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타라곤
이상한 점이 있다고 해서 대화를 계속하기에는 장소가 여의치 않았다. 그 아들이 요정이든 뭐든 간에, 일단은 캐러웨이 부인과 대면하는 게 우선이었다. 볼로디아도 그 점에 동의했다.
사무실은 예상과는 달리 단정한 분위기였다. 극본집과 서류철로 가득 찬 책장이 벽면을 둘러쌌고, 구석진 자리의 책상에서는 경리가 장부를 넘기고 있다. 밑층에서 들려오는 소음을 제외하면 이곳이 극단 건물이라는 걸 짐작하긴 어려웠다.
캐러웨이 부인의 자리는 책장 맞은편 탁자였다. 타라곤과 무언가를 논의하던 부인은 문이 열리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들었다. 허리춤의 칼자루를 보자마자 갸름한 뺨에 화색이 돌았다.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았어요. 와서 앉아요.”
타라곤이 기다렸다는 것처럼 사무실 한구석으로 향했다. 칸막이 너머로 주전자와 찻잎통이 얼핏 보였다. 란드와르는 부인에게 가볍게 목례했다.
“반갑습니다. 교단 사제, 란드와르입니다. 옆에 계시는 분은 제 형님이시고요.”
“타우베스라 불러 주시오. 마찬가지로 교단 소속이고.”
둘은 간략한 자기소개를 마치고는 부인 앞의 소파에 자리 잡았다. 캐러웨이 부인은 가냘픈 인상의 중년이었다. 올려 묶은 백발이 우아하고 성숙한 인상을 줬다.
“교단에 서한을 보낸 게 그저께였는데, 일정이 촉박했겠어요.”
란드와르는 배낭을 무릎에 올려놓으며 곁눈질로 서류를 살폈다. 캐러웨이 부인이 요정과 한패일 가능성을 계산에 넣기 시작하자 신경이 곤두섰다. 무엇이든 단서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특이점이 없어 보였다.
지금으로서는 추측을 멈추고 하려던 일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펠로시 문제를 처리한 뒤 극단에 취직할 길을 찾아보는 것이다.
“그 이야기도 하게 될 테지만, 일단은 다른 용건 때문에 왔습니다. 말루카에는 개인 자격으로 방문했거든요.”
“개인 자격이라뇨?”
“펠로시 일입니다. 사정이 있어 직접 오진 못하고, 지금은 세카두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이걸 대신 전해달라더군요.”
란드와르는 배낭에서 짐을 꺼내 탁자에 올려놓았다.
“이건 중부 사람들한테 나눠주셔야 하는 편지고, 자루 안에는 마력 결정이 들어 있습니다. 빌린 돈의 두 배 가치입니다. 품질 인증서도 동봉되어 있고요.”
자루를 들여다본 부인의 얼굴에 웃음기가 일었다.
“그래요, 그 아이가 떠난 지도 벌써 열 해가 됐네요. 소식이 전혀 없어서 걱정했는데 약속을 지켰군요. 갚지 않아도 된다고 했는데 잊지 않았어요. 아시겠지만 정말 착하고 똑똑한 아이랍니다.”
요정이고 자시고 간에 이 소리를 또 듣자니 가슴 한구석이 시큰거렸다. 혈압이 올라와서 그런 것 같았다. 란드와르는 아랫입술을 가볍게 깨물고는 반성문을 건넸다.
“일단은 이것부터 확인해 보십시오.”
그는 부인이 반성문을 모두 읽을 때까지 기다렸다.
무거워지는 침묵 속에서, 볼로디아에게 들었던 이야기들이 잇달아 떠올랐다. 캐러웨이 부인은 흰둥이 중에서는 흔치 않은 재력가라고. 장학재단을 운영하는데다 싹이 보이는 아이들은 인간 세상으로 유학까지 보내 준다고.
흰둥이들이 하층민 취급을 받긴 했지만 명시적인 차별은 없었다. 여건만 뒷받침된다면 펠로시처럼 중부에서 마법 교육을 받는 게 가능했다.
그리고 말루카의 계획경제는 흰둥이에게서 그 여건을 박탈하는 쪽으로 작동했다.
흰둥이들은 대대로 변두리 지역의, 보람 없고 취급이 박한 일을 맡았다. 역사에 이름을 남기진 못할지라도 평범한 연구자나 마법사쯤은 될 수 있었을 아이들이 농장에서 썩어갔다. 재능도 발견되어야 재능인 법이니까.
캐러웨이 부인은 그런 아이들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펠로시도 그들 중 하나였다.
말인즉슨, 펠로시는 운이 좋았다. 그것도 엄청나게. 그 행운과 사람들의 믿음을 제 손으로 하수구에 처박았다는 사실을 떠올리자니 입맛이 썼다.
