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피투성이 심장 (1)
"깨끗하게 입긴 글렀군."
테네브로즈는 자신의 어깨를 힐끔 보고는 중얼거렸다.
의상실에 다시 가져다 놓을 물건인데 만나자마자 윗옷이 피에 젖고 말았다. 피만 흘렸을 뿐이지 상처가 깊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이야기 잘 들었어, 젊은 친구. 잠자리가 편안하길 빌지."
그는 정신을 잃은 울쿠스를 침대에 옮겨 뉘인 뒤 이불까지 덮어 주었다. 두꺼운 커튼 사이로 창백한 아침 햇살이 들어오며 세모꼴로 넓어지는 게 보였다.
슬슬 야간 순찰도 끝나고 사람들이 대로변으로 나올 시간이었다. 이제부터는 인간 소년 모습으로, 혼자 돌아다닐 수 있다는 뜻이었다.
웃옷을 갈아입은 테네브로즈는 짧은 편지까지 남긴 뒤 집을 나섰다. 집안을 들쑤시긴 했지만 모두 정리했으니 책잡힐 일은 없을 듯했다.
* * *
"내가 널 감당할 능력이 되는지 모르겠어. 가끔 니가 무서워."
"저는 충성스럽고 말도 잘 듣지 않습니까."
"안 충성스러우면 진짜 죽여 버린다."
테네브로즈의 보고를 모두 들은 란드와르는 복잡 미묘한 감정을 느꼈다. 대화를 하라고 보냈더니 고문을 실컷 하고 온 것이다. 물론 상황이 불가피했다는 건 이해했다. 덕분에 의문이 대부분 해결되기도 했다.
잘 했는데.
잘 하긴 했는데.
그는 이마를 짚은 채, 하늘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천사들과 신들을 눈앞에 그려 보았다. 비록 그네들이 직원 머릿속까지 사찰하는 양아치들이긴 했지만 명목상으로는 정의의 편에 서 있었다.
이게 용사 일행이 할 짓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건 당위보다는 기분의 문제였다. 시간을 되돌리더라도 똑같은 결정을 내렸겠지. 그리고 똑같은 결과를 마주했겠지. 애초에 울쿠스도 착한 놈이 아니고. 하지만, 씨발…….
순간 티아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기어들었다.
<최근 전과가 화려하시긴 하죠. 도둑질과 신분 도용, 말루카 보안법 위반, 고문…….>
란드와르는 예상치 못한 속삭임에 눈을 깜박였다. 그래서 뭐, 인사고과에 불이익이라도 주겠다는 겁니까? 먼저 말 걸어서 하는 소리가 이딴 거예요?
<아뇨, 윗분들도 마음에 들어하시더군요. 말루카 일만 잘 처리하면 인센티브 따로 나올지도 몰라요. 응원차 연락 드렸습니다.>
신들이 그래도 됩니까? 선한 쪽 아니에요?
<일단 우리가 정의의 편이 아니라는 점을 말씀드리죠. 그냥 인간들을 돌볼 뿐이에요.>
그런 분들이 카스바는 왜 싫어하십니까?
<인간들이 그걸 기대하니까요. 이유가 더 필요한가요?>
예상했던 말은 아니지만 명쾌한 대답이긴 했다. 이 땅은 거대한 시장이고, 거주민들은 고객이며, 신들은 업체였다. 고객을 만족시키면서 경쟁 업체를 무릎 꿇리는 것 자체는 딱히 도덕적일 것도 정의로울 것도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편해지는 것 같았다… 생리적 거부감은 은은하게나마 남아 있었지만. 이마에서 손을 뗀 란드와르는 요정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감정을 가라앉히고 생산적인 이야기로 주제를 돌릴 때였다.
"다시 정리해 보자. 피웅덩이는 그냥 쓰레기고 스카르파는 반신 비슷한 게 됐다. 볼로디아도 마찬가지다."
"힘의 사분지 일씩을 나눠 가졌고, 나머지 절반은 심장에 남아 있습니다."
