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울쿠스
“마력 결정? 있긴 하지. 파르타한테서 세 달쯤 쓸 정도는 받아 왔다.”
다른 도시라면 몰라도, 말루카에서는 마력 결정을 항상 가지고 다녀야 했다.
탈로나는 인간 도시 연합의 공용 화폐. 기본적으로는 그 가치가 로야페타 서부 거래소의 마력 결정 시세와, 그리고 황금 시세와 연동되었다. 금과 마력 결정에 대해 복본위제를 채택하고 있는 셈이었다.
반면 말루카는 독자적인 통화 체계를 갖추는 대신 마력 결정을 화폐로 이용했다. 영토 내에 고순도 마력 지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계획경제 체제 역시 이 결정에 한몫을 했다.
그러니까, 늑대인간들은 마력 결정을 모으지 못하더라도 배급을 받아먹으면서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이방인이 끼니를 때우고 열차를 타려면 마력 결정이 필수적이었다.
“막대 하나만 주십시오. 좀 쓰겠습니다.”
“각인도 할 줄 아냐?”
란드와르는 배낭에서 나무곽을 꺼내 건넸다. 테네브로즈는 뚜껑을 열어 기다란 막대를 쥐고는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각인도 결국엔 마법진의 일종이랍니다. 괜찮은 제물까지 하나 구해두었고요.”
마력 결정을 손등에 누르자 끄트머리가 부드러운 크레용처럼 부스러지며 자국을 남겼다. 획은 결정과 똑같은 금색이었다가 일시에 색이 변했다.
번쩍이는 보랏빛 마력은 란드와르에게도 익숙했다. 야스와다의 주문이었다··· 야스와다 학파의 마법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다룬다. 단순한 고통에서부터 복잡한 감정까지를. 그리고 영혼 그 자체를.
“물리적인 힘으로만 따지면 바단의 혈마법이 더 강력할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야스와다의 명문가는 마법이 아니라 마법사를, 마법사들을 다스립니다. 그게 바로 우리가 도시를 지배한 방법입니다.”
테네브로즈의 입가에 흐뭇한 웃음이 떠올랐다. 란드와르는 녀석이 그렇게 웃으면 무언가 나빠질 징조임을 절감했다. 적이 안 좋든, 아군이 안 좋든 간에 누군가는 험한 꼴을 봤다. 이번에는 울쿠스가 좆될 예정이었다.
서른네 살의 이강현은 잠시 갈등했다. 비록 울쿠스가 마요르가 왕도 죽이고, 볼로디아 인생도 망치고, 피웅덩이까지 탐낸 개새끼지만, 지금은 흰둥이 인권투사가 됐는데, 이래도 괜찮은 걸까? 울쿠스를 저놈 손에 맡기는 건 반인권적인 행위가 아닐까?
전쟁에서도 제네바 협약이란 걸 지킨다지 않나, 적군이라도 인도적인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아니다. 울쿠스가 불쌍하긴 했지만 개새끼는 개새끼였다. 둘을 상계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심지어 피해자까지 같은 방에 있었다.
그는 악당에게 괜한 동정심을 품는 대신 다른 방향으로 생각을 뻗어나갔다. 테네브로즈가 같은 편이라서 정말 다행이라고.
여기에는 논박의 여지가 없었다.
***
아즈리온은 무예와 살육을 주관하며 자신의 사도에게 도둑질을 시키는 신이었다.
란드와르는 테네브로즈에게서 건네받은 옷가지를 적당한 곳에 감춰둔 다음 건물 뒤편으로 나와서 담배를 뻑뻑 피우기 시작했다. 의상실을 터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라고 생각했으나 막상 해 보니 내상이 있었다. 심란했다.
분명히 카스바에서까지는 모든 게 좋았던 것 같은데, 지금도 사실 나쁘다고는 할 수 없는데, 그런데 뭔가가 많이 바뀐 것 같았다. 세상을 구하러 온 용사가 좀도둑질이나 하고 있다니. 참으로 멋이 없고 좀스럽다.