씨발, 사람이 돈을 빌렸으면 갚아야지. 그게 안 되면 부끄러운 줄이라도 알아야지.
···순간 타라곤의 목소리가 생각의 흐름을 깨고 들어왔다.
“차는 이 고장에서만 나는 건데, 바깥 분들 입맛에 맞으실지 모르겠네요. 쌉싸름하니까 과자랑 같이 드시면 좋을 거예요. 어머니?”
“별일 아니란다. 내 걱정은 말고 남은 일이나 마저 하려무나.”
란드와르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앞을 바라보았다. 타라곤이 눈물을 흘리는 부인에게 손수건을 건네주고 있었다. 연기력이 꽤나 괜찮아 보였다. 하긴 왕과 대장군을 제거하고 피웅덩이를 집어삼키려면 그 정도 능력은 있어야 할 터였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멋쩍은 웃음을 흘리며 칸막이 너머로 되돌아갔다. 부인이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미안해요, 볼썽사나운 꼴을 보였네요. 나이가 드니까 눈물이 많아진답니다. 그래요. 수도원에 머무르고 있다고요. 다행이라고 생각해야지요. 펠로시를 구해 주어서 고마워요.”
“별것도 아닙니다. 그냥 제게 판돈을 걸라고 했을 뿐이죠.”
란드와르는 잠시 고민하다가 답했다. 빈말은 아니었다. 어쨌거나 펠로시를 데려온답시고 고생을 하진 않았던 것이다. 처분을 깊이 생각한 적도 없다.
그건 그냥 덤이었다. 볼로디아를 구출하면서 딸려온, 덤.
“모른 척 지나가지 않은 것만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부인은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자신이 학비를 대준 건 사실이지만 보답이나 결실을 바라고 한 일은 아니라고 했다. 펠로시가 유명하거나 뛰어난 사람이 되진 못했을지라도, 오히려 그 반대일지라도 살아만 있다면 탓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곧바로 떠날 예정인가요? 답장을 써서 보내고 싶은데, 하루 이틀만 기다려 준다면 고맙겠어요. 멀리서 온 손님을 그대로 돌려보내는 것도 예의가 아니지요.”
“아, 다름이 아니라 그 문제로도 논의를 하려 했습니다.”
란드와르는 상황을 나열했다. 체류증은 열흘짜리로 끊어 두었으니 기다릴 여유는 충분하다는 것. 다만 마조람에게 연극 이야기를 들었는데, 거기에도 흥미가 있다는 것. 교단 측 허락도 받을 수 있으리라는 것.
“두 분이 이 사무실에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그 생각을 하고 있었지요. 늑대인간들과 함께 무대에 서더라도 부족함이 없을 거예요. 다만 내 욕심 때문에 바쁜 분들을 붙잡는 게 아닐까 염려스럽네요.”
“카스바에서 돌아온 게 닷새 전입니다. 임무를 막 끝마친 사제들에게 또 다른 일을 떠맡기진 않지요.”
부인은 생각에 잠긴 기색으로 볼로디아를 쳐다보았다. 이윽고 주름진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요, 시간도 이렇게 되었으니 남은 이야기는 바깥에서 마저 하기로 해요. 괜찮은 식당을 알고 있답니다.”
“열한 시 열차를 탔으니까··· 벌써 저녁이군요.”
그렇게 중얼거린 란드와르는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진득한 노을이 건물들 틈새로 스몄다. 아주 얇고 가느다란, 수천 수만 개의 기둥이 붉은 천장을 떠메는 모습 같았다.
***
캐러웨이 부인은 저녁식사를 마친 뒤 숙소도 따로 잡아 주었다. 시내의 고급 여관이었다. 유령이라도 나올 것 같은 분위기는 어쩔 수 없었지만 시설은 훌륭했다.
란드와르는 욕조에 몸을 담근 채로 식당에서 오간 이야기들을 정리해 보았다. 펠로시나 연극 같은 주제는, 그냥 무탈했다. 서로의 뜻이 일치하는 판에 더 논의할 것도 없었으니까.
란드와르는 내일 낮에 열차를 타고 북부 기지로 올라갈 예정이었다. 세카두로 돌아가서 교단에 소식을 전하는 게 우선이다. 자세한 수속은 파르타가 알아서 처리해 줄 것이다. 장기 체류증은 부인이 끊어 줄 테고.
그 다음부터가 중요했다. 테네브로즈를 데려와야 했다. 타라곤의 영혼을 살필 수 있도록.
“타라곤 이야기를 해 봅시다. 죽은 사람이 맞다는군요.”
그건 란드와르가 욕실에서 나오자마자 처음으로 꺼낸 말이었다. 볼로디아는 일찍이 씻은 뒤 옷까지 모두 갈아입은 상태였다.
“거기엔 의심이 없소. 부인이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가 논점일 뿐이지.”
