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세이버리
“언제까지 따라올 거야?”
테네브로즈는 앞서가는 여자아이를 바라보았다. 이름은 세이버리. 부모님은 없고 언니네에 얹혀사는데, 그 언니와 싸운 뒤에 여기로 보내졌다고 했다.
당사자에게 직접 들은 설명은 아니다. 세이버리를 맡고 있는 삼촌이 이야기해 주었다.
“네가 멈출 때까지.”
세이버리는 보폭을 넓히는 것으로 대답했다. 귀찮은 남자애를 떼어놓으려는 식이었다. 테네브로즈는 함께 걸음을 재촉하면서 어젯밤의 일을 생각했다.
원소학 계열 주문의 위력은 보잘것없는 수준이었지만 배워둔 보람이 있었다. 늑대인간이라 쳐도 결국엔 아이에 불과했으니까.
정확히는 강아지에 가깝겠다. 낯선 사람에게는 으르렁거리다가도 친해지면 금방 꼬리를 흔드는 것들 말이다.
호감을 얻기는 쉬웠다. 삐쩍 말라서 할 수 있는 것도 없겠다면서 무시하는 아이들에게 눈사람을 선물해줬다. 농장 일은 모르지만 이런 건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고.
거기서부터 대화가 시작됐다. 마법을 배운 사연. 카스바의 투기장. 그리고 기타 등등.
이야기가 모두 끝난 다음에도, 한참을 어울려 논 다음에도 테네브로즈를 싫어하는 아이는 하나뿐이었다. 다른 마법사처럼 강한 것도 아니면서 뽐내는 게 꼴 보기 싫다고 했다. 그리고 주먹이 날아들었다.
그게 어제까지의 일이었다.
“약골 주제에 바깥에는 왜 나온 거야? 산맥 근처가 얼마나 위험한지 몰라?”
“말했잖아, 너 보려고 나온 거라고. 그리고 네가 이쪽으로 걸어가니까.”
아이들에게 세이버리가 어디 있냐고 물었더니 마을 바깥에 가 있을 거라는 답이 돌아왔다. 혼자서 산맥 근처를 돌아다닌다는 거였다. 다행히도 멀지 않은 곳에서, 나무둥치에 기대어 앉은 여자애를 찾을 수 있었다.
위협조로 멱살이 잡히긴 했지만 얻어맞진 않았다. 으르렁대던 세이버리는 상대할 가치가 없다는 것처럼 등을 돌려 걸어가기 시작했다. 테네브로즈는 쫓아갔다.
그렇게 한참을 걷고만 있었다.
“괴수 나와도 안 구해줄 거야. 여기부터는 큰 것도 많이 있어.”
“도망가면 되지.”
“그렇게 허약해서 잘도 달리겠다.”
테네브로즈는 슬며시 미소 지으며 약지에 낀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영혼을 담을 수 있도록 각인이 새겨진 것이었다. 작동 여부는 생쥐로 시험하긴 했지만 본격적으로 쓸 기회는 없었다. 어느 정도 덩치가 있는 녀석을 만난다면 좋을 터였다.
“못 도망치면 싸우는 거고. 봤잖아, 내가 마법 쓰는 거.”
“바보야? 그런 거로 어떻게 괴수를 잡아?”
세이버리는 벌컥 짜증을 내더니 이어 말했다.
“별것도 아닌 마법으로 뭐라도 되는 것처럼 굴지 마. 투기장에서 싸웠다는 것도 다 거짓말이잖아. 인간 전사들 시종이나 하는 주제에. 마법은 서커스단에서나 잔재주로 배웠겠지.”
“거짓말은 아니야.”
“아냐, 다들 똑같아. 마법 좀 배웠다고 자기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아. 아무것도 아니면서.”
테네브로즈는 아이의 말이 일종의 화풀이라고 판단했다. 언니와 싸우고 친척집에 보내진 아이였다. 가족 역시 저항군 소속일 터. 분명히, 혈마법과 관련해서 무슨 잡음이 있었을 것이다.
