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세이버리
테네브로즈는 능숙하게 뒤처리를 마쳤다. 마력을 거둬들인 다음 마법진을 지웠고 적당한 크기의 돌로 칼린카의 머리를 잔뜩 내리쳐 두었다. 마법으로 꿰뚫린 것과 개에게 물린 건 형태가 확연히 다르니까.
칼린카를 잡은 건 세이버리여야 했다. 인간 남자애를 지키기 위해 괴수 형태로 맞서다가, 겨우 쓰러트리고 함께 기절한 것이다. 자신은 뒤에서 돕다가 마무리만 했다 치고.
세이버리를 업고 가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워낙 멀리 온 탓에 한참이 걸렸다. 마을 인근에 들어설 무렵에는 벌써 해가 가라앉고 있었다.
“멈춰라.”
잿빛 머리 늑대인간이 테네브로즈를 보고는 외쳤다. 보초였다. 그녀는 곧바로 뒤에 업힌 여자아이의 상태를 깨달았다.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 애는······.”
“괴수 피에요. 놀러갔다가 괴수를 만났어요. 괴수는 죽었고 얘는 기절했어요. 저는 사제님들이랑 같이 온 인간인데, 체류증은 주머니에 있어요.”
테네브로즈는 적당한 어조로, 필요한 이야기만을 읊었다.
***
세이버리를 경비대에게 인계한 다음 보초와 함께 칼린카가 있던 곳까지 갔다. 어둡긴 했지만 핏자국이 궤적처럼 남아 있어서 길 찾기는 쉬웠다. 보초는 멀찍이 서서 시체를 살폈다.
그새 다른 칼린카가 달려와서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죽은 놈보다는 크기가 작았다.
“···저걸 어린애 둘이서 잡았다고? 게다가 넌 인간이잖아.”
“저 마법 쓸 줄 알아요. 예전에 배웠어요.”
“아무리 마법을 쓸 줄 안다지만.”
테네브로즈는 카스바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세이버리의 의심을 이용하기로 했다. 기초적인 원소학을 아는 것과 그걸 전투에 써먹는 건 다른 일이었으니까.
“예전에 서커스 극단에서 일했어요.”
“서커스라구.”
“거기서 이런 거 많이 했어요. 사람 벽에 붙여놓고 단검 던지는 거예요. 날아가서 바로 옆에 꽂히게. 안 맞게. 그래서 방향 맞춰서 날리는 건 잘 해요.”
테네브로즈는 얼음을 작은 단검 형태로 빚어낸 뒤 근처의 나무에 날려 보내는 모습까지 보여주었다. 피의 창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하지만 속도가 붙은 탓에 끄트머리가 약간은 들어갔다.
“도망치면서 계속 얼굴만 노렸거든요. 가죽은 못 뚫어도 눈이랑 입은 부드러우니까요. 그 다음에는 쟤가 달려들어서 물어뜯고. 거의 다 잡았는데 실수했어요.”
고개를 끄덕인 보초는 시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대견하다는 투로 칭찬했다.
“너, 인간이 꽤 용감하구나. 무서웠을 텐데.”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보초는 침묵마저도 무슨 의미가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고는 사려 깊은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려니 했다.
돌아가자 골목 사람들끼리 난리가 나 있었는데 그것도 어떻게 해결이 됐다. 세이버리가 위험한 곳까지 나다닌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던 것이다. 왜 산맥 어귀까지 따라갔냐면서 테네브로즈를 탓하는 이도 없었다.
오히려 인기인이 됐다. 괴수 잡은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아이들을 앞에 두고, 그는 어린 시절을 곱씹었다. 이렇게 인기가 많은데 왜 고향에서는 친구가 한 명도 없었을까? 자신의 잘못은 아닌 듯했다.
어쨌거나 분위기가 좋았다. 한 명만 빼고.
“불러 달라니 불러주는 거지만··· 너, 우리 조카애한테 무슨 수작 부리면 죽는다. 싸우더니 또 같이 다니는 게 느낌이 이상하더라니. 아직 일어나지도 못하고 있으니까 그렇게 알고.”
