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울쿠스
테네브로즈는 해가 가라앉을 무렵 타라곤과 함께 사무실을 나섰다. 대로를 타고 올라가다가 꺾어 14번가로. 이윽고 주택가 중앙의 원형 광장이 나타난다.
땅을 덮은 포석은 도시의 다른 부분처럼 잿빛이지만 광장 정중앙의 늑대 석상은 한밤을 도려낸 것처럼 검다. 눈에는 샛노란 보석이 박혀 있고, 은은한 빛 아래로 마력이 이글거린다.
“눈이 반짝이네요. 멋지다.”
테네브로즈는 석상 앞에 멈춰서 중얼거렸다.
“내가 이거 때문에 여기 산다고 하면 믿겠니? 해가 완전히 지면 빛이 더 밝아져.”
“가로등 같은 거예요?”
“아니, 400년 전의 왕이 만든 거래. 대관식 기념으로.”
주위를 둘러보던 타라곤은 속삭이듯 몸을 낮췄다. 얼굴에 짓궂은 기색이 떠올랐다.
“···그런데 무서운 게 뭔지 알아?”
“뭐예요?”
“밥 먹고 얘기해 줄게. 체할지도 모르니까.”
타라곤은 꼿꼿이 허리를 펴고서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집은 자그마한 1층짜리 주택이었고, 주방과 거실이 똑바로 붙은 구조였다. 탁자가 자리 잡은 쪽의 벽에는 장식용 단검이 걸려 있었다.
테네브로즈는 저녁이 준비되는 동안 거실 창가에 기대 시간을 죽였다. 창문 너머로 조각상이 훤히 보였다. 조각상 때문에 여기 살고 있다는 말은 여러 가지로 해석이 됐다.
늑대인간 특유의, 우중충한 미감에 진저리를 냈을 가능성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야스와다의 요정들은 화려하고 섬세한 건축물을 사랑했으니까. 석상을 보면서 고향에 대한 향수를 달래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어딘가 석연찮았다.
타라곤은 존재 자체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구혼자들끼리의 결투에서 중상을 입은 뒤 실종됐다가 돌아온 것만으로도 화제가 될 만한데, 심지어 상대는 왕이다. 극단의 간판 배우였으니만큼 얼굴도 알려져 있다.
수년이 지났는데도 타라곤이 어떻게 사는지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득시글거렸다. 정체를 들키지 않으려면 거주지를 최대한 외곽으로 잡아야 할 터였다. 조각상이 아름답긴 하지만 목숨만큼의 가치는 없다.
“조각상이 마음에 들었나 보구나. 그래도 저녁은 먹어야지.”
친절한 목소리에 테네브로즈는 뒤를 돌아보았다. 식탁에는 흰 빵과 스튜가 준비되어 있었다. 타라곤의 맞은편에 앉은 다음 툭 질문을 꺼냈다.
“그런데 정말로 조각상 때문에 여기 사는 거예요?”
“응, 그렇지. 왜?”
“아는 사이도 아니면서 형한테 말 거는 사람들 많잖아요. 빤히 보는 사람들도 있고. 저는 그러면 귀찮아서요, 조각상이 멋지긴 해도 외진 곳에 살 거 같거든요. 그러면 사람도 덜 만날 테니까.”
“유명세를 어쩔 수는 없지. 그리고 어디 살든 출근은 극단 사무실로 해야 하는 걸.”
테네브로즈는 곁눈질로 창밖을 보았다. 무슨 용도가 있으리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보석 아래에 흐르던 마력이 의심을 더했다. 조명을 구현하려면 마법 각인이 필요하긴 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큰 힘이었다.
실마리가 잡힌 것은 식사를 거의 마칠 무렵이었다.
“맞다. 조각상 이야기 해 주기로 했지?”
“네, 무서운 얘기요.”
“사실은 별 게 아닌데··· 늑대인간 왕족끼리는 서로 죽여도 죄가 아니래. 지금은 그래서 왕족 머릿수가 관리가 되는데, 예전에는 아주 난장판이었다는 거야. 왕이 되면 언제 죽을지 모르는 거지.”
“왕이 만든 조각상이라면서요. 설마 저거 만들고 바로 죽었어요?”
“아니, 그 반대야. 자기 어머니를 죽인 다음 왕위를 물려받고서 세운 거지. 따지고 보면 가족을 죽인 기념인 거야.”
“와아.”
소년의 표정에 흥미와 공포가 뒤섞여 나타났다. 그 뒤편에서는 주판이 맹렬하게 돌아가는 중이었다.
당시의 왕들은 편집증적으로 비밀 통로와 차원문을 만들어댔다. 따라서 찬탈자가 단순히, 기념 삼아 조각상을 세웠을 리가 없다. 용도는 아마도 공간 이동.
조명을 밝힐 용도라기엔 과도한 마력도, 울쿠스가 여기에 거처를 잡은 이유도 이것으로 해명이 됐다. 나중에, 추적자 신분으로 만날 때 정확한 명세를 꼭 물어봐야겠다는 계산이 섰다.