그렇다고 해서 멋지게 칼 맞고 싶으냐면, 그건 또 아니고······.
“사제 청년,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어?”
위에서 내려오는 걸걸한 목소리에 란드와르는 고개를 들었다. 다부진 체격의 늑대인간 여자가 창밖으로 상체를 내밀고 있었다. 작업반 반장이었다.
“인생 고민 좀 하고 있었습니다.”
“젊은이가 무슨 고민이 그렇게 많아서. 저녁에 우리 쪽 사람들이랑 술 한 잔 하실려우?”
“인간도 갈 수 있는 술집이 근처에 있습니까?”
“어디든. 우리가 쓰는 게 얼마인데 그걸 막아.”
반장이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고민은 짧고 결정은 빨랐다. 강현은 술자리의 분위기를, 사람들과 웃고 떠드는 것을 좋아했다. 취하지 않더라도 마찬가지였다.
“데려가 주시면 감사하죠. 기대하겠습니다.”
“술버릇은 괜찮지?”
“안 취해서 문제입니다.”
***
극단 휴일이었다. 테네브로즈는 새벽부터 눈을 떴다. 여관 로비에는 접수처에 앉은 직원 하나를 제외하면 아무도 없었다. 입구로 향하려는 찰나 졸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딜 가니?”
몸을 돌려 직원을 보았다. 딱히 의심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며칠간 지내면서 얼굴을 익혀둔 덕이었다.
“극단 사무실에 두고 온 게 있어서요. 중요한 건데.”
“아직 추운데 해 뜨고 가질 않고.”
“잃어버리면 사제님들한테 혼나요. 그래서 몰래 가는 거예요. 좀 늦어도 아무한테도 말하시면 안 돼요.”
“알았다, 이 녀석아.”
직원을 함구시킨 다음 여관을 나섰고, 건물 뒤편에서 재빨리 옷을 갈아입었다. 얼굴도 흰둥이 여자아이로 바꿨다. 인간 모습으로 군부 순찰을 맞닥뜨리면 곤란하니까.
세이버리와 붙어 있었던 시간은 짧았지만 정보는 충분히 얻어냈다. 나이는 열두 살. 서류상의 주소지는 중부 외곽지 보리 평야 12―3. 부모님은 없고 위로는 언니가 하나 있다. 포도밭 골목에 사는 친척네에 맡겨졌다가 다시 중부로 내려왔다고 치자.
“자, 보자··· 보리 평야 12번로 세 번째 집 세이버리. 새벽 열차 타고 도착했다 이거지? 내려서 여기까지 걸어왔고? 차표 한 번 볼 수 있을까?”
14번가 인근에서 야간 순찰을 도는 것은 며칠 전에 마주친 군부 대원 둘이었다. 타라곤과 함께 만났을 때에 비해서는 태도가 서글서글했다. 테네브로즈는 투덜대며 대꾸했다.
“잃어버렸다니까요. 마력 결정이랑 차표랑 싹 잃어버렸어요. 그게 있으면 제가 왜 걸어요, 친척 집까지 수레 타고 갔지. 이 날씨에 추워 죽겠는데.”
“에구.”
여자의 얼굴에 동정이 일었다.
“순찰서에서 쉬다 갈래? 친척 집 주소 알려주면 와서 데려가라고 소식 전해 줄게.”
“됐어요. 제가 뭐, 길 잃은 어린애도 아니구······.”
테네브로즈는 그렇게 말하고는 몸을 홱 돌려 걷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대원들이 뒤따라오지는 않았다. 흰둥이 꼬마들은 원래 버릇이 없다는 소리만 들렸을 뿐이다.
꼬마라니. 그는 자신의 나이가 정확히 얼마쯤일지 가늠해 보았다. 여든? 아흔? 백?
그 언저리일 듯한데 정확한 숫자가 긴가민가했다.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그는 열네 살짜리 인간 소년도 열두 살짜리 흰둥이 소녀도 될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심지어 곱사등이 노인이나 서커스단의 광대마저도.