게임에서 정확히 묘사된 부분은 아니었지만 여기까지는 이해가 갔다. 볼로디아를 미치게 만든 건 어쨌거나 옛 신의 잔재였던 것이다. 마요르가 왕이 먼저 타락했고, 그녀를 처치하면서 신위와 함께 광기마저 물려받았다고 치면 설명이 됐다.
"…그리고 울쿠스는 스카르파가 남은 심장까지 먹어치우는 걸 막는 중이다. 하지만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울쿠스는 스카르파의 편에 설 것이다."
"예, 요정 신의 심장을 취하면 그 신위를 물려받게 됩니다. 스카르파가 제정신이 아니긴 하지만, 힘을 지닌 광인만큼이나 무서운 존재는 없지요."
그 부분은 란드와르도 잘 알고 있었다. 애초에 다섯 개의 핵심 시나리오가 모두 거기에 얽혀 있었으니까. 이시 첼의 피투성이 심장. 아 드지즈의 수정 심장. 윰 시밀의 썩어 문드러진 심장. 그리고 기타 등등.
말루카 시나리오의 핵심 보상이 바로 피투성이 심장이었다. 정확히는 거기에 담긴 힘.
"그래서 스카르파를 그냥 처형시키면 안 되고 능묘로 보내야 한다는 거야. 걔가 나머지 심장까지 다 먹어야 돼. 그런 다음에 볼로디아가 스카르파를 죽이면 끝나는 거지."
"예?"
테네브로즈가 훅 되물었다. 진심으로 놀란 듯했다. 란드와르는 심호흡하고서는 본론을 꺼내들었다.
"볼로디아가 늑대 신이 될 거다. 한다 만다의 문제가 아니라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설마 지금 떠올리신 생각이십니까?"
"자세한 사정을 몰랐던 거지, 거기 심장이 있다는 건 원래 알았어. 처음부터 이럴 예정이었고. 왕 자리도 마다한 사람한테 대뜸 신이 되라고 하면 들어먹힐 리가 없으니까 이야기를 자세히는 안 한 거야."
볼로디아는 이시 첼의 잔재에 잠식되어 있다. 아즈리온의 축복이 유지되는 동안에 정신 오염을 해결하지 못하면 완전히 미쳐 버리고 만다. 유일한 방법은 스카르파를 죽이고 심장에 담긴 권능을 온전히 흡수하는 것뿐.
"너도 투기장 관람실에서 느꼈지 않냐. 지금 볼로디아한테 걸려 있는 건 단순한 혈마법 주문이 아니야. 훨씬 근원적인 거지. 그래서 아예, 그걸 볼로디아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소리고."
게임에서, 이 부분은 정수 시스템으로 구현되어 있었다. 요정 신의 심장을 흡수시켜서 동료를 강화하는 것이다. 게임상에 직접 등장하는 심장은, 얻을 수 있는 정수는 총 세 개.
정수를 받아들일 수 있는 동료 캐릭터는 한정적이다. 능력이 없는 놈에게 먹였다가는 동료는 동료대로 잃고 진행까지 심각하게 꼬이고 마니까. 하지만 다행히도 볼로디아는 그걸 견딜 자격이 됐다.
게임에서는 그랬다.
"적을 늘리는 게 아닐까 걱정스러운데요. 심장 때문에 한 번 정신이 나갔던 자가 아닙니까. 나으리께서 축복을 내리긴 했지만 임시방편이고요."
"나도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는데, 볼로디아한테는 심장 먹여도 되더라."
현상과 게임이 충돌하면 현상을 우선하기로 방침을 세우긴 했다. 게임은 시뮬레이터에 불과했고 수많은 사실이 누락되어 있었으니까. 헤이딘의 존재나 타라곤의 신상이 그런 것처럼.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요정 신의 심장까지 대충 구현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거야말로 이 모든 사태의 핵심이 아닌가. 만약 이걸 빠트렸다 치면, 그렇게 무능한 놈들은 그냥 망하는 게 맞았다.
"나으리,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닙니다. 비어 있는 신위가 채워지는 겁니다. 지금의 볼로디아는 분명 선인이지만, 옛 신의 심장에는 증오가 담겨 있습니다. 필멸자로서의 정신은 쉽게 무너진단 말입니다."
