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세이버리
“솔직하게 말하자. 그거 니가 따라가서 죽였지?”
“아닌데요.”
“환술 풀고 말해 봐.”
즉시 인간 소년의 얼굴이 흩어지며 요정의 것으로 변했다. 본모습을 보는 건 꽤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났다. 물결치는 은발을 목덜미에서 잘랐고, 선이 굵지 못한 이목구비는 병약한 귀족 청년이라는 인상을 준다.
하지만 퀭한 눈 너머에서 음흉한 의도를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언제나 그렇다.
“정말로 아닙니다. 제가 무언가를 감출 수는 있지만 아니라고 하는 건 아닌 겁니다.”
“너 나한테 말 안 하는 거 얼마나 있어.”
“많지요.”
테네브로즈는 늑대인간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줄줄이 쏟아냈다.
포도밭 골목의 연간 수확량과 기후 조절 마법사들의 존재. 인공 강우와 군부 소속 토양학자. 군부는 말루카의 종합 행정기관으로서 도시 수호뿐만 아니라 모든 방면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란드와르는 흥미로운 주제라고 생각하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까딱 잘못했다가는 말려들어갈 뻔했다. 말 안 하는 거, 라는 게 이런 잡학에 대한 질문일 리가 없었다.
짜증이 훅 올라왔다.
“내가 씨발, 니 친구로 보이냐? 아무 개소리나 하면 그렇구나 하고 넘어갈 거 같아?”
“죄송합니다.”
요정 놈이 눈을 내리깔았다. 욕을 해 줘야 태도가 공손해지는 놈이었다. 란드와르는 무의식적으로 입가에 손을 옮겼다가 다시 뗐다. 마음 같아서는 실내고 뭐고 한 대 물고 싶었다.
“멍청한 척 하지 말고 제대로 대답해라.”
“아니, 하지만··· 나으리께서 원하시는 답은 해 드릴 수가 없습니다. 제가 울쿠스의 부모를 죽였다고 의심하고 계시지요. 그런데 그건 정말로 제가 한 짓이 아닙니다. 하지 않았는데 무슨 설명을 덧붙일 수 있겠습니까.”
란드와르는 테네브로즈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웃음기는 모두 사라졌고 억울함만 가득 남아 있었다. 의심과 믿음이 동시에 커졌다.
그랬다. 비록 숨기는 게 많고 웃으면 불길한 놈이긴 했지만 아닌 걸 그렇다고 말하진 않는 놈이었다. 지금까지 관측한 바로는 그랬다.
“증거···는 없지. 니가 증거를 진짜로 주든 가짜로 만들든 나는 모르지.”
“나으리의 명예를 걸고 맹세합니다.”
귀를 의심할 만큼 진지한 어조였다. 란드와르는 다시 욕했다.
“이 씨발놈이 지 명예는 안 걸고 내 명예를 걸어.”
“저는 아즈리온의 종인데, 자신이 모시는 분의 이름에 맹세하는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이 요정이 나트람의 개라도 된 게 불가사의하게 느껴졌다. 이스빈드는 점 한 번 쳐 줬다가 죽을 뻔했다는데 테네브로즈한테는 칼침을 넣어 줄 친구들이 없었던 모양이다. 안타까웠다.
***
란드와르는 담배를 피우면서 요정에 대한 입장을 정리했다. 녀석에게는 뭔가 숨기는 게 있었다. 야스와다에서 있었던 일들뿐만이 아니다. 테네브로즈라는 인격체 자체가 의문이었다.
놈이 음모를 꾸밀 경우도 상상했으나 가능성은 낮았다. 여전히 아즈리온의 성흔이 남아 있었으니까. 성흔은 해당인이 천사들에게 직접적으로 관리를 받는단 의미였다. 티아가 란드와르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예, 그게 바로 우리가 정보사를 제어하는 방법입니다. 사제 개인에게 반역의 기미가 보이면 곧바로 징벌을 내리고 파문하니까요.>
남이 실컷 생각하는데 갑자기 끼어들지 마시고요.
<확답이 필요하신 듯해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렇지, 말 잘 하셨네. 요정 생각 좀 읽어줄 수 있어요?
<강현님의 경우에는 화신의 몸을 빌려 쓰는 관계로 규정을 변칙적으로 적용했을 뿐이고, 이스트리아 원주민의 생각을 그대로 읽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신앙심과 충성심의 정도만을 계측할 수 있을 뿐입니다.>
도움이 될 것 같으면서도 쓸모가 없었다. 그래도 뒤통수가 얼얼해질 일은 없으리란 보장을 받으니 마음이 놓였다. 란드와르는 담배에서 입을 떼고 불이 자연스럽게 꺼지기를 기다렸다.
