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울쿠스
테네브로즈가 물어온 이야기들은 예상범위 안이었지만 놀라운 데가 있었다.
울쿠스가 늑대인간 어머니에게 그렇게나 진심이라는 것. 군부 대원들이 녀석을 대놓고 멸시한다는 것. 그리고 집 앞의 석상이 어딘가로 이어지는 통로일 확률이 크다는 것.
“그건 마술사 왕, 에스테르가 세운 석상이오. 일반적인 순혈과 같진 않았지만, 마법적인 면에서는 따라올 자가 없었다고 했소. 각인 기술까지 포함해서··· 그 말대로라면 가능성이 높을 거요.”
볼로디아가 보증을 서 주었다.
“통로는 나중에 직접 물어보면 될 테고, 잘 했다.”
포도밭 골목에서부터, 테네브로즈는 잘 하고 있었다.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요정일 때와 인간 시종일 때의 인격이 따로 있는 건 아닐까 의심스러웠다. 자신 앞에서는 정신이 반쯤 나가는 놈이, 시야에 없을 때에는 일을 척척 해내는 게 기묘하게만 느껴졌다.
설마 일부러 그러는 건가?
만약 그게 진짜라 쳐도 어쩔 방법이 없었다. 태도가 좋지 못하다는 이유만으로 갈구기에는 맡은 일이 과중한 녀석이었다. 그는 의심이 더 커져서 정상적인 사고를 방해하기 전에 재빨리 본론으로 건너뛰었다.
“어쨌든 요정 모습으로도 만나야 돼. 저번에 말했지, 네가 추적자인 척 접근을 해 보라고. 극단 휴일이 보름마다 있으니까 그때를 노리자. 사흘 남았다.”
“예, 위장에 쓸 옷은 나으리께서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하셨지요. 지금쯤이면 마련이 됐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란드와르는 녀석을 빤히 바라보다가 한 마디를 툭 던졌다.
“없어.”
“예?”
“없어. 직접 구해 와야 돼.”
갑자기 볼로디아의 방에서 요정 놈을 기다린 게 후회가 됐다. 전직 대장군 앞에서 이런 이야기를 꺼내고 싶진 않았다. 사실은 전직 부제사장 앞에서도 사양하고 싶었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함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쩌겠나, 이러나저러나 방법은 하나뿐인데.
“너 의상실 자주 가잖아. 저번에 잠깐 봤는데 구석자리에 먼지 쌓인 게 좀 많더라고. 적당히 크기 맞고 평범한 거 있으면 훔쳐 와. 심부름이 일인데 그거 꺼낸다고 뭐라 할 사람이 있겠냐. 누가 시켰나보다 하겠지.”
란드와르는 의상실 도둑질이 수단의 치졸함과는 별개로 훌륭한 방법이라고 확신했다.
이방인이라면 눈에 불을 켜는 도시였다. 동선마저 파악되고 있는 판에 인간이 뭘 샀다고 치면 소문이 금방 돌 터. 거기에서 흔적이 잡히면 곤란했다.
“아, 그러니까, 도둑질을 하자는 겁니까? 나으리는 무예의 신이시구요?”
그러나 테네브로즈는 이 결정이 못마땅한 투였다. 아니면 그냥 심심해서 들이받고 싶은 걸지도 모르고. 평소의 태도를 떠올리면 후자라 해도 놀랍진 않았다.
“누가 뭐 하는 신이든 신경 쓰지 마. 내가 넘겨받아서 적당히 숨길 테니까 꺼내오기만 하라고. 어차피 안 쓰는 건데 들키기 전에 가져다 놓으면 아무 일도 없었던 거 아니겠냐.”
“예, 나으리는 무예의 신이시고, 도둑질을 시킨 다음 물건 빼돌리는 걸 도우십니다.”
란드와르는 대놓고 항명하는 요정을 내버려둔 채 볼로디아를 보았다. 딱히 분류하고 싶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즉각적인 수습의 필요성이 느껴졌다. 그는 다시 요정에게로 시선을 가져다 붙인 뒤 진지한 어조로 읊기 시작했다.
“도둑질하기 싫으면 그냥 현직 대장군 불러서 흰둥이 저항군 다 죽이라고 하면 돼. 그러면 끝나. 알아, 몰라.”
“압니다.”
“그러면 내가 사람을 죽여야겠어, 살려야겠어.”
“살리고 싶으시겠지요.”
“그러니까 적당히 니 키에 맞는 거로 가져와라. 능묘 일까지 처리한 다음에는 제자리에 돌려놓을 거니까 깨끗하게 입고.”
그는 테네브로즈를 바라보며 눈으로 칼을 갈았다. 진심 어린 눈길 덕분인지 기대했던 결과가 나왔다. 녀석은 란드와르가 한 말을 천천히 되풀이하고는 대답을 그 뒤에 붙였다.