“왜, 제대로 된 마법사도 많잖아. 그런 마법사들은 혼자서 용 날개도 찢는다구. 나도 늪지대를 지나면서 용을 본 적이 있는데······.”
“입만 열면 거짓말이야. 도마뱀만 봐도 놀라서 도망가게 생겼으면서.”
“늪지대에 갔다는 건 뭐라고 안 하네?”
“늪이 뭐? 늪은 나도 본 적 있어. 별거 아니야.”
테네브로즈는 말루카가 고립된 도시라는 점을 상기했다. 카스바는커녕 타일라프람에도 가보지 못했을 어린아이가 요정 제국의 흔적을 알 리가 없었다. 인간 측의 신화에라도 적혀 있으면 몰랐겠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세카두 저택에서 노닥거리는 동안, 아즈리온 전서를 훑어본 적이 있다. 바단과 나우파나의 신을 죽이고 야스와다의 주인에게 치명타를 입힌 내용은 길게 적혀 있었으나 타마기스에 할애된 분량은 아주 적었다. 요정 제국의 수도였지만 대전쟁 초기에 저주를 받고 자멸했다는 게 고작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인간 입장에서는 어찌 됐건 시체들이 몰려나오지만 않는다면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늪지대는 대륙 북단에 위치했고, 그 너머에 있는 것은 황무지뿐이었기 때문이다. 범죄자들이 그 곁에 카스바를 세웠지만 일반인이 엮일 곳은 아니었다.
···테네브로즈는 짧게 고민했다. 걸어 다니는 시체가 된 황제 이야기를 해 주고 거짓말쟁이 소리를 들을지, 아니면 입을 다물지.
전자가 더 재밌어 보였다.
“늪지대는 그냥 늪이랑은 달라. 죽은 요정들이 살아서 움직이는 곳이라고.”
“살아서 움직이면 산 요정이지 그게 뭐야.”
“말 그대로 시체가 움직인다니까. 목을 뽑아서 던졌다가 다시 붙이고 그래.”
“그게 어떻게 돼?”
줄곧 투덜거리던 세이버리였지만 여기에는 흥미를 느끼는 듯했다.
“자, 옛날에는 요정 제국이 있었다는 거 알지? 요정 신들도 여섯이나 살아 있었고.”
요정 신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던 것은 역병의 신, 윰 시밀. 제국을 다스리던 황제는 그의 아들. 대전쟁 초기에 황제는 아버지에게 맞서 힘을 물려받았다. 그리고 불사의 저주가 타마기스를 덮쳤다.
“이상해.”
“뭐가?”
“죽이면 힘이 넘어와? 그러면 푸줏간 아저씨는 힘이 황소 천 마리만큼 세게?”
“음.”
요정의 신은 엄밀히 말하면 단일한 인격이라기보다는 힘이자 지위였다. 신의 심장을 취한 자는 그 권능을 물려받았다···감당할 수만 있다면. 부족한 능력으로 욕심을 부렸다가는 역으로 흡수당하고 말았다.
흡수당하지 않더라도 보통은 결말이 나빴다. 황제가 신격을 얻어내면서 저주에 휩쓸린 것처럼. 요정의 역사에는 비슷한 일을 겪은 이가 몇 남아 있었다. 완전히 미쳐 버리거나 오래도록 자신의 영토에 갇혀야 했던, 불운한 신들이.
신위에 오르면서도 악의에 휩쓸리지 않았던 자는 하나뿐이었다. 방법은 간단했다. 전대 신에게서 허락을 받으면 됐다.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왕위조차도 제 손으로 내려놓는 인간이 없는데.
“황소가 신은 아니잖아. 푸줏간 아저씨도 황제가 아니고.”
물론 테네브로즈는 자세한 사항에 대해서는 함구했다. 늑대인간 소녀 앞에서 줄줄 읊을 내용은 아니었다.
