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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53화 (54/258)

53화. 울쿠스

“피웅덩이를 원해.”

“안 됩니다.”

“뭐가 안 된단 말인가? 피웅덩이는 신의 흔적이야. 제국의 것이지. 우리 야스와다의 요정들은 제국의 후예고.”

“하지만, 스카르파는······.”

순간 울쿠스의 얼굴에 결의와 격노가 동시에 일었다. 그는 고개를 홱 돌려 탁자가 붙은 벽면을 바라보았다.

장식용 단검이 창밖으로부터 스미는 빛을 받아 번뜩이고 있었다. 울쿠스는 팔을 뻗어 단검을 붙잡은 뒤, 다른 손으로는 상대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테네브로즈의 목에 칼날이 바짝 붙었다.

“협박을 하겠다 이거군. 내가 혼자일 것 같나?”

“추적자님을 죽인다고 해서 추적대가 저를 버리진 않을 겁니다. 제가 아니라면 스카르파에게 접근할 수 있는 요정은 없단 말입니다. 또 다른 이가 보내지겠지요. 저는 그들과 이야기할 겁니다. 저로서도 할 말이 많습니다. 그리고······.”

울쿠스는 읊듯이 말했지만 부들거리는 손에는 격한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테네브로즈는 흥미롭다는 투로 되물었다.

“그리고?”

오래된 원한이 울쿠스를 압도했다. 그는 심호흡한 뒤 요정의 언어로 분노를 폭발시켰다.

“너, 테네브로즈, 나트람의 개자식아. 네놈이 내게 명령을 내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아무것도 아닌 귀족 도련님에게 지시할 자격은 충분하지. 그대도 알겠지만, 나는 어둠달의 일원이자 3교구 소속 추적자야.”

“내 부모님을 죽인 원수고.”

“언제쯤 오해가 풀릴지 의문이군.”

날이 살갗을 파고들었다. 피가 흐르기 시작했을 뿐이지 깊은 상처는 아니었다. 울쿠스는 곧바로 죽이진 않겠다는 듯 이어 말했다.

“할아버지는 그 정원에서 수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네놈의 낯짝이 얼마나 두꺼운지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 손에 큰삼촌 되는 자의 피를 묻히고서도 가문의 이름을 참칭하다니.”

“스티그미르 말인가? 내가 불민한 조카였던 건 사실이지만, 그런 짓을 한 적은 없어. 저승에 계신 분을 불러오지 못하는 게 아쉬울 따름이군.”

상처가 약간 더 깊어졌다. 울쿠스가 계속 으르렁댔다.

“그래, 네놈이 가문에서 쫓겨난 건 그전부터였지. 어째서인지도 알고 있어.”

“한 번 들어보고 싶은데. 나도 정확한 사연은 잊어버렸거든.”

“누님을 일부러 죽였다더군. 금지된 마법을 실험하려고.”

순간 테네브로즈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이것도 딤 나겔이 말해 주던가?”

“네 주인에게 시달렸을 뿐이지, 할아버지께서는 충분히 현명하셨다. 그 도시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두 알고 계셨지. 네놈이 얼마나 가소로운 거짓말쟁이인지도······.”

테네브로즈는 울쿠스의 팔을 움켜쥐었고, 단언했다.

“아니야.”

···동시에, 손등의 마법진이 동작하며 음산한 빛을 내뿜었다.

***

울쿠스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테네브로즈의 손등에서부터 뻗어나온 마력 줄기가 자신의 팔을 기어오르는 모습이었다.

곧이어 그는 어둠 속에 덩그러니 남겨진 자신을 발견했다. 여유를 되찾은 목소리가 모든 곳에서 윙윙 울렸다.

“그래, 딤 나겔이 충고하지 않았던가? 명문가 사람들에게 함부로 덤비지 말라고? 내가 아무런 방비도 하지 않았으리라 생각했다면 그대는 정말 헛배웠네.”

울쿠스의 마음속에서 때늦은 후회가 종처럼 울리며 점차 커졌다. 추적자 중에서도 명문가 출신은, 즉 야스와다 학파의 마법을 배운 귀족들은 심문관 역할을 겸했던 것이다.

귀족을 상대로 그런 주문을 쓰는 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으나 정신의 감옥에 갇힌 평민들은 곧잘 볼 수 있었다. 멍하니 앉아서 주어진 질문에 순순히 대답하는 것들이었다.

“이제부터 나는 그대에게 몇 가지를 물어보려 해. 직접 고통을 가할 때도 있겠지만, 거짓말에서 오는 통증은 주문 자체의 효과라는 점을 일러두지.”

“추적대에서 하필이면 나트람의 사냥개를 보낸 이유가 있었어. 처음부터 이러려고 했던 거야, 그렇지?”

울쿠스는 덤비듯 외쳤다. 이 꼴까지 난 판에 굽실거릴 마음은 없었다.