언젠가는 날을 잡고 한 번 풀어봐야 할 것이다. 쉬운 일은 아닐 듯했다. 주제를 확정지으면 뭐라도 파고들 수 있지만 무엇을 모르는지도 모른다면 문장들 사이에서 헤매다가 길을 잃고 마니까.
하지만 궁금하긴 했다.
***
란드와르는 가을바람을 잠시 맞다가 마을회관 내부 숙소로 돌아왔다. 테네브로즈가 잘 왔다는 투로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내일 바로 중부로 간다지 않으셨습니까.”
“열한 시 직통 탈 거야. 여자애 여기 두는 건 아쉽긴 한데, 그 건은 일단 울쿠스랑 접선을 해 보고 진행하자.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가능성은 계속 열어두고.”
“지금 여쭤보려는 게 그겁니다. 어쨌건 저도 장기 체류증을 받아야 하니까, 시종 신분으로 캐러웨이 부인과 울쿠스를 만나게 됩니다. 시종 소년과 아즈리온의 사제 둘이 한 묶음이라는 겁니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이 갔다. 울쿠스와 접선할 방법을 묻는 거겠지. 시종 소년인 상태라면 만날 방법은 많지만 아즈리온과 볼로디아에게까지 여파가 올 터.
“안 그래도 오기 전에 볼로디아랑 그 관련으로 이야기해 뒀다. 너랑 걔랑, 둘이서만 만날 방법을 최대한 알아놔 보라고. 물론 시종 모습으로 말을 걸 수는 없고, 다른 신분을 써야겠는데······.”
시종인 상태로 접근하는 건 어느 쪽으로나 도움이 안 됐다. 테네브로즈는 울쿠스 앞에서는 추적자 행세를 해야 했다. 반면 볼로디아와 란드와르는 교단 사제로 위장하고 있었다. 같이 다닐 수가 없는 조합이었다.
“신분이라는 게 정교할 필요는 없어. 그 상태로 계속 돌아다닐 것도 아니니까. 예를 들면 떠돌이 행상인인 척 문을 두드린 다음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거지. 얘기 끝내고 나오면 적당한 곳에서 옷을 갈아입든 뭘 하든 해서 시종으로 되돌아오고.”
이 세상에 감시 카메라가 없다는 사실이 그나마 위안이 됐다. 만약 그런 게 개발되었더라면 말루카에는 골목마다 하나씩이 달려 있었을 터였다.
“그리고 이건 확실하진 않은데, 저번에 저녁 먹으면서 들은 얘기로는 캐러웨이 부인이랑 따로 사는 것 같더라고. 그놈 집만 알아내면 편할 거야.”
***
“나는 니가 정상인처럼 행동할 때마다 위화감이 들어.”
“아닐 때에는 화를 내시잖습니까.”
“스스로 구분이 되네?”
테네브로즈는 아침나절에 포도밭 골목에서의 일을 모두 끝마쳤다. 세이버리에게 가서 사정을 전한 다음 편지까지 주고 온 것이다.
열네 살다운 필치로 쓰인, 풋풋한 편지였다. 캐러웨이 부인을 도우러 간다고. 기회가 되면 다시 보자고. 꼭 보고 싶다고.
란드와르는 역겨움을 느꼈다.
“너 원래 그런 성격 아니잖아. 아닌 걸 그렇다고 하면 안 된다면서. 양심의 가책은 못 느꼈냐.”
“나으리께서는 제가 잔인해지길 바라십니까?”
요정이 신호를 기다리는 사냥개처럼 란드와르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렇다고 말하면 정말로 그럴 놈이었다. 그는 서둘러 대화를 매듭지었다.
“됐다. 내가 미안해.”
***
열한 시 차를 타고 망치 집결지로 돌아간 다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볼로디아는 여관에서 숙식하면서 매일 아침마다 사무실로 나가기로 이야기가 됐다. 출근을 하는 셈이었다. 란드와르와 테네브로즈가 지낼 곳은 그 옆 호실이었다.
교단에서 받아온 서한과 서류를 캐러웨이 부인에게 전달한 뒤 장기 체류 심사를 받았다. 심사관은 사제가 2인 1조로 움직이는 건 용납했지만 시종의 쓸모에 대해서는 의심을 표했다.