“그래도 말이 안 돼. 그러면 아즈리온이 요정 신들 힘까지 다 먹었어야 하는 거 아니야? 피웅덩이를 남겨두는 게 아니라? 우리 엿 먹으라고 일부러 남겨 뒀대?”
세이버리는 멈춰서더니 테네브로즈를 째려보았다. 한 대 칠 기세였다. 그는 그제야 이 여자애가 늑대인간이라는 점을 되새겼다.
“신들끼리는 그게 안 되나 보지.”
둘러대는 말이긴 했지만 진실이었다. 다른 신을 죽이고 신위까지 얻어내는 게 가능했더라면 요정의 신은 여섯이 아니었을 터였다. 그보다 더 적었거나 아예 하나였겠지.
와그다스의 신은 전투 능력이 아예 없었다. 야스와다와 가디스의 신은 서로 사이가 나빴다. 게다가 굳이 원한 관계가 아니더라도 더 큰 힘을 마다할 이는 없다······.
“나는 누가 거짓말하는 거 싫어해.”
“응?”
“듣기 싫으니까 거짓말은 그만 하라고. 그런 이야기 지어낼 필요 없어. 네가 어디까지 가 봤는지 궁금하지도 않고 네가 하는 말도 안 믿어. 하나도 안 믿어.”
하지만 세이버리는 불만이 많아 보였다. 분위기가 차갑게 얼어붙더니 울분에 찬 목소리가 쏟아졌다. 테네브로즈가 아니라 그 너머의 누군가를 겨누는 듯했다.
“···마법 조금 배웠다고 다 되는 줄 아는 것도 싫고 책임 못 질 소리도 싫어. 안 될 거에 목숨 걸고 싶지도 않아. 자기 분수에 안 맞는 일은 안 했으면 좋겠어. 위험한 것도 싫어. 그냥 살면 되잖아.”
테네브로즈는 그 문장들에 흰둥이 저항군을 대입했다. 가망 없는 투쟁에 진절머리를 내는, 흰둥이 소녀. 가능성은 충분했다. 그걸 발판으로 추론을 뻗어 보자··· 저항군 내부의 사정이 대강이나마 짐작이 갔다. 세이버리가 친척 집에 보내진 이유까지도. 언니 앞에서 똑같은 이야기를 했으리라.
“그냥 살면 된다고. 나는 네가, 키가 작고 마르고 힘이 없어서 싫어하는 게 아니야. 그냥 거짓말쟁이라서 그래. 좋은 소리 좀 해 주면 다 마음에 들어 할 줄 알아. 사실은 아무것도 도와주는 게 없는데.”
울쿠스가 늑대인간들에게 진심으로 혈마법을 가르쳐주진 않았을 터였다. 애초에 그 자체로는 소득이 없는 일이었다. 군부 세력이 호락호락하지도 않거니와 만에 하나, 기적적으로 말루카를 뒤엎더라도, 스카르파가 없으면 능묘에 들어가지 못할 테니까.
사회 전복을 목적으로 저항군을 지원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어째서일까?
스카르파가 그걸 원하기 때문에?
왜?
···테네브로즈는 그 지점에서 생각을 멈췄다.
“아무튼 다 싫어. 다들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 이상해. 이상하고 싫어. 너도 안 그랬으면 좋겠어.”
세이버리의 뒤편에서, 중간 크기의 칼린카가 조용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칼린카는 고양이를 닮은 괴수. 평소에는 고양이 모습으로 있다가, 마력을 흡수하면 뼈대가 부풀며 크기가 커진다.
“일단 뒤를 봐야겠는데.”
동시에 칼린카가 도약했다. 세이버리는 반사적으로 몸을 날려 피하고서는 재빨리 괴수 형상을 취했다. 익숙한 태도였다. 곧이어 급박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괜히 도울 생각 하지 말고 빨리 가!”
테네브로즈는 그 말을 듣기도 전부터 슬금슬금 내빼고 있었다. 몸을 숨기고 있다가, 어떻게든 결판이 나면 그때 모습을 내밀 생각이었다. 위협적인 크기는 아니지만 늑대인간 꼬마 앞에서 요정 마법을 쓸 수는 없으니까.
