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포도밭 골목
한밤중이었다. 텅 빈 마을회관 뒷마당에는 달빛만 가득했다.
“연초 피울 건데 괜찮냐? 연기 싫으면 멀리서 피우고 온다.”
“저 그 냄새 좋아합니다. 가문 어르신들이 모두 애연가셨거든요.”
“건강에 나쁜 건 안 한다면서. 간접흡연이, 씨발, 얼마나 무서운 건데······.”
잠시 고민하다가 불을 붙였다. 허락도 받았는데 멀리까지 나가기는 귀찮았다. 볼로디아와 대화를 마친 후 요정 녀석을 끌고 내려온 참이었다. 전직 대장군 앞에서 나누기엔 껄끄러운 이야기가 될 것 같았다.
“나는 기본적으로 널 믿거든.”
“그런 말은 집안에서 쫓겨난 후로 처음 들어 봅니다.”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야. 진담이야.”
믿는다는 건 빈말이 아니었다. 이 새끼가 나사가 하나 풀려 있긴 해도 일부러 자신을 엿 먹이거나 뒤통수를 치지는 않을 거란 확신이 있었다. 그건 느낌에 불과했지만 이유를 붙이려면 얼마든지 가져다 붙일 수 있었다.
어차피 야스와다에서는 공적이 된 상태다. 동족을 아끼는 편도 아니다. 원래부터 사회부적응자였다. 나트람에게는 원한까지 있다. 그리고 기타 등등.
“그런데 니 정신머리는 못 믿겠어. 니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는지도 모르겠고 지금 시키려는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아. 내가 널 어떻게 해야 하냐.”
“한 번 시켜 보시지요. 제가 그래도 지금껏 방해가 된 적은 없지 않습니까.”
“잘 했어. 잘 했는데.”
저항군 소속 여자애랑 친해진 뒤 그걸 계기로 울쿠스와 접촉하겠다는 계획에 현실성이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가능할지도 모르지. 어느 정도 연기력만 좋고 사교성이 충분하다면.
“일단 볼로디아를 극단에 취직시킬 거야. 중부 외곽지에 있는 저항군 거점도 모두 알아. 그러면 어떻게 접근하느냐가 문제인 거야. 두 가지 길이 있다. 생쥐를 써서 첩보전을 벌이거나, 니가 그 여자애랑 친해져서 직접 두 발로 걸어들어가거나.”
“후자도 어려울 건 없어 보입니다만.”
“넌 애랑 싸워놓고 그런 말을 하냐.”
테네브로즈는 억울한 듯 항변을 늘어놓았다.
애들이 기웃거리며 관심을 보이기에 같이 어울렸을 뿐이라는 거였다. 도중에 마법 이야기가 나오기에 냉기 주문을 몇 개 보여주었다고. 그런데 외따로 다니던 여자애가 갑자기 시비를 걸어왔다고 했다.
“아마도 시기심이라고 생각합니다. 마법을 쓸 줄 아는데 자랑을 못 하니 샘이 났던 거지요. 게다가 자기는 외톨이인데 오늘 처음 만난 이방인 꼬마는 관심도 받고 같이 놀겠다는 애들도 많습니다. 얼마나 심란하겠습니까. 잘 대해주기만 하면 마음의 문을 열 겁니다.”
의외로 타당한 분석이었다. 타당한 분석인데, 이놈한테서 듣자니 묘했다.
“그거를 알면 씨발, 같이 싸우진 말았어야지.”
“안 싸웠습니다. 진심으로 맞섰으면 목숨을 남겼겠습니까.”
“그러면.”
“얼굴만 멀쩡하도록 애썼지요. 투기장에서 계속 그랬던 것처럼요.”
란드와르는 테네브로즈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여우든 생쥐든 간에, 아무튼 그런 류의 동물을 연상시키는 인간 소년. 물론 원판은 완전히 다르다.
환술은 실제로 형태를 바꾼다기보다는 개념을 뒤트는 방식이었다. 예컨대 턱이 넓고 눈썹이 굵은 남자라는 설명을 듣는다면 차이는 조금 있더라도 엇비슷한 얼굴을 상상할 터. 각자에게, 그들 각각이 떠올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웬만해서는 들킬 일이 없다. 만나는 사람의 몽타주를 일일이 그려서 비교하는 것도 아니니까. 만약 그렇더라도 어지간하면 비슷한 결과물이 나올 테니까. 하지만 상처를 입는다면 그때부터 이야기가 달라진다.
콧대에 주먹을 맞았다고 치자. 코피가 터졌으리라 예상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그 정도의 세기로는 별일이 없으리라 판단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둘은 순간적으로, 완전히 다른 얼굴을 보게 된다.
물론 환술은 기본적으로 원본의 변화를 반영한다. 결국엔 모두가 같은 상처를 보게 된다.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사람의 마음에 의심이 깃들기엔 그 몇 초의 흔들림만으로도 충분하다. 환술을 깨기에 충분한 의심이.
“저도 필요할 정도로는 생각하면서 행동하고 있습니다.”
