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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55화 (56/258)

55화 피투성이 심장 (2)

테네브로즈에게 보고를 듣는 동안 볼로디아의 얼굴엔 특별한 감정이 드러나지 않았다. 생각에 짓눌린 표정으로 침묵을 지키다가, 간혹 몇 가지 질문을 던질 뿐이었다.

이야기가 모두 끝난 후 란드와르는 요정을 방으로 돌려보냈다. 진지한 분위기를 갖추고 싶었다.

"원하신다면 능묘에 가볼 수도 있을 겁니다. 직접 보시면 의심도 사라지겠지요."

얻어낸 정보 중에는 석상에 대한 것도 있었다. 타라곤의 집 앞에 있는 석상은 능묘 내부로 이어지는 관문을 겸했다. 하지만 지하층은 물론이고 지상층까지 심장의 힘에 잠식된 탓에, 그 통로를 즐겨 쓰진 않는다고도 했다.

"…의심은 오래전에 거뒀소. 그래서 쉽게 입을 열지 못하는 거요."

란드와르는 말없이 자리를 지켰다. 침묵은 길고 시끄러웠다.

*  *  *

볼로디아는 자신이 저버린 기회들을 생각했다.

만약 그때 마요르가 왕을 죽였더라면, 정당한 찬탈자가 되어 제위에 올랐더라면, 동생의 혼례를 취소하고 곁에서 위로해 주었더라면. 스카르파의 원망마저 모두 감싸 안을 수 있었더라면…….

처음부터 그랬어야 했다는 사실은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선택에 이어지는 결과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도망쳤을 뿐이다. 그러나 이제는 피할 곳 없는 외길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항상 왕좌가 두려웠는데 당신은 내게 신이 되라고 하는군."

"세 달 뒤에는 축복의 효과가 사라집니다. 완전히 미쳐 버리는 겁니다. 투기장에 계실 때처럼 말입니다."

지난 여섯 해가 볼로디아의 뇌리를 스쳤다. 앞선 두 해 동안에는 산맥을 떠돌며 괴수들을 죽였고, 이후의 네 해는 지하 투기장의 검투사로 살았다.

그간의 정신이 명징했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고통스럽지 않았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기억이 서서히 돌아오던 시점에는 자신이 그런 처지가 되었다는 데에 당혹과 모멸감을 느끼기도 했다. 스카르파를 저주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윽고 그것은 순응으로 변했다.

"나는 동생도, 그 요정도 증오하지 않게 되었소. 어머니를 원망하고 싶지도 않소. 나는 산맥에서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을 수 있었고, 그래서 행복했소. 북부 기지에 틀어박힌 동안 꿈꿨던 삶이 바로 그런 것이었단 말이오."

"하셔야 합니다."

란드와르는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볼로디아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떨어트렸다. 마지막 기회였다. 여기에서마저 도망친다면 남는 건 파멸뿐이다.

언젠가 스카르파는 나머지 심장마저 취할 것이다. 도시는 무너지고 늑대인간은 절멸을 맞는다. 그리고 자신은 광기 속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는다. 아무런 책무도 소명도 없는 삶에 몸을 내맡기고…….

그것은 볼로디아가 죄책감을 피하는 방식이었다.

"마요르가 왕의 첫째 딸은 현명하고 충성스러운 군부 대원이었소. 항상 직분에 걸맞은 선택을 했지."

어머니를 죽이는 것은 패륜이며 구혼자끼리의 결투는 왕실의 전통이었다. 따라서 칼을 거둔 것도, 펜닐과의 혼례를 막지 않은 것도 모두가 지당한 일이었다. 볼로디아가 북부 기지의 일상에 파묻힌 것마저도.

"사실은 그게 아니었던 거요. 때에 따라 다르오."

모든 나날은 언제나 과거와 미래 속에서만 평가될 수 있다. 어떤 일상을 지탱하려면 용기가 필요하지만 어떤 일상은 오로지 비겁함으로만 직조되기 때문이다.

볼로디아는 자신이 북부 기지에서 보낸 시간이, 어쩌면 평생이, 오로지 후자라고 믿었다.

"나는 언제나 의무를 지켰소. 내 진짜 자리는 법전의 위였는데도, 어머니께서 내게 요구하셨던 바 역시 그것이었는데도 선택을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단 말이오."

"너무 자책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대장군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악의를 가지고 행동하는 것만이 죄가 아니오. 가만히 있는 것조차 악행이 될 수 있지. 나는 그걸 너무 늦게 배웠고, 그래서 당신이 내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거요."

볼로디아는 고개를 숙여 가볍게 웃었다. 울거나 침울한 기색을 보이지 않게 된 지는 오래되었다. 군부 장교는, 대장군은 그러기에 적합한 지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신 그녀는 무표정에 익숙해졌다. 소용돌이치는, 이름조차 잊힌 감정들을 모두 그 밑에 묻어둔 채. 지금도 가슴팍에서 무언가가 울렁이는데 설명할 말을 붙이기가 어려웠다.

"물론 어머니에게 과를 돌리고 싶을 때도 많소. 그분께서 스카르파에게 조금만 자비로웠더라면, 아니, 최소한 냉담하거나 가혹하지 않았더라면 많은 게 바뀌었을 거요."

