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타라곤
볼로디아는 타라곤을 북부 기지로 데려간 후 검술을 가르쳤다. 며칠에 한 번씩은 스카르파를 볼 수 있도록 중부 기지로 이어지는 차원문을 열어 주기도 했다. 그건 동생에게, 혹은 타라곤에게 베풀 수 있는 최대한의 자비였다.
하지만 볼로디아 자신은 공개 결투 전날까지 중부에 다시 들르지 않았다. 어머니나 동생을 마주하는 일도 없었다. 왕실에 엮인 일이라면 무엇이든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매일 밤마다 산맥으로 도망쳤다. 늑대 형상을 취하고 갖가지 괴수들을 찢어발겼다.
“표정이 좋지 않구나.”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산맥의 괴수 중 하나로 태어났더라면 훨씬 행복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요. 괴수들은 서로 물어뜯고 할퀴고 피를 흘립니다. 그러면서도 아무런 상념이나 원한을 남기지 않습니다. 죄책감이 없으므로 동정이나 자비 또한 필요하지 않습니다.”
“수없이 말하지 않았느냐. 혈통에는 의무가 따른다.”
그것은 볼로디아가 서른 해가 조금 넘는 시간에 걸쳐 지겹게도 배워 온 사실이었다. 알고 싶었던 적은 없었다. 지금조차도.
공개 결투장의 관객석은 군부 제복으로 가득했다. 대부분은 구혼자의 가족이나 동료들이었다. 그 사이에서 흰둥이 특유의 하얀 머리카락은 확연히 눈에 띄었다. 캐러웨이 부인이었다.
부인은 결말을 예감한 것처럼 검은 드레스를 갖춰 입은 채 어깨를 움츠리고 있었다.
볼로디아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고개를 숙였다. 결투가 살인까지 이어지는 경우는 흔치 않았지만, 사나운 순혈 남자들이 건방진 흰둥이를 내버려둘 리가 없었다. 타라곤은 여기에서 죽을 것이다. 자신이 그를 사지로 밀어 넣는 것이다.
“혈통도, 의무도, 제가 원한 게 아닙니다. 어머니께서 주셨을 뿐입니다. 언제든 가져가셔도 좋습니다.”
“내가 준 건 목숨뿐이다. 나머지는 모두 네 것이야. 이 도시 전체가 네 몫이 되겠지.”
볼로디아는 답하는 대신 경기장으로 시선을 옮겼다. 벌써 두 차례의 결투가 끝났고 다음 대진을 위해 종이표를 뽑는 중이었다.
그녀는 먼저 경기장에 나타난 남자를 알아보았다. 펜닐. 검술로 유명한 중부 장교였다. 힘 자체는 비할 바가 아니지만, 뛰어난 기교로 여자 대원 몇몇을 결투에서 이긴 적도 있었다. 남자끼리의 싸움이라면 손쉽게 승리를 거머쥘 터였다.
사실 볼로디아는 펜닐을 스카르파의 부군으로 점치고 있었다. 그렇다면 상대방은······.
“캐러웨이의 아들, 타라곤!”
감독관이 함에서 종이표를 꺼내 맞상대의 이름을 부르자마자 볼로디아의 얼굴이 굳었다. 마요르가도 비슷한 생각을 떠올린 듯 비릿한 웃음을 입가에 그렸다.
“참으로 공교롭구나.”
“이건··· 그만두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멈춰야 합니다. 최소한 표를 다시 뽑게 해 주십시오.”
타라곤이 죽기 위해 이곳에 왔다는 것은 알았다. 볼로디아는 그 결정을 존중했다. 하지만 옛 애인을 죽인 남자를 부군으로 맞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건 스카르파에게나 타라곤에게나 잔인한 일이었다.
“운명이 그 둘을 골랐거늘, 무슨 명분으로 그런단 말이냐?”
“운명이 아닙니다. 어머니께서, 이 도시의 주인께서 바꿀 수 있는 일입니다.”
“피에는 명예가 깃들어 있지. 그런 이유로 결투가 취소되거나 상대가 달라진 적은 없다.”
스카르파는 어머니나 언니와는 따로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감독관의 뒤편에서, 어울리지 않는 화환을 머리에 얹고. 그녀는 절박한 표정으로 볼로디아를 바라보았다.
긴 고민 끝에 볼로디아는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었다. 야유 섞인 함성이, 매서운 겨울바람이 귓가에서 윙윙 울렸다. 피 냄새마저 났다. 눈을 감으면 산 한복판에 있으리라 착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오랫동안 그 상태로 굳어 있었다. 절규가 모든 소음을 압도하고 소름끼치는 침묵이 찾아올 때까지.
“안 돼, 아니야, 아니야······.”
