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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45화 (46/258)

45화. 타라곤

“···그래, 이제 기억이 나오. 스카르파가 보낸 급보였는데 봉인이 단단히 되어 있었소. 능묘에 무슨 변고가 일어난 것 같으니 다른 이에게는 말하지 않는 게 좋겠다더군. 이유는 비밀로 감추고 차원문을 탔소.”

“그게 마지막이었겠군요.”

볼로디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능묘에 들어갔고, 피 냄새를 맡았고, 어머니를 죽였소. 사정을 모르는 이들에게는 오해를 사기 딱 좋은 장면이었을 거요. 나는 어머니와 거의 연락하지 않았고, 북부 기지에서는 온종일 무언가를 죽일 궁리만 하고 있었으니까······.”

무거워진 분위기 속에서, 란드와르는 말루카 왕실의 관계도를 세워 보았다. 어머니는 성격파탄자였고 동생은 정신이 나갔다. 당사자는 심각한 우울증을 앓고 있는 듯했는데 겪은 일에 비하면 양호한 수준이었다.

이강현의 인생도 좆같다면 좆같았지만 볼로디아에 비하면 달달했다. 그래서인지 위로할 말이 마땅치 않았다.

문득 말루카에 심리상담소를 개업하면 돈을 갈퀴로 긁어모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멀쩡한 인간도 정신병자로 만드는 동네니까. 물론 착하고 유쾌한 사람도 있긴 있다. 캐러웨이 부인이나 포도밭 골목 흰둥이들이 그런 것처럼.

당연히 세상에는 좋은 사람이 나쁜 사람보다 많다. 비극은 나쁜 사람 한 명이 착한 사람 아홉 명을 이긴다는 데에서 온다.

그건 권력가는 악하고 민중은 선하다, 류의 이야기와는 다르다. 개새끼 하나가 깽판 놓은 걸 수습하려면 그 이상의 착한 사람이 필요하다는 뜻일 뿐이다. 복구가 아니라 수습만으로도. 복구는 대개 불가능하다.

···마요르가도 선왕에게 당한 게 꽤나 많아 보였지만 그 점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자신은 가족 상담 클리닉을 온 게 아니라 그 가족을 죽이러 온 것이니까.

란드와르는 대화를 선택지에서 진작 빼놓은 상태였다. 죽일 수밖에 없었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스카르파는 벨레다와 경우가 달랐다. 정신이 오락가락하는데다가 옆에는 요정까지 끼고 있다. 요정은 옛 애인 행세를 하면서 피웅덩이를 노린다.

견적은 충분했다. 볼로디아의 심경이 관건이었다.

“저는 예정된 일을 마치려 합니다. 대장군님의 뜻을 밝혀 주십시오.”

예정된 일, 이란 당연하게도 스카르파와 울쿠스를 죽이고 피웅덩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네 달 안에. 그러지 않으면 볼로디아는 옛 신의 피 때문에 완전히 미쳐 버린다.

“스카르파가 정말로 예언의 아이였더라면, 혹은 인간 집안에 태어났더라면 어땠을지 생각한 날이 많소. 나는 여전히 그 아이를 동정하오. 하지만 사사로운 정에 붙잡혀서는 안 되는 일도 있는 법이오.”

“동의하신단 말씀이시지요.”

“명예나 지위 때문에 사람을 죽이고 싶지는 않소. 하지만 피웅덩이는 우리네 삶의 문제요. 나는 왕위가 아니라 이 땅의 목숨을 위해 싸워야 하오.”

확답까지 들었는데도 마음이 무거웠다. 여기에서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건 쓰레기나 할 짓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 그래요? 빠른 결정 감사드리고, 이제 스카르파를 죽일 계획을 짜 봅시다. 제정신으로 할 이야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야 했다. 그는 긴 망설임 끝에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논의를 계속해 봅시다. 만약 중간에라도, 술이 필요하다 싶으면 말씀하십시오. 떠날 때 작은 병을 받아왔거든요.”

“나는 취한 상태를 좋아하지 않소. 나쁜 기억이 되살아나거든··· 이대로 이야기하지.”

포도밭 골목에서 술자리를 피한 까닭을 알 것 같았다. 란드와르는 짧게 헛기침하고서는 운을 뗐다.

“대장군님은 왕실의 사람들에게 타라곤이 살아 있다고 말씀하셨죠. 그 거짓말이 생사 여부에 공백을 남겼을 겁니다. 엄청나진 않아도 파고들 여지가 있는 공백을요.”

그건 신빙성은 부족하지만 진위 여부를 밝혀낼 필요도 없는 주장으로 간주되었을 터였다. 흰둥이 배우가 살았건 죽었건 중요한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스카르파는 펜닐과 혼례를 올렸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울쿠스가 그 공백을 이용했다고 치면 이해가 됩니다. 여기서부터는 지하 통로가 중요해집니다. 거기에 접근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요.”

“논리에 생략된 부분이 있는 것 같소.”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가능성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 가능성은, 타라곤이 죽자마자 스카르파가 요정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작당을 했겠죠. 타라곤이 살아 있다고 말한 건 단순한 현실 부정이 아니라 울쿠스를 잠입시킬 수작이었던 겁니다.”