하지만 아직은 열네 살짜리 남자애로 남아 있어야 했다.
“엄마를 죽인 걸 자랑한 거네요. 가족끼리 어떻게 그러지. 형도 사장님이랑 사이 엄청 좋잖아요. 형이 말도 잘 듣고 일도 열심히 도우니까 그런 거겠지만.”
“아, 그래 보이니?”
웃음을 참으려는 듯 타라곤의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조소는 아니었다. 도리어 기쁜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는 투였다.
“어머니가 좋은 분이셔서 그렇지. 나는 불효자고.”
테네브로즈는 일전의 추측에 심증이 더해지는 것을 느꼈다. 울쿠스는 오래전에 죽은 친부모 대신, 캐러웨이 부인을 어머니로 모시고 있었다. 그것도 진심으로. 딤 나겔이 손자의 근황을 알게 되면 놀라 죽을지도 몰랐다.
“에이, 설마요. 불효자 소리 들으려면 부모님 집 찾아가서 유리창도 깨고 물건도 부수고 돈도 달라고 하고 그래야죠. 세상에 그러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형이 어딜 봐서 불효자에요.”
“하긴, 내가 사무실 오고부터 일도 많이 줄어들었다고 하셨고······.”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던 타라곤의 표정이 갑자기 침울해졌다.
“아니야.”
작게 중얼거린 그는 일어나 식탁을 치우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일시에 가라앉았다.
테네브로즈는 자리에 앉아 타라곤의 정체가 들키지 않았던 비결을 의심했다. 죽은 사람이 돌아오는 것부터가 이상한 일인데, 저렇게 속이 뻔히 보여서야 누군가가 의심을 해도 진작 했을 터였다.
그래도 일단은 생각하는 바가 훤해서 좋았다. 피웅덩이를 얻고 싶다. 하지만 어머니를 잃고 싶지도 않다. 테네브로즈는 그 심정을 이해했다. 양자택일 앞에서 사람은 쉽게 길을 잃으니까.
지금의 울쿠스는 성립할 수 없는 외줄타기를 하고 있는 셈이었다. 옆에서 불어오는 바람만으로도 쉽게 끝나는 곡예다.
그는 저항군을 모두 죽이면 반응이 올 거라던 말을 상기했다. 장기말에 불과한 사람들이 어떻게 놈을 움직일 수 있는진 의문이었지만, 어쨌건, 무슨 이유로건 울쿠스는 그 줄에서 뛰어내려야 했다.
자신이 떠미는 것이다.
테네브로즈는 녀석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고, 칼린카 사건 때의 꼬마를 그 위에 겹쳐 보았다. 일전에도 떠올린 생각이지만 역시나 낯설었다. 그 어린애가 그런 고민을 할 정도로 자랐다는 게. 그리고 자신이 또다시 그의 삶을 바꾸어 놓으리라는 게.
사건의 수사를 맡은 것은 테네브로즈였다. 나트람은 그가 딤 나겔의 손자를 엮어 넣길 바랐지만, 그럴 수 있었지만, 결국엔 그러지 않았다. 죄책감을 느끼진 못하더라도 속죄는 필요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
식탁을 모두 치운 타라곤은 테네브로즈와 잠시 잡담을 나눴다. 중요한 이야기는 없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 그는 소년을 여관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집을 나섰다.
해는 완전히 저물었고 오가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도로변에 설치된 마력등이 교수형장의 머리통처럼 둥둥 떠 있을 뿐이었다.
14번가를 따라 걷는 동안은 아무도 보이지 않더니 방향을 꺾자마자 군부 대원 둘을 마주쳤다. 야간 순찰을 나온 모양이었다.
“안녕하십니까.”
타라곤이 먼저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오른편에 선 대원이 등불을 테네브로즈에게 가져다 댔다. 낮은 목소리의 여자였다.
“인간이군. 체류증은 있나?”
“여관에 두고 왔어요. 평소에는 안 가지고 다녀요. 기한도 남아 있어요. 가져올 수 있어요.”
“너는 일단 여기 있고··· 일행은 흰둥이군. 인적사항을 말하게.”
질문이 멈추면서 등불이 약간 위로 자리를 옮겼다. 동시에 또 다른 목소리가 카랑카랑하게 울렸다.
“이봐, 그냥 보내줘! 기둥서방이잖아. 인간도 극단 소속일 테고.”
“극단 소속?”
“아즈리온 교단 쪽에서 사제들을 보냈다더라고. 시종이랑.”
“아.”
낮은 목소리가 짧게 신음했다.
“알았으니 가 보게.”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타라곤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테네브로즈는 재빨리 따라가면서 뒤를 힐끔 보았다. 군부 대원 둘이 멈춰선 채 떠들고 있었다.
“저거 봐,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돌아다니지. 나였으면 자살했을 거야.”
“거기까지만. 더 말했다가는 상관 모독죄야.”
