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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43화 (44/258)

43화. 타라곤

일곱 해 전에, 볼로디아는 북부 대장군직을 맡고 있었다.

***

볼로디아는 좁은 지하 통로를 빠져나와 허리를 꼿꼿이 폈다. 말라 죽은 들풀로 뒤덮인 산등성이는 거대한 짐승의 시체처럼 보였다. 산맥의 끝자락이었다.

지하 통로는 왕실 별채의 차원문과 이어졌다. 그것은 불상사를 대비해 만든 탈출로였는데 원래 목적으로 쓰이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왕가의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서로에게 칼을 겨눈 것도 수백 해 전의 일이었다.

볼로디아는 언덕 너머에 있을 오두막을 눈앞에 그려 보았다. 자매에게 그곳은 쉼터였다. 왕실에서 잠시 도망 나와 숨을 돌릴 수 있는 공간 말이다.

군부에 들어가기 전에, 그녀는 여섯 살 터울의 동생을 데리고 곧잘 오두막을 찾곤 했다. 보통은 스카르파를 달래기 위해서였다.

모두가 왕가에 내려오는 예언을 알았다. 대전쟁이 끝날 무렵, 아즈리온이 직접 미래를 알렸다고 했다. 언젠가 붉은 머리를 가진 소녀가 태어날 거라고. 오로지 그 아이만이 늑대인간을 해방시킬 수 있으리라고.

붉은머리 스카르파.

혹은 얼간이 스카르파.

그녀는 어린 시절의 스카르파를 기억했다. 넘쳐나는 사랑과 기대 속에서 자라나던 아이를. 하지만 붉은 머리의 소녀가 사실은 평범한 인간과 다름없다는 게 밝혀지자 모든 순혈이 등을 돌렸다··· 그 어머니마저도.

볼로디아는 동생에게 위안을 주려 애썼지만 성과가 있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가끔은 천 마디 말보다도 가만히 내버려두는 게 더욱 도움이 되는 것 같기도 했다. 둘은 완전히 다른 삶 속에 있었으니까.

마요르가 왕의 첫째 딸은 성년식을 치르자마자 군부에 들어갔다. 열세 해가 지난 지금은 대장군이 되어 북부 사령관 직위를 맡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녀가 현명하고 강력한 왕이 되리라 믿었다.

반면 마요르가 왕의 둘째 딸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괴수 형상을 취할 수도 없는데다가 키 역시 다른 여자들에 비하면 한참이나 작았다. 무예는 물론이고 마법에도 재능이 전혀 없었다. 책과 연극에만 관심이 많았다.

볼로디아는 동생이 인간으로 태어났더라면 훨씬 행복한 삶을 살았으리라 생각하곤 했다··· 그녀는 걸음을 옮기기에 앞서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추위 냄새가 났다. 온도에는 냄새가 있다. 콧등을 아리게 만들 정도로 강렬한 냄새가.

그녀는 이게 죄책감의 잔향이 아닐까 의심했다.

토벌전을 마치고 잠시 중앙으로 내려온 참이었다. 마요르가 왕은 북부 대장군으로서의 공을 치하한 후 또 다른 임무를 지시했다. 이번에는 첫째 딸에게 내리는 지령이었다. 스카르파와 이야기를 나누어 보라고 했다. 행적에 수상쩍은 데가 있으니 이유를 알아 오라고.

보통 그런 명령은 결말이 나빴다. 사실을 알아내건, 감추건 간에. 너그러워져도 괜찮지 않겠냐면서 반기를 든 적도 있다. 하지만 끝내는 볼로디아가 무릎을 꿇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스카르파는 아마도 오두막에 있을 것이다. 누군가와 함께.

동생의 안식처를 들쑤시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의 말을 무시하고 북부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다면 그 일은 다른 자의 몫이 될 것이었다.

원망을 들을지라도, 자신이 맡을 수밖에 없었다.

볼로디아는 그렇게 믿었다.

***

“너는 무언가를 감출 때면 갑자기 무뚝뚝해지지. 알고 있다.”

“평소의 태도일 뿐입니다.”

“어머니를 속이려 하는구나.”

볼로디아는 날카로운 인상의 중년을, 마요르가 왕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거기에 스카르파를 겹쳐 보았다. 흰둥이 청년의 손을 잡고 즐거워하던 동생의 모습을. 볼로디아도 익히 아는 남자였다.

타라곤. 캐러웨이 부인의 아들이자 극단의 간판 배우였다. 스카르파는 그가 나오는 공연은 꼭 챙겨보았다. 흰둥이일지라도 조명 아래에서는 누구보다 빛나는 것 같아서, 그게 좋다고 했다.

그게 연심으로 변하더라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어쩌면 필연인지도 모른다.

“제가 하루 만에 알게 된 것을 어머니께서 눈치 채지 못하셨으리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심심하면 별채에 흰둥이를 끌어들이는데, 모르기도 어려운 일이 아니겠느냐.”