…순간 란드와르는 강렬한 불길함을 느꼈다. 이 새끼들이 설마 그 정도로 무능하면? 이 세계는 망한다 치고, 나는 어쩌지? 계약서 안 읽고 도장 찍은 업보인가?
테네브로즈가 전적으로 옳았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는데 괜찮더라, 따위로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천사에게 직접 물어봐야겠다는 판단이 섰다.
"티아 씨, 상의 좀 해 봅시다."
동시에 티아의 환영이 허공에 나타났다. 각진 안경을 쓴, 인텔리한 느낌의 여자.
"오랜만에 뵙는군요."
테네브로즈가 정중히 인사했다. 오랜만이긴 했다. 녀석 앞에서 티아를 부른 건 대평원에서가 마지막이었던 것이다. 늪지대에서 수레를 부숴 먹고 교단표 콜택시를 요청했을 때.
"예, 오랜만이에요. 요정님도 그간 잘해 주셨고요."
"과찬이십니다."
티아는 테네브로즈와 짧은 인사를 마친 후 란드와르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지금껏 생각을 모두 읽고 있었을 터. 구태여 설명할 필요가 없는 점은 확실히 편했다.
"볼로디아가 심장의 힘을 제대로 흡수할 수 있는지가 궁금하신 거죠?"
"맞습니다."
"걱정하시는 부분은 알겠지만, 그런 부분은 철저히 검수했어요. 일차적으로는 스카르파가 나머지 심장을 먹어치우면서 전대의 악의를 흡수합니다."
스카르파가 일종의 거름망 역할을 해 준다는 소리였다. 달리 말하면 액막이겠지.
"그리고 볼로디아는 홀로 싸우는 게 아닙니다. 선조의 영령이, 그러니까 능묘에 모인 전대 왕들의 영혼이 그 늑대인간을 돕죠."
란드와르는 시나리오의 마지막 부분을 떠올렸다. 스카르파가 울쿠스와 함께 능묘로 자리를 옮긴 다음부터는 <선조의 능묘> 던전이 열린다. 거기에 등장하는 우두머리는 둘.
지상층에서 타락한 선조들을 정화한 뒤 지하층으로 내려간다. 거기에서 울쿠스와 스카르파를 동시에 상대해야 한다. 심장의 나머지 부분까지 먹은 스카르파를. 그러면 시나리오가 끝난다.
여기에 볼로디아를 데려가면 보너스가 붙는다. 선조의 영혼이 그녀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이다.
"전투력 증강 말고 다른 기능도 있다는 거죠."
"예, 선조의 혼령이 볼로디아를 지킬 뿐만 아니라 정신까지도 수호할 겁니다. 그게 바로 능묘가 지어진 목적이기도 하고요."
"원래 목적이 그거였다고요?"
"당시 상황을 말씀드려야겠군요."
대전쟁 당시에도 요정 신들의 심장은 골칫거리였다. 심장을 도려내긴 했지만 처분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던 것이다.
아즈리온의 화신은 요정 신의 신위를 얻지 못했다. 그가 이끌고 다니던 용사 중 하나에게 먹여 본 적도 있었으나 유능한 마법사만 잃고 말았다.
"첫째 왕은 피웅덩이 위에 능묘를 세운 다음, 와그다스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영혼을 보존하는 각인을 새겼습니다. 언젠가 자격 있는 후손이 태어났을 때, 그 후손이 이시 첼의 심장을 취할 때, 되살아나서 힘을 보탤 수 있도록요."
"볼로디아가 그 역할을 맡겠군요."
신위를 받아들일 수 있는 기작은 대강이나마 해명이 됐다. 선조의 영혼들이 심장에 담긴 악의를 막아줄 것이다. 볼로디아는 스카르파를 죽이고 늑대인간들의 신이 된다…….
"잠깐만요, 그러면 성능이, 예, 성능이 좀 더 좋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명색이 신인데요?"
대뜸 질문을 던진 란드와르는 옆의 요정을 힐끔 보았다.