“그런 놈이 이걸 처음부터 말해야겠다는 생각은 왜 못 했냐.”
“나트람 어르신은 제가 길게 떠드는 걸 싫어한답니다.”
나트람이 어떤 놈이었는지는 헤이딘에게서 대강 들었다. 동생의 손발을 토막치고 감금까지 했다고. 테네브로즈가 좋은 대접을 받진 못했으리라는 추측은 쉬웠다. 그런 성격의 소유자가 이놈에게 너그럽진 않았을 테니까.
똑같은 취급을 받으니 기분이 좋지 못했다.
“걔가 씨발, 너를 어떻게 굴려먹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걔랑 동급이냐. 그건 아니잖아. 할 말 있으면 처음부터 해. 남은 얘기 있으면 지금 마저 하고.”
테네브로즈는 앉은 채로 란드와르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남의 일에 대해서라면 얼마든지 떠들 수 있지만, 저 자신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별로 없습니다. 그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고요. 단지 나으리께 궁금한 게 몇 가지 있을 뿐입니다.”
“심각한 거냐.”
“개인적인 질문은 아닙니다. 그냥 이 상황에 대한 겁니다.”
“말해 봐.”
란드와르는 대답을 기다리면서 시가를 세게 빨아들였다. 생각을 가다듬던 테네브로즈는 침착한 태도로 운을 뗐다.
“나으리께서 대뜸 군부에 찾아가지 않는 이유는 저도 이해합니다. 교단의 공식 사절로 나서면 행동반경만 좁아지지 실익이 없습니다.”
“교단 소속이라고 해도 어쨌거나 이방인이니까. 내정을 모두 보여주진 않지.”
“만약 대장군 앞에서 천사를 불러낼지라도 그 아랫것들을 설득하는 건 또 다른 이야기입니다. 이방인 사제를 데리고 다니는 이유를 납득시켜야 하니까요··· 어려운 일이지요. 게다가 스카르파와 울쿠스도 이상한 점을 눈치 챌 겁니다.”
이것까지도 정답이었다. 대장군이 둘의 정체를 알게 된다면 그 수하들도 그걸 알아야 한다. 혹은 의혹을 감수하고서라도 비밀을 엄수하거나. 모두 지금으로서는 달가운 선택지가 아니었다.
“따라서 다른 대장군들에게 접근하는 것은 증거를 충분히 모은 후의 일로 미루어도 괜찮습니다. 제 짐작이 맞습니까?”
이놈이 평균적으로 똑똑한 이야기를 하자니 낯설었다··· 사람을 잘 죽이는 것만으로는 부제사장 직분을 따낼 수 없으리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카스바에서 돌아온 직후, 뒤처리를 도맡은 게 녀석이란 것도.
필요할 때에만 정신을 차릴 수 있다니 마음이 참 편리한 새끼였다. 란드와르는 짧게 혀를 차고는 대꾸했다.
“오냐. 뭐가 궁금하냐. 알 건 다 알고 있으면서.”
“이건 아무런 정보도 없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나으리께서는 흰둥이 거점과 지도자를 모두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대장군을 몰래 찾아가서 누구를 붙잡아 들이라고, 혈마법을 배운 놈이라고 일러 주면 되는 겁니다. 흰둥이 한둘쯤을 감옥에 넣는 건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거기에서부터 시작하면 스카르파와의 연관성도 더 빠르게 찾아내겠지요.”
란드와르도 알았다. 그런 방법을 생각하지 못했을 리가 없다. 단지 의도적으로 계산에서 빼놓았을 뿐이다. 결국엔 흰둥이들의 피를 봐야 하니까.
“그러고 싶지가 않은 거야. 스카르파랑 울쿠스만 죽이고 끝냈으면 좋겠어.”
“저는 나으리가 자비롭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몽상가였던 것 같습니다. 나으리께서도 스스로 아시겠지만, 모두에게 좋은 일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취할 것과 버릴 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언제나 그렇습니다.”
테네브로즈가 단정 지었다. 신랄할 때에는 쓸데없이 신랄한 놈이었다. 란드와르는 발뒤꿈치로 애꿎은 흙바닥을 긁었다.
“어쩌면 네 말처럼 끝날지도 몰라. 아마 그렇게 되겠지. 그래도 일단은 저항군이랑 친해진 다음 울쿠스랑 협상을 봐야 돼. 10년 동안 가출해 있었다면서. 야스와다에는 전혀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고. 그렇다면 네가 배신자가 됐다는 것도 모르겠지.”
“추적자 행세를 하라는 겁니까? 그리고요?”
“일에 진척이 없다고 닦달을 해 봐. 야스와다에서는 옛 신을 깨웠는데 피웅덩이는 왜 아직도 소식이 없냐고. 스카르파의 곁에 그렇게 오래 있었으면서도 진도가 영 나가지 않는 이유가 뭐냐고.”