"아마도 그렇겠지요."

"하지만 어머니는 그런 식으로 평생을 살아오셨소. 바뀔 분이 아니지. 그러면 나는 어머니를 상수로 놓고 내 일을 해야 했던 거요."

어머니가 일차적으로 원인을 제공한 것과 볼로디아 자신이 아무 행동에도 나서지 않은 것은 별개였다. 둘에게는 각각의 잘못이 있었다. 저울에 죄업을 얹어 더 무거운 쪽에게 나머지를 몰아줄 수는 없는 법이었다.

란드와르는 잠시 망설이다가 반론했다.

"저는 그냥… 이렇게 생각합니다. 대장군께서는 평범하게 선했을 뿐입니다. 도망치신 것은 사실이지만 그게 엄청난 흠결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어지간히 강인한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대개는 그런 선택을 했을 테니까요."

"그러면 당신이 생각하기에, 누가 이 과오를 짊어져야 할 것 같소? 이미 돌아가신 어머니가? 내 불쌍한 동생이? 동생을 꼬드긴 요정이?"

요정을 떠올리면 볼로디아는 특히 심경이 복잡해졌다. 울쿠스가 스카르파를 부추겨 참극을 일으킨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 사태는 잘못 꿰인 단추의 마지막 단에 불과했다.

게다가 그는 이제, 모욕을 감내하며 도시를 지키고 있었다.

볼로디아는 요정이 늑대인간의 적수임을 잊지 않았다. 그들은 오만하고 잔인한 종족이었으며 늑대인간을 노예로 여겼다. 하지만 울쿠스는 행적으로 진심을 증명했고, 볼로디아는 그 용기를 폄하하고 싶지 않았다.

들킬 위험과 멸시를 무릅쓰면서 흰둥이들을 지키려는 용기를.

"그래, 나는 요정마저도 이해하오. 그가 스카르파의 편에 선다면 결국엔 피를 봐야겠지만, 나는 그를 명예로운 적으로 기억할 거요. 그런데 내게는? 내게는 뭐가 있지? 흰둥이를 동정하면서도 저항군들을 잡아 죽였고 동생이 절망에 잠겨 있을 때에는 눈을 돌렸소."

볼로디아는 스카르파만큼이나 흰둥이들도 안타깝게 여겼다. 산맥 너머에서, 인간으로 태어났더라면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행동으로 드러난 적은 없다. 그녀는 저항군 지도자들을 잡아들였고 그 딸을 매질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중얼거리면서.

"비겁자에게는 자학이 어울리는 법이라오."

"아닙니다, 그저 이 도시 전체가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겁니다. 제가 보기엔 그렇습니다."

볼로디아는 다시 웃었다. 여전히 소리가 없었다.

"나는 이 도시를 바꿀 수 있는 사람이오."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었다. 그녀가 바꿀 수 있고 바꿔야 하는 일이었다. 볼로디아는 그 사실을 오래도록 외면해 왔으며 지금은 업보를 치르고 있었다.

그 업보의 무게는 일곱 해.

어쩌면 서른일곱 해.

왕의 첫째 딸로 태어나 이 땅을 밟은 기간만큼.

최후의 도달점까지 남은 시간은 세 달하고도 며칠.

"마음을 정하셨습니까."

"정답은 알고 있소. 그렇게 할 거요."

앞으로의 일은 명백했다. 볼로디아는 스카르파의 목숨을 취하고 온전한 신이 된다. 피웅덩이가, 심장이 제 주인을 찾는다면 늑대인간은 요정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이다. 말루카의 천 년이 막을 내린다. 불행으로 이루어진 천 년이.

"다만 시간이,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 뿐이오."

*  *  *

란드와르는 볼로디아와 이야기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왔다. 한 일이라고는 가만히 앉아 있다가 몇 문장을 툭툭 내뱉은 것밖에 없는데도 진이 잔뜩 빠졌다.

이강현은 거창한 대의나 사명을 마음에 품은 사람이 아니었다. 법의 철퇴를 얻어맞지 않을 정도로만 도덕적이었고 딱히 원한을 사지 않을 정도로만 착했다.

물론 주위 사람들한테는 잘해 줬는데 그게 선행의 증거라고는 할 수 없었다. 모두에게 한결같은 개차반이었더라면 애당초 주위 사람이라는 게 없었을 테니까.

그래서인지 볼로디아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자 새삼 존경심이 밀려왔다. 그렇게 살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나는 사람이 제정신을 유지하려면 좀 뻔뻔해야 한다고 본다."

"제 뜻과 나으리의 뜻이 일치하니 기분이 좋습니다."

혼잣말을 툭 뱉자마자 요정 녀석이 말을 얹었다. 과연 뻔뻔하기 이를 데 없는 새끼였다.

"너는 씨발, 도가 지나치잖아."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말하자. 울쿠스 부모 죽인 거 너 맞지."

"제 잘못 아닌데요."

예상했던 대답 앞에서 란드와르는 짧게 고민했다. 뭐가 어쨌든 중요하지 않다는 결론이 나왔다. 방법 없는 문제를 깊이 살피지 않는 것은 좋은 특성이었다.