다음날 오후 나절이 되자 세이버리의 삼촌이 애 좀 빌리겠다면서 마조람을 찾아왔다. 세이버리가 테네브로즈를 보고 싶어 한다는 거였다. 표정이 묘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듯했다.
“그럴 나이 아니에요.”
“그럴 나이가 아니긴 무슨, 꼬맹이들끼리 싸우자마자 붙어 다니면 뻔하지.”
하지만 테네브로즈는 포도밭 골목의 모든 늑대인간보다 나이가 많았다. 세어 보진 않았지만. 서른 해가 넘은 다음부터는 셈을 멈췄다.
그는 잠시, 자신이 매 해마다 숫자를 더해가던 시절을 추억했다.
당시엔 누님들이 멀쩡히 살아 있었고 울쿠스는 태어나지도 않았다. 평민이었던 이스빈드는 허드렛일을 하다가 그때 막 별점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헤이딘도 멀쩡하게 밖을 나돌아 다녔다. 괜찮은 과거였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나트람은 한참도 더 전부터, 그러니까 테네브로즈가 태어나기 전부터 성격이 개차반이었다. 그는 고작 열 살에 사촌의 애완 칼린카를 죽일 수 있는 남자였던 것이다.
이유: 자기 부모님은 애완용 괴수를 마련해주지 않아서.
그밖에도 나트람은 딤 나겔에게서 많은 것을 앗아갔다. 피송곳니의 가주가 우울하고 겁이 많고 소박한 성격이 된 건 지당한 결과였다. 울쿠스가 할아버지의 태도에 진절머리를 내면서 가출한 것까지도.
테네브로즈는 사건의 원인이 또 나트람으로 귀결되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숙였다. 입가에 차오르는 웃음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놈은 분명히 수많은 갈등의 원흉이었지만, 사실 그건 그럴 수도 있는 일이었다.
진짜 문제는 그가 딱히 엄청난 악당이 아니라는 부분에서 왔다. 능력의 차이일 뿐이지 요정 귀족들은 보통 그런 식으로 굴었던 것이다. 나트람 같은 종자가 되기는 쉬웠다. 평균적인 귀족보다 훨씬 유능하고 자기애가 강하면 됐다.
앗, 구린 일을 도맡을 오른팔도 하나 필요하다. 마음껏 쓰다가 버릴 수 있는 부하가. 거기에 생각이 닿자 웃음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이 자식이 웃고 있어.”
“아뇨, 아니에요. 잠깐 다른 생각을 해서요.”
“이놈 이거, 안 되겠어. 일부러 모른 척 하는 건 아니지? 우리 아내도, 어? 깜짝 선물로 괴수 가죽을 벗겨 온다고 했다가 다쳐서, 침대에 누워서 혼례를 올렸단 말이다.”
테네브로즈는 눈을 깜박였다.
“그래서 걔가 저한테 구혼이라도 했다는 거예요? 혹시 인간 사위 맞고 싶으세요? 아니면······.”
“조카 구해 줬으니까 참는다. 아니었으면 뼈도 못 추릴 줄 알아.”
요정 사위도 괜찮으냐고 물을 뻔했는데 다행히도 그 전에 멈출 수 있었다. 꿀밤이 날아들었던 것이다. 전직 부제사장이 이런 곳에서 이런 취급이나 당하고 있다니 통탄스러운 일이었다.
***
삼촌이 테네브로즈를 데려오자 세이버리는 둘이서만 이야기하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다. 오해를 사기 딱 좋을 발언이었다. 그는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인간 소년을 째려보다가 문을 쾅 닫고 나갔다. 이제 방에는 둘만 있었다.
세이버리는 가늘게 뜬 눈으로 테네브로즈를 바라보았다. 피곤에 찌든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이상해.”
“너 그거 말버릇이구나.”
“이상하니까 이상하다고 하는 거야. 내가 괴수를 잡았다면서. 너는 도망치면서 마법 쓰고. 난 그냥 한 대 맞고 기절한 거 같은데.”
“기억 안 나? 마지막에 너무 세게 맞아서 다 까먹은 걸지도 모르겠다. 원래 머리 부딪혔다가 기억 잃어버리는 사람들 많잖아.”
“기억을 잃어버린 게 아니라 다르다고. 완전히 다르다니깐.”