녀석의 얼굴에는 흥미가 절반,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 절반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신과 성능이라니, 실로 어울리지 않는 단어 조합이 아닌가.
하지만 더 적절한 말이 없었다. 동료를 정수로 강화시킨다 해서 엄청나게 강해지지는 않았던 것이다. 게임상의 수치로 따지면 50% 가량의 전투력과 체력 향상을 보일 뿐.
씨발, 현실은 게임이 아닌데. 그런데 정량적인 문제를 따질 때에는 게임상의 수치를 인용하게 됐다. 숫자만큼이나 쉽게 세상을 구체화하는 방법은 없으니까.
"이성을 유지하면서 그 힘을 제어하려면, 시간이 걸립니다."
"얼마나요?"
"수십 년, 어쩌면 수백 년이지요. 경우마다 다르니 확답은 어렵겠습니다."
란드와르는 타마기스의 부패자들이 아직도 저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부패의 저주는 천 년간, 언데드 요정들을 늪지대에 가둬 두었던 것이다. 황제가 힘을 제어할 수 있었더라면 진작 저주를 풀었을 터였다.
"오래 걸리긴 하겠군요. 그동안 혈마법이나 괴수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요정 마법의 고위급 주문은 해당 학파의 신을 매개로 작동합니다. 즉, 신이 존재하지 않거나 영토를 스스로 닫을 경우에는 아무 효력이 없다는 뜻입니다."
모든 요정 마법은 신의 영토에서 처리되었고, 이러한 영토는 심장부와 외곽지로 나뉘어 있었다. 신의 영향력이 직접적으로 미치는 곳과 아닌 곳의 차이였다. 달리 말하면, 신이 심장부에의 접근을 불허할 경우, 그곳을 빌려 써야 할 만큼 강력한 주문들은 사용이 불가능했다.
"한편 괴수들은, 저희 쪽에서 관리 체계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차후에 계약서를 작성하게 될 겁니다."
그는 순간적으로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계약서. 삼백 페이지짜리 불공정계약서. 서른네 살의 이강현을 판타지 세계로 집어넣은 그 계약서를 볼로디아도 쓰게 된단 말인가?
이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불신이 밀어닥쳤다. 이런 짓을 해도 되나 싶었다. 정의와 평화의 이름으로, 근엄하고 현명한 늑대인간 대장군을, 불공정계약의 마수에…….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볼로디아는 계약을 마친 후 늑대 신으로서 합당한 예우를 받을 겁니다. 토착 신이니만큼 제약사항은 다소 다르겠지만, 어쨌건 우리네 만신전에 한 자리가 추가되는 것이니까요."
안도는 한순간이었다. 란드와르는, 이강현은, 진심 어린 울분을 격발시켰다.
"나는요? 나는 그냥 계약직이라서 지금처럼 남 머릿속도 들여다보는 겁니까? 그러면서 좆 빠지는 일들은 다 저한테 시키고요? 그쪽 분들은 힘든 건 능력 없다고 내빼고?"
"가능한 한 최선의 지원을 해 드리고 있습니다."
"생각해보니까 씨발, 타라곤 건도 조사하라니까 한 달 걸린다면서. 그거 결국 나랑 볼로디아가 직접 알아내서 이러고 있잖아요. 하늘 위쪽에서 대체 뭐 하고 있는 겁니까? 관람?"
"죄송합니다."
티아의 환영이 잽싸게 사라졌다. 란드와르는 허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인간의 신들이, 천계 놈들이 정의의 편이 아니라는 건 확실해 보였다. 그냥 양심도 없고 뭣도 없는 씨발것들이었다.
일 다 끝내면 받을 게 있으니 넘어가는 거지.
아니었으면 이미 엎었다.
"사제야."
"예, 예?"
란드와르는 화를 삭이고는 테네브로즈를 불렀다. 이놈 앞에서 계약직이니 뭐니, 불필요한 얘기를 너무 많이 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인간은 진취적으로 살아야 했다.
"더 따질 거 없다. 가서 볼로디아한테 이 얘기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