지 했단 말예요. 아홉 살 때까지는 좋았는데 마법을 배우고 나서부터 다 달라졌어요."

"마법? 마법이랑은 무슨 상관이야?"

울쿠스는 잠깐 망설이다가 부끄러운 투로 운을 뗐다.

"저는 아직 하나도 못 배웠거든요. 할아버지가 안 가르쳐 주셨어요. 부모님처럼 사는 건 너무 위험하다고. 다들 그걸 가지고 계속 시비를 걸지 뭐예요. 자기들도 정작, 실력은 안 배운 거나 마찬가지면서."

"그래, 친구라고 해서 다 도움이 되는 건 아니야. 나도 잘 알지. 너랑 비슷한 나이일 때, 친구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거든……."

울쿠스는 신관이 몇 해쯤을 살았을지 짐작해 보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요정의 나이를 겉모습으로 분간하기는 어려웠다. 완연한 노년기에 들어서기 전까지, 요정들은 엇비슷한 외관을 유지했던 것이다.

"그게 얼마나 된 일인데요?"

"꽤 됐지. 내가 성년이 되자마자 혼례를 올렸더라면 너만 한 아들이 있었을 테니까."

할아버지가 돌아오기 전까지, 소년은 신관과 갖가지 이야기를 나눴다. 마법에 대해서. 추적대에 대해서. 신관의 옛 친구와 가족에 대해서. 누님이 둘인데 한 분은 못 만나게 되었고 다른 분은 울쿠스가 태어날 무렵에 돌아가셨다고 했다.

두어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저택으로 돌아온 딤 나겔은 신관을 보고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신관은 아랑곳하지 않고 일어나 공손히 인사했다.

"3교구의 추적자가 피송곳니의 가주를 뵙습니다."

"무슨 일인가?"

"자세한 이야기는 응접실에서 나누는 게 좋겠습니다. 영특한 손자분을 두셨더군요."

짧은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딤 나겔의 눈빛이 형형해졌다.

"허튼 소리를 할 작정이라면, 관두게."

"아이에게 선물을 하나 주고 싶을 뿐입니다. 바쁘신 줄은 알지만 잠깐은 기다려주실 수 있겠지요."

신관은 예복 앞자락의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울쿠스에게 건넸다. 손바닥 절반 크기의 사각판에 구멍이 뚫려 있고 거기에 매듭이 끼워진 물건이었다. 명주실에 달린 구슬 두 개가 사각판에 가로막혀 있었다.

"지혜의 고리라는 장난감인데, 구슬이 사각판의 같은 쪽으로 넘어가도록 실을 잘 잡아당기면 된단다. 심심할 때 하면 좋아. 적어도 그 친구들보다는 훨씬 도움이 되겠지."

그리고 신관은 딤 나겔과 함께 본채로 걸음을 옮겼다.

울쿠스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지혜의 고리를 만지작거렸다. 고리는 잘 풀리지 않았고 대신 후회가 늘었다. 부모님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물어봤어야 했다는 후회가. 그의 부모는 추적대 소속이었고 신관과 연배도 비슷했다. 서로 알고 지냈을 공산이 컸다.

해가 가라앉고서야 할아버지가 왔다. 그는 신관에게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물었고 카위르와 있었던 일을 추궁했다. 카위르를 부추긴 게 네가 아니냐고도. 처음에는 부정했지만 결국엔 솔직히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놈이 할아버지를 모욕했어요. 할아버지를 집에 숨은 겁쟁이라고 불렀다고요."

딤 나겔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네 마음은 이해한다. 하지만 그런 건 목숨을 내걸 일이 못 돼."

"그러면요? 그런 소리를 계속 들으면서 살라는 소리예요? 저는 할 수 있는 일을 했어요. 들키지도 않을 거예요. 눈치챈 애들도 없고 신관님한테 한 얘기도 사소한 것뿐이에요."

울쿠스는 딤 나겔의 표정을 보고는 말을 멈췄다. 눈물이 주름진 얼굴을 적시고 있었다. 그는 입을 다물었고, 할아버지가 자신을 껴안은 채 중얼거리는 소리를 가만히 귀에 담았다.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사람이 너와 나를 헐뜯을 게다. 그럴 때마다 이럴 수는 없어. 어린아이의 꾀는 금방 들킨단 말이다. 지금은 운이 좋았을 뿐이야. 운이 좋아서… 미치광이의 변덕을 도대체 누가 믿겠느냐?"

딤 나겔은 마지막 문장의 정확한 뜻을 알려주지 않았다. 신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일도 없었다. 그래서 울쿠스는 그 하루를 이상한 날로 기억했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서는 완전히 잊어버렸다.

그러나 지혜의 고리만은 부적처럼 그를 따라다녔다…….

꿈의 막바지에서, 울쿠스는 다시 신관을 보았다.

칼린카에게 손을 내미는 은발의 남자.

그 얼굴은,

울쿠스는 눈을 떴다. 한밤중이었다. 테네브로즈를 만나서 기절한 후로 얼마가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침대 등받이에 기대어 한동안 생각을 가다듬다가, 비틀거리면서 일어났다.

동시에 요정의 얼굴이 훅 나타났다. 창백한 금발이 어깨에 닿는 남자였다. 뒷걸음질 치며 주문을 준비하던 울쿠스는 가까스로 평정을 되찾았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일 뿐이었다.

테네브로즈의 말이 옳았다. 캐러웨이 부인의 아들로 다섯 해를 살아오면서, 그는 늑대인간의 삶에 너무 익숙해지고 말았다. 추적대가 그걸 달갑게 여길 리가 없었다.

심지어 지금은 나트람의 사냥개가 중간에 끼어든 상황이었다. 놈이 추적대와는 전혀 다른 꿍꿍이를 품고 있다는 점은 명백했다. 돌아가서 어떤 식으로 보고를 올릴지는 모를 일이었다.

그게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알 수 없었다.

고민 끝에 거실로 나와 불을 켰다. 벽에 걸린 단검은 잘 닦여 있었고 탁자 역시 깔끔했다. 설마 테네브로즈를 만난 것부터가 악몽이었나 싶었지만 그건 아니었다. 물건들의 위치가 기억과는 약간 달랐다.

이윽고 울쿠스는 서랍장 위에서 낯선 종이를 발견했다. 요정의 언어로 쓰인 편지였다.

<자는 동안 집을 좀 정리했어. 안타깝게도 내 선물을 서랍장에 박아뒀더군. 아니, 그런데, 가출하면서 이런 장난감은 왜 들고 왔나? 심심할 때 하려 그랬나? 보아 하니 풀지 못한 모양인데, 다시 도전해 봐. 다음 휴일에 또 올 테니 그때까진 해 두길 빌지.>

울쿠스는 편지 옆에 놓인 지혜의 고리를 알아보았고, 그때 딤 나겔이 흐느꼈던 이유를 이해했다. 테네브로즈의 마지막 말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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