경기장에 뛰어든 스카르파는 타라곤을 일으켜 세우려 애썼다. 하얀 드레스가 피로 물들건 말건 신경 쓰지 않고. 굴러 떨어진 화환이 피웅덩이에 잠기는 순간 볼로디아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번뜩였다.
그녀는 서둘러 모래판으로 내려갔고, 타라곤을 들쳐 업었다. 그리고 스카르파와 함께 경기장을 떠났다. 북부 대장군을 막아서는 이는 없었다. 왕의 직속 부관들이 이후의 일을 논의하기 위해 상석으로 올라왔을 뿐이었다.
“왕이시여, 명을 내려 주십시오.”
마요르가 왕은 차갑게 미소 지었고,
“결투는 계속된다. 스카르파는 정당한 절차에 따라 혼례를 치를 것이다.”
선언했다.
***
볼로디아는 타라곤을 왕실의 치유사에게 보여주었지만 살려낼 수 없다는 대답만을 들었다. 최선을 다하더라도 혼수상태를 유지하는 게 고작일 거라고 했다.
스카르파는 울지 않았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똑같은 말만을 거듭 중얼거릴 뿐이었다. 오두막으로 가자고. 오두막의 침상에 타라곤을 뉘여 달라고.
볼로디아는 그대로 했다. 그리고 죽은 연인 앞에 가만히 앉아 있는 동생을 내려다보다가 도시로 돌아왔다.
“돌발행동은 문제 삼지 않겠다. 대신 그 아이를 내일까지는 데려오거라.”
시합은 그새 속행되어 결과를 내어놓고 있었다. 마지막 승자는 펜닐이었다. 생각은 많았지만 똑바로 할 수 있는 말은 적었다. 입을 열기만 하면 수십 년간 쌓여온 문장들이 울컥거리며 쏟아졌기 때문이다.
“···저는 지금껏 훌륭한 딸이자 모범적인 군부 대원이었습니다. 어머니께서, 이 도시가 그것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무슨 소리를 하고 싶으냐?”
“완전히 잘못 살아온 게 아니었을까 하는 후회입니다. 저는 혈통을 포기하고 산에 틀어박힐 수 있었습니다. 그랬어야 했습니다. 10년도 더 전에 말입니다. 그리고.”
차가운 질타가 말허리를 잘랐다.
“나약한 소리를 늘어놓기에는 너무 늦었다. 책임이 버거웠더라면 성년식을 치르기 전에 도망갔어야지.”
“예, 너무 늦었지요. 저도 압니다. 하지만 세상은 하나의 사건으로만 이루어져 있지는 않습니다. 첫 기회를 놓쳤더라도 다음 순간을 노려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말씀을 듣다 보니, 이게 바로 두 번째 기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볼로디아는 일어서며 허리춤에 매단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궁내에서 칼을 패용하는 것은 역모로 간주될 수 있는 문제였지만, 그녀는 북부 대장군이자 첫째 왕녀로서 충분한 무장을 허락받았다. 검신이 칼집을 벗어나며 싸늘한 빛을 흘렸다.
“확신은 서지 않습니다. 허나 이래야 한다는 느낌이 듭니다.”
볼로디아는 마요르가의 목가에 날을 겨눴다. 작은 상처를 내고, 피가 날을 따라 흐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반격하려는 기색은 없었다.
계산은 쉬웠다. 이대로 마요르가를 죽인다 해서 군부에서 반기를 들고 나서진 않을 터였다. 왕가의 문제는 왕가의 혈통끼리만 단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순혈 가문은 선조의 능묘를 열지 못하므로.
하지만 확신이 서지 않았다. 왕으로서의 소임을 다할 자신이 없었다. 그건 북부에 틀어박혀 몰려오는 괴수들을 도륙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일이었다.
“너는 한 번도 왕좌를 탐내지 않았지.”
무언가를 절실히 원했던 적이 없었다.
살고 싶었던 적조차 없었다.
그래서 의무를 충실히 따를 수 있었다.
“나는 네게 갈망을, 증오를, 결의를 심어주려 했다.”
사실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이보다 더한 책임을 짊어지고 싶지 않았다.
“이제는 준비가 된 모양이구나.”
지금조차도.
“그대로 힘을 주면 된다. 이 도시를 네 것으로 만들거라.”
볼로디아는 칼을 거뒀다.
***
집무실을 나와 복도를 밟자마자 볼로디아는 직전의 선택을 후회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요르가를 죽일 마음이 선 것은 아니었다.
스카르파를 위해서라면 그래야 한다는 걸 아는데도.
