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46화 (47/258)

46화. 타라곤

다음날 아침에 타라곤이 둘을 찾아왔다. 이후의 일들을 마저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사무실로 자리를 옮긴 란드와르는 가장 먼저 혼인 이야기를 꺼냈다. 처음에, 체류 기간을 이틀에서 열흘로 늘이기 위해 그 핑계를 댔던 것이다. 펠로시와 볼로디아가 혼례를 올렸고 아이까지 있는 상태라고.

란드와르가 세카두로 향하는 동안 극단 측에서도 장기 체류 수속을 밟을 터였다. 지금의 캐러웨이 부인은 사제들이 방문한 목적을 우편 전달로만 알고 있는 상태. 검문소 서류에 적힌 내용을 미리 납득시키지 않으면 곤란할 수가 있었다.

“이건 언짢아하실 듯해 함구하고 있었던 문제인데······.”

란드와르는 옆을 힐끔 보았다. 혼례를, 당사자가 아니라 그 동생이 앞장서 해명한다면 모양이 이상했다. 똑같은 생각을 떠올린 듯 볼로디아가 운을 받았다.

“내가 말씀드리지.”

그녀는 미리 짜둔 각본을 읊은 다음 한 문장을 덧붙였다. 펠로시가 부인에게는 특히 은혜를 갚고 싶어 하니 배우 역을 맡는 것도 선뜻 허락해 줄 거라고.

캐러웨이 부인은 이야기가 끝나도록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곧이어 무언가를 떠올린 듯 부인의 눈빛에 묘한 이채가 돌았다.

“누구와 혼인을 올리는지는 문제 삼지 않아요. 하지만 사제분은 꼭 예산안을 읊는 군부 장교처럼 말하는군요. 정말로 그 아이를 사랑하나요?”

볼로디아는 잠시 망설이다가 진중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펠로시는 밝고 활발한 사람이오. 사소한 문제는 깊이 생각하지 않는 모습이 좋소. 마주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면 내 고민도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게 되오. 나와는 다른 세계 속에 있는 것 같소. 그게 부럽고 좋소.”

칭찬이라고 하긴 어려웠지만, 사랑하냐는 질문에 대한 답과도 거리가 멀었지만 마음은 충분히 담겨 있었다. 란드와르는 그녀가 진심으로 펠로시를 부러워했으리라 추측했다. 성격과 인생사의 스펙트럼이라는 게 있다면 둘은 완전한 대극에 놓였을 테니까.

부인 역시 비슷한 인상을 받은 듯했다. 비록 자세한 사정은 모를지라도.

“그래요. 우리는 살다 보면 많은 걸 만나고 받아들이게 된답니다. 완전히 다른 것도,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것마저도요. 심지어는 그게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는 걸 알게 되지요.”

내막을 아는 입장에서는 의미심장하게 들리는 문장이었다. 란드와르는 그녀가 무슨 심정으로 울쿠스를 받아들였을지 가늠했고, 침묵했다.

***

란드와르는 정오 무렵 열차에 몸을 실었고, 북부 종착지에서 내렸다. 테네브로즈를 데려가기 전에 먼저 세카두에 들를 생각이었다.

다행히도 체류증 기한이 남아 있었으므로 복잡한 수속을 다시 밟을 필요는 없었다. 차원문을 타고 세카두로 넘어가자마자 곧바로 외곽 수도원으로 향했다. 정보사 수장, 파르타 차테르지가 그를 맞았다.

“체류 기간이 더 필요하다. 스카르파의 배후에 있는 요정을 파악했어.”

파르타도 대강의 사정은 알고 있었다. 말루카로 떠나기 전부터 미리 논의해 두었다. 정보사는 동료들만큼이나 중요한 동업자였으니까.

“외람된 말씀이오나, 일전에 말씀드렸다시피 공식 서한을 보내는 것 외에는 교단 차원에서 지원할 방도가 없습니다. 최대한 주목을 피하는 것이 이롭겠습니다만 저희가 그 뜻을 따르지 못할 듯해 송구스럽습니다. 다만 당신께서 아량을 베푸신다면 또 다른 방법을 강구할 수가 있습니다.”

“말해 보거라.”

답이야 정해 두었지만 란드와르는 괜히 질문을 던졌다. 그 방법이라는 게 궁금했다. 아량을 베풀어야만 할 이유가 뭔지.

“교단은 늑대인간 극단과 협약을 맺고 연극에서 당신의 역할을 맡을 사제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 영향력을 유지할 수단이지요. 다만 올해는 여러 가지 문제가 겹쳐서, 보낼 자가 마땅치 못한 상황입니다.”