“이봐, 젊은 친구. 비록 우리 요정들은 살아온 해를 셈하지 않지만, 내가 성년이 되자마자 혼례를 올렸더라면 그대와 똑같은 나이의 자식이 있을 거야.”

“그러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군. 네놈 밑에서 자란 아이라면 똑같은 미치광이나 되었을 테니.”

“나도 그 점에 있어서는 전적으로 동의해. 가족을 이루지 않았던 게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하지. 하지만 그대는··· 아버지뻘 되는 연장자에게 예우를 다해야지 않겠나.”

숨 막히는 격통이 섬광처럼 울쿠스를 내리쳤다. 그는 컥컥거렸고, 허공을 향해 으르렁대다가, 끝내 고통에 굴복했다. 테네브로즈의 목소리에 흐뭇한 기색이 섞여들었다.

“나는 잔인해지는 걸 즐기지 않아. 사실대로만 말한다면 서로 즐거운 시간이 되겠지.”

“질문이나 하십시오. 뭐가 알고 싶습니까? 제가 야스와다에 돌아가지 않은 이유? 대장군들을 건드리지 못하는 이유? 능묘에 들어가는 방법?”

“원래는 흰둥이 저항군에게 혈마법을 가르치는 이유부터 물으려 했지만, 모두 흥미롭군. 천천히 이야기하라고. 시간은 많으니까.”

울쿠스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지금부터 할 이야기가 이 정신 나간 요정을 만족시킬 수 있을지 긴가민가했다. 일단 추적자들이 좋아하지 않으리라는 건 확실했다.

“결론부터 말하겠습니다. 이제 피웅덩이에는 아무 쓸모가 없어요. 심장에만 힘이 남아 있는데 그건 스카르파의 몫이 되었습니다. 육 년 전부터 그랬단 말입니다.”

“아니, 피웅덩이에 쓸모가 없어? 그러면 그대는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가?”

“정신 나간 신을 달래는 중이지요. 제가, 타라곤이 없어진다면 이 도시는 산산조각날 겁니다. 그 이후는 감히 상상하고 싶지 않습니다.”

한 문장을 더할 때마다 뼈저린 무력감이 몰려왔다. 그가 딤 나겔에게서 들은 이야기 중에는 요정 신들에 대한 것도 있었다. 신의 심장을 취한 자는 그 신위를 잇는다고 했다.

스카르파는 이시 첼의 자리를 물려받았다. 온전히는 아니더라도 상당한 부분을. 그 과정에서 피웅덩이의 마력은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고통을 느끼지 않는 걸 보면 진실이군. 최소한 그대는 이게 진실이라 믿고 있어. 아, 흥미로운데. 아무것도 아닌 늑대인간이 그 힘을 받아들였다고. 정말인가?”

“정확히 말하면··· 스카르파가 완전한 신이 된 건 아닙니다. 첫째 왕녀가 다른 일부분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껏 수십 개의 관계도를 그린 뒤 폐기했다. 신의 힘이 어떤 식으로 이어지는지 알아내야 했다. 오랜 고민과 탐색 끝에 그는 지금의 결론에 이르렀다.

일단 스카르파와 마요르가가 심장의 일부를 취하면서 신위가 두 개로 나뉘었다. 그리고 마요르가를 죽인 볼로디아가 다시 반신격을 얻었다. 그 과정에서 셋 다 미쳤다. 설상가상으로 심장 자체도 절반이 남아 있었다.

설명을 마친 울쿠스는 깊은 절망감 속에서 대답을 기다렸다. 홀가분한 느낌도 약간은 있었다. 어쨌거나 이 요정들은 원하는 바를 얻지 못하고 돌아갈 예정이었다. 피웅덩이도, 노예 늑대인간도 없는 것이다.

물론 저 멀리에서는 야스와다의 신이 깨어났다지만 자신이 어찌할 일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그대 설명대로면 이렇게 된다는 거지. 마요르가 왕의 두 딸이 이시 첼의 권능을 사분지 일씩 물려받았고, 나머지는 원래 심장에 보존되어 있다고?”

기나긴 정적 끝에 테네브로즈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맞습니다.”

“볼로디아는 어떻게 된 건가? 실종된 것으로 아는데.”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만 제정신이 아니라는 점만큼은 확실합니다. 피투성이로 능묘를 떠나, 산맥을 향해 끝없이 걸어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쩌렁쩌렁한 웃음소리가 어둠을 가득 채웠다. 실망도, 공포도 느껴지지 않는 음색이었다. 울쿠스는 예상을 벗어난 태도에 약간 안도했다.

“혹시 흰둥이 저항군들도 관련이 있어? 그대가 가르치고 있는 무리 말이야.”