그녀는 잠시 멈췄고, 매일이 오늘이기를 기도했다. 개인의 번민 때문에 시간의 운행을 가로막을 만큼 오만하지는 않았다. 다만 닥쳐올 파멸로부터 눈을 돌리고 싶을 뿐이었다. 볼로디아는 단호하게 삶에 맞서기에는 자신이 너무 심약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만약 평범한 순혈이었더라면 이런 일 또한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뒤틀린 선택지 앞에서 갈등하기는커녕 유망한 군부 대원으로 살아갔을 터였다.
아니, 차라리 인간이었더라면.
모든 문제는 그녀가 왕의 딸이라는 데에서 왔다. 볼로디아는 그 지점에서 생각을 멈췄다. 누구의 탓이건 하고 싶지 않았다. 뻔히 보이는 해답을 거부한 것은 오로지 자신이었다.
***
볼로디아는 삽을 챙겨 별채의 차원문을 탔다. 지하 통로를 타고 나오자 삭막한 겨울 산기슭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녀는 오두막 근처의 평지를 골라 파기 시작했다. 땅은 딱딱하게 얼어 있어서 석회석을 삽으로 떠내려는 것 같았다.
살갗이 벗겨지며 손에서 피가 배어났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어떤 피를 흘리더라도 비겁함을 씻어내지는 못할 듯했다. 볼로디아는 끝없이 자학하다가, 자학마저도 자기만족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까마득한 흑암이 낱말들을 씹어 삼키며 넓어져갔다.
무덤을 모두 만든 뒤에야 생각이 되돌아왔다. 볼로디아는 오래도록 망설인 끝에 오두막 문을 열었다. 바깥만큼은 아니지만 싸늘한 공기였다. 스카르파는 그녀가 타라곤을 데려다주었을 때와 똑같이, 침대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있었다. 한 번도 움직이지 않은 듯했다.
“동생아, 돌아가자.”
볼로디아는 나지막이 말했다. 어머니 이야기는 일부러 입에 담지 않았다. 돌아오는 말이 없었다.
“네가 여기에서 얼어 죽도록 내버려두고 싶지 않다.”
누구를 위한 일인지는 불명이었지만, 어쩌면 자신만의 욕심인지도 몰랐지만, 스카르파가 죽도록 두고 싶지 않았다. 무슨 이유로건.
“···나는 그럴 수가 없단 말이다.”
볼로디아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침대로 향했다. 주검을 무덤으로 옮기기 위해서였다. 피가 침대보 위에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등허리에 손을 밀어 넣고 타라곤의 윗몸을 일으켜 세우자 얼음 결정이 반으로 부러지며 엉긴 핏덩어리와 섞여들었다.
“어머니한테 데려가지 마.”
순간 마른 손이 볼로디아를 제지했다. 가느다랗지만 기묘한 힘이 있는 목소리였다.
“그런 게 아니야. 바로 바깥에 묫자리를 봐 두었다.”
“묫자리를? 왜?”
“망자에 대한 예우다. 이 오두막까지도 왕실의 영토야. 여기에 묻힌 자는 왕가의 일원으로서 죽은 것이니까······.”
“안 죽었어.”
스카르파는 눈을 부릅뜨고서는 그 말을 반복했다. 시선은 여전히 침대 위에 붙박여 있었다.
“안 죽었어. 죽지 않았다고 말해 줘. 어머니께도. 캐러웨이 부인한테도. 다른 사람들한테, 모두. 타라곤은 여기에서 쉬는 것뿐이야. 쉬다가 몸이 나아지면 다시 일어날 거야.”
고민은 길었다. 볼로디아는 손을 거뒀고, 침상에서 멀찍이 물러난 다음, 무뚝뚝한 어조로 답했다.
“그래, 타라곤은 살아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소식을 전해 주마. 그러니까 도시로 돌아가자. 타라곤이 살아 있다면 너도 살아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 정말이야. 선조들의 영혼에 맹세해 줘.”
“알겠다. 맹세할 테니, 돌아가자······.”
왕실로 돌아간 스카르파는 열흘 밤낮을 앉아만 있었고 볼로디아는 끝끝내 주검을 수습하지 못했다. 무덤에 타라곤을 뉘여야겠다고 거듭 생각은 했으나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수하를 보낼 마음도 없었다.
결국 볼로디아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 채 북부로 돌아갔다. 낮에는 사령관으로서의 소임을 다했고 밤에는 산맥을 떠돌며 괴수들을 씹어 삼켰다. 피 냄새 속에 파묻혀 있을 때에는 인간으로서의 일들을 잊을 수 있었다.
그러는 동안 중부에는 한 번도 들르지 않았다. 스카르파의 혼례도, 마요르가의 부름도 모두 무시하면서.
그렇게 한 해가 흘렀고 급보가 날아들었다.
마요르가 왕이 능묘에서 실종되었다는 소식이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