“에이, 설마. 착각한 거겠지.”
테네브로즈는 침대에 팔꿈치를 얹고는 빙글빙글 웃었다.
제국 시절에, 귀족들은 까만 늑대인간을 경호 노예로 쓰고 흰둥이는 애완용으로 길렀다고들 했다.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요정이라면 기억이 안 나도 일단 자기 유리한 쪽으로 행동하고 봤을 텐데 이렇게 솔직하니 보기 좋았다.
“나 업고 온 건 어떻게 한 건데? 말라깽이면서.”
요정이 인간보다 체구가 작고 힘이 약하기야 했지만 엄청난 차이는 아니었다. 어차피 추적자 노릇을 하려면 체력이 필요했다. 3교구의 신관들마저도 곧잘 잊는 사실이었지만, 그는 한때 장래가 촉망된다는 평가를 받는 추적자였다.
“두 명도 아니고 한 명쯤이야 충분히 업지.”
“오다가 다른 괴수는 안 만났어? 피 냄새가 잔뜩 났을 텐데.”
“운이 좋았나 봐.”
“몰라.”
툭 내뱉은 세이버리는 입을 다물었다. 테네브로즈는 이불 위로 꼬마의 어깨를 토닥이고서는 일어섰다.
“할 말 다 끝났으면 가 볼게. 쉬어야지.”
“가지 마. 가면 다음번엔 안 막아줄 거야.”
세이버리가 갑자기 엄포를 놓았다.
“안 막아준다고?”
“내가 한 대 맞고 기절했든, 계속 도망 다니다가 맞고 기절했든 간에 어쨌든 괴수가 나한테 먼저 덤볐다는 거잖아. 다음번에 싸울 일 생기면 나도 바로 도망칠 거라고.”
다음번이라는 게 있을지 궁금했다. 사실 테네브로즈가 짐작하기에 그 다음번이란 흰둥이 사냥이 될 공산이 컸다. 울쿠스와 대화가 잘 되지 않을 경우엔 저항군을 죽이는 방법밖엔 없다고, 란드와르가 말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그는 아이의 투정을 들어주기로 했다.
***
란드와르는 연극 관련 서한을 얻어내자마자 말루카로 돌아왔다. 날이 늦었으니 포도밭 골목에서 하루 잔 뒤 출발할 생각이었다. 뜻밖의 광경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테네브로즈가 침대에 누운 늑대인간 여자애한테 옛날 얘기를 해 주고 있었다. 여자애는 그게 싫지 않은 기색이었다. 시킨 대로 되긴 했는데 보기에 기분이 나빴다. 란드와르는 기겁하며 요정 놈을 끌고 나왔다.
“너는 대체 뭘 했길래 애가 저렇게 됐냐. 괴수 만났다는 얘기는 듣긴 들었는데.”
“뭘 하다뇨. 친해졌습니다.”
“너 무슨··· 사실대로 말하자. 괴수 잡은 다음 그거 제물로 바쳐서 매혹 썼지?”
늑대인간한테는 야스와다 학파의 주문이 잘 먹히지 않는다지만 또 몰랐다. 흰둥이는 괴수의 영혼이 아주 약하니까.
테네브로즈가 억울한 투로 되물었다.
“나으리는 저를 뭐로 보시기에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마법 잘 쓰고, 인신공양도 하고, 암살에도 재능이 있는··· 다재다능한··· 개새끼?”
테네브로즈의 표정이 한층 더 억울하게 변했다. 반박을 하려 했는데 잘 생각해보니 모두 맞는 말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경우는 그게 아니었다. 정말이었다.
“저도 남들이 무엇을 나쁘다고 말하는지는 압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애를 끌고 가서 주문을 거는 건 나쁜 일입니다. 나으리께서 그러라고 명령을 내리면 하겠지만 보통은 안 합니다. 저는 그런 게 싫지 않지만 즐기지도 않습니다.”
이번에는 란드와르가 수긍할 차례였다. 테네브로즈가 죄책감과 정신머리가 동시에 희박한 놈이긴 하지만 딱히 적극적으로 악행을 저지르진 않았다. 시키는 걸 그대로 할 뿐이지.