하려던 말을 상대의 입으로 듣게 되자 기분이 묘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파르타가 그걸 떠올리지 못할 리가 없었다. 정보사는 아즈리온 교단을 주축으로 한 기밀 정보기관. 교단의 일쯤은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게 당연했다.

긴 설명은 필요하지 않을 듯했다.

“이미 캐러웨이 극단과 협의를 봤다. 볼로디아가 그 배역을 맡을 테고, 나와 요정은 동행이 된다. 세카두 대교구에 사람을 보내서 남은 절차를 처리해라.”

***

벨레다는 저택에 공간을 연결하자마자 공방에서 살기 시작했다. 인간 장인들과 의견차가 심하다고 했다. 덕분에 헤이딘은 골치가 아팠다. 제멋대로 제자를 들이더니 그걸 또 자신에게 떠넘긴 것이다.

이해는 했다. 부적 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는 헤이딘이 펠로시를 맡을 수밖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자신이 좋은 스승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연히 펠로시도 좋은 제자가 아니었다.

“정리하자. 혼 문절은 한 개 이하의, 긍정적 논리구를 지니는 절이다. 각인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모든 문장을 혼 문절로 표현해야 한다는 점을 명심하거라.”

펠로시는 머뭇거리다가 대꾸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는데요······.”

“천천히 곱씹어 보아라. 내가 어려운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잖으냐.”

늑대인간은 멍한 표정으로 요정을 바라보기만 했다. 요정은 한숨을 내쉬었다. 종족차별적인 이유는 아니었다. 헤이딘은 그냥 자신의 설명을 이해하지 못하는 존재를 보면 속이 터졌다. 그게 요정이건, 인간이건, 늑대인간이건 간에.

그건 헤이딘이 벨레다를 아끼는 이유기도 했다.

물론 이 늑대인간이 벨레다만큼 똑똑할 거란 기대는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 하나를 알려주면 열을 알아서 깨닫는 아이는 이 땅 전체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적을 테니까.

하지만 하나를 가르치면 하나는 배워야 되는 것이 아닌가?

아닌가?

“솔직히 말해 보거라. 이게 그렇게 어려우냐?”

“예! 어렵네요.”

헤이딘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당당하게 인정하는 펠로시 앞에서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가 느끼기에 지금 다룬 내용은 물이 축축하다는 것과 동일한 수준의 진술이었다.

도대체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단 말인가?

물은 축축하고, 불은 뜨겁고, 혼 문절은 논리곱 정규형의 부분집합이자 일차 술어논리의 한 형태로서 와그다스 각인의 기본 단위였다. 간단했다. 이건 계산이나 증명조차 아니라 정의에 불과했다.

“왜? 이게 왜 어렵지? 벨레다가 여덟 살에 모두 이해한 건데?”

“그거를··· 저한테 물어보시면··· 안 되지··· 않을까요?”

펠로시는 더듬거리면서도 할 말을 했다. 사실 그녀로서도 억울한 점이 많았다. 처음에는 요정 소년을 보고 깜짝 놀랐는데 이제 그런 건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문제가 되고 말았다. 차라리 사악한 요정 마법사한테 붙잡혀서 인체실험을 당하는 게 나을 뻔했다.

“나는 어렵지 않으니, 벨레다도 마찬가지였으니 어렵다는 사람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는 게 아니겠느냐.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말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펠로시는 인생이 쉽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도박장에서 전 재산을 날리고, 카스바에서 노예가 될 뻔했다가, 수도원에 갇혔고 이제는 이 꼴이 났다.

말루카의 마법 학교에 다니던 시절이 떠올랐다. 미친 강사가 하나 있었다. 칠판을 판서로 가득 채우면서 알쏭달쏭한 말을 끝없이 늘어놓던 강사가. 아무도 수업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시험은 항상 어렵게 나왔다.

채점이 끝난 다음이면 그는 혼자 화가 나서 연단을 돌아다녔다. 아니, 제군들은 대체 그 머리로 무슨 마법 이론을 배우겠다는 건가? 그렇게 계산이 안 되고 암기가 안 되는데 자기 이름은 어떻게 외우고 다니나?

그 선생보다 더 미친 사람은 처음이었다. 펠로시는 마음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아즈리온이시여, 레오나시여, 아무튼 인간의 신들이시여. 아니, 요정의 신이라도 괜찮습니다. 누구든 좋으니 절 좀 여기서 빼내 주세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오랜만이오.”