“북부 사령관이 신경 쓸 사안도 아니지요.”

“동생의 혼례에는 참석해야지. 공고를 내려 한다.”

그 말을 듣자 볼로디아는 신경이 곤두섰다. 그건 타라곤과 스카르파의 관계를 용인하겠다는 뜻이 아니었다. 순혈 늑대인간들의 혼례는 대개 구혼자간의 공개 결투를 동반했던 것이다.

늑대인간은 괴수의 영혼을 그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았다. 괴수 형상을 취할 수 있는 것 역시 여성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자들이 무예에 소홀한 것은 아니었다.

태중에 아이가 있는 동안에는 괴수 형상을 취할 수 없으므로 부인을 지키는 것은 그 남편의 몫이었다. 따라서 늑대인간 여성들은 구혼자 중에서 제일 강한 남성을 반려로 맞아들였다. 혼란기가 끝나고 사회가 안정된 뒤에도 그것은 전통으로 남게 되었다.

스카르파는 무능력자로 알려져 있었고, 그게 사실이었지만, 야심찬 청년은 어디에나 있었다. 어떻게든 왕가에 한 발을 걸치고 부군 직함을 달고 싶어 하는 군부의 젊은이들이.

“간청하겠습니다. 내버려 두십시오. 타라곤이 스카르파의 반려자가 되도록 허락하십시오. 어머니께서도 아시겠지만, 대를 이을 때 남자 쪽의 혈통은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그렇다 쳐도 흰둥이의 자식을 왕위에 올릴 수는 없잖으냐. 명예와 위신이 땅에 떨어질 일이다.”

“저도 언젠가는 혼례를 올릴 겁니다. 그리고 스카르파가 제대로 된 순혈을 낳으리라는 보장도 없습니다.”

마요르가가 코웃음 쳤다.

“동생 대신 네가 혼례를 올리겠다고―그러면 북부 기지 사령관은 누가 맡는단 말이냐? 사사로운 정에 사로잡혀 북부의 사람들이 괴수에게 짓밟히도록 내버려 둘 셈이냐?”

볼로디아의 목 깊은 곳에서부터 그르렁 소리가 올라왔다. 어머니가 뒤틀린 선택을 강요할 때마다 그녀는 구역질을 느꼈다. 차가운 웃음이 기다렸다는 것처럼 귓가를 파고들었다.

“나는 네게 가혹해지는 법을 알려주고 있단다.”

“저는 그런 심성이··· 미덕이 될 수는 없다고 믿습니다. 비참한 사람을 궁지로 몰고 가지 않더라도 우리는 맡은 일을 다할 수 있습니다.”

“네가 그 아이를 어떻게 대했는지 기억이 난다. 그 사이에 마음이 약해졌구나.”

마요르가가 이야기하는 것은 볼로디아가 북부 기지로 옮겨가기 전의 일이었다. 그때 그녀는 중부의 장교로서 배신자들을 찾아 처단하는 일을 맡았다. 요정과 결탁한 흰둥이 지도자를 붙잡았고 잔당을 소탕했다.

그리고 몇 달 뒤, 지도자의 딸이 길거리에서 덤벼들었다.

“너는 그 아이를 달래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는 대신 윽박지르고 내쫓았지. 나는 스카르파에게도 그러라고 말하고 있는 게다. 왕위에 오르려면 더 많은 관용을 저버려야 할 테니.”

볼로디아는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아이의 뺨을 후려갈겼을 때 어떤 기분이었는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빨리 잊고 싶다고만 생각했을 뿐이다.

“최선이었습니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그 꼬마는 군부에 끌려갔을 겁니다. 제가 그 아이를 매질했기 때문에, 그것으로 처벌이 끝났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부관들이 굳이 나서지 않았을 뿐입니다. 스카르파는 다릅니다. 우리는 그 아이를 사소한 행복 속에 내버려둘 수 있습니다.”

“볼로디아.”

마요르가의 목소리가 엄해졌다.

“길게 말하지 않겠다. 둘째 왕녀에게 가서 소식을 전하거라. 늦어도 내일까지는.”

볼로디아는 비틀거리며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복도를 따라 걸으면서 몇몇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 것 같았는데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녀는 임시 거처로 돌아와 의자에 걸터앉았고, 그대로 밤을 지새웠다.

방법은 있었다. 스카르파와 타라곤을 북부 기지의 차원문에 태워 보내는 것이다. 목적지는 어디라도 좋다. 타일라프람. 세카두. 킬카타라이. 로야페타. 그리고 그보다 규모가 작은 인간 도시들.

하지만 볼로디아는 그 계획에 현실성이 없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차원문 이용자는 모두 명부에 기록되었다. 오고 나간 사람들을 관리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신분을 빌리더라도 금방 들킬 게 분명했다.