“키에 맞고 눈에 띄지 않는 것으로 고른 다음, 돌려줘야 하니까 깨끗하게 입어라―예, 알겠습니다.”
그러나 지시와는 별개로,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을지는 다소 의문이었다. 명령을 내리는 입장에서 생각하더라도 그랬다.
장학 재단을 운영하고 덕업을 많이 쌓았고 아들을 잃은 것과는 별개로 부인은 요정과 내통한 배신자였다. 진상이 밝혀진다면 부인은 물론이고 극단 역시 무사할 수 없을 것이다. 볼로디아가 자비를 베푸는 게 아니라면.
완고한 전직 대장군이 그럴 수 있는 사람인지는 판단이 서지 않았다. 물론 흰둥이들에게 동정을 느끼는 것처럼 보이긴 했지만, 그녀는 동정심과 당위를 구분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불쌍한 것은 불쌍한 것이고 배반은 배반이었다.
···결국 지금으로서는 해결이 나지 않을 일이었다. 그는 다음 문제로 주의를 옮겼다.
“그리고 이게 또 관건인데, 울쿠스가 추적대에 적대적으로 나올 확률이 있거든. 비협조적이거나. 행동만 봐도 그렇지 않냐.”
울쿠스는 피웅덩이에 대한 욕망과 늑대인간으로서의 삶 사이에서 갈등하는 것처럼 보였다. 정확히는 흰둥이로서의 삶.
란드와르는 그게 핵심일 거라고 생각했다. 울쿠스가 능묘를 점거하는 기점은 군부가, 그러니까 순혈 집단이 흰둥이 저항군을 도륙한 이후였던 것이다.
“네 말대로면, 걔가 폭발하는 이유는 피웅덩이가 탐나서가 아니라 순혈 때문이야. 울쿠스를 움직이는 건 요정이라는 정체성이 아니라 흰둥이 쪽이라고. 가뜩이나 불만 많은데 까만 애들이 하얀 애들 죽이니까 터진 거라고 본다.”
울쿠스는 지금도 군부 대원들에게 온갖 멸시를 받고 있었다. 란드와르는 그 참을성에 대해서만큼은 존경을 느꼈다.
길거리만 걸어도 시비 거는 새끼들이 나오면, 심지어 죄다 좆도 아닌 것들이면, 와, 씨발, 그걸 어떻게 참지. 자신이 울쿠스였더라면 어머니고 뭐고 간에 진작 피웅덩이를 썼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카르파가 막아서 능묘에 접근하지 못한 게 아니라, 들어갈 능력이 되는데도 참고 있었다는 말씀이시지요.”
“아무래도 그런 거 같아. 이게 또, 시간을 따져 보면 둘이 만나고서는 거의 바로 일이 터졌지 않냐. 스카르파가 마법의 천재고 옆에 피웅덩이가 있어도 마법 배운 지 얼마 안 된 애가 왕족을 그렇게 만드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거든.”
“늦봄에 울쿠스를 만났고, 그해 초겨울에 왕이 죽었다고 하셨지요. 반년입니다. 반년.”
테네브로즈는 기억을 되짚어가듯 그 낱말을 반복했다. 이윽고 확신에 찬 목소리가 돌아왔다.
“예, 불가능합니다. 피웅덩이에 담긴 힘이 강력하긴 하지만 그만큼 제어하기도 어렵습니다. 반년이라면 요정조차도 마력 운용에 겨우 익숙해질 시기입니다. 늑대인간이나 인간이라면 진도가 더 늦고요. 혹여 기초를 미리 배워 두었다면 모르겠으나······.”
“마법에도 전혀 소질이 없었소.”
볼로디아가 단정 지었다. 다시 란드와르가 말을 받았다.
“그렇다면 대장군님께서 선왕과 전투를 치를 때 요정도 그 자리에 있었다는 말이 되는군요. 능묘 내부로 이어지는 비밀통로가 따로 있습니까?”
“내가 아는 것만도 여럿 있소. 아마 능묘에 들어갔다면 별채의 차원문을 썼을 거요. 능묘 내부에도 통로가 따로, 여럿 있고.”
오두막에서 별채로, 별채에서 다시 능묘 내부로 차원문을 탔다고 치면 궁정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고 능묘에 잠입할 수 있었다. 시종으로 위장해서, 짧은 시간 동안 별채 복도를 돌아다니는 것쯤이야 어려운 일이 아닐 테니까.
“그때 이미 피웅덩이에 접근했겠지요. 유리병에 피를 담아왔을 테고요. 그런데도 울쿠스는 평범한 흰둥이로만 살고 있는 겁니다.”
지금까지는 스카르파가 울쿠스를 막아 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반대로 심증이 계속 기울어갔다. 도시의 파멸을, 피웅덩이의 힘을 원하는 건 울쿠스가 아니라 스카르파였을 거란 쪽으로.