요정족 추적자는 인간 언어를 기본적으로 익혔으나 테네브로즈는 그들보다 훨씬 뛰어났다. 그는 수많은 억양과 토착 방언을 수준급으로 구사했고 목소리의 높낮이까지 조절할 수 있었다. 덕분에 인간 도시에 잠입하는 임무를 몇 번 맡기도 했다.
따라서 테네브로즈는 자신이 똑똑하고 유능하다고 믿었다. 심지어 사회성도 충분한 것 같았다. 나트람과 란드와르가 그걸 인정하지 않는 이유가 의문이었다. 둘 다 사회성 이야기만 꺼내면 죽일 듯 짜증을 냈던 것이다.
물론 친구가 없었던 건 사실이지만 테네브로즈는 그게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사회가 잘못된 탓이었다. 그것은 공리(公理)였고 공리에는 증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당연한 사실들을 되짚어가다 보니 타라곤의 집이 코앞이었다. 테네브로즈는 얼굴을 늙은 남자로 바꾸고서는 초인종을 눌렀다. 세이버리의 신분을 울쿠스 앞에서 쓸 수는 없으니까.
세 번을 더 누르고서야 문이 열렸다. 졸린 표정의 타라곤이 어둠을 등지고 서 있었다.
“예, 누구세요? 새벽부터 어쩐 일로······.”
“이놈은 사고를 당해서 기억이 오락가락한다더니 내가 누군지도 못 알아보는구나. 일단 들어가마. 네 어머니가 폭삭 늙은 것도 이해가 가.”
테네브로즈는 막아설 틈도 주지 않고 집 안으로 들어섰고, 탁자에 자리 잡았다. 모르는 사람이라며 내쫓을 수는 없으리라는 계산에서였다. 역시나 타라곤은 잠깐 망설이더니 문을 닫았다.
“죄송합니다, 어르신. 어머니께서도 말씀하셨겠지만, 제가 기억이 온전치 못해서요.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말해주면 기억은 하고? 보자, 얼굴은 멀쩡한데······.”
짐짓 투덜댄 테네브로즈는 맞은편에 앉은 타라곤을 향해 훅 손을 뻗었다.
훈련된 마법사나 인간 교단의 사제들조차 마력의 흐름을 보고 환술을 간파하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의심만 품는다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라도 환술을 깰 수 있다.
물론 단순한 의심으로는 부족하다. 근거가 있어야 한다. 눈을 깜박였더니 멀쩡하던 사람의 얼굴에 갑자기 피멍이 생겼다거나, 없는 게 만져진다거나, 있는 게 만져지지 않는다거나 하는.
환술이 깨지는 기점은 근거를 갖춘 의심이 당사자에게로 옮겨오는 순간이다. 달리 말하면, 충분한 자기 확신만 있다면 환술을 유지하는 게 가능했다. 얼마나 뻔뻔하게 우기느냐가 관건인 셈이었다.
하지만 젊은 요정들은 마음을 다스리는 일에 능숙하지 못했다.
무방비 상태에서 귀가 만져질 때에는, 특히.
뺨에 손바닥을 붙이고 머리칼 속으로 손가락을 옮기자 손끝에 귀가 닿았다. 각진 살덩어리 가장자리로 우둘투둘한 흉터가 느껴졌다. 기대했던 것은 아니지만 의심을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이윽고 타라곤의 형체가 흔들리더니 창백한 금발의 청년으로 변했다. 체념한 듯 고개를 숙인, 요정족 남자.
테네브로즈의 입가에 음산한 미소가 어렸다.
“반으로 잘랐군.”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귀 때문에 들킬 뻔한 적이 너무 많았단 말입니다.”
울쿠스는 토할 것만 같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입국 검문은 귀를 머리카락 안쪽으로 접은 다음 가짜 귀를 붙이는 식으로 대응할 수 있었지만, 일상을 살아가는 건 다른 이야기였다.