"그래, 그거는 내가 더 따질 마음이 없다. 어차피 너는 안 죽였다고 할 거고 쟤는 니가 죽였다고 생각할 거야. 둘 중에 누가 맞는지는 몰라. 그러니까 그냥 이 상황을 전제로 둘 거야."

"현명하십니다."

볼로디아는 어느 정도 결심이 선 듯했지만 그것으로 끝은 아니었다. 울쿠스를 움직여야 했다. 내막을 알게 되었는데도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스카르파도 캐러웨이 부인도 포기하기 싫다는 게, 영원히 이 상태로만 살고 싶다는 게 녀석의 입장이었다. 심지어 딤 나겔이 이 사실을 알게 되는 것조차 원치 않는다고 했다.

씨발, 그게 될 일인가.

수능 일주일 남은 고3이 시간이 멈추길 비는 거랑 똑같았다. 어차피 야스와다의 신까지 깨어난 판에, 스카르파가 죽든 안 죽든 간에 난장판은 정해진 미래였다. 울쿠스도 머리가 있는 이상 알 터였다.

그런데도 현실을 부정하면서 드러누운 것이다. 일이 까다로워진 셈이었다. 모르는 놈한테는 알려주면 그만이지만 알면서도 배를 째는 놈은 백약이 무효였다.

"연극 때문에 체류 기간 받은 게 이제 두 달 좀 넘게 남았다. 그 안에 울쿠스가 마음을 안 바꾸면 저항군을 죽일 수밖에 없어."

물론 군부에게 가서 알아낸 사실을 읊어줄 수도 있겠지만 그 경우도 쉽진 않다. 일단 볼로디아는 피웅덩이를 탐내다가 미쳐 버린 반역자로 알려져 있으니까. 대뜸 돌아와서 사정이 이러저러하니 스카르파에게 심장을 먹이고 죽이겠습니다, 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다. 대장군들이 왕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리라는 점은 일단 넘어가자. 스카르파가 군부의 명령에 따라, 순순히 심장을 먹은 다음 능묘에 가만히 누워 있을 확률은 낮다. 미쳤을 뿐이지 일반적인 필멸자와는 한참이나 거리가 머니까.

결국엔 울쿠스가 스카르파를 부추기는 수밖에 없다. 스스로 심장을 먹어치우게끔.

"가서 그대로 이야기하면 되지 않습니까. 흰둥이 저항군 싹 죽이기 전에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요. 스카르파한테 심장을 먹이고 같이 죽든, 마지막 순간에 배신하고 캐러웨이 부인이랑 계속 살든."

"협박 아니냐."

"협박을 안 하면 피를 보셔야 할 텐데요."

"너는 이게 문제야. 말을 존나 쉽게 하잖아. 애꿎은 사람 여럿 죽어나가는 일에 고민이 없다고. 다른 건 몰라도 그건 고민을 해야 하는 거야."

여차하면 죽일 생각으로 인질을 잡는 건 봤어도 사람을 살리려고 그러는 건 처음이었다. 심지어 자신이 그 협박범 역할을 맡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충격요법 외에는 별다른 수가 없었다.

란드와르는 앓는 소리를 삼키고서는 이어 말했다.

"그러면 이걸 내가 가서 이야기해야 된다는 건데."

"나으리께서 왜 하십니까?"

"울쿠스가 너 죽이려 그랬다면서. 니 말이 어디 들어 먹히겠냐."

"두 번째 기회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있어 보이냐?"

정말로 몰라서 물어보는 건지, 아니면 그냥 신경을 긁고 싶은 건지가 의문이었다.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부모님의 원수 취급을 받는 놈이었다.

"어차피 저는 녀석보다 마법 실력이 뛰어납니다. 말을 붙여 본 다음, 여차하면 죽이면 된다는 소리입니다. 그 다음에는 미쳐 날뛰는 스카르파까지 처치하면 그만이지요. 스스로, 나머지 심장까지 먹을 테니까요."

"이 새끼는 누구 죽이고 싶어서 안달난 거 같아."

"제가 어디 틀린 말이라도 했습니까."

"봐라, 울쿠스가 사라지면 스카르파는 지하층으로 내려갈 거야. 거기까지는 맞아. 그런데 그게 정확히 언제일지를 누가 알겠냐. 우리 체류기간 끝난 다음에 그러면 안 된다고. 나는 불확실성이 싫은 거야."

"나으리께서 직접 말을 거는 일에는 불확실성이 없단 말입니까?"

"있지. 충분히 있는데."

울쿠스가 흰둥이 편을 들고 있긴 하지만 결국엔 요정. 헤이딘처럼 고향을 싫어하는 것도 아니다. 아즈리온 교단의 사제를 반길 확률은 낮다. 그 사제가 스카르파를 죽이겠다고 나선다면, 더더욱.

그런데 씨발, 방법이 있나.

"어쩔 수 없잖아."

"그럴 바에는 그냥 제게 맡겨 주십시오. 잘 될 겁니다."

테네브로즈가 확신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자신감의 원천이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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