그러니까, 명령을 내리는 사람의 성향이 중요했다. 나트람은 악당이었고 그래서 놈도 악당이 되었다. 그리고 란드와르는··· 그는 자신이 요정에게 뭐라 할 입장이 아니란 사실을 깨달았다.
란드와르는 이미 테네브로즈에게 몇 가지 악행을 시켰다. 불가피한 면이 컸지만, 일을 편하게 만들려면 어쩔 수 없었지만, 사람을 죽이고 제물로 바치고 정신지배를 거는 건 정의의 사도가 할 짓은 아니었다. 게다가 앞으로는 그럴 일이 더 많을 터였다.
동업자에게 너무 각박해서는 안 됐다.
“알았다. 의심부터 한 건 미안하고, 일이 어떻게 된 거냐.”
“한 대 맞고 기절하기에 업어 왔지요. 괴수는 알아서 처리했고요. 그 정도 했으면 호감 얻기엔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테네브로즈는 그 말을 시작으로 동네 바깥에서 있었던 일을 자세히 설명했다. 울쿠스가 저항군에게 제대로 된 마법을 가르치진 않았으리라는 것과, 소녀의 가족이 꽤나 열성분자일 거라는 예측까지도.
“잘 했네.”
란드와르는 내심 감탄하는 동시에 안타까움을 느꼈다. 테네브로즈는 상상 이상으로 잘 했다. 잘 했는데, 타라곤이 더 중요했다. 두 기회를 모두 붙잡기는 어려워 보였다.
여자아이를 중부의 언니 집으로 돌려보낼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소녀가 테네브로즈에게 호감이 있다 쳐도 그건 또 경우가 달랐다.
“근데 이거 일 접어야 될지도 몰라. 내가 너 데려가려고 온 거거든. 내일 바로 떠날 거야. 더 중요한 게 생겼다.”
“체류 기간 연장 때문에 그러십니까?”
“그것도 있고.”
란드와르는 긴 이야기를 차례대로 늘어놓았다.
타라곤은 스카르파의 연인이었다. 마요르가 왕은 둘을 떼어놓기 위해 혼례 공고를 냈다. 타라곤 역시 구혼자끼리의 결투에 참여했다. 스카르파의 부군이 된 자가 그에게 치명상을 입혔다.
볼로디아는 스카르파를 도와 타라곤을 오두막까지 옮겼다. 타라곤은 거기에서 죽었고 울쿠스가 그 주검을 발견했다. 그리고······.
“보니까 캐러웨이 부인도 알면서 다 눈감아주고 있는 것 같더라. 울쿠스가 아들 역할을 꽤 잘 하고 있어.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냥 효자라고. 실제로는 어떨지 몰라도, 남들 앞에서는 연기력이 엄청 좋아.”
“제 생각에는 연기가 아닌 것 같은데요.”
테네브로즈가 반론했다.
“직접 보지도 않았는데 그걸 어떻게 아냐. 야스와다에서도 엮인 거 없다면서.”
“그래도 소문은 모두 듣고 있습니다. 녀석이 가출한 게 그 할아버지 때문이라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란드와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카두에서, 상황을 정리하느라 나눴던 이야기 중 하나였다.
“그건 기억을 하지. 손자가 추적대 들어가는 걸 방해했다고. 뭐라던가, 쓸데없이 위험한 임무를 받고 황무지에서 죽을 거라고 했던 거 같은데.”
“그게 근거 없는 걱정이 아니란 말입니다. 나트람이 울쿠스의 부모를 그렇게 처리했거든요. 딤 나겔에게는 딸과 사위가 되겠군요.”
불길한 느낌이 엄습했다.
“뭐?”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덕분에 그 꼬마는 무뚝뚝하고 정 없는 할아버지 밑에서 자랐답니다. 애정결핍 환자가 착한 어머니를 만났으니 기분이 좋겠죠.”
테네브로즈가 훈훈한 소식이라도 전하는 것처럼 흐뭇하게 웃었다. 란드와르는 잠시 할 말을 잃어버렸다가 가까스로 정신을 되찾았다. 현기증이 났다.
“솔직하게 말하자. 그거 니가 따라가서 죽였지?”
그는 일전의 판단을 취소했다. 각박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이 새끼한테는 좀 각박할 필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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