“스카르파의 소망은 이 도시가 무너지고 타라곤을 제외한 모든 늑대인간이 죽음을 맞는 겁니다. 제 얼굴을 볼 때마다 그 이야기를 꺼낸단 말입니다. 덕분에 저까지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울쿠스는 저항군을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감옥에 갇힌 지도자를 빼낸 다음 도움을 주겠다며 접근하는 것이다. 자신은 추방된 흰둥이의 후손이라고. 잊힌 마법을 알려주겠다고. 석연찮다면 거절해도 괜찮다고.

신뢰를 쌓자 그 다음부터는 쉬웠다. 저항군에게는 의심을 사지 않을 정도로만 혈마법을 가르쳤다. 괴수의 영혼을 강화하는 종류로.

그들이 행동에 나서면서 군부 보고서가 만들어졌다. 기이할 정도로 힘이 강한 흰둥이들이 있다고. 스카르파는 그걸 전해들은 뒤 도시가 조금은 변해가고 있다며 만족했다.

지난 몇 년간은 그런 나날의 반복이었다. 앞으로도 그럴 터였다.

“그러니까 저는 그저··· 서로에게 희망을 심어주고 있는 겁니다. 저항군과 스카르파 모두에게요.”

“치졸하고 얄팍한 거짓말일 뿐이지.”

테네브로즈가 촌평했다. 울쿠스는 반발하는 대신 솔직히 인정했다. 그로서도 수없이 떠올린 생각이었다.

“예, 헛된 희망이지요. 저는 그 사람들을 이용할 뿐인지도 모릅니다. 이용하는 게 맞습니다. 하지만 도시를 지키려면 어쩔 수 없단 말입니다.”

“엄청난 헌신이군. 군부 대원들은 알아주지도 않는데 말이야. 그게 즐겁나? 행복해?”

“쓰레기 같은 순혈 놈들은 저를 볼 때마다 이죽거립니다. 온갖 소리를 다 듣고 있습니다. 그놈들의 면상을 보면 내가 과연 이 개자식들을 지킬 가치가 있나 생각하게 됩니다.”

원한으로 타오르던 울쿠스의 목소리가 갑자기 잦아들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좋은 분입니다. 극단 사람들도, 저항군의 흰둥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그 누구도 잃고 싶지 않습니다.”

“그대는 늑대인간의 삶에 너무 익숙해졌군.”

그는 문득 자신이 대화하고 있는 상대가 테네브로즈라는 사실을 상기했다. 추적자에게, 그것도 나트람의 사냥개에게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는 게 좋은 선택일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정신의 감옥에 갇혀 있었고 거짓을 고한다면 상대도 즉시 알게 될 것이었다. 목숨은 이미 내놓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여기까지 이야기했다면 쉽게 죽이지도 못할 거란 계산이 있었다.

“자, 그러면 다른 질문을 해 보지. 요정이 아닌 존재가 스카르파의 목숨을 취한다면 어떻겠나? 그러면 그대는 지금처럼 살아갈 수 있어. 저항군 신분일랑 버리고 캐러웨이 부인의 아들로 남는 거지.”

그러나 테네브로즈의 반응은 또다시 울쿠스의 예상을 벗어났다. 야스와다의 추적자가 하기에는 이상한 질문이었다. 그는 저의를 가늠하려다가 포기하고, 떠오르는 대로 말했다.

“불가능한 일입니다. 누구든 간에 미쳐 버릴 겁니다. 저는 두 명이 미쳐가는 모습을 제 눈으로 봤습니다. 게다가 신위가 요정에게 넘어간다면 이 도시가, 늑대인간들이 무사할 수도 없습니다.”

테네브로즈가 짧게 웃었다.

“젊은 친구, 나는 요정이 아닌 존재라고 말했어. 그저 상상을 해 보라는 거야. 이 도시와는 전혀 연이 없는 누군가가, 예컨대 아즈리온의 화신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스카르파를 죽이면 어떻겠냐는 거지.”

울쿠스는 그런 미래를 상상했다. 선하고 초월적인 존재가 스카르파를 죽이고 말루카에 평화를 안겨주는 미래를. 야스와다의 신도, 볼로디아도 일단 잊도록 하자. 스카르파에 대해서만, 그 이후의 일들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더한 고통이 심장을 덮쳐들었다. 그는 자신이 정신의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여기가 현실이었더라면 눈물을 쏟아냈을지도 몰랐다.

“안 됩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어째서인가?”

“저는 스카르파가 행복하길 바랍니다. 그 불쌍한 왕은 제 앞에서만 표정을 보인답니다. 연인의 신기루 앞에서만요··· 죽음은 비정한 안식처일 뿐입니다.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가까스로 문장을 마무리했다. 심장이 수천 번쯤 뛸 정도의 시간이 소리 없이 흘렀다.

“그대는 스카르파를 사랑하는군.”

이윽고 테네브로즈가 단정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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