볼로디아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닐 거요. 그럴 상태도 아니었거니와 다른 자의 흔적이 조금이라도 있었더라면 내가 먼저 알았을 테니.”

“그렇다면 두 번째 가능성으로 넘어갑시다. 요정은 산을 헤매다가 버려진 오두막에 들어섰고, 흰둥이의 주검을 본 다음, 자신이 그 신분을 차지하기로 마음먹은 겁니다.”

겨울의 산맥에서 맨몸으로 살아남기란 불가능했다. 도시에 침투하지도 못한다. 그 상황에서 오두막을 발견한다면 누굴 만나든 간에 일단 들어가 보는 수밖에 없다.

심지어 주인은 이미 죽은데다가 근처에는 구덩이까지 파여 있다. 시체를 구덩이에 숨긴 뒤 똑같은 모습으로 환술을 쓴다. 만일 다른 늑대인간과 마주치더라도 의심을 사지 않도록. 울쿠스에게는 당연한 선택이었을 터였다.

“내가 알기로, 스카르파는 늦은 봄이 되어서야 처음 바깥으로 나왔소. 그전까지는 별채에 앉아만 있었지. 시체는 그때쯤이면 이미 썩어 문드러졌을 테니, 요정은 한겨울에 오두막을 찾아낸 뒤 그곳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는 말이 되오.”

볼로디아는 그 지점에서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군부 대원이 울쿠스를 보았더라면 그 즉시 볼로디아에게도 소식이 들어갔을 테니까. 울쿠스를 처음으로 만난 건, 그 존재를 한동안 비밀에 부친 건 스카르파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오두막은 늦은 봄까지 완전히 버려진 상태였어야 했다.

“지하 통로와 차원문을 쓸 수 있는 것은 왕실의 혈족뿐이오. 암호가 걸려 있거든.”

비밀 통로는 수백 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었다. 왕족들이 칼부림을 벌이고 서로를 물어뜯던 시절에.

왕권은 그 혈통으로부터, 선조의 능묘를 여는 힘으로부터 왔다. 능묘에 들어설 수만 있다면 누가 왕좌에 오르건 괜찮다는 뜻이었다. 성공한 모반은 죄가 아니었고 대장군들도 그 정통성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왕족은 언제나 기회를 노렸다. 왕들은 강박적으로 비밀 통로와 차원문을 설치했다. 시간이 흐르고 치세가 안정되면서 어떤 것은 잊혔지만 어떤 것은 남았다. 오두막까지 이어지는 통로가 개중 하나였다.

“군부 대원은 물론이고 왕녀의 부군에게도 그 암호는 알려주고 있지 않소. 어머니께서 타라곤의 시체를 직접 거둘 분도 아니고 말이오. 그러니 일부러 오두막을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거요. 스카르파가 외출에 나서기 전까지는.”

“두 번째군요.”

란드와르는 잠시 말을 멈추고 지금까지의 추측을 정리했다. 울쿠스는 무슨 이유로건 겨울부터 봄까지 그 오두막에 머물러 있었다. 타라곤의 얼굴을 빌린 채로. 오두막에 들르는 이가 없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스카르파와 마주쳤다.

“어쨌거나 스카르파는 요정을 받아들였습니다. 요정도 스카르파에게 이용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지요.”

스카르파에게 울쿠스는 타라곤의 대용품이자 복수의 수단이었다. 울쿠스에게 스카르파는 피웅덩이로 향하는 열쇠였다. 서로의 뜻이 일치한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방향만큼은 비슷했다.

“그리고 여기에, 동지가 한 명 더 있습니다. 대장군께서도 아는 사람입니다.”

“캐러웨이 부인이겠군.”

란드와르는 고개를 끄덕여 긍정을 표했다. 울쿠스가 타라곤 행세를 하려면 가족의 도움이 필수적이었다. 기억을 잃어버렸다는 변명으로는 면피할 수 없는 순간이 있으니까.

캐러웨이 부인은 울쿠스에게 타라곤의 행동을 가르쳤을 것이다. 이유는 충분했다. 그 속에 들어 있는 게 요정일지라도, 아들을 곁에 두고 싶었을 것이다. 거기에 피웅덩이만큼의 가치가 있다고 느꼈을 것이다.

도시에 충성을 바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중부 외곽지에 혈마법을 배우는 자들이 있다고 했지. 캐러웨이 극단과 연관이 깊을 테고.”

“그건 아니라 봅니다. 만약 연관이 있다 쳐도 깊이 엮이진 않았을 겁니다.”

“장담하는 근거가 듣고 싶소.”

만약 캐러웨이 극단이 공략의 필수요소였더라면 게임에서도 묘사가 되었을 터.

비록 천계 놈들이 시뮬레이터를 허술하게 만들어 놓긴 했지만, 그 전개 역시 란드와르의 성미엔 차지 않는 것뿐이었지만, 때려죽이는 종류의 파훼법만큼은 명시하고 있었다.

딱히 극단을 들쑤시지 않아도, 저항군만을 죽이더라도 해결이 되었으므로 시나리오에 나오지 않은 것이다.