“너만 일러바치지 않으면 벌 받을 일도 없지. 그리고 이게 높으신 분들 귀에 흘러들어간대도 무슨 상관이야. 대낮에, 광장에서 외칠 수도 있어. 그 둘이 붙어먹는 걸 누가 모른다고··· 응?”
스카르파와 타라곤 이야기를 하는 모양이었다. 순찰을 도는 하급 대원들까지도 그 주제를 입에 담다니 뜻밖이었다. 쉬쉬하는 기미라도 있을 줄 알았는데.
테네브로즈는 군부 고위층이 둘의 관계를 공공연하게 용인했을 경우를 고려했다.
정신 나간 인간을 달랠 요량으로 타라곤을 붙여놓았다 치면, 가능성은 충분했다. 어차피 스카르파는 허수아비고 정무를 담당하는 건 대장군들과 부군이니까.
의문스러운 점이 있다면 울쿠스의 태도였다. 대다수의 요정은, 특히 바단의 귀족은 늑대인간을 예비 노예로만 여겼던 것이다.
오만한 태도를 보이다가 들킨 요정은 수도 없이 많았다. 하지만 녀석은 기둥서방 소리를 들으면서도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있었다.
타라곤으로서의 삶에는 모욕과 멸시를 감내할 정도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 가치가 정확히 어디에서 왔는지가 궁금했다. 늑대인간 어머니인지, 피웅덩이인지, 아니면 완전히 다른 것인지.
***
극단에 취직한 이후로 란드와르는 멍하니 앉아 있을 때가 많아졌다. 그는 침대에 기댄 채 곰곰이 생각했다. 아즈리온의 화신이 여기에서 목수 일을 돕는 건 낭비가 아닌가?
어쩌다 보니 작업반 소속이 된 상태였다. 무대 장치를 제작하고 설치하고 관리하는 부서였다. 힘을 쓰는 잡일은 대부분 작업반 몫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쉬웠다.
덕분에 오늘도 실컷 힘을 쓰고 왔다. 볼로디아는 대본을 외우고 테네브로즈는 타라곤에게 말을 붙이고 있는데 자신은 목적 없는 노가다를 뛰고 있는 것이다.
원래 관리자가 그런 자리라지만, 일은 실무자가 하는 거라지만 명령만 내려둔 채 하는 게 없으니 기분이 묘했다. 사실은 세카두에 한 번 더 다녀올까 싶기도 했다. 용병 임무를 받아 처리하는 게 이보다는 더 보람찰 것 같았다.
“마지막 대사가 없는데.”
란드와르는 중얼거리는 듯한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숙소는 서로 분리되어 있었지만, 지금은 볼로디아의 방에서 테네브로즈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녀석이 돌아오면 타라곤의 집을 알게 되는 셈이다. 거기에서부터 다시 계획을 짜야 한다. 말인즉슨, 알아서 하라고 내버려둘 수 없는 사안이 란드와르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세카두로 돌아가 모험을 즐기겠다는 건 망상에 불과하다. 그는 현실적으로 생각하려 애쓰면서 질문을 던졌다.
“대본이 파본입니까?”
“아, 혼잣말이 컸군. 그건 아닐 것 같소. 사소한 수정이 있었을 뿐이지.”
원래 각본에서는 마지막 장면에 아즈리온의 예언이 들어갔다고 했다. 왕가에 언젠가 붉은 머리를 가진 아이가 태어날 것이고, 그 아이가 늑대인간을 해방시킬 거라고. 천 년씩이나 이어진 전설이었다.
“그런데 스카르파가······.”
볼로디아는 말을 뚝 멈추고서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있겠냐는 듯 란드와르를 보았다. 그는 우울해지는 분위기를 느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물어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해하시겠지. 이 대본은 스카르파가 열 살이 된 이후로는 한 번도 공연되지 않았다오. 이제는 다시 무대에 오르는 모양이지만··· 그 대사가 빠져 있군.”
“그렇군요.”
짧은 대답에 마침표가 찍히자마자 정적이 방을 덮쳤다. 정말로 괜히 물어봤다. 란드와르는 속으로 후회를 삭이며 요정 놈에게 괜한 욕을 퍼부었다. 이 새끼는 씨발, 시간이 언젠데 아직도 안 들어오는 거야? 저녁을 무슨 야스와다까지 가서 먹나?
설마 들켰나?
“나으리는 표정이 왜 그러십니까?”
생각이 깊어지던 차에 낯익은 목소리가 그를 현실로 끌어냈다. 언제 왔는지 요정 놈이 바로 앞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일단 멀쩡하게 나타난 걸 보면 별 문제는 없는 모양이었다.
“니 군부 끌려가서 고문당하는 상상 하고 있었다.”
란드와르는 퉁명스레 대꾸했다. 요정 놈의 얼굴에 밝은 미소가 떠올랐다.
“오다가 불심 검문에 걸렸는데 별일은 없었답니다. 별일은 울쿠스가 있었죠.”
“뭐, 설마 걔가 들켰어?”
“아뇨, 대원들이 녀석을 보고 기둥서방이라면서 비웃던데요. 아예 대놓고 왕실에 드나드는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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