잡일을 돕도록 데려왔다고 이야기를 해 두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됐다. 타라곤이 맡던 잡무 중 일부를 대신하게 된 것이다.
잘 된 셈이었다. 극단 건물 밖에서 독대할 기회를 찾아내려면 타라곤과 가까이 지내야 할 테니까.
미행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에는 위험 부담이 컸다. 아즈리온 일행은 말루카에 몇 없는 이방인. 감시하는 눈은 차고 넘쳤다. 인간 꼬마가 묵는 방에서 낯선 늑대인간이 나왔다 치면 금방 의심을 받을 터였다.
***
타라곤은 건물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사소한 부분을 챙겼고 남는 시간에는 장학재단의 서류 작업을 도왔다. 급사 소년이 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이제 그 일은 모두 소년의 몫이 되었다.
“3층 사람들한테 물건 전해드리고 왔어요. 카다멈 씨가 1층 연습실 조명이 깜박거려서 고쳐야 할 거래요. 테라스에 있는 화분들에도 물 부어 놨구요, 베이리브 양이 사장님이랑 상담하고 싶대요. 말씀드릴 테니 일정 잡히면 가서 전하기로 했어요.”
덕분에 타라곤은 온종일 사무실에만 앉아 있을 수 있었다. 일이 훨씬 편해진 셈이었다.
그가 테네브로즈를 귀여워하는 것도 당연했다. 기억력도 좋고, 일처리도 빠른데다가, 완전히 공짜인 열네 살짜리 시종을 싫어할 사람은 어디에도 없으니까.
“잘 했다. 과자 하나 줄까?”
“네, 감사합니다.”
한때 부제사장이었고 지금은 급사가 된 소년은 칸막이 너머로 돌아가는 타라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테네브로즈보다도 두 뼘이 더 컸다.
세월이 무상했다. 꼬마를 내려다보던 게 어제 일 같은데도 벌써 이렇게 자란 것이다.
그건 체격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울쿠스는 마요르가를 죽였고, 볼로디아를 내쫓았고, 이제는 늑대인간 사회에 완벽히 적응해 있었다. 예전의 그 꼬마와 같은 사람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물론 그때도 교활한 면은 충분히 있었지만······.
테네브로즈는 칼린카 사건을 복기했다. 이스빈드의 애완 칼린카가 도련님들을 찢어 죽였을 때를. 어린 울쿠스를 만난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다. 자세한 경위를 파악하기 위해 죽은 녀석들의 친구를 찾아다녔던 것이다.
하지만 결론은 시시했다. 마력이 짙은 날에 칼린카를 건드리면 안 된다는 것은 상식이었다. 어린애들은 그걸 몰랐다. 혹은 무시했다. 그래서 나쁜 점괘를 내어놓은 별점술사를 죽이겠다고 덤볐다가 역으로 당했다. 끝.
···추억을 곱씹던 테네브로즈는 타라곤이 돌아온 것을 보고 허리를 꼿꼿이 폈다. 그의 손에는 작은 종이봉투가 들려 있었다. 과자가 두 개씩 담긴 것이었다.
“자, 이거 받아라. 그런데 저번에 보니까 고기는 거의 안 먹는 것 같던데. 이런 것만 먹으면 키 안 커.”
“기름진 음식을 먹으면 정신이 게을러진대요. 고기는 나흘에 한 번씩만 먹으라던데요. 반 접시보다 적게요.”
“누가 그랬니? 같이 다니는 사제님들이? 그건 아닐 텐데.”
“아뇨, 예전에 알던 사람이요.”
테네브로즈는 이어질 문장을 입속에만 남겼다. 별점술사가 그랬지. 네 친구들이 죽이려 한 별점술사 말이야······.
애당초 이스빈드의 실력과는 별개로 육류에 대한 충고는 딱히 신뢰하고 있지 않았다. 남들이 반응을 보이는 게 재미있어서 그렇게 떠들고 다니다가 입버릇이 되었을 뿐이다.
이번의 반응은 그럭저럭 흥미로웠다.
“그런 계율은 수도승이나 지키는 거야. 어릴 땐 잘 먹어야지.”
“그 소리 듣기 전에도 조금만 먹었어요. 고기 별로 안 좋아해요. 구운 건 전혀 안 먹어요.”
“왜?”
“먹었다가 토한 적이 있어서요. 예전에요.”
“상한 거였나 보다.”
타라곤은 안타깝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뜻밖의 제안이 이어졌다.
“저녁 같이 먹을래? 집에 괜찮은 고기가 있거든. 너도 좋아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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