란드와르는 이 부분을 어떻게 설명할까 고민했다.

“천계의 판단입니다. 자세히는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윗분들 핑계를 대고 넘어가야겠다는 계산이 섰다. 아주 틀린 말도 아니니까.

“그렇다면 더 묻지 않겠소.”

볼로디아가 곧바로 수긍하는 걸 보자 옛날 사람들이 온갖 이상 현상에 하늘의 뜻을 가져다 붙이던 심정이 이해가 갔다. 일이 편해서 좋았다.

“하려던 이야기를 계속 하겠습니다. 제가 보기에, 울쿠스는 두 개의 신분을 엄격히 구분했던 것 같습니다. 캐러웨이 부인의 아들과 저항군의 조력자는 서로 다른 사람이었단 소리입니다.”

그는 게임상에서의 의문을 복기했다.

일단 울쿠스는 저항군 소속이 아니었다. 한 달에 두어 번씩, 정해진 일자에 만나 도움을 줄 뿐이다. 그렇다면 남은 시간 동안에는 어디에 있었을까? 스카르파와는 어떻게 관계를 유지했을까?

최종전에서는 능묘에 숨어 있던 울쿠스와 전투를 벌이긴 하지만, 줄곧 지하에서 살아왔다기에는 석연찮은 부분이 많다. 요정도 결국엔 피와 살을 지닌 생명체. 스카르파가 직접 식량을 조달했다면 진작 들켰을 것이다.

타라곤이 바로 해답이었다. 전투와는, 저항군 파트와는 관련이 없기 때문에 생략되었을 뿐이다.

“캐러웨이 부인이 말하길, 타라곤이 사고를 당하고 사무실 일을 돕기 시작한 게 다섯 해 전이라고 했지요. 진짜는 일곱 해 전에 죽었으니 두 해나 차이가 나는 것 같지만, 잘 따져보면 큰 문제가 없습니다. 저건 그냥 다섯 해 전부터 사무실 일을 도왔단 소리일 뿐이에요.”

타라곤은 7년 전에 죽었고, 5년 전에 말루카에 다시 모습을 내밀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사무실 일을 돕기 시작했다. 무대에 오르진 않고.

간격의 존재는 당연했다. 울쿠스와 스카르파가 접촉한 게 여섯 해 전 초봄이라 쳐도, 곧바로 도시에 들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볼로디아와 마요르가를 제거하고, 캐러웨이 부인을 설득하고, 울쿠스에게 말루카의 법도를 가르치는 데에는 긴 시간이 필요했으리라.

“타라곤의 신분에는 두 가지 용도가 있습니다. 말루카에 안정적으로 머무르면서 스카르파와 접촉하는 겁니다. 불상사가 있긴 했지만 캐러웨이 극단은 여전히 군부 공연을 맡고 있고, 극단의 사무원이라면 그걸 빌미로 왕실에도 드나들 수 있으니까요.”

볼로디아가 스스로 정답을 찾아가는 데에는 이 정도의 설명만으로도 충분했다. 전제가 주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결론을 받아들이기는 어려울지라도, 결론으로부터 전제를 역산하기는 쉬우니까.

“아, 알겠소. 그 경우에는 관련성을 최대한 없앨 수밖에 없지.”

“맞습니다.”

흰둥이 저항군들은 언제든 군부에 끌려갈 수 있는 존재. 까딱해서 타라곤이 엮여든다면 일이 복잡해진다. 캐러웨이 극단은 물론이고 스카르파까지 이어지는, 기나긴 도화선이 생기는 것이다. 그 사태를 막으려면 신분을 따로 관리해야만 한다.

물론 석연찮은 부분은 있었다. 울쿠스가 본격적인 행동에 나서는 기점은 흰둥이 저항군의 몰살이었던 것이다. 그 동기는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아니, 애초에 흰둥이들에게 혈마법을 가르친 저의조차도. 군부에 대항하기엔 너무 사소한 전력이었다.

“이제 타라곤의 정체를 알았으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따져볼 차례입니다.”

계획은 이랬다. 볼로디아를 극단에 남겨둔 다음, 란드와르는 마력철도를 타고 북부 기지로 돌아가는 것이다. 세카두에 들러서 상황을 알려야 할 테니까. 교단 소개장을 새로 받아온 뒤 테네브로즈와 함께 중부로 돌아온다. 그리고 타라곤과 독대할 기회를 노린다.

“요정 녀석은 동족을 배신하기 전까지만 해도 야스와다의 고위급 신관이었습니다. 울쿠스에게 명령을 내릴 정도는 되지요. 그걸 이용해 보려 합니다.”

“소녀와 친해져 보라고 지시를 내렸던 것 같은데, 하긴 이 상황에서는 쓸모가 딱히 없겠군.”

볼로디아가 지나가는 투로 지적했다. 그는 요정 놈에게 맡겼던 임무를 떠올렸다. 중요성이 떨어지긴 했지만 아예 계산에서 제할 마음은 없었다. 흰둥이 저항군은 울쿠스의 행동에서 엄청난 변수였으니까.

“그것도 어떻게든 활용해 보려 합니다. 가능하다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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