“고향에서 오셨겠군요. 본모습을 보여 주십시오.”
“기꺼이.”
테네브로즈가 요정 모습을 되찾자 청년의 얼굴이 보다 창백해졌다. 그는 내키지 않는 목소리로 인사했다.
“피송곳니의 울쿠스가··· 3교구의 추적자를 뵙습니다.”
“안색이 좋지 않군. 날이 이른 탓인가? 아니면 달갑잖은 손님이 와서 그래?”
“아닙니다. 언젠가는 추적대가 저를 발견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대가 어디에 있는지는 예전부터 알고 있었어. 스스로 잘 하기에 내버려두었던 것이지. 이번에는 좋은 소식을 전하러 온 거야.”
“고향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혹시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건 아니겠지요.”
그 목소리에는 적대감과 공포가 뒤섞여 있었다. 적어도 반가운 기색은 아니었다.
“딤 나겔 말인가? 우울한 심성이야 어쩔 수 없지만 몸만큼은 정정하지. 이대로라면 몇 십 년은 더 살 거야. 우리 늙은이가 싫어하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취미가 있긴 하지만 죽이진 않거든··· 그 주위 사람들이 죽어나갈 뿐이지.”
“그건 사실인 것 같군요. 하필 제게 추적자님을 보냈으니 말입니다.”
머릿속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나트람의 사냥개가 자신을 물어 죽이는 미래를 상상하고 있는 것이다··· 테네브로즈는 태연한 어조로 대꾸했다.
“그대의 목숨을 거두러 온 건 아니야. 야스와다의 주인께서 깨어나셨는데 어찌 동족의 피를 손에 묻히겠나.”
“깨어났다고요? 이시 타브께서요?”
이시 타브는 심장을 잃지는 않았지만 치명상을 입고 잠들어 있었다. 바단의 귀족들과 달리, 야스와다의 명문가가 고위계 주문을 마음껏 시전할 수 있는 이유였다. 요정 마법의 주문들은 신의 영토를 빌려 써야 했기 때문이다.
테네브로즈는 씩 웃으며 답했다.
“물론. 게다가 피웅덩이까지 우리 손에 들어올 예정이지. 제국의 영광에 한 발짝 가까워지는 거야.”
태도가 돌변한 것은 그 순간이었다. 그는 추궁하듯이 읊기 시작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의심을 품고 있거든. 그대가 이 노예들을 너무 사랑하게 된 게 아닌가, 하고. 그렇지 않나? 원할 때마다 왕실을 찾는데다가 능묘에 들어가는 법까지 아는데도, 그대는 건방진 노예들에게 족쇄를 채우기는커녕 온갖 모욕을 감내하고 있단 말이야.”
왕실이나 능묘에 대한 이야기는 아직 추측에 불과했지만, 정보적 우위에 있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서는 과감해질 필요가 있었다. 그게 효과를 발휘한 듯 울쿠스는 오래도록 침묵했다.
“명령이 내려오기 전까지 자중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제가 사사로운 원한으로 행동한다면, 그래서 이 땅에 이변이 생긴다면 인간들도 눈치를 챌 겁니다. 추적대가 저를 찾아내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니, 방법은 많아. 대장군들을 피의 힘으로 복속시킨 다음 뒤에서 조종하면 그만이지. 설마 이 생각을 떠올리지 못했나? 마요르가 왕을 죽이고 첫째 왕녀까지 내쫓은 계략가가?”
울쿠스는 무언가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테네브로즈는 기세를 이어 몰아붙였다.
“치졸한 변명은 그만두라고. 그대가 정말로 야스와다를 생각했더라면 언제든 한 번은 고향으로 돌아왔겠지. 노친네에게도 소식을 전하고. 불쌍한 딤 나겔은 아직도 정원에서 손자를 기다리고 있거든!”
고통이 울쿠스의 얼굴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는 쥐어짜내듯 한 문장을 떨어트렸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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