“고생 많으십니다. 이 녀석 좀 잠깐 쓰겠습니다.”

“쓰겠다고? 무슨 쓸모가 있는 아이요? 이해력이 영 부족한데.”

“일단은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가 하늘에 닿았다.

***

펠로시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구원자를 껴안았다.

란드와르는 늑대인간을 칼같이 떼어낸 뒤 거실로 끌고 나왔다. 할 말이 많았다. 포도밭 골목에서 있었던 일들과 친척들의 반응을 모두 전해주고서는 잔소리를 덧붙였다.

“도박 빚 문제는 해결됐다 치고, 너는 좀 잘 해라. 며칠이나 됐다고 벌써부터 이해력이 부족하단 소리를 듣고 있냐. 이왕 일 돕는 거 쓸모가 있어야지.”

“그래도 지금까지 살면서 멍청하단 평가는··· 거의 못 받았는데요··· 학교에서는 수석 자리도 따 봤구요······.”

평소라면 수석이 맞았는지를 의심했겠지만, 거짓말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말루카에서 들은 이야기가 있었으니까. 펠로시는 보통 사람치고는 똑똑한 수준이었을 터였다.

보통 사람치고는.

“그래, 씨발, 니 잘못은 아니지. 니 잘못은 아닌데.”

란드와르는 펠로시를 이해했다. 사실 자신이라고 해서 헤이딘에게 배울 머리가 되진 못했다. 똑같은 입장이었더라면 순식간에 영혼이 털렸을 터였다. 이건 추측조차 아니다. 그 역시도 헤이딘에게 시달린 적이 있으니까.

머리가 잘 돌아가는 건 죄가 아니다. 하지만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이 자신의 클럭 속도를 남한테 강요하는 건 죄다.

갇혀만 지냈던 게 원인일 듯했다. 감금당한 상태로 수십 년을 살다 보니 평범한 사람에게 맞춰 주는 법을 잊어버린 것이다. 하필이면 벨레다까지 천재라서 그걸 깨달을 기회는 영영 물 건너가고 말았다.

결국 나트람이 원흉이었다. 꼭 죽여야겠다는 다짐이 섰다.

“아무튼 할 거 많다. 종이랑 필기구 들고 와서 앉아. 편지 다시 써야 돼.”

“잃어버린 거라도 있어요?”

“설마 그랬겠냐. 완전히 새로 쓸 거야.”

펠로시가 맞은편에 앉자 그는 검문소에서 있었던 일을 천천히 설명했다.

“봐라, 검문소 서류상으로 우리는 너랑 타우베스의 혼인 때문에 말루카에 온 거야. 그런데 그 사제가 갑자기 아내는 내버려두고 배우 노릇을 한다고 하면 얼마나 이상하겠냐. 검문소 측에 둘러댈 말이 따로 필요하다고.”

늑대인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잠깐만요, 검문소 직원한테 그걸 보여줬어요? 두 번째 소개장요?”

“안 보여줄 거면 왜 쓰라고 했겠냐. 여기 오기 전에, 캐러웨이 부인한테도 미리 말했어. 행복하면 괜찮다더라.”

펠로시는 경악한 표정으로 입을 벌리고 가만히 굳어 있었다. 잠깐의 시간이 지났다. 그녀는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다가, 맥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무언가 중요한 걸 놓아버린 투였다.

“그래도 출세했네요. 대장군님이랑 혼례도 올리고요.”

태도가 돌변한 건 그 순간이었다. 펠로시의 눈이 갑자기 반짝였다.

“잠깐만요, 대장군님이 쫓겨난 게 누명 때문이라고 했잖아요. 이번에 누명 풀러 가는 거고. 그러면 그 다음에는 우리 대장군님이 왕 되는 거 아니에요?”

“아마 그렇겠지.”

“그럼 나도 후궁이잖아요.”

란드와르는 펠로시가 여러 가지로 개방적인 사고방식의 소유자라고 생각했다. 혹은 아무런 잣대가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거나. 펠로시와 볼로디아가 같은 종족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지경이었다.

하기야 인간도 저마다, 천양지차로 다르긴 하지만······.

“자, 개소리 멈추고 받아 적어라.”

“네?”

“편지 쓰자고. 안 어울린다 싶은 단어는 알아서 바꿔도 된다. <펠로시입니다. 캐러웨이 부인께서 마땅한 배우가 없어서 곤란하시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일찍이 부인께 진 빚이 크니 제 바깥사람을······.>”

펜이 사각거리는 소리가 거실을 가득 채웠다. 조용하니 좋았다.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