“하지만··· 그렇게까지 평범할 이유가 있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일단은 내가 울쿠스나 스카르파에게 전혀 동조하지 않는단 점을 일러두겠소. 하지만 내가 그들이었더라면, 나와 어머니를 쫓아내자마자 군부의 핵심 인물을 조종하기 시작했을 거요. 흰둥이에게 혈마법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볼로디아의 반박은 유효했다. 울쿠스 입장에서는, 일을 크게 벌이지 않더라도 피웅덩이를 쓸 방법은 충분히 많았던 것이다. 대장군들과 부군만 지배하면 도시 전체가 넘어왔으니까.
반면 게임 내의 대장군은 모두 명징한 정신을 유지했다. 혈마법의 영향을 받지 않는단 뜻이었다.
“사실은 저도 그게 의문입니다. 유의미한 세력이라면 몰라도 저항군은 성공할 가망이 없는 오합지졸이죠. 그런데도 기대를 걸었던 걸까요?”
“그 점은··· 짚이는 구석이 전혀 없소. 동생에게 몽상가적인 기질이 있긴 하지만 그럴 만큼은 아니오. 오히려 무의미한 노력을 하는 게 자신 같다고 말하던 게 기억나오.”
멀리에서 보면 단순했지만 면면을 뜯어볼수록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이 늘어났다. 흰둥이 저항군이 그 모순의 핵심을 맡고 있었다.
스카르파도, 울쿠스도, 저항군을 지원할 이유가 없었다. 그들이 몰살당한다 해서 극단적 선택을 할 이유마저도. 하지만 실제로 그 일이 벌어졌다······.
지금으로서는 이런 고민에 별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단계로 나아가려면 정확한 저의를 알아야 했다.
울쿠스와 스카르파는 서로에게 어떤 존재인지. 그들이 흰둥이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저항군을 가르치는 이유는 무엇인지. 그게 선결되지 않으면 모든 논의가 공허했다.
그는 다시 테네브로즈를 보았다.
“그러니까, 이렇게 추측하는 게 아니라 당사자 입장을 직접 들어봐야 한다는 소리야. 네가 그걸 해야 한다고. 그런데 추적자 신분이 별로 도움이 안 될 것 같아서 걱정이다.”
요정은 잠시 생각하더니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합니다. 울쿠스가 추적대에 반기를 들고 나서진 않겠습니다만, 적극적으로 돕지도 않을 겁니다··· 그래도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으니 한 번 만나보는 게 좋겠군요.”
“넌 그게 장담이 되냐.”
울쿠스의 죽은 친부모가 마음에 걸렸다. 요정 놈이야 부정하긴 하지만, 란드와르는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려둔 상태였다. 직접 죽인 건 아니더라도 무슨 연관이 있긴 있을 거라고.
좋은 쪽은 아닐 게 뻔했다.
“시가지 한복판에서 대놓고 혈마법을 쓰진 않을 테고 저를 군부에 고발하는 건 자살행위지요. 만약 명령을 듣지 않으려 하면, 저항군을 모두 죽이면 되는 일 아닙니까. 어차피 협상이 잘 안 됐을 때에는 그 방면으로 진행할 거라 말씀하셨던 기억이 나는데요.”
날씨 이야기라도 하는 것처럼 태연한 어조였다. 저항군 소녀와 웃고 떠들던 놈이 안색도 안 바꾸고 이런 소리를 늘어놓으니 이상했다. 란드와르는 잠시 고민했다. 맞는 말이긴 한데. 울쿠스랑 대화 안 되면 죽여야 되는 거 맞는데.
그는 자신이 화신이라는 걸 밝히는 미래까지 고려해 보았다. 유력한 각본은 아니었다. 결국 피웅덩이 사태를 해결할 유일한 방법은 스카르파를 죽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울쿠스에게 흰둥이들이 중요한 존재라면 스카르파도 이용 대상으로만 보고 있지는 않을 터. 신의 권위를 빌어서, 스카르파를 죽이라 하더라도 들어먹을 확률은 낮을 듯했다.
저항군을 몰살시키는 방법밖에 없나? 정말로?
“그건 그런데, 일단은 최선을 다해야지. 추적자인 척 가서 이야기 잘 해보고, 얻어낼 정보는 얻어내고, 괜히 문제 일으키지 말고.”
“문제라뇨.”
“지금까지 계속 이야기 했잖아. 울쿠스는 추적자들 별로 안 좋아할 거라고. 그런데 내가 보기엔··· 걔가 널 특히 싫어할 것 같거든. 대놓고 자폭할지도 모른다는 거야.”
테네브로즈는 잠시 궁리하더니 해맑게 미소 지었다. 어쩐지 불길했다.
“마력 결정을 가지고 계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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