피웅덩이 시나리오의 난이도를 높이는 요소는 두 가지였다. 늑대인간들의 의심병. 그리고 보상 조건. 우두머리를 선조의 능묘에서 상대하지 않으면, 처형시키면 핵심 보상을 얻을 수 없었다. 둘이 능묘로 도망가서 특정 행동을 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울쿠스를 적절히 자극해야 했다. 게임에서는 흰둥이 저항군을 몰살시키는 방법으로 그 일을 해내지만, 테네브로즈를 잘 써먹기만 한다면 직접 지령을 내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울쿠스는 힘을 쫓던 녀석이다. 추적대가 관심을 보인다면 기꺼이 따를 터.
“아하, 알겠습니다. 가서 이렇게 말하란 말씀이시지요. 우리는 사실 그대가 해온 일들을 지켜보고 있었다네. 잘 하고 있어서 내버려 두었는데 왜 아직까지도 진척이 없지? 잠든 분께서도 깨어나셨는데? 예, 이런 식으로요.”
요점을 단번에 알아들으니 좋았다. 란드와르는 테네브로즈를 내려다보다가 툭 내뱉었다.
“이렇게 머리가 잘 돌아가는 새끼가 평소에는 왜 그러지.”
“저는 언제나 유능하고 현명하답니다.”
란드와르는 바로 그렇게 말하는 면모가 신뢰를 깨는 원인이라고 생각했지만 굳이 말하진 않았다. 긴 정적 속에서 구름 한 올이 달의 한가운데를 훑고 지나갔다. 느닷없는 문장이 고요를 깼다.
“궁금한 게 하나 더 있습니다.”
“이번엔 또 뭐야.”
“전쟁을 선포하지 않는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아직 잠든 분은 힘을 완전히 되찾지 못했고 요정들의 세력은 제국 시절에 비하면 초라한 수준입니다. 인간은 이미 한 번 제국을 이겼지요.”
“그래서.”
“그렇다면 그 세가 더욱 강성해진 지금은, 야스와다 한 곳쯤은 쉽게 무릎 꿇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명문가의 요정을 모두 죽이고 주문식을 불태우십시오. 교리 경전과 옛 지식이 담긴 문서들을 파묻으십시오. 그러면 됩니다.”
“진지하게 하는 소리냐.”
요정들이 패배한 이유는 크게 세 가지였다. 타마기스가 자멸해서. 와그다스가 뒤통수를 치고 도망가서. 그리고······.
하나가 더 있는 듯한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사실은 두 개뿐이고 나머지 하나는 셋을 채워야 한다는 강박의 소산일지도 몰랐다.
어쨌거나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 개판 속에서도 야스와다만은 온전히 남았다는 게 중요했다. 전쟁터야말로 야스와다 학파의 주문이 빛을 발하는 곳이었던 것이다.
어디에든 영혼이 넘쳐났다. 아군이든 적군이든 제물로 바치면서 비등한 싸움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공멸할지라도 패배하진 않았다. 그것이 야스와다의 방식이었다.
인간들은 싸워 봤자 함께 죽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게 전쟁이 끝났고 천 년이 흘렀다. 위태롭지만 평화로운 천 년이.
“물론 전쟁이 일어난다면 많은 인간이 죽겠지요. 어쩌면 야스와다에 있는 요정들보다도 훨씬 많은 인간이요. 하지만 화근을 없앤다는 점에서는 무엇보다도 확실한 방법이 아닙니까.”
“신만 죽이고 끝내는 방법도 있지. 그래서 내가 신의 영토에 직접 쳐들어갈 놈들을 모으고 있는 거야. 요정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전에.”
당연하게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대전쟁 당시에 바단과 나우파나의 신을 그런 식으로 처리하긴 했지만 거기엔 상황의 특수성이 한 몫을 했다.
화신의 성능은, 그리고 목숨은 신앙심의 총량에 비례한다.
신앙심만 받쳐 준다면 아즈리온은 몇 번이고 죽었다가 되살아날 수 있다. 축복도 마음껏 내린다. 오락실 코인을 무한으로 쓰는 셈이었다. 게다가 와그다스의 신, 슈문에게서도 조금이나마 지원을 받았다.
하지만 평화로운 시기에는 신을 잘 찾지 않는다. 슈문은 아예 황무지에 틀어박혔다. 야스와다의 신이 약화된 만큼 인간 측의 전투력도 낮아진 것이다. 정확히는 화신의 힘이.
“당시와 지금은 상황이 다르지요. 어려운 길을 선택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그분들이 나으리만큼이나 몽상가라서 그런 겁니까, 아니면 무슨 신념 때문입니까?”
란드와르는 이 일을 맡기 전에, 꿈에서 들었던 설명을 떠올렸다. 계약서야 읽지도 않고 대강 넘겼지만 중요한 대화는 기억이 났다. 누구도 전쟁을 원치 않는다고 했다. 살육의 신, 아즈리온조차도.
신도를 수호하는 것이 신들의 소명이므로.
“전쟁은 선택지가 아니라 종착점이라더라. 모든 대안이 실패했을 때 만나는 종착점. 쉽고 어렵고를 따질 문제가 아닌 거야. 그냥 최대한 피해야 하는 일이지······.”
────────────────────────────────────
────────────────────────────────────