그들이 알았건 몰랐건 간에, 마요르가 왕은 연루된 사람들을 엄벌할 터였다. 볼로디아는 스카르파를 동정했지만 부하 또한 아꼈다. 북부 기지 대원을 이 사건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스카르파가 이 땅에서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신이 돕더라도, 피해를 보는 자의 머릿수만이 늘어날 뿐이다. 어쨌거나 결말은 같다. 그렇다면 더 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편이 낫다.

합리화와 객관적인 사실을 구분하기는 어려웠다.

***

“언니.”

스카르파를 마주할 때마다 볼로디아는 시들어가는 꽃을 떠올렸다.

꽃은 그림과 시를 좋아했고, 상냥한 성격이었고, 마음이 여렸다. 어머니 앞에 서면 창백해진 낯빛으로 입술만을 잘근거렸다. 타라곤을 만나기 전까지, 그녀가 의지하는 상대는 볼로디아가 유일했다.

“차원문을 열어 달라고는 하지 않을게. 그냥 나를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줘. 별채 통로를 쓰면 도시 바깥으로 갈 수 있으니까, 그러면······.”

볼로디아도 그 방법은 이미 고려해 보았다. 수색대가 산맥을 들쑤실 게 뻔했다. 무능력자 둘이 괴수로 가득한 산맥에서 살아남을 리도 없었다. 그럴 바에는 당장 여기에서 목숨을 끊는 편이 낫다.

그녀가 보기에, 이 상황의 해결책은 하나뿐인 듯했다. 혼례가 싫으면 죽음밖에는 답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말을 어떻게 입에 담는단 말인가?

“언니.”

스카르파가 다시 불렀다. 볼로디아는 자신을 둘러싼 공기가 한없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끼면서 벽을 빤히 바라보았다. 혼례를 강요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헛된 희망을 심어주는 것도 싫었다.

만약 선택해야 한다면, 결말이 같다면, 전자를 고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다시 구역질이 일었다. 어머니와 같은 사람은 되지 않으리라고 수없이 다짐했는데도. 결국엔.

“나는 해줄 수 있는 게 없다. 더 따지지 말거라.”

그녀는 심호흡했고, 무감각한 어조로 내뱉었다.

***

타라곤이 볼로디아를 찾아온 것은 다음날의 일이었다. 겁먹은 표정이었지만 주눅 들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묘한 결의를 품은 것 같기도 했다. 대화를 시작하자마자 그 정체가 분명해졌다.

“한 달간 검술을 알려달라고.”

“그렇습니다. 비록 군부 대원들과는 비교가 어렵겠지만, 기초는 일찍이 배웠으니 가르침을 주신다면 충분히 따를 수 있습니다.”

“스카르파가 말하던가? 내게 부탁해 보라고?”

“저의 독단입니다.”

타라곤은 잠시 주저하다가 속내를 털어놓았다. 순혈 남자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머쥘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런 이유만으로 도전조차 포기하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결투에서 패배한다면 스카르파 역시 단념하리라고도.

“그건 절차입니다. 저는 절차에 따라 패배할 겁니다. 어쩌면 죽을지도 모르지요. 그렇다면 사랑을 포기할 명분 역시 생기는 셈입니다. 스카르파가 제게 아무 미련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자네가 출전하건 말건 간에, 사람의 마음은 그런 것으로 지워지는 게 아니야.”

“떳떳하고 싶습니다. 도망자보다는 패배자가 낫습니다.”

볼로디아는 괜한 호승심에 타오르는 젊은이를 많이 보았다. 해줄 말은 언제나 하나였다.

“그게 자네의 자기만족인지, 스카르파를 위한 일인지는 따져봐야지 않겠나.”

“모르겠습니다.”

타라곤은 짧은 숨을 들이켰다. 느닷없이 주제가 변했다.

“흰둥이가 왕실에 드나드는 걸 용납한 것만으로도, 마요르가 왕께는 감사하고 있습니다. 저는 왕실의 명예를 실추시킨 겁니다.”

“요점을 말하게.”

“명예를 다루는 작품은 죽음으로만 끝맺을 수 있다고들 합니다.”

타라곤은 어딘가의 각본에 적혀 있을 게 분명한 문장을 인용했다. 볼로디아는 두통을 느꼈다. 그녀는 문필가나 예술가 같은 족속과는 친하지 않았다. 그네들 특유의 감상주의와도.

“현실은 연극이 아니야. 자네는 그냥 극단의 인기 배우로 살아가면 돼.”

“스카르파는 저를 잊지 못할 겁니다. 제가 계속 무대에 오른다면요.”

하지만 이것만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볼로디아는 자신의 동생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았다. 그녀가 타라곤의 무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도.

순혈 남자와 혼례를 올리더라도 그 마음은 여전할 터였다. 어쩌면 더욱 커져서, 스카르파를 완전히 집어삼킬지도 모른다.

“그래서, 결투장에 자네의 피를 바치겠다는 말인가? 망자에게 사랑을 줄 수는 없으니까?”

“그렇습니다. 각오는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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