게다가 제대로 된 주문을 시전하려면 마법진이 필요했다.
“오······.”
멀찍이 물러나서 마법진을 그리던 그는 세이버리의 앞발을 감싼 혈기를 알아보고 짧게 휘파람을 불었다.
혈마법의 계통은 크게 두 가지였다. 괴수를 지배하고 제압하고 강화하고 치료하는 것. 그리고 생명의 기운을 다루는 것.
이시 첼이, 바단의 신이, 괴수들의 주인이 죽은 후로 전자는 사실상 무용한 주문이 되고 말았다. 강화와 치료는 가능했지만, 제압까지도 어느 정도 먹혔지만 지배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단 출신 귀족들이 아니고서야 대부분은 후자만을 수련했다. 야스와다 투전판에서 괴수들에게 강화 마법을 걸고 싸움을 붙인다는 얘기를 듣긴 했으나 직접 보지는 못했다.
테네브로즈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재미있을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어쩔 수 없는 망종임을 알았으며 그 점에 있어 대체로 떳떳했다. 혈마법을 쓰는 늑대인간 꼬마와 괴수가 싸우는 걸 상상했더니 기분이 좋은데 어쩌란 말인가? 즐기는 게 이득 아닌가?
“···이렇게 시시해서야.”
하지만 안타깝게도 즐길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다. 흰 개가 유효타를 넣나 싶더니 반격을 맞고 금방 나가떨어졌던 것이다. 괴수 형상마저 풀린 걸 보면 더 볼 것도 없었다.
테네브로즈는 힘을 끌어올렸다. 암적색의 기운이 골을 따라 흐르더니 일시에 치솟아 한 점으로 뭉쳤다. 칼린카는 소녀의 어깨에 이빨을 박아 넣으려다가 마력의 흐름을 느끼고 몸을 홱 돌렸다.
동시에 피의 창이 괴수의 머리통을 꿰뚫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풀밭이 피범벅으로 변했다. 그는 반지를 낀 손을 가볍게 쥐었다 펴고서는 걸음을 옮겼다. 원소학으로 장난만 치다가 제대로 된 주문을 쓰니 기분이 좋았다.
“뭐야··· 안 도망갔어? 도망가라고 했잖아··· 너처럼 약한 애는 바로 죽는다니까······.”
가까이 다가가자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발치를 간질였다. 의식은 남아 있어도 상황을 분간할 정도는 아닌 모양이었다. 테네브로즈는 말없이 칼린카의 가슴팍에 손을 붙였다. 반지의 각인이 동작하며 금색으로 빛났다. 영혼의 힘이 넘실거리는 게 느껴졌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반지의 성능을 확인했고 비상용 제물도 하나 구했다. 꽤나 성공적인 하루라고 할 수 있었다.
“자, 그러면 이걸 어떻게 한다?”
세이버리가 곧바로 죽을 염려는 없었다. 괴수 형상에서 치명상을 입더라도 인간 형상으로 되돌아오기만 하면 외상은 모두 사라졌던 것이다. 그만큼 영혼에 타격을 입어서 문제일 뿐이지. 보름은 정신을 못 차리고 골골댈 터였다.
따라서 꼬마의 명줄은 테네브로즈의 마음에 달려 있었다.
이대로 내버려두고 마을에 다녀온다면 다른 괴수들은 저녁을 배불리 먹겠다. 자신은 란드와르가 시킨 일 때문에 골머리를 앓지도 않을 테고. 가족들이야 슬프겠지만, 뭐, 멋대로 산맥 근처까지 갔다가 이 꼴이 났다면 누굴 탓할 수도 없다.
그는 가만히 궁리하다가 피식 웃었다.
“얘야, 내가 저승까지도 구경해 보았는데 좋은 곳은 아니더구나. 언젠가, 기회가 되면 그 이야기도 해 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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