“저도 동의합니다.”
캐러웨이 부인의 의중을 떠볼 요량으로 질문을 몇 개 던지긴 했다. 요정과 한패인지, 아니면 속아 넘어갔을 뿐인지가 궁금했다. 일단은 후자라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여러모로 석연찮았다.
부인의 말에 따르면 타라곤은 단 한 번도 성벽 바깥을 밟아 본 적이 없었다. 평생을 도시 안쪽에서만 살았다는 것이다. 원래는 배우였는데 다섯 해 전부터는 사무실 일만을 돕고 있다고. 사고 때문에 몸이 망가졌다고.
진짜 타라곤은 일곱 해 전에 죽었다. 두 해나 차이가 났다.
“그래도 긍정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여기까진 이상하지만 그럴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가 모르는 어느 시점에, 신분이 바뀌었다고 치면 그만이니까요. 늑대인간 사회에도 어떻게든 적응했다 치고요.”
“너무 많은 걸 흘려 넘기는 것 같소만.”
볼로디아는 촌평했다. 별다른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어조였다. 란드와르는 심호흡한 뒤 본론으로 도약했다.
“아뇨, 이러고서도 해명할 수 없는 부분이 남기 때문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대장군께서는 이걸 어떻게 알고 계시는 겁니까?”
지금의 타라곤은 멀쩡히 사무실에서 일했다. 길거리의 식당에도 마음 편히 드나들었다. 죽음을 아는 자가 없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볼로디아는 타라곤을 보자마자 정체를 간파한데다가 무덤의 위치까지 알았다.
수도원에서 설득을 마칠 때, 캐러웨이라는 이름에 볼로디아가 반응했던 게 떠올랐다. 스카르파가 연극을 유독 좋아했다고. 극단 사람들과 개인적으로 만난 적도 있다고.
― 토벌전을 끝내고 축연을 벌일 때마다, 캐러웨이 극단에서 공연을 왔었다오. 덕분에 그쪽 집안 사람들과는 개인적으로도 몇 차례 본 적이 있소. 스카르파는 연극을 아주 좋아했었지. 시들어가는 꽃 같던 아이가 관객석에 앉을 때만은······.
그 말은 묘한 표정과 함께 멈췄다. 고통이거나, 후회거나.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북부 대장군 볼로디아는 타라곤의 죽음에 깊이 연관되어 있으며 그걸 아는 사람은 지극히 적습니다. 사실은 둘뿐이라고 해도 좋을 겁니다.”
“둘.”
볼로디아가 그 어절을 되풀이했다. 지금까지 들은 것 중에서는 가장 무거운 음색이었다.
“둘일 수밖에 없습니다. 스카르파는 군부를 제압할 능력은 물론이고 지지기반조차 없으니만큼, 요정과의 내통이 들켰을 경우 그걸 덮고 넘어가기가 불가능합니다. 타라곤이 한 번 죽었다는 건 정말로, 대장군님과 스카르파를 제외하면 그 누구도 모르는 사실인 겁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충분한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앞선 추론을 소화하기에 충분한 시간이. 거기에 마침표를 찍기 위해서는 대담한 결론이 필요했다.
볼로디아가 스카르파와 공모해 요정을 데려왔으리라는 가능성은 배제한 상태였다. 그럴 이유도 마땅치 않았거니와 게임에서의 볼로디아는 그런 존재가 아니었다.
란드와르는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았다. 그게 조잡한 시뮬레이터 속의 단편일지라도. 게임을 맹신할 필요까지는 없다. 생각의 방향을 약간만 뒤틀기만 하면 된다.
“···저는 타라곤과 스카르파가 연인이었을 거라고 추측합니다.”
물론 볼로디아도 진실을 알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알면서도 받아들일 수 없는 진실이 있다. 그녀가 이런 이야기를 지금껏 털어놓지 않았던 것처럼.
“이건 명예의 문제지요. 흰둥이 배우와 왕가의 적통이 사랑에 빠진 겁니다. 마요르가 왕의 첫째 딸은 그 사실이 밝혀지기 전에 조치를 취하기로 마음먹었고.”
“내가 타라곤을 죽였다고? 아무도 모르게?”
그 문장이 말허리를 치고 들어왔다. 란드와르는 신중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타라곤을 죽였다고―”
무감각한 목소리를 끝으로 기나긴 침묵이 있었다. 그러는 동안 볼로디아는 단 한 순간도 란드와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는데 노려보려는 의도는 아닌 것 같았다. 대신 그 너머에 있는 것들을, 오래된 순간을 되짚어가는 듯했다.
마침내 볼로디아의 입이 열렸다.
“그것만은 인정하겠소. 허나 당신의 짐작과는 다르오.”
그늘진 얼굴 속에서